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과학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
나가이 다까시의 작품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인간학적 고찰은 나가이 박사가 회심하게 되는 단서가 된 파스칼의 "팡세"를 연상케 합니다. 나가이 다까시의 생애를 통하여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정열은 진리의 탐구였습니다. 파스칼도 그렇고 나가이 다까시도 그렇고 두 사람 모두 깊은 신앙인이고 투철한 지성을 가진 과학자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수필 "과학자의 신앙 - 학도들에게 보내다"에서 나가이 다까시는 다음과 같은 고찰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의 길이야. 하느님은 진리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이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편 과학자는 과학적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바르게 보려고 한다. 종교도 과학도 목표는 같은 진리인 것이다. 둘은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둘은 서로 대립되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고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노력이다. 진리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유일하고 완전한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전략) 사람이 최대의 노력을 다해도 사람이 제 아무리 노력을 다해도 끝내 도달하는 곳은 진리의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원자물리학자는 누구나 다 고백한다. "신앙은 진리를 파악하는 일이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것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지는 은총으로 완전히 하느님을 소유하기를 허락받고 있다.(3권 "묵주알" '과학자의 신앙' 248~255쪽)
볼타, 암페어, 마르코니, 멘델 그리고 파스칼, 코페르니쿠스, 파스퇴르, 등 역사에 남는 과학자들이 모두 위대한 신앙인이었음을 예로 들면서 과학과 신앙을 쉽사리 대비하는 사람들을 향해 반박합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읽어보면 과학과 신앙은 상반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상반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시험관을 만져본 일이 없고 펜대만을 잡고 말하는 사회문제 평론가나 문학평론가들이다.(바오로 그린 "나가사끼의 노래" 그리스도회 290쪽)
이 같은 문장에는 예컨대 1991년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근년의 John Polkinghorne의 "과학자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고당샤 블루북스 2001년), I. G. Barbour의 "과학자가 종교를 만날 때의 4개의 유형"(교분깡<教文館> 2003년), A.E. McGrath의 "과학과 종교"(교분깡<教文館> 2003년) 등의 저작물에 이어 나오는 고찰을 볼 수 있다. 처음의 "하느님과 과학"은 가톨릭의 철학자 Jean Guitton이 당대의 물리학자 Grichka Bogdanov、Igor Bogdanov와 가진 대담인데 먼저 Louis Pasteur의 말 "과학의 길을 조금 앞으로 걸어 가다보면 하느님과 멀어지지만 더 깊이 연구하여 걸어 들어가면 하느님께로 회귀한다"는 말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는 과학적 이론 속에 종교적 신념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물리학자가 그리는 실존의 궁국적 핵심에는 하느님 그 자체가 자리하고 있음을 어김없이 보게 되는 게 아닐까"("하느님과 과학" 16쪽)
가. 신앙이란? _ 신앙과 맹신의 차이
여기서 나가이 다까시가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인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옴진리교(オウム眞理敎) 사건 등으로 "맹신"과 참된 "신앙"의 구별이 애매해진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참된 "신앙"이란 결코 이성을 버리고, 눈을 감고 믿자고 하는 수동적 맹목적 태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나가이 다까시가 젊었을 때 그리스도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된 동기가 된 "팡세" 속에서 파스칼은 아주 적절하게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최종적 행보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무한대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이성은 취약한 것에 불과하다.
자연적인 사물이 이성을 초월하고 있다면 초자연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해야 할 것인가?"(B267)
"만약 모든 것을 이성의 지배하에 둔다면 우리 종교의 신비적 초자연적인 것은 모두 없어질 것이다. 만약 이성의 원리에 반한다면 우리 종교는 부조리에 가득 찬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B273)
또 "신앙의 박사"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빌리자면 "지성이 하느님과의 사랑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신앙만이 그에 걸맞은 가장 가까운 수단"(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제2부 9장 126)입니다. 왜냐면 철학의 원칙에 따르면 어떤 수단이든 수단은 모두 그의 목적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감각, 지성을 훨씬 높이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감각에 의해서건 지성에 의해서건 하느님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성에 접목된 신앙만이 하느님과 일치되는 직접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한량없는 무한한 존재이시면 신앙은 역시 하느님을 무한한 것으로 나타낸다. 또 하느님이 삼위인 동시에 일체로 계시다면 신앙은 역시 우리에게 하느님을 삼위이시고 일체로 나타내신다. 또 하느님이 우리 지성에 암흑으로 존재한다면 신앙도 또 우리의 지성을 맹목으로 또 그 눈을 어지럽게 하신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지성을 초월한 신적인 빛 속에 이 신앙이란 유일의 매개에 의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크고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제2부 9장 127쪽)
나가이 다까시가 어떤 그림에 써 넣은 소박한 시가 있는데 그를 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에 호응시키면 그 시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띠노도 몰랐지뭐야, 몰랐지만, 알고 있었지. 삼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persona)은 한 몸이심을."
