진주농민봉기 - 왕 동 오
I. 들어가며...
진주 민란은 1862년 2월 18일에 경상도 진주에서 발생한 농민 운동을 말한다. 진주에서는 이보다 6백여년이 앞선 1200년에 공사노비가 각지 노비반란의 영향으로 폭동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러나 이 노비반란은 철종조의 순수한 농민운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진주민란은 외양으로는 조선왕조말기를 통하여 各地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제민란과 비슷하면서도 그 내적 여건은 판이하였다. 이때는 이전에 비하여 민란발생의 소지가 지역적인 것에서 전국적인 것으로, 그리고 더욱 심각하고 절박한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편 이 민란은 이해에 삼남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진주 민란은 봉기한 농민이 수만이었고, 6일간 계속되었으며, 그 시위행동이 과격하였다. 그러므로 성주. 개령. 상주. 제주민란과 함께 임술민란의 대표급으로 손꼽힌다.
II. 농민의 봉기
1. 사회.경제적 여건
조선왕조의 농촌사회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 어느때 보다도 불안정 하였다. 그것은 봉건적체제의 제모순으로 인하여 정치기강이 해이해지고 제반제도가 문란해진 까닭에 지배계층, 특히 농민의 경제가 날로 파탄의 길로 다름질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00년에 순조가 즉위하면서 부터 시작된 외척세도정치는 제반사회제도에 혼란을 야기시켰고, 19세기 전반을 통하여 일어난 인사제도의 문란에서 파생된 과폐나 각종 민란을 비롯한 괘서. 모반사건 등은 그 가운데에서도 두드러진 것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중국대륙이 서양인에 의하여 유린당하고 있다고 사실, 특히 1860년에 英.佛[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어서 京官이 그 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는 사태까지 빚어냈다.
또한, 이 시대는 신분계층상의 큰 변동기였다. 공명첩과 노비면천첩등의 발행이 전에 비하여 부쩍 늘어난 것은 물론, 1801년에 내사노비 6만여인을 일시에 혁파한 것은 그 좋은 예였다. 농민경제를 살펴보면 국가경제는 국가의 기본경제정책인 삼정제도가 그 자체내의 결함과 지방관리의 불법수탈로 말미암아 파탄일로를 걸어왔다. 철종말기의 농민은 실학과 국문소설의 발달로 이전의 어느시대 보다도 지식수준이 향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배계층의 불법수탈에 대한 반발심도 전보다는 훨씬 강했던 것이다.
2. 봉기의 경위
진주민란의 시발지는 진주읍에서 서남방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이었다. 이곳에 살던 유계춘. 김수만. 이귀재등이 농민봉기에 대한 최초의 모의를 가졌다. 이 최초의 모의일시는 기록에 보이지 않아 확실히 알길이 없으나 아마도 1862년 1월중에 있었던 것 같으며 그 장소는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수익의 외방객실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들 주모자들은 농민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과 그 모인 군중을 이끌어 나아갈 행동 계획도 논의한 듯 하며 또 諺榜[언방]도 지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부정지방관리에 항거하여 봉기할 것을 결정하게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사정과 오랜 시일을 요했을 것이므로 최초의 發論日時 [발논일시]를 꼬집어 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전년 가을부터는 농민의 불평불만이 充溢[충일]하여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곡동에서 里會[리회]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회수와 참가인원수도 확실치 않다. 다만 성공적인 거사를 위해서는 적어도 3차 이상은 모의를 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며, 그 참가 인원도 前記[전기]한 3주동자외에 박수익과 정순계등 몇 사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곡동 里會[리회]에서 농민봉기를 결의한 주동자들은 보다 규모가 큰 會合[회합]을 갖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2월중순에 유곡동의 서편에 있는 수곡장시에서 재회합을 가졌는데 그 참가인원은 적어도 10명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곡장시에서 도회가 열린지 며칠 안되어서 드디어 부정관리에 대한 본격적인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2월 18일 이른 아침 마동과 원당동의 농민이 서편에 있는 수곡장시를 先犯[선범]하고 곧장 덕산 장시로 몰려 갔다. 한편 같은날 아침 백곡리와 금만리의 농민은 일단 삼장리와 시천리에 轉入[전입] 하였다가 다시 덕산장시로 밀려 들었다. 이렇게 하여 진주읍 西方[서방]의 많은 농민이 일단 진주성 에서 수십리나 떨어진 덕산장시로 모이게 되었다.
