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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사색인의 십계명*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반 경 환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나는 오늘도 나를 더욱 더 호된 채찍질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호머, 괴테, 셰익스피어, 니체, 쇼펜하우어, 부처, 예수......
나는 언제나 더욱 더 강력한 적들을 발견하고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국제정치학자이자 카터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미국은 “단순한 제국이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으로서, 과거 어떤 제국도 누려본 적이 없는 세계일등 지위국가”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냉전 시대에 록펠러와 더불어, 미국, 유럽, 일본의 삼각체제(삼각위원회)를 구축했던 인물이며, 제국의 선택(황금가지, 2004)에서도 그 삼각체제에 대한 소신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삼각체제가 구소련(공산주의 체제)과 맞서기 위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다면, 오늘날의 삼각체제는 미국의 세계화, 또는 세계경영의 전략으로 그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러시아를 가입시켜서 유럽의 집단안보체제를 강화시키고, 중국과 일본까지도 끌어들이는 범유라시아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는 냉전이 종식된만큼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여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된 논지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제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통합(집단안보체제와 경제블록)마저도 미국의 이익과 그 지배를 관철시키는 주요 전략목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제국의 선택에서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다섯 개의 딜레마를 성찰하고 있는 데, 첫 번째는 ‘국가불안의 딜레마’이며, 두 번째는 ‘전지구적 무질서의 딜레마’이고, 세 번째는 ‘동맹관리의 딜레마’이며, 네 번째는 ‘세계화의 딜레마’이고, 다섯 번째는 ‘헤게모니적 민주주의 딜레마’이다. 첫 번째는 주권안보의 개념이 종식을 고한 시대에 자국의 주권에 집착하고 있는 미국의 딜레마를 뜻하고, 두 번째는 9.11 테러 사건 이후 전지구적 재앙으로 확산되고 있는 테러리즘을 뜻한다. 세 번째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하여 범유럽적인 반미주의와 범아시아적인 반미주의를 뜻하고, 네 번째는 자본의 이동이 실시간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경이 없는 세계에서, 그러나 국경이 있는 인간 사이의 딜레마를 뜻하고, 다섯 번째는 국제공용어로서의 영어와 미국의 문화가 중심문화가 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미국의 문화가 파괴될 수 있다는 딜레마를 뜻한다. 이것이 세계화로 인한 미국의 딜레마인 것이다. 요컨대 미제국주의는 대외적인 팽창과 대내적인 균열(내파)의 위험성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란 무엇이며, 세계화란 무엇인가? 제국주의란 더없이 강력하고 위대한 민족이 수많은 이웃 민족들을 정복하고,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제국에는 그들만의 열망과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제국은 하늘나라의 천국과도 같은 지상낙원임을 뜻하게 된다. 지상낙원, 또는 영원한 제국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계이며, 그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가 신적인 지위로 수직 상승된 세계를 뜻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브라만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인도제국, 유일신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았다는 유태왕국, 알렉산더 대왕이 꿈꾸었던 문화제국, 천년 왕국을 꿈꾸었던 로마제국,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었던 중화민국,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대영제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선 아메리카 합중국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제국, 그 영원한 제국의 꿈은 모든 민족들의 한결같은 꿈이며, 인류의 역사는 자기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이다. 이제 그 영원한 제국은 혈통에 의한 민족주의를 넘어서, 러시아와 중국과 미국의 경우에서처럼 다인종 민족국가로서 그 꿈을 추구하는 단계로까지 접어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찍이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이었던 칼톤 J. H. 헤이즈는 그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의 기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근본적으로 신제국주의는 민족주의적인 현상이었다. 자본가들 중에는 제국주의를 조장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이익을 본 자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최종적으로 볼 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가장 큰 소리로 성원하고 또한 가장 지속적으로 후원한 자는 민족주의적인 대중들이었다.”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까치, 1981
모든 국가는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영원한 제국의 꿈만이 그 구성원들의민심과 국력을 결집시켜주게 된다. 영원한 제국의 꿈이 있는 민족은 국력이 상승하고 있는 민족이지만, 영원한 제국의 꿈을 잃어버린 민족은 그럴 수가 없다.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은 끊임없이 이웃 민족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또 그리고 그들의 상품판매시장을 확보해나가게 된다. 자국내의 빈약한 자원과 잉여 인구에 따른 내부의 문제를 끊임없는 식민지배의 전략으로 해결하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위대한 제국의 문화를 전파해준다는 역사적 사명감마저도 띠고 있었던 것이 모든 제국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민족, 즉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고, 인간 이하의 동물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야만인들을 지배(인도)해야 된다는 것이 제국의 역사적 기원이라면, 천연자원의 확보와 상품판매시장의 확보는 그 다음의 부차적인 경제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위대한 민족들은 그들만의 영원한 제국을 위해서 일엽편주와도 같은 배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과 아프리카 내부까지도 깊숙이 탐험했던 것이며, 다른 한편, 자연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선박, 기차, 항공기, 소총, 대포, 전차, 항공모함을 개발하고, 그리고 수많은 정치인들과 사상가들과 역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그 식민경영의 전략과 전술, 즉 제국주의의 사상적,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왔던 것이다. 이 탐험가들과 자연과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삼원일치의 세계----, 즉, 식민지 쟁탈전은 스포츠와도 같은 전쟁일 수도 있었지만, 영원한 제국의 꿈은 마치, 종합예술처럼,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펼쳐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는 “기술혁명의 전세계적 파급효과”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경제적으로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자본과 상품이 실시간대로 국경선을 넘나들게 되었지만, 그 세계화로 인한 손익계산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화선진국들에게 있어서의 세계화는 제3세계의 시장 진출과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뜻하지만, 문화후진국들에게 있어서는 자국의 시장의 잠식과 정치적, 경제적 종속을 뜻한다. 문화선진국은 세계화로 인한 이익이 그 손실보다 크지만, 문화후진국은 세계화로 인한 손실이 그 이익보다 크게 된다. 요컨대 제3세계는 자국의 천연자원과 그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문화선진국의 자본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종속됨을 뜻하게 된다. 세계화는 “다국적 자본가들이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용어이며, “기술 수준이 높고 자본이 풍부한 국가”(제국의 선택, 208면)일수록 세계화에 대한 열광적인 신도가 되어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제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세계화’라는 용어 자체가 문화선진국내에서도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세계화로 포장하고, 독일과 프랑스와 일본과 영국 등은 그들의 이익을 세계화로 포장한다. 미국은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서 일방주의를 그 선진국들에게 강요하고, 문화선진국들은 미국에게 그들만의 상대주의를 강요한다. 이처럼 문화선진국들과 문화선진국들 간의 싸움은 제국주의자들의 ‘헤게모니 투쟁’이 되고, 그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서처럼, 미제국주의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현재 15개국 3억 7500만의 인구로 이루어진(이에 비해 미국의 인구는 2억 8000만이다) 유럽연합은 전체적인 국내 총생산이 대략 미국과 비슷한 수준임에도 방위비 지출은 미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게다가 과거 50년간 미국은 유럽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자 자국 군대를 유럽 땅에 배치했다. 냉전 기간 내내 유럽은 사실상 미국의 보호 대상이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발칸에서의 분쟁을 억제하고자 군사적 노력에 앞장선 것은 미국이었다. 유럽은 또한 미국이 중동과 극동에서 수행해온 정치적, 군사적 안정화 역할의 경제적 수혜자이다.”----제국의 선택, 139면
“이빨 없는 불평과 비난은 물어뜯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라크를 둘러싼 대서양 사이의 갈등으로 양쪽이 겪은 곤경을 생각하면 미국은 군사적 분야에 서 유럽이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그만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앞의 책, 142면
“냉전이 종식된 이래 미국이 거침없는 행패를 부리는 세계적 깡패와 같다는 유럽의 비난은 점점 확산되고 정교해졌다. 소련이라는 위협이 사라지면서 그러한 비난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은 감소한 반면 점진적인 유럽의 경제적 통합으로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대서양 간의 갈등은 전면에 떠올랐다. 게다가 미국 의회의 일방적 입법조치, 새로운 농업보조금, 수입철강에 부과된 관세로 유럽은 개방적 세계 경제를 약속한 미국의 의도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앞의 책, 143면
“일본이나 중국, 인도의 경제를 사실상 마비시키려면 단지 소수의 기뢰들로 상하이나 요코하마, 또는 봄베이(하나 또는 둘 이상)를 봉쇄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 나라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석유 수입을 위시하여 선박을 이용한 화물 수송에 거의 전적으로 국가 경제를 의존한다. 국제적인 상업용 철도 수송은 일본이나 인도네시아같은 섬나라에게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에게도 변변찮은 방편이다. 싱가포르 근역의 말라카 해협은 중동으로부터의 원유 수입뿐 아니라 극동과 유럽 간의 무역이 이 좁은 통로를 지나기 때문에 특히 사활이 걸린 해상 교통 수송로이다.”----앞의 책, 168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중국이 스스로 중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한동안은 계속 그러할 것이다) 사실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 통감한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충돌이 포함된 군사적 시나리오는 중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미국은 원한다면 중국을 봉쇄할 수 있고, 중국의 해외 무역과 원유 수입을 완전히 중단시킬 수 있다.”----앞의 책, 180
오늘날 세계화는 미국의 이익을 세계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미제국주의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고, 바로 거기에는 선악을 넘어선 강자의 논리만이 횡행을 하게 된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적이다”라는 레닌식의 흑백논리는 영원한 제국의 논리이며,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그 어떤 행위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군사적인 힘에의 의지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그 모든 것이 제 멋대로이다. 이웃 민족국가의 주권은 무차별적으로 짓밟으면서도 자국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자유시장 경제논리를 역설하면서도 철강업과 섬유업,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는 보호무역주의로 일관한다.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휴머니즘)는 그처럼 역설하면서도 절대적인 빈곤과 기아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3세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항상 국제법의 준수를 주창하면서도 UN의 합법적인 승인없이 이라크를 침략한다. 또, 그리고, 유럽연합이나 유라시아의 통합은 옹호하면서도 언제, 어느 때나 미제국주의의 통치질서를 강요하고, 교토의정서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약에는 끝끝내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제국의 힘은 옳든 그르든 미국의 일방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미국은 자기 만족적인 독트린을 선택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미국은 인류의 역사상, 세계 최초로 영원한 제국을 건설한 국가이고, 워싱턴은 과거 로마나 북경을 넘어서서, 명실상부한 세계의 수도가 되어가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워싱턴을 방문하고, 미국 대통령과의 30분 짜리 면담 시간에 자기 자신의 정치적 운명과 그 국가의 사활적인 운명을 걸어놓고 있는 실정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의전절차는 다음과 같다. 노무현 대통령과도 같은 30분짜리 면담은 상대 대통령과 상대국가를 아주 가볍게 본다는 것을 뜻하고, 공식적인 저녁 만찬은 상대국가와의 특별한 관계를 뜻한다.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회의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뜻하고, 텍사스주 크로포드 별장에서의 만남은 양국 관계가 아주 특별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군사적인 힘은 어떠한 대량살상무기도 봉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또한 미국의 경제적인 힘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을 미 재무부의 산하기관으로 거느리고 있을 만큼 강력하다. 이 세계는 미국의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미국이 있는 한, 유럽이나 아시아에서의 양차 대전과도 같은 세계대전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세계인들은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기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영원한 제국의 특권이며, 미국 이외의 모든 세계인들은 그저, 다만, 묵묵히 참고 지불해야만 하는 안보부담금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이익은 세계의 이익이고 세계의 이익은 미국의 이익이다. 거기에는 도덕도 없고, 법도 없고, 선악도 없다. 세계화는 미국화와 동의어이며, 따라서 그것은 ‘반세계화’(‘반미주의’)의 모태가 되어준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9.11테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찬양한 바가 있다.