공교요리(公敎要理)라고 제목을 단 이 시는 교리반에서 아마 삼위일체를 배우는데 눈을 휘둥그레 굴리며 장난치고 있는 어린이들의 유머러스한 그림에 쓰여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던 삼위일체의 신비를 신앙 속에 "알고 있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곧 나가이 다까시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 신앙의 신비
"개미와 사탕가루"("로사리오의 사슬")은 아주 정교한 필치로 이 지성과 신앙의 신비를 이야기한 명 수필입니다. 병상의 나가이 다까시는 머리맡으로 몰려오는 개미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몸집이 크고 검은 개미는 자신만만한 과학자, 자그마한 붉은 개미는 겸손한 신앙인입니다. 어느 쪽 개미도 병 속의 사탕가루(진리)에 다가갈 수 없지만 붉은 개미의 겸손한 기도에 마음이 움직인 나가이 다까시는 그 붉은 개미 앞에 사탕가루를 좀 부어 놓습니다. 붉은 개미는 그 사탕가루를 꼭 끼어 안습니다. 나가이 다까시에게 붉은 개미는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과학의 길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노력이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학 그 자체에도 한계가 있어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느님, 진리 - 과학적 방법만으로는 진리를 전적으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검은 개미는 병속의 사탕가루를 차지할 수 없었다. 과학자는 과학적 방법으로 하느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그저 보는 것으로 그치고 그것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다.
나는 아주 작은 존재다. 비천한 몸이다. 더러워진 몸이다. 가난한 자다. 나는 기도하며 앞으로 나가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계속한다. 그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모습, 불안한 걸음걸이, 그렇지만 강력하게 그리고 열심히 진리를 구하며 절실하게 바라고 있는 바 그런 것을 하늘에서 보시고 하느님께서 애련한 정으로 그 진리를 주신다 -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곧바로 진리의 품에 안기는 일입니다."(3권 "묵주알" 256쪽)
다. 겸손과 유머
나가이 다까시의 진리탐구는 추상적인 인간탐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탁월한 유머 감각입니다. 이것도 나가이 다까시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인데 그는 사람을 웃기는 데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꾸라지를 잘 잡는 특기처럼 유별난 게 아니었습니다. 뇨꼬도(如己堂)에서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어도 병문안 차 찾아 온 이들을 도리어 격려하고 기쁘게 만들어주는 환자였다고 합니다.
유머의 비결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이 다까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만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이란 진리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아빌라(Avila)의 성 데레사의 유명한 말인데 거기서 나가이 다까시의 깊은 겸손과 비길 데 없이 탁월한 유머가 탄생했습니다.
"꽃피는 언덕"에 수록되어 있는 '그와 나'라는 글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나가이 다까시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어 있는 나가이 박사를 나는 존경한다.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중략) 나가이 씨는 두 아이를 몹시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모양이다. - 그런데 나는 병문안 온 이로부터 "가야노에게 주세요"하고 선물 받은 과자 상자 두껑을 조금 밀어 제치고 손가락을 밀어 넣고는 속의 모나카 한 개를 슬쩍 하고도 모자라 두 개째를 끄집어낸다. 가야노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꽉 차있던 케이크 상자가 반은 비어있어서 남은 모나카를 다 들어내 종이에 다시 싼 것을 "자, 선물이야"하고 아이에게 시치미를 떼고 준다. 그리고 가야노가 "아빠도 드세요"하며 건네주는 것을 또 받아먹는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나가이 박사와 나와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보인다. 신문에 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는 나의 스승이시다. 같은 인생 코스를 몇 걸음 앞서 달리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노력하면 따라붙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종착역 테이프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테이프에 도달하기까지 그를 따라잡았으면 좋겠다. 뭐 따라잡았던들 세계기록으로 되지야 않지만.......(3권 "꽃피는 언덕" '그와 나' 297~29쪽)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