晋州西方[진주서방]의 농민봉기대열이 성밖에 이르자 북. 동. 남 三方面[삼방면]의 민중이 즉각 이에 響應[향응] 가담함으로써 그 군세는 더욱 떨쳤다.
이와같이 진주지방의 농민이 1862년 2월 18일을 기하여 일제히 봉기하게 되기까지에는 주모자들의 긴밀한 사전계획과 諸般弊 [제반폐막]의 矯 [교구]에 대한 농민의 여원이 간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민중대열에는 가난한 농민뿐이 아니라 饒戶富民[요호부민]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신분은 물론 상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의 示威群衆[시위군중]은 衣冠[의관]을 整齊 [정제]한 양반은 눈에 뜨이는 대로 모조리 타파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이와는 달리 천인층이 이 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그것은 亂後[난후] 被囚罪人 [피수 죄인] 의 이름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富農[부농]에 寄食[기식]하는 농노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되며 천인중에서도 이 운동과는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禾尺[화척]이나 廣大 [광대]같은 부류는 가담치 못한 것 같다.
3. 봉기상황
1862년 2월 18일 晋州牧[진주목]의 농민은 不義[불의]에 항거하여 횃불을 들었다. 봉기 첫날인 2월 18일 각 면 단위로 농민들이 진주 읍을 향해 모여 들었고, 읍내 5리 밖에 구름떼같이 모여든 농미들은 "吏逋[이포]를 백성에게 징수 말라" , "都結[도결]과 統還[통환]을 혁파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차 읍내로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吏逋[이포]란 관청의 재정 결손액을 말하는 것이고, 都結[도결]은 전세, 대동제, 기타세목을 다 합해 금전으로 환산하여 일괄 부과하는 것을 말하고, 統還[통환]이란 관청의 환곡미 결손분을 각 호에 분담시키는 것을 말한다.
농민들은 진주 목사에게 도결 혁파를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었고 목사는 서면으로 작성하고 날인까지 해주었다. 손쉽게 요구사항을 쟁취해낸 농민들은 흩어질 줄 모르고 농민 수탈의 원성이 높았던 진주 병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이방, 호방 등 조세징수 관리의 집들은 부수고 불태웠다. 2월 19일에 농민들은 진주 병사 백낙신을 감금하고 이어 이방 권준범을 처단했다. 또한 진주 읍의 이방 김윤두를 찾아내 몽둥이로 두들겨 패 죽였다.
2월 20일 농민들은 읍 외곽지대를 돌며 대지주들 및 관과 결탁해 농민들을 괴롭히던 부유층의 집을 습격, 부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23일 밤이 돼서야 농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경상감사 이돈녕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민란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의하여 진주민란의 원인과 피해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박규수를 按 使[안핵사]로 파견하였다.
III. 맺는 말
19세기 전반에 접어 들면서의 우리 농촌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혼란하였으며 제반여건으로 말미 암아 국가재정은 萎縮一路[위축일로]에 있었고 또 농가경제는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불안정한 사태 하에서도 진주의 관리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농민을 수탈하였고 진주민란의 주모자 유계춘은 이런 기회를 타서 농민의 불평불만을 대변하고 나섰다. 진주민란은 시위군중이 白進[백진] 해산함으로써 일단 동결되었지만 조정에서는 按 使[안핵사]를 派遺[파유] 하고 그 지방관을 교체하여 사후수습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到任[도임]하자 곧 諸般弊害[제반폐해]의 矯 [교구]에 노력하는 한편 범법자를 모조리 처형하였다. 그런데 이 진주에서의 농민봉기에서 발단된 壬戌民亂[임술민란]은 三南지방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그 지역이 35個所[개소]에 달하였다.
이 晋州民亂[진주민란]은 우리 역사상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민중운동, 즉 壬戌民亂 [임술민란]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 그 意義[의의]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