“테러리즘은 부도덕하다. (.......) 그러나 그것은 부도덕한 세계화에 대한 대답이다.
이 세계의 초강대국이 파괴되는 것을 보는 광대한 환희, 또는 그보다 자기 파괴, 아름다운 자살을 보는 방대한 환희.”----제국의 선택, 226면, 재인용
우리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1870년대 어떤 독일 사람은 “독일은 식민지가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해놓고, 곧바로 “그렇다”(제국주의란 무엇인가, 143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수출주도형 산업국가이며, 국민소득 30,000달러----현재 일인당 국민소득은 12,000달러라고 한다----의 선진국을 향해서, 아니,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그 고지를 향해서 필사적인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대한민국은 문화선진국을 지향하고 있으며, 천연자원의 확보와 상품판매시장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 한국인들의 대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렇다”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선택받은 민족이고 영원한 제국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영원한 제국의 꿈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 앞에서 잃어버린지가 오래되었고, 이제는 겨우 한 여름밤의 꿈처럼 우리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서나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한국인들의 ‘신의 섭리’----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신의 섭리----와도 같은 정체성과 영원한 제국의 꿈을 되찾고, 지난 시절의 쓰라리고 아팠던 굴욕을 청산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비상의 날개를 힘차게 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미제국주의에 대한 혐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가 제 아무리 현실적으로 유효하고 또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대머리독수리는 미국의 國鳥이다.
흰 대머리의 수리,
복면을 쓴
백악관의
두리번거리는 파란 눈들,
높이 떠서 넓은 적과 먹이를 살피는 눈들.
짐승의 세계에선 오직 강한 자만이
큰 자유를 누리는 법이라고
거대한 날개의
대머리독수리떼가
발톱에 대포알을 움켜쥐고 대륙을 횡단한다.
라는 최승호의 「대머리 독수리 1」과도 같은 반제국주의는 우리 한국인들의 암적인 종양이라고 할 수가 있다. 보드리야르와 최승호는 다같이 민주주의자이고, 반제국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치명적인 한계는 인간 평등과 지나친 도덕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 영원한 제국의 꿈이 없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반미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반제국주의자는 아니다. 오늘날 미국이 없다면, 이 세계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피 비린내를 풍기게 될 것이고,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은 추풍의 낙엽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이여, 이제는 제발 거대한 제국을 혐오하지 말고, 죽자사자 그 제국주의를 배척하지도 말자. 그대들의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에 대한 혐오는 배반당한 애정의 표현이며, 영원한 제국의 꿈에 대한 절망감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대국이며, 그들은 그들의 일본정신, 즉 ‘大和魂’을 통하여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에는 차마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 놓고 있지는 않지만, 그 치욕과 굴욕을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언젠가, 어느 때는 미국을 극복하고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경제력도 세계 제2위의 국가이며, 군사력도 세계 제2위인 사실상의 핵보유 국가이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청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대만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또한 ‘러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대한민국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한다. 1910년, 대한제국과의 합병조약은 다음과도 같았다. “제1조, 대한제국 황제 폐하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한을 완전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도한다. 제2조, 일본 황제 폐하는 제1조에 의거한 양도를 수락하고 또한 대한제국 전체를 일본제국에 합병하는 것을 승낙한다.(이토 나리히코, 일본헌법제9조, 행복한 책읽기, 2005, 297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대일본제국의 한일합병조약서란 말인가? 아니,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더럽고 치욕적인 한일합병조약서란 말인가? 대한제국의 국민들에게는 결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겠지만, 자그만 섬나라의 일본인들에게는 신대륙의 발견과도 같은 국경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란 상대적인 것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역사교과서의 왜곡과 독도영유권 주장,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그저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과성의 해프닝이 아니라, 이처럼 정확한 역사 철학적인 수준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미국 이상으로 영원한 제국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일본인들의 의지를 알고 있는 만큼, 두 번 다시 한일합병과도 같은 치욕을 되풀이 당해서는 안 된다. 영원한 제국의 꿈은 모든 인간들의 이상인 만큼, 우리가 그들의 꿈 자체를 매도하고, 또 그것을 봉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원한 제국의 꿈은 호언장담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학문과 무기의 성과에 의해서만이 달성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제국의 꿈을 접을 리도 없고, 어떠한 외교적인 노력으로도 그들의 제국의 꿈을 좌절시킬 수도 없다. 일본의 힘은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이제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의 문턱을 올라 가려고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보다도 더 잘 살거나, 적어도 그 힘이 대등해지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또다시 식민지배의 치욕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보다도 더 잘 살거나, 적어도 그 힘이 대등해질 때, 바로 그때만이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야욕을 접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무조건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도 사이 좋은 이웃 나라를 위해서 오늘도 전진하고, 또 전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은 날이면 날마다 폭발할 듯 하지만,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는 원시적인 문맹인들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흥분하고 분노하기 잘 하는 민족은 사상적으로 불임의 동물에 불과하고, 이빨이나 발톱이 없는 동물들처럼, 그들의 공격본능과 방어본능마저도 상실한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냉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며, 새로운 사상의 결과물들을 내놓아야 할 때조차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흥분하고, 근검절약하고 부를 축적해야 될 때에도 온갖 허례허식과 사치를 일삼는다.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 한일협정에 서명을 해놓고도 무조건의 떼----비록, 박정희가 군사적인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박정희 정권도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정부였다. 박정희 정권이 치욕적인 한일협정에 서명을 하고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었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이제와서 1965년의 한일협정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의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대한민국의 산업을 발전시킨 공적도 있는 만큼, 정신대여성과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의 책임은 대한민국의 정부에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정부의 예산 책정이 정이나 어렵고, 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서 배상을 하는 편이 차라리 더욱 더 합리적이고 떳떳할 것이다. 1965년도의 한일협정도 협정이었던 만큼, 그 협정을 준수해가며, 그 치욕과 굴욕의 상처를 다스려 나가는 것이 더욱 더 성숙하고 훌륭한 국민의 태도가 될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도 감동시킬 만큼 훌륭한 사상과 태도로 일관한다면 일본인들도 더욱 더 크게 뉘우치고 더욱 더 사이좋은 이웃 국가의 국민이 되어 줄는지도 모른다----를 쓰고,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의 왜곡에는 제법 살기를 띠고 핏대를 올려 세우면서도, 일본의 학문과 산업기술은 너무나도 뻔뻔스럽고도 파렴치하게 표절을 해댄다. 흥분하고 분노하기 잘 하는 인간은 성실하지 않은 인간이며,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기꾼들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의 분노 속에서, ‘일본’과 ‘일본문화론’에 대한 너무나도 안타까운 부재현상 때문에 치를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는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민족이며, 역사 철학적으로는 이미 거세된 불임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도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과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아주 감명깊게 읽을 수가 있었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에 대한 매우 값진 역작이고,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는 그녀의 사적 체험과 독단주의에 치우친 사악한 졸작에 불과하다.
