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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장을 갔다가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는 남편을, 아버지를 나아가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내가 그렇게 늙었는가? 변했는가? 거울을 얼굴을 들어다 보고 생각에 잠긴다고 하지만 … 섭섭한 마음, 혹은 괘씸한 마음이 슬금슬금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카프카라는 사람이 쓴 소설 가운데 [변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샐러리맨이 자기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일어나보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쳐다보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벌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변신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가 아닙니다. 거울 앞에 서니 완전히 벌레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제 저녁까지 자기를 아버지로 불러주고, 남편으로 불러주던 온 가족들이 벌레가 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안하고 벌레 취급을 합니다. 찢어진 신문 위에 찬밥을 던져주고 먹으라고 하니 그 고통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변신을 했는데, 벌레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0)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을 지으신 본래 주인이요 왕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땅에 왔으나 백성이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 ‘로이’라는 검은 색의 개가 있습니다. 로이는 제가 가면 꼬리를 치고 벌쩍벌쩍 뛰면서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sit down하면 앉습니다. Go away하면 물러납니다. 그리고 먹이를 주면 저의 눈치를 보면서 저를 쳐다봅니다. 제가 ‘eat’이라고 하면 비로서 먹습니다. 왜냐하면 로이는 내가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 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로이가 저를 알아 보지를 못한다면 저는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좀 시대에 맞지 않은 말이지만 ‘너 된장 바른다’고 소리를 칠 것입니다.
어째서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 안에 들어오셨는데, 자신이 주인 된 세상에 들어왔는데도, 세상은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를 못했을까요?
예수님을 인정하고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주인으로, 인정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접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를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관 주인은 ‘그들’을 원치 않았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은 가축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하고는 지상의 모든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나심을 알았지만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들레헴에 갓난 아기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그들이 바라고 고대하던 메시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고대하던, 자신을 가난에서,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장군이요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세상 속에 묻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저, 배 불리 먹을 수 있도록 기적을 행하고, 사람의 생로병사의 문제에서 달콤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자신들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는, 그런 왕이요 선지자를 원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우들이 이런 형태의 종교생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무병건강하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진정한 성도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알아주고, 하나님을 알아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성도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너무나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겠다고 …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그냥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시를 만드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회사에서 컴푸터로 작업하는 것도, 환자를 만나는 것도,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의 자리가 선교지가 되고, 나는 선교사로 파송 되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11)
예수님은 낯선 곳, 완전 외지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잘 알고 있는 자기 땅(자기 집)에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택한 백성의 땅에 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 받지를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벼랑으로 몰아 밀치려고 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못된 사람으로 죽이려고 수없이 많은 계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접받는 것이 아니라 배척을 당해야 했습니까? 요한복음은 왜 세상이 이렇게 하느냐 것을 설명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와서 세상을 비추었는데, 어두움을 사랑하는 세상은 자신의 어두움을 알게 하는 빛을 용납할 수도, 받아 들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악하므로 빛 자체를 무시하고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외친 첫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입니다. 그들은 원했던 메시지는 이런 이런 메세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면서 회개를 외치는 메시야를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후에 어떻게 합니까?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아내 하와에게 전가시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습니까?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이혼과 재결합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구금을 시킵니다. 그러다가 잔치날에 악한 헤로디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목숨을 요구했습니다.
악한 인간은 자기의 허물과 죄를 감추기 위해서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 옳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끼어 들면 싫어합니다. 그러면 도적질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마치 입 안에 씹히는 모래알처럼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니 없애려고 탄압하였고,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애매하게 고생하는 것,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거나, 배고픔을 당해 보셨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한 편이 된, 예수님 편에 선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이름 석자는 단순히 이름 석자가 아니라 그 사람됨, 인격을 말합니다.
예수 이름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요,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옛날에 한 번 단회적으로 믿는다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 지금 믿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 믿는다는 미래의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벧후 1:4)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그런 ‘권세’(에쿠시아)가 주어집니다. 공적인 당당한 지위, 합법적인 지위가 주어집니다.
미국 석유왕 존 D 록펠러가 어느 날 한 호텔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지배인이 깜짝 놀라며 정중히 맞이했습니다. “제일 싼 방 하나만 주시오.”
지배인은 “회장님! 사실은 지금 아드님께서 제일 비싼 특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등급으로 사용하셔야지요.”
록펠러는 “그래요? 내 아들이 사용하는 방이 하루에 얼만데요?”
“5,000달러(5백만원)이고, 가장 싼 방은 33달러(3만 3천원)입니다.”
“저는 33달러짜리로 하겠습니다.”
“아이고, 회장님! 그래도 그렇지”
그러자 록펠러가 빙그레 웃으며 “허허, 신경 쓰지 마세요! 내 아들이야 최고 갑부 아버지를 둔 녀석이니 비싼 방을 잡는 게 당연하죠. 나야 가난뱅이 아버지를 둔 사람이니 33달러짜리도 과분하죠”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의 권세입니다.
전에 롱펠로우(Longfellow, Henry Wadsworth, 1807-1882)가 몇 줄 시상(詩想)을 매모한 종이가 일만 달러에 팔렸답니다. 록펠러(Rockefeller, John Davison R., 1839-1937)의 싸인 하나면 미국 어느 은행에서든지 백만 달러($)까지 신용지불이 되었답니다. 피카소(Picasso, Pablo Ruiz, 1881-1973)가 담배갑 속 면에 데생을 한 것이 집 한 채 값을 호가했다고 합니다.
유명인들의 작품이 엄청난 고가로 경매에 올라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 값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나는 왜 금수저로, 혹은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내가 이렇게 삼포, 사포, N포하면서 살아서 뭐하나? 삶의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 권세는 출생함으로 자연적으로 얻게 되는 ‘생득적 권리’가 아니고, 사람의 뜻대로 취할 수 있는 ‘인위적 권리’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권세’입니다. 다만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무조건적 은혜의 권리’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권리로 당당하게, 감사함으로, 겸손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