“일본인은 축소지향의 발상에 따라 트렌지스터를 만들고 반도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확대 문화로 옮겨갔다. 이 역설에서 생긴 것이 무역마찰이란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지금까지 어느 나라보다 자유무역의 국제적 개방정책의 덕을 보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실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비국제적인, 소위 ‘우치’와 ‘소토’의 두터운 의식의 벽 안에서 살고 있는 민족이다. 경제의 힘은 국제적으로 성장했는 데, 그 의식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다. 이러한 일본인은 꼭 손발만 커지고 머리는 그대로인 기형의 잇슨보시(一寸法師) 같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문학사상사, 2003, 320면
“이렇게 ‘축소’의 천재와 영웅은 ‘확대’의 바보와 망상자가 되어버린다. 그가 친 조선조는 그 뒤에도 300년 가까이 끄떡없이 지속해갔지만, 히데요시의 천하는 몇 년도 못가 망해버린다. ‘확대’를 지향하게 되면 그 섬세성이나 집중력을 잃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이 지금까지 나타난 일본문화의 패턴이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인에게도, 히데요시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고 깊은 상처만으로 끝난 임진왜란은 다시 되풀이되어 한국을 침략하고 중국대륙을 공략해 끝내는 ‘대동아전쟁’의 세계 침공으로 파멸하게 된다. 단지 동상에 걸린 것이 원폭으로 확대된 것만 다를 뿐이다.”
----앞의 책, 331-2면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문화론’의 가장 뛰어난 역작 중의 하나이며, 출간 즉시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고, 일본의 지식인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던 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일본문화에 어느 누구보다도 정통한 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일본어로 공부하고 일본문화의 세례 속에서 성장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조르주 풀레의 주제(‘수축’과 ‘확산’이 바로 그것이다)와 그 방법론을 차용하여, 현대의 일본문화를 분석해낸 것이다. 서양의 문화는 창조적 문화이며, 일본의 문화는 모방의 문화이다. 서양인들이 그들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통하여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확대의 문화를 구축해나갔다면,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 모방의 천재성을 통하여 축소의 문화를 지향해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들의 문화는 축소지향의 문화이지 확대지향의 문화가 아니다. 확대지향의 문화는 새로운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나갈 수가 있지만, 축소지향의 문화는 그 사상과 이론의 출구가 막혀 있기 때문에, 작고 조그만 세계로만 움추러 들게 된다. 대자연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세키데이(石庭)와 분재(盆栽), 밥상을 가장 적게 줄여놓은 듯한 도시락, 쥘부채와 삼단우산,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단시인 하이쿠(俳句), 그리고 축소지향의 상징이자 ‘메이드 인 재팬’의 대명사인 트렌지스터, 카메라, 전자계산기, 시계, 자동차, 반도체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사상과 이론적 출구가 막혀 있는 곳에서 모방의 천재성이 자라나고, 그리고 그 모방의 천재성을 통하여 세계의 시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줄어듬으로써 펼쳐지고 펼쳐짐으로써 줄어든다. 축소지향이 확대지향이 되고, 확대지향이 축소지향이 된다. 그러나 일본문화는 본질적으로 축소지향의 문화이기 때문에, ‘축소’의 천재와 영웅이 ‘확대’의 바보와 망상자가 되어버린다. 사상과 이론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민족은 창조적인 천재성을 지닌 민족이 될 수 없고, 또 그리고 영원한 제국의 신민이 될 수도 없다. 좀더 냉정하고 엄격하게 말한다면 모방의 천재는 진정한 천재도 아니고, 그는 자기 자신의 편협성과 폐쇄된 울타리를 뛰쳐나와 진정한 세계시민이 될 수도 없다. 일본인들의 집단적인 광기와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일본만이 아닌, 세계 속의암적인 종양일 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어령은 일본문화의 장점과 단점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따라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다음과도 같은 우정어린 충고로 그 대미를 장식해 놓고 있다.
“온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사무라이의 칼이 아니라 료안지와 같은 아름다운 세키데이(石庭)다. 그런 정원을 만들고 맑고 고요한 다실 문화를 낳은 일본인, 설사 역사를 피로 씻은 사무라이 사회의 살육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속죄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꽃의 문화를 만들어낸 일본인...... 그러한 일본인들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그 주인이 되지 못했다. 칼을 가진 자와 주판을 가진 자만이 역사를 지배했던 것이 일본의 비극이었다. 이제부터 ‘군사대국’, ‘경제대국’이 아니라 ‘문화대국’의 새 차원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야만 확대지향성도 제 빛을 차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본인의 축소지향력은 정원을 만들고 다도(茶道)와 화도(華道)를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트랜지스터를, 탁상 전자계산기를 만들었다.
앞으로는 그 고토와 같은 생명의 울림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더 커지고싶으면, 참다운 대국이 되고 싶으면, 더 작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도깨비(鬼)가 되지 말고 난쟁이(一寸法師)가 되라. 배를 태워 고토를 만들라. 그 소리가 7대양에 울리도록......”
----앞의 책 349면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한국의 학자로서는 보기 드문 역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르주 풀레의 창조적인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수축과 확산/ 축소와 확대’는 너무나도 똑같고,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진부한 주제에 불과하다. 이어령은 그 사상과 이론의 약점을 다소 현학적이고 섬세한 그물망으로 아름답게 엮어나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의 본질적인 오류들이 흔적조차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령의 치명적인 오류는 첫 번째로 ‘일본정신’에 대한 무지이고, 두 번째는 사상과 이론이 없는 학자로서의 오류이다. 아니, 그는 자기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이 없는 ‘불임의 동물’이기 때문에, 일본정신의 기원과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갇혀서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조망해볼 수 있는 선경지명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자원빈국이며, 해마다 크고 작은 지진들과 함께, A급 태풍들이 열 다섯 번씩이나 지나가는 자그만 섬나라이다. 하지만 자원부국은 저주받은 나라이며, 자원빈국은 축복받은 나라이다. 자원부국의 원주민들은 자연의 풍요로움만을 믿으며, 더없이 한가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었지만, 자원빈국의 원주민들은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 더없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자는 한가함과 평화로움 속에서 야만인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고, 후자는 근면함과 성실함 속에서 문명인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언제, 어느 때나 최악의 생존조건과 맞서 싸우며, 그 구성원들전체가 一心同體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가정, 부족, 직장, 군대, 정당, 그리고 그밖의 모든 단체의 조직원으로서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 사회의 도덕과 규범에 반하는 개인은 천하의 대역죄인이 되어서 할복자살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浪人이 되어서 외롭고 고독하게, 또는 더없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자기 자신의 생애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원시적인 공동체 의식이 더욱 더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大和魂’이며, 그것은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에서부터 19세기 말의 ‘에도 막부’, 즉,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고, “사무라이 계급에게 모든 명예와 특권”이 주어지자, 그때서야 비로소 사무라이들은 “자기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고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할 공통의 규칙과 기준(니토베 이나조, 사무라이, 생각의 나무, 2004, 17면)”을 마련했던 것이다. ‘大和魂’은 일본정신이며, 일본정신은 사무라이 정신이다. 무사도에서는 국가(主君)는 개인에게 우선하며, 개인은 단지 국가의 구성원(분자)으로서만 존재한다. 무사는 忠과 孝의 다툼이 있게 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忠을 택해야만 하고, 주군이 잘못된 길에 빠지면 할복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주군의 양심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무사는 언제, 어느 때나 청빈한 생활과 함께, 자기 자신의 명예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아야만 했고, 1702년 12월, 47명의 무사가 주군인 아사노 나가노리의 원수를 갚고 幕府의 명령에 따라 ‘집단할복자살’을 감행했던 것처럼, 무사는 할복자살마저도 최고의 명예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일본사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사회이며, 타인들에 대한 사랑과 함께, 도덕적인 정의가 살아 숨쉬는 사회이다. ‘大和魂’에 의해서 일본정신이 싹트고, 일본정신에 의해서 그들만의 민족주의가 아름답게 꽃 피어난다. 이제 ‘大和魂’의 정점에는 천황 폐하가 있고, 천황 폐하는 신의 대리인이 된다. 일본정신의 기원에는 ‘大和魂’이 싹틀 수밖에 없었던 최악(혹은 최선)의 생존조건이 있었던 것이고, 그 ‘大和魂’이 아름답고 웅장하게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무사계급의 등장과 함께, 그 장구한 통치에 있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19세기 말, 즉,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아 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무인 통치시대는 그 역사의 종말을 고했지만,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 ‘大和魂’의 정신은 가장 역동적으로 일본인들의 살과 피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거인의 몸을 지닌 왜소한 난장이이며, 그 민족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더욱 더 발작적인 자폐증의 환자들처럼 움추러 들고만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타 인종과 이웃 민족에 대한 편견이 제일 심한 곳도 일본이며, 국제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지 못하고, 역사교과서의 왜곡과 야스쿠니의 신사참배와, 또 그리고, 자그만 돌멩이와도 같은 섬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곳도 일본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이어령의 지적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요컨대 ‘사랑’과 ‘행복의 전도사’로서의 일본인들의 역할은 모든 세계인들의 소망과 기대일는지도 모른다.
이어령은 일본문화는 근본적으로 축소지향의 문화이며, 이제는 확대지향의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의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和’를 중요시하는 집단문화는 세계 제2위의 대국으로 결실을 맺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일본의 영원한 제국의 꿈은 실패를 하게 된다고말한다. 이제 근면은 광기가 되고, 성실은 맹목이 된다. 순결은 불순이 되고, 민족주의는 배타주의(반세계주의)가 된다. 또, 그리고, 정의는 불의가 되고, 화는 불화가 된다. 오늘날 일본은 인류의 역사 상, 가장 아름답고 끔찍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어갔던 것처럼, 또다시 그처럼 어리석고 우매한 전철을 되밟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령의 일본비판은 그가 일본문화의 전체를 보면서도 일본정신의 기원과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지난 날의 경험에만 의거한 ‘역사주의의 오류’만을 되풀이 자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 있어서 동일한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민족의 역사는 흥망성쇠가 있는 것처럼, 미국만이 초일류국가로서 영원원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영원한 제국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그 영원한 제국의 꿈 자체를 매도하고, 또 그것을 봉쇄할 수는 없다. 어쨌든일본은 그 영원한 제국의 꿈을 통해서 그들의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키고, 오늘날 세계 제2위의 대국으로 부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조비를 부담하고 있는 것도 일본이고, 미국 다음으로 국방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나라도 일본이다. 일본은 아직도 미국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인 식민지배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오늘날 그들의 미국에 대한 순종은 너무나도 마음에도 없는 가짜 순종에 불과하다. 일본헌법 제9조는 일본의 “비무장과 전쟁포기”(일본헌법제9조, 38면)를 명시하고 있는 데, 그것은 세계 제2위의 대국의 모습이기는 커녕, 어떠한 방어능력도 없는 노예 국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우리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군대가 불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고, 또 그리고 국방의무에서 해방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 있겠는가? 일본의 자위대는 세계 제2위의 군대이지만, 이상야릇하게도 위헌적이고도 불법적인 군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헌법의 개정의 노력에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왜 자위대를 해체시키고, 그 불법적인 무기들을 마치 전리품처럼, 강탈하려고 하지 않는지를 모르겠다. 이제 일본은 주권국가인 만큼 일본헌법 제9조는 마땅히 개정되어야만 하며, 우리 한국인들이 그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필요가 없다. 또, 그리고, 일본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인만큼, 그들의 국제적인 역할을 고려하여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우리 한국인들이 그토록 반대해서도 안 된다. 독도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의 왜곡,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의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사사건건 일본인들의 발목만을 잡는 추한 한국인이 되지를 말고, 易地思之의 입장에서, 영원한 제국을 꿈꾸는 일본의 앞날에 기꺼이 양탄자보다도 더욱 더 아름답고 화려한 비단길을 깔아주는 것이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는 일본은 군사적인 제국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大和魂’은 흔적조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보다 더 넓고 관용적이며, 기꺼이 자기 자신들을 희생함으로써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욱 더 크게 끌어안는 대한민국의 정신만이 늘 푸른 소나무처럼 일본 땅, 일본 열도에서 자라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폴레옹 황제는 이민족들에게는 ‘살인마’, ‘식인귀’,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은 프랑스인들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니, 오늘날에는 독일인, 이탈리아인, 영국인, 오스트리아인, 러시아인들마저도 나폴레옹 황제를 세계적인 영웅으로 추앙하고 또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의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위대한 영웅일 수도 있다. 안중근은 대한민국의 영웅이었지만,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잔인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이처럼 역사란 상대적인 것이고, 비록, 우리가 지난 날의 상처와 그 아픔 속에서 신음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성토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들이 민사소송에서 거듭 승소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듯이, 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이 살인마, 식인귀들이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듯이, 이제는 일본의 그 모든 잘못들을 더욱 더 따뜻하고 너그럽게 용서해줄 때도 된 것이다. 너무나도 사소하고 눈 앞의 자그만 이익에만 집착하여 너무나도 훌륭한 이웃 나라의 미래의 앞날을 망쳐서는 아니된다. 나는 더 이상의 인간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며, 더욱 더 옹졸하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태도에는 전적으로 찬성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고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태어났지, 거인의 몸을 지닌 왜소한 난장이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어령은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이 없다. 내가 아는 한, 어떠한 일본인도 세계적인 사상가와 이론가의 반열에 올라 선 인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이어령식으로 “너희들은 축소지향적인 인물이니까, 작게 작게 소꼽장난이나 하면서 살아가거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라고, 우리 한국인들의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을 퍼부어댈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일본인들은 이어령보다 더 품이 넉넉하고, 그러니까 이어령과도 같은 외국학자의 글을 대서특필하고, 그야말로 베스트 셀러가 되어주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그리고,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의 한계와 그 오류들을 동냥아치에게 동전 몇 푼 건네주듯이, 마음껏 야유하고 비웃어 주었을는지도 모른다. 못난 자는 흥분하지만, 우월한 자는 경멸한다. 일본은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고, 그 꿈을 위하여 ‘大和魂’의 정신을 불태워나가고 있다. 나는 일본인들의 영원한 제국의 꿈에 진심으로 뜨거운 성원을 보낸다. 역사에 있어서는 두 번 다시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의 미제국주의보다도 더욱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그들만의 영원한 제국이 건설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어느 때는 일본정신의 천박함이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충복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면서.
일본은 상징의 나라이며, 그 상징을 통해서 모든 일본인들을 ‘大和魂’이라는 ‘일본정신’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나라이다. 기호는 사물을 지시하지만, 상징은 인간의 의도(정신)를 지시한다. 일장기는 단순 명료하게 태양을 뜻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는 천황은 하나님의 아들(대리인)로서 상징적으로만 존재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가문의 뛰어난 인물이나 순수한 혈통보다도 그 문양을 더욱 더 중요시하고, 그 문양을 통해서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나간다. 또한 회사의 로고를 통해서 노사화합을 이끌어나가고, 대일본제국을 건설해나간다. 상징이 곧 ‘大和魂’이며, 그 상징 속에는 일본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그리고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예의범절과 애국심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그처럼 ‘탈아시아’를 외쳤으면서도 서구의 물질문명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정신만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로마의 교황이 가장 푸대접을 받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일본정신의 무서운 위용과 그 힘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꽃인 일본의 만엔 권의 지폐 속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그는아직도 일본정신을 대표하고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2004년 11월 이전의 구권 화폐 속의 주인공들로는 만엔 권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오천엔 권에는 니토베 이나조, 천엔 권에는 나쓰메 소세키였으며, 그들은 모두가 대일본제국의 주창자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2004년 11월 새로 발행된 신권 화폐에는 오천엔 권에는 니토베 이나조 대신에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로, 천 엔권에는 나쓰메 소세키 대신에 메이지 유신 시대의 유명한 세균학자였던 노구치 히데요로 바뀌었을 뿐, 만엔 권의 주인공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여전히 변함없이 그 권좌를 지키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의 주창자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열광자이다. 그는 그의 「탈아론」에서 “우리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함께 진퇴를 하고, 지나(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나쁜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일본헌법제9조, 150면)”고 역설한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885년 「천황께서 직접 징벌 나가실 준비는 되었는가」, 「일본 병사들, 재조선 일본인들의 안부는 어떠한가?」,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라고 한일합병을 열광적으로 주창하고, 그 결과, 아시아인 2,000만명, 일본인 300만명을 대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인물----전범의 때가 묻지 않은 대일본제국의 주창자----이었고,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그를 만엔 권의 인물로 선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정신, 즉 ‘大和魂’의 상징이며, 일본은 아직도 여전히 영원한 제국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장기는 태양을 뜻하고, 일본의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뜻한다. 따라서 일본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일본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영원한 제국의 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만엔 권의 화폐 속에 대일본제국의 열광적인 주창자이자 ‘征韓論者’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일본인들의 영원한 제국의 꿈이 그들의 국력과 민심을 결집시키는 ‘大和魂’으로 나타난 것이고, 일본인들은 그 ‘大和魂’을 통하여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 이익을, 또, 그리고, 그 무엇을 하더라도 원리원칙을 중요시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항상 근검 절약하는 삶의 태도를 지녀왔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을 창출한 민족은 위대한 민족정신을 지닌 민족이며, 도덕을 창출하지 못한 민족은 소멸해가는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위대한 민족정신을 지닌 민족이며, 한국은 그렇지 못한 민족이다. 위대한 민족이 그렇지 못한 민족을 지배하고 개같이 학대할 권리를 지녔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그 약육강식의 치욕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일본의 식민통치기간은 실제로 36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식민통치기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영원히 그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무력으로 정복된 순간, 그들의 상품판매시장과 천연자원의 약탈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수많은 국민들이 학도병으로, 독립군으로, 또는 정신대로, 강제징용으로 머나 먼 이역만리로 끌려 다니며, 마치, 개나 돼지와도 같이 학대받는 생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즉,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어쩔 수 없이 일본은 물러가고 말았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은 전후 일본경제 부흥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한국전쟁의 특수는 1950년부터 1953년 5월까지, 연간 4억 900만 달러의 이익을 가져다가 주었고, 일본의 전체 수출의 64%에 해당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일본의 제국의 꿈은 대한민국의 재앙이었고, 대한민국의 재앙은 일본의 행운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일무역적자는 230억 달러에 달하고, 그것은 곧바로 일본의 기술과 자본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의 왜곡, 그리고 독도영유권이라는 채찍을 맞고 전국민이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은 새로운 사상과 이론으로 한국정신을 정립하고, 그 한국정신을 토대로 하여 전국민의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 ‘愛知’, 즉 지혜를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영원한 제국의 꿈과 민족정신을 창출해내게 해줄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는 매국노이자 민족의 반역자는 수없이 많이 있어 왔지만, 진정한 ‘친일파’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낙천주의의 사상가로서의 나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힘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고, 조금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일본인을 이해하고 일본인을 사랑한 사람들이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를 배우지 못했다면, 그것은 제 민족을 팔아먹거나 갉아먹은 민족의 반역자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로 미국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일본인들이 천황폐하의 항복선언 이후, ‘反美’가 아닌 ‘親美’로 돌아선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날 ‘親美가 애국이 되고 反美는 매국’이 되고 있는 이 기이한 역전현상 속에서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우월한 힘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지적인 민감성으로 감지해낸 바가 있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나서고, 그 강력한 적들에게 경의를 표현하면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더욱 더 높이 끌어 올리게 된다. 일본인들은 일본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가증스러운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도 세계 제2위의 대국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한국정신이 철두철미하게 거세되었기 때문에, ‘한일수교 40년’이 지나고, 또 올해에는 일본과의 ‘우정의 해’라고 말하면서까지도 여전히 ‘반일’이 애국이 되고, ‘친일’이 매국이 되는 이상하고도 기이한 나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덧 일본과 국교를 맺고 선린이웃을 표방하고 있는 마당에, 이제는 ‘친일’과 ‘반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일본정신을 참답게 이해하며, 또 그들의 장점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의 정신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면, 진정으로 친일파보다도 더 한 애국자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친일파는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매국노와 민족의 반역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고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고문한 자, 일제에게 아첨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부를 축적한 자----, 이들은 모두가 민족의 반역자이자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지금 이 순간의 민족의 반역자는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며, 그들은 모두가 우리 한국인들의 꿈과 희망을 갉아먹고 있는 자들이다.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자, 뇌물을 밥 먹듯이 하는 자, 사면복권을 일삼으며 家臣의 안위와 명예만을 생각하는 자, 부실공사를 일삼으며 뇌물상납의 연결고리를 밥줄처럼 생각하는 자,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잣대를 지니고도 도덕과 정의만을 외쳐대는 자, 세계화로 인한 이익이 그 손실보다도 더 큰 데도 오직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교육시장과 의료시장의 개방에는 한사코 반대를 하는 자,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들에게는 핏대를 올려 세우면서도 온갖 기초생활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 친일파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있으면서도 일본인들의 논문만을 죽자사자 베껴먹고 있는 우리 학자들, 대한독립운동과 그 역사는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일본의 TV 프로그램은 모조리 표절해서 쓰고 있는 언론인들,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이나 베껴먹고 있는 이 땅의 소설가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모조리 베껴먹고도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대한민국학술원의 회원직을 간직하고 있는 김윤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조리 표절작품인데도 대한민국의 국민작가로 불리고 있는 이문열----, 바로 이러한 자들이 민족의 반역자이자 대역죄인인 것이다. 부정부패는 대한민국 사회의 암적인 종양이며, 우리 한국인들의 꿈을 갉아먹고, 일본의 제국주의 앞에다가 제 조국을 통째로 가져다가 바치게 된다. ‘대당절의’, ‘대원절의’, ‘대명절의’, ‘대청절의’, ‘대일절의’, ‘대미절의’ 등의 ‘사대주의’는 그 부정부패의 꽃이며, 또한 부정부패는 싸움 한 번 하지도 못한 채, 제 조국을 명나라(일본)에게 바친 ‘사대주의’(이성계와 이완용)의 비옥한 토양이다. 박정희는 민족의 반역자이었지, 친일파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일본천황 폐하를 모시는 황군이었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대일본제국의 황군이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학문의 꽃인 철학(사상) 교육을 폐지하고, 그토록 어리석고 우매한 군부독재와 부정부패의 새싹들과 그 나무들만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이 조약의 어디에도 일본의 식민지지배 역사도, 일본의 전쟁 책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니, 단지 언급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시등, 예전에 조선, 만주를 지배했던 인물들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박정희 장군은 전전(前戰) 및 전쟁 중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의 신하가 되어 자국 동포들의 항일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기시 등 예전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박정희 장군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하는 등 그가 정권을 잡도록 도왔다. 그리고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1951년 이래 14년간이나 질질 끌어왔던 한일조약 교섭마저도 단숨에 해결되고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조약 교섭을 담당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하여 조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일본은 ‘영광의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즈음해서는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를 박정희 장군에게 축하금으로 전달하였다. 동시에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을 비롯한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으로 양국과 양국민의 재산 및 권리 등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함’으로써 한국 피해자들이 이후에 할 수 있는 청구권의 요구의 길을 봉쇄해 버렸다.”
----이토 나리히코, 일본헌법 제9조, 행복한 책읽기 간, 2005년, 325-6면
수많은 우리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치하에서 개나 돼지처럼 학대받고 있을 때, 재빨리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합했던 박정희 장군, 공산주의자로서 여순반란 사건의 주동 인물이었다가 재빨리 그의 동지들을 밀고해버리고 기회주의적인 화려한 변신술로 입신출세했던 박정희 장군, 5,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일본인들에게 선거자금을 얻어쓰고, 그 결과, 한일협정마저도 단숨에 해치워 버렸던 박정희 장군, 수많은 부정부패와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학살하고도 끝끝내는 궁정동 안가에서 자기 자신의 부하에게 총살을 당해야만 했던 박정희 장군----, 하지만 박정희 장군이 그토록 소중하게 가꾸어 왔고, 애지중지했던 ‘사대주의’와 ‘부정부패’의 새싹은 아직도 한나라당의 대표인 박근혜에게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는 민족의 반역자이지, 친일파가 아니다. 진정한 친일파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장점을 전혀 배우지 못했고, 오직 사대주의와 부정부패만을 연출해냈다면 이것은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친일은 민족의 애국행위이며, 반일은 민족의 반역행위가 된다. 친일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를 제대로 알고 고귀하고 위대한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정신을 창출해내 줄 수가 있지만, 반일은 우리 한국인들의 온갖 부정부패와 사대주의만을 연출해내고, 단 한 번의 전쟁도 해보지 못한 채, 이성계처럼, 이완용처럼, 박정희처럼, 대한민국의 국토를 일본(또는 미국, 중국)의 식민지로 통째로 가져다가 바치게 된다. 그토록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면서도 친일과 반일의 의미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채, 역사 철학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못쓰게 된 우리 한국인들이여! 그러나, 제발 이제부터는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사랑하거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욱 더 위대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이어령이 사상과 이론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본정신의 본질과 영원한 제국의 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전여옥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는 커녕, 사적인 체험과 독단주의에 사로잡혀서 그토록 무식하고 무자비하게, 또한 그만큼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감정’만을 잔뜩 부풀려 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여옥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민족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또, 그리고, 일본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본문화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제국주의, 민족주의, 일본정신, 일본문화는 ‘일본문화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이며, 따라서 그 주제들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성찰을 끝냈을 때만이, 참다운 ‘일본문화론’의 저자가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란 무엇이고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일본정신이란 무엇이며,일본문화란 무엇인가? 일본은 어떻게 해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또한 어떻게 해서 그 패전의 아픔을 극복하고 오늘날 세계 제2위의 대국이 될 수가 있었던가? 일본문화의 장점과 단점이란 무엇이며,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서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고, 대한제국, 아니, 영원한 제국의 꿈을 펼쳐나갈 것인가?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푸른숲, 1997)라는 책은 무조건적인 원한 맺힌 저주감정의 사악한 폭발이며, 그만큼 사적인 체험과 독단주의에 치우친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녀는 일본인들의 제국주의에서는 팽창주의만을 바라다 보게 되고, 또 그들의 민족주의에서는 집단적인 광기와 인종차별주의만을 바라다 보게 된다. 일본인들의 일본정신은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는 획일주의에 불과하고, 그들의 사회제도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없는 노예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근면은 광기가 되고, 성실은 맹목이 된다. 순결은 불순이 되고, 민족주의는 배타주의가 된다. 또, 그리고, 정의는 불의가 되고, 화는 불화가 된다. 요컨대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에는 단 하나의 장점도 없고, 따라서 일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여옥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고, 엉덩이에서 뿔이 돋아나면 도깨비들이 춤을 추게 된다. 일본인들의 철두철미한 기초생활의 질서와 근검절약의 정신을 향해서 암탉이 울고, 그들의 고귀하고 위대한 장인 정신을 향해서 도깨비들이 춤을 춘다. 언제, 어느 때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그들의 사회성을 향해서 암탉이 울고,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못하는 그들의 도덕성을 향해서 도깨비들이 춤을 춘다. 암탉의 울음은 언제나 불길하고, 도깨비들의 춤은 언제, 어느 때나 음산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암탉의 울음과 도깨비들의 춤은 대한민국이라는 부정부패의 공화국에서 연출되고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맑은 대일본제국에서 연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처럼 철두철미하게 기초생활의 질서를 지키고 있고, 또한 언제, 어느 때나 근검절약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언제, 어느 때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제2위의 대국이 되고 국민소득 30,000달러 이상의 문화선진국이 되었을테지만, 그러나 전여옥은 우리 국민들의 그토록 간절한 소망과 열망에 반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광기와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못 사는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이민을 떠나갔을는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나 곰처럼 단독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이른 바,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집단의 사회성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유를 짓밟지 않고 공동체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도덕과 법을 초월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이지만, 세계가 있고 내가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민족주의(사회성)를 보지 못하고 개인주의만을 바라본 전여옥의 관점은 독단주의 바로 그 자체이며, 우리 한국 사회는 그 독단주의 측면에서,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윤리와 반윤리,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부정부패의 암적인 종양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문학 분야에서, 의학 분야에서, 물리학 분야에서, 화학 분야에서, 그리고 그 모든 부문의 노벨상을 수상한 바가 있지만, 그토록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 보장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부정부패의 화신인 김대중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노벨상을 수상한 바가 없다. 사상과 이론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의 산물이며, 노벨상은 바로 그 사상과 이론의 주체자에게 수여되는 영광의 표지이다. 만일 그렇다면, 과연 일본인들과 우리 한국인들 중에서 어느 민족이 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향유하고 발휘하고 있는 민족이란 말인가? 나는 전여옥이 아닌, 모든 세계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전여옥의 독단주의(개인주의)는 부정부패의 암적인 종양이며, 우리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을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악순환의 관계로 몰아가고 있다. 이제 전여옥은 한국방송공사의 기자도 아니고, 리마주 방송프로덕션의 대표만도 아니고, 제일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변인이다. 한나라당은 부정부패의 원조정당이며, 따라서 수많은 암탉과 엉덩이에 뿔 달린 도깨비들로 득시글거리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광신적인 쇼비니즘이며,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압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에게 그 제국주의적인 발톱을 드러낸 바가 있다. 일본인들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이며, 그 제국주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재앙이자 악몽,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이 세상에서 제거해야 할 암적인 종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없으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존재의 이유와 그 꿈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속에서도 살아 남았고, 이제는 미 제국주의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전여옥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가 지나쳐 ‘일본은 없다’라고 극단적인 독설을 퍼부어 댔지만, 그러나 브레진스키의 말을 빌린다면, 이빨이 없는 독설은 절대로 물어뜯지 못한다. 만일, 일본이 없다면, 또한 가까운 시일내에 정말로 일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식민지배의 사과’나, ‘정신대 여성의 보상 문제’는 거론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고, 또한 역사교과서의 왜곡이나 독도영유권의 주장에 그처럼 전국민이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서 흥분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허깨비나 유령과도 같은 일본을 향해서 역사교과서의 왜곡과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그처럼 온갖 독설을 퍼부어대면서도 그 유령이나 허깨비같은 존재들에게 해마다 수백억 달러씩 무역적자를 보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를 읽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한국은 없다라는 책을 출간하고 전여옥에게 생일선물로 보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설과 험담과 떼거지적인 사고법은 우리 한국인들의 주특기이고, 그러면서도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더욱 더 매달리는 철면피함도 우리 한국인들의 주특기이다. 김윤식, 이기백, 장정일, 이인화, 구효서, 신경숙, 윤대녕 등,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이 일본의 학문을 너무나도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게 글도질----대한민국 국회의원인 전여옥 여사도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것처럼----하는 것도 주특기이며,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 유령과도 같은 정신병자들에게 떼를 쓰는 것도 우리 한국인들의 주특기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외세의 개입 때문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데올로기 때문도 아니고, 오직 우리 한국인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책임전가 유형이고, 어쩔 수 없는 노예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내 탓은 하나도 없고 날이면 날마다 연출되는 사색당쟁과 부정부패마저도 모두가 일본의 탓인 것이다.
“평민적인 혈통이 아직 몸 속에 남아 있는데도 정신적 귀족성에 이르려는 노력을 행하지 않았을 때 항시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를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내가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천민을 꼭 하류계층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내 형제인 피터----그 역시 막 책에서 해방된 천민입니다.” ----입센, 민중의 적, 신원문화사, 2004년
주지하다시피 제국주의자들이 반드시 반인륜적인 파렴치범도 아니고, 인류의 영원한 숙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탐욕과 이익을 위해서 제3세계를 약탈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역사와 전통을 파괴시킨 바가 있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다 본다면, 우리가 순전히 세계11대 교역국가의 문명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의 문명과 문화의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계, 라디오, TV, 비디오, 냉장고, 세탁기, 오디오, 양복, 구두, 자동차, 배, 비행기, 군함, 엘리베이터, 에어콘, 선풍기, 전화, 핸드폰 등의 문명의 이기들을 발명했던 것도 제국주의자들이고, 대서양과 태평양과 열대우림과 그리고 극북지방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 제국주의자들의 개척 정신의 덕분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의 소산이긴 하지만, 제법 세련되고 정교한 현대식 교육제도를 통하여, 절대빈곤 국가에서 이처럼 중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 제국주의자들의 덕택이다. 전세계의 수십 억의 인구가 만성적인 실업과 절대 기아선상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세계화로 인한 이익이 그 손실보다도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제발 무조건적인 떼를 쓰는 유아적인 사고방식----전여옥의 그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반일감정’의 책마저도 출간해주는 일본인들의 그 문화적 포용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을 하루바삐 걷어치우고, 모든 것을 두루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종합적인 시야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교과서의 왜곡, 그것은 순전히 일본인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따로 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면 된다. 단,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왜 우리가 그처럼 치욕적인 굴욕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는가를 반성하고, 그리고, 언젠가, 어느 때는 대한민국도 영원한 제국이 될 수가 있다는 희망찬 미래의 역사도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도 영유권 주장, 그것은 일본인들의 한 여름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으며, 전쟁에 의한 패배가 아니면 결코 빼앗길 염려가 없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그것은 단순히 일본인들이 자기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참배에 불과하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수많은 순국열사와 독립기념관이 따로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무한히 너그럽고 자비로운 ‘大德의 사상’----낙천주의자의 대덕의 사상----을 통하여 ‘新外交禮法’이라는 용어를 전세계인들에게 선사해주고자 한다. ‘반 상징화’란 정치학의 용어는, 보다 약한 정당이 보다 강한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법칙들을 재빨리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다시 상대방에게 되돌리는 것을 말하고, 이 ‘新外交禮法’도 그 뜻은 똑같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 상징화’란 용어는 너무나도 난해하고 조잡한 용어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나의 ‘新外交禮法’이라는 용어로 고쳐 부르는 것이 더욱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新外交禮法’이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상대방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더욱 더 무거운 책임과 도덕성을 거꾸로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전혀 대응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독도의 경비를 강화시키고, 새로운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해상호텔과 공공기관의 사무실을 해상 위에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는 이미 앞에서 얘기한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군사 대국인 만큼, ‘전쟁 포기와 비무장’을 명시한 일본헌법 제9조를 개정할 수 있도록 거꾸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또한 일본의 UN 안전보장회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국력이나 국제사회의 공헌도를 생각해볼 때, 일본은 어차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데, 우리가 그토록 반대를 해서 더욱 더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의 이 ‘新外交禮法’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질질 끌어온 한일 간의 해묵은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대덕의 사상’이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한국인들의 살신성인의 자세와 그 정신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만약 일본이 우리 한국인들의 이러한 ‘대덕의 사상’을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세계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앞으로 동북아 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일본과 한국----남북이 통일된 한국-----, 그리고 중국은 세계 속에서 동북아 시대를 열어가며, 더욱 더 사이좋은 이웃국가들로 통합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의 유럽 연합처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통합도 어렵지 않게 성사될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의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하여 모든 언론과 전국민이 그처럼 흥분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오히려 거꾸로 냉담하다 싶을 정도로 무시해버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외교적인 현안에 있어서 약자는 사소한 일에는 곧잘 핏대를 올려 세울 수가 있지만, 강자는 냉소적이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게 된다. 강자가 화를 내면 약자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한일합병조약과 한미방위조약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과 국교를 단절시킬 수도 있고, 무력으로 독도를 강탈해갈 수도 있다. 이것이 그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냉엄한 현실인 것이다.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懷古主義者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 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反抗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信用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김수영, 「현대식 교량」 전문
김수영의 「현대식 교량」에는 식민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뼛속 깊이 파고드는 참다운 반성과 자기 성찰이 있고, 그 ‘식민지의 곤충’으로서의 죄의식을 씻고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미래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구세대는 대한제국을 돌보지 않고 사색당쟁과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 일본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긴 대역죄인들이며, 신세대는 구세대의 과오에 의하여 아무런 죄 없이 식민잔재와 동족상잔의 비극과 세계 제일의 빈곤국가라는 채무를 짊어진 세대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뼛 속 깊이 파고드는 참다운 반성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대역죄인으로서의 용서를 구하고, 신세대는 구세대의 참다운 반성과 참회의 눈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즉 사랑으로써 감싸주게 된다. 이때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용서도 아니고, 제 핏줄과 제 민족만을 소중히 여기는 근친상간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 사랑은 암울했던 지난 날의 모든 과오를 다 털어버리고, ‘식민지 곤충들’을 인간으로 끌어 올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원한 제국’의 신민으로 끌어올리는 사랑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우리 한국인들은 김수영이 「현대식 교량」을 통해서 이처럼 영원한 제국의 토대를 쌓아 놓은 것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아직도 사색당쟁과 부정부패의 축제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다시 말해서,‘부정부패를 뿌리 뽑자’, ‘일본을 뛰어넘고 미국을 뛰어넘어,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자’는 꿈을 상실하고 무조건적인 반미주의와 반일본주의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에게, 비천하고 더러운 것은 비천하고 더러운 민족에게’라는 영원한 제국의 금과옥조를 이해하지 못한 우리 한국인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부끄러울 정도로 기초생활질서를 안 지키고, 부정부패의 꽃을 피워가는 우리 한국인들은 이 반경환과 김수영과는 달리, 얼마나 더럽고 추한 노예적인 인간들이란 말인가?
고귀한 인물(민족)과 천박한 인물(민족)----, 이 두 사람은 모두가 다같이 식민지의 지식인으로서 태어났고, 자기 자신의 몸 속에서 더럽고도 추한 하층민(노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도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전자는 낙천적이었고, 후자는 염세적이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은 참다운 반성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는 책임의식이 강한 인물이 되었고, 비천하고 천박한 인물은 늘 회의적이고 그 찌푸린 시선 탓으로 모든 것을 남의 탓(제국주의자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책임전가형의 인물이 되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은 지혜, 용기, 성실함으로 학문 연구에 매달리고, 그 사상과 이론을 통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비천하고 천박한 인물은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학문 연구는 커녕, 자칭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가 되어 갔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은 늘 언제나 더욱 더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린 반면, 비천하고 더러운 인물은 니체, 쇼펜하우어, 아인시타인, 뉴턴, 플라톤,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빌 케이츠와도 같은 인물들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채, 늘 제 집만을 지키는 犬公처럼 끊임없이 짖어대며 물어뜯기에 바빴다. 유태인, 일본인,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고, 한국인, 중남미인, 아프리카인들은 더럽고 비천한 민족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이라는 가치를 극단적으로 저하시킨 민족이며, 달리 생각해보면 하루바삐 소멸해버리는 것이 지구촌 정화사업에 더욱 더 어울리는 노예의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이 자기 자신의 평민적 혈통, 또는 노예민족의 혈통을 극복하고 고급문화인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은 오직 ‘愛知’, 즉 지혜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길 밖에는 없다.
나는 「애지를 펴내면서」(애지, 2005년 여름호)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가 있듯이,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이성을 되찾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다. 우선 초 중 고등학교에서부터 철학을 가르치고, 모든 교육 과정을 독서와 글쓰기 중심으로 대체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국어, 영어, 사회, 철학, 도덕, 그리고 자연과학마저도 최고의 논문을 쓸 수 있는 예비단계로써, 독서와 글쓰기 중심의 기초 과정에 충실해야만 하고, 그리고는 대학에서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아인시타인, 뉴턴, 스티븐 호킹처럼, 세계적인 사상과 이론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상과 이론은 세계정복운동이며, 바로 그때에는 우리 한국인들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되고, 일본 땅, 일본 열도에는 대한민국의 정신과 문화가 언제나 늘 푸른 소나무처럼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아무런 강요와 강제를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수입해 갈 수밖에 없는 정신과 문화---. 따라서, 바로 그것만이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피 눈물나게 당한 치욕과 패배의 아픔을 되갚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사상과 이론(지혜)은 돈이고, 명예이고, 권력이며 그 모든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름길은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제도를 연출해내고, 세계적인 대사상가들을 배출해내는 길 밖에는 없다. 하루바삐 제 집만을 지키는 犬公의 수준을 벗어나서, 어서 빨리 교육시장을 개방하고,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이 땅의 명문대학교들마저도 외국의 명문대학교에 팔아버리고,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 한국의 학자들의 실력으로는 세계적인 대사상가들을 배출해내기는커녕, 어떠한 교육개혁도 이루어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학자들은 어떠한 사상과 이론도 정립하지 못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세계적인 석학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적이 없으면 동지도 없고, 동지가 없으면 적도 없다.미국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 한국인들의 강력한 적이며,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더 위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사랑하라, 그러면 우리 한국인들은 그 강력한 적들보다도 더욱 더 위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적의 건강함은 나의 건강함이고, 나의 건강함은 적의 건강함이다. 적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이며, 마치, ‘원수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진정한 영웅이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사상의 힘이란 어떠한 원자폭탄보다도 그 파괴력이 더 크고 그처럼 무서운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보고, 더욱 더 강력한 적 앞에서 무릎을 꿇어보라! 그러면 그대가 얼마나 왜소한 난장이이며, 의지박약한 인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그러면 그대는 그 강력한 적을 찾아내기까지의 오랜 준비과정, 즉, 고통의 지옥훈련과정 속에서 더욱 더 강력한 적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단 칼에 베어버리고, 마치 알렉산더가 크세르크세스 궁전, 즉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워버리고, 페르시아 정복사업의 완성을 기념했던 것처럼, 그대의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사상의 신전을 세워보라! 그러면 그대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움켜쥐고 영원한 제국의 황제가 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낼 능력도 없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
무지몽매한 한국인들과 철학자와의 싸움----,
나는 오직, 고립무원의 단 한 사람의 성실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철학이란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지혜 사랑을 통하여 나의 낙천주의의 세계, 즉, 지상낙원의 세계를 창출해내는 학문을 말한다. 지상낙원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계이며, 보다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모든 철학자들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통하여 새로운 지혜를 창출해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이라는 종이 향상되고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1계: 깊이 있게 배운다, 제2계: 잘 질문한다, 제3계: 神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제4계: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제5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제6계: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제7계: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제8계: 언제나 낙천적이어야 한다,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은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계율이며, 바로 그 계율 속에는 나의 낙천주의 사상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예술가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잘 질문할 줄 알아야 하며, 신의 권위마저도 인정하지 않아야 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보여야만 하며, 그리고 바로 그 사상의 신전이 크고 작은 수많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축성될 수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은 인간이며, 언제, 어느 때나 낙천적인 인간이다.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섰던 인간이며,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통하여 방안 가득히 ‘부(지혜)의 성실함’을 쌓아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의 도덕 철학을 창출해내고 그 계율을 통하여 낙천주의 사상의 신전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예술가, 수많은 신들의 권위마저도 부정하고 無神論의 정점에서, 새로운 미래형의 인간으로서 황금옥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예술가, 그는 영원한 제국의 주인공이며 불멸의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예술가는 그의 충신들인 철학자들을 수없이 거느리고, 그 신하들의 호위 속에서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새로운 가치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형의 인간들을 창출해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철학예술가의 근본신조는 철학이란 철학예술가를 위해서 새로운 철학예술로 옷을 갈아 입어야만 하며, 철학이란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발 디딤판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더욱 더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철학예술은 그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 속에다가 언제나 늘 푸른 소나무처럼 그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자와 철학예술가, 그들은 모두가 다같은 인간이지만, ‘부의 성실함’의 척도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과 계급으로 나뉘어 진다. 물질자본, 지적자본, 상징자본, 종교자본 등, 우리 인간들의 부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고, 그리고 자본의 유무에 따라서, 마치, 피라미드의 구조처럼 수직적인 서열제도를 구축하게 된다. 성실함의 척도는 부의 척도이며, 부의 척도는 성실함의 척도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만인평등’이라는 폭력적인 잣대로 모든 수직적인 서열제도를 부정하지만,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의 사회, 즉, 귀족사회는 그가 가진 능력에 따라서 모든 특전과 특권을 배분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거짓 환영이며, 민주주의가 사실 그대로 구현된다면----절대로 그럴 리가 없겠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농민과 상인, 지식인과 문맹인, 건강한 자와 불구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성자와 바보의 차이가 없어지고, 그 문화적인 무질서만이 자라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치명적인 독약이며, 생존경쟁이라는 유기체의 본능마저도 부인하는 반생물학적인 정치체제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사색인의 십계명」 제1장에서,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철학적인 話頭를 설명한 바가 있는 데, 지혜, 용기, 성실이 바로 그것이다. 지혜, 용기, 성실은 철학예술가로서의 학문연구의 전제조건이며, ‘사색인의 십계명’은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도덕적(교육적)인 계율이다. 지혜는 그의 뛰어난 두뇌의 산물이며, 그는 그 지혜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상낙원을 창조하게 된다. 나의 낙천주의 사상은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전복시킨 것이며, 나는 나의 모든 것, 즉, 돈, 명예, 시간, 그리고 온갖 욕망을 다 걸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을 싸워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내가 오늘날 철학예술가로 서기까지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김현이란 요상한 괴물을 비판한 이후, 모든 발표지면을 다 빼앗기고,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 악전고투만을 해왔다. 하염없이 가난의 밑바닥으로 추락해가면서도 더욱 더 황홀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부(지혜)의 성실함, 모든 인간 관계가 파탄을 맞이하게 되고, 외롭고 쓸쓸함에 사로잡혀서 그 고독을 더욱 더 크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부의 성실함, 차디 찬 냉소와 멸시 속에서 은둔을 강요받고 그때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 진검 승부의 칼을 들이밀고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보여야만 했던 부의 성실함, 때때로 좌절과 실망의 손아귀에 발목을 잡혀버리고, 쓰디 쓴 인내와 함께, 그만큼의 굴욕의 울음을 울고 싶었던 부의 성실함, 선악을 넘어서서 그토록 끔찍하고 잔인한 영웅의 역사를 탐구하고 자기 스스로 도덕적(교육적) 계율을 명명하고 사상의 신전을 건축했던 부의 성실함,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시킬 수 있을만큼 최고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愛知를 창간하고 그 잡지를 최고급의 잡지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부의 성실함, 인간 전체를 보고 새로운 미래의 인간을 역설하면서도 그토록 지지리도 못나고 가난한 조국에게 발목이 잡히고,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조국 때문에 울어야만 했던 부의 성실함, 더없이 가난하고 비천한 노예계급의 출신이면서도 대중들의 만인평등사상과 민주주의를 그토록 역겨워하고 한 바구니의 달콤한 빵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높이 끌어올리면서 끝끝내는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을 정립했던 부의 성실함----. 하지만 나는 이 악전고투를 통해서 정신의 희말라야를 극복할 수가 있었고, 나의 부의 성실함은 오늘도 고산영봉의 만년설처럼 너무나도 눈 부시고 영롱하게 빛난다. 나는 피 눈물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황홀했고, 그리고 그 황홀함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아니, 나는 일찍부터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하고 새로운 지상낙원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태어났던 만큼, 나의 용기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감행할 수 있을 만큼 천하무적의 그것으로 단련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대범하고 간이 크고 스스로 발광하는 라듐처럼, 어떠한 사건의 본질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을 지녔고, 따라서 나는 나의 승리를 스스로 보장하고 장담할 수가 있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사상을 지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내가 왜 행복하지 않은 인간일 수가 있겠으며, 또한 자기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도덕철학을 정립해냈던 내가 왜 성실하지 않은 인간일 수가 있겠는가? 지혜, 용기, 성실은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화두이며, 분신이고, 또, 그리고,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삼위일체이다. 지혜는 용기이고 성실이며, 용기는 성실이고 지혜이다. 따라서 나의 성실함은 지혜이며 용기인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 세 개의 화두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매우 다르게, ‘愛知’라는 단 하나의 화두에다가 각인시켜 두었던 것이다. 반경환, 그로 인하여 ‘愛知’는 얼마나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졌으며, 그 도덕철학(‘사색인의 십계명’)은 또한 얼마나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졌단 말인가? 이제 철학은 철학예술에게, 철학자는 철학예술가에게 그 지위를 내주게 되어 있고, 이것이 낙천주의 사상가로서의 나의 명령인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도 명명해본 적이 없는 철학예술가이며, 모든 철학자들을 나의 신하로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성실한 인간이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없이 그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명명할 권리를 지녔다. 나는 가치의 창조자이며 명명자이고, 또한 입법자이며 전제군주이다. 나의 사상을 배우고 싶지 않은 사람, 나의 도덕철학을 배우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나의 사상의 신전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더욱 더 젊어지지만, 그대들은 타인의 사상과 이론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노인병원의 기생충들처럼 더욱 더 나약하고 왜소해져 간다. 좀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 좀더 대범하고 한없이 관용적이며 너그러운 인간,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쌓은 명예와 명성을 언제, 어느 때나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수 있는 인간, 가난과 궁핍과 병 속에서도 그 고귀하고 위대한 품위를 잃지 않고, 언제, 어느 때나 행복했던 인간, 좀더 강력한 적을 사랑하고 좀더 강력한 적의 탄생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예법이 있고, 또, 그리고, 필요하다면 만인의 의사에 반하여 수많은 어리석음들을 단 칼에 베어버릴 수가 있는 인간, 또,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의 시체들로 바벨탑을 쌓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인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 모든 욕망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인간,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행복했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면서도 행복했던 인간, 天命을 알 수 있는 나이가 지났는데도 단 한 번의 외국여행도 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대예술가와 함께 정담을 나눌 수가 있는 인간----. 그의 행복은 어느 누구의 행복보다도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행복이지만, 그러나 우매한 대중들이나 애늙은이들이 걸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크고 헐렁하기만 한 행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자그만 들쥐가 코끼리옷을 빼앗아 입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의 신전은 대한민국에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와 젖과 꿀이 넘쳐 흐르고, 쌀과 보리와 온갖 과일들이 넘쳐나고, 날이면 날마다 스포츠와 섹스와 공부와 노동과 사냥과 낚시와 그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을만큼 자유롭고, 그리고 일년내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이 모든 건강과 자유와 행복은 그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 즉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전리품인 것이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도 없고, 평화가 없으면 전쟁도 없다. 요컨대 평화는 전쟁 뒤의 전리품인 것이며, 전리품(평화)이 없으면 어떤 전쟁도 일어날 수가 없다. 미리부터 말해두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니, 내가 죽어도 나의 사상의 신전에서는 그 어떤 싸움도 일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사상의 신전의 전제군주이며, 나의 사상은 나의 유한성까지 뛰어 넘어서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더 강력한 적들을 찾아다녔고, 그 성실함으로 인하여 나의 사상의 신전을 건축할 수가 있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머, 아이스퀼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제논, 제우스, 헤라클레스, 알렉산더, 나폴레옹, 부처, 예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반 고호, 폴 고갱은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강력한 적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도덕철학의 창시자이자,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의 주인공들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의 삼박자를 다 갖춘 인간들이었고,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삶의 의지이고, 이 삶의 의지가 장애를 만나게 되면 그 주체자는 평상시보다 수천 배나 지적인 민감성을 띠게 되고, 그리고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과 고산준령의 험악한 산악지대, 그리고 사나운 비 바람과 그 모든 것마저도 얼어붙을 듯한 추위 등은 최악의 생존 조건이며, 최악의 생존 조건이란 인간의 삶의 의지가 장애를 만난 것을 뜻한다. 때때로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 그 최악의 생존조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멸해간 인간이나 민족을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나 민족들은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되어갔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난관들과 싸우면서 더욱 더 날카롭고 예리해진 지적인 민감성, 끝끝내 자기 자신의 한 몸을 희생----보트피플들의 人身供養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시켜서라도 다른 동료들을 구원해내려는 살신성인의 희생정신, 상호간의 신뢰와 애정의 표시로써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집단의식, 최악의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빠른 합의와 일치단결의 필요성,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무서운 성실성 등----, 이 모든 것들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백야 현상과 무섭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아 남으며 오늘날의 유럽을 정복했던 바이킹족들, 대영제국의 품안에서 쫓겨나 사나운 인디언들과 들짐승들과 싸우며 신대륙을 개척했던 청교도들, 자기 자신의 조국을 잃고 머나 먼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며 불과 600만 명의 인구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내의 유태인들, 수없이 크고 작은 지진들과 A급 태풍이 열 다섯 번씩이나 지나가는 최악의 생존조건과 싸우며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했던 일본인들----, 그들의 선생은 최악의 생존조건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황금보다도 더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악의 생존조건은 황금종족의 모태이며, 그 황금종족은 더없이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전쟁은 문명과 문화의 아버지이며,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은 그토록 처절하고 끔찍한 전쟁이 끝난 뒤에,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을 불태우며 페르시아 정복사업을 기념했던 것처럼, 더없이 아늑하고 달콤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평화란 피 비린내 나는 전쟁 뒤의 휴식이며, 전쟁이란 그 무사안일과 나태함을 떨쳐버리고 힘찬 일터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조국과 동지를 사랑하고, 조국과 동지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단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바칠 수가 있지만, 눈 앞의 적과 미래의 잠정적인 적을 물리치는 일이라면 그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마저도 마다 하지를 않는다. 이와는 정반대방향에서, 학교, 병원, 회사, 정당, 군대 등도 생존경쟁의 전쟁터이며, 그곳에서의 패배는 황금종족의 멤버로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위해, 폭력, 착취, 질투가 제거된 사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으며, 또한 희생, 우정, 자선, 사랑이 제거된 사회 역시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생존조건은 더럽고 추한 민족의 모태이며, 최선의 생존조건 속에서 태어난 민족은 무사안일과 평화만을 사랑하고 백전백패의 수모만을 겪게된다. 따라서 평화만을 사랑하고 평화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이제 더럽고 추한 민족은 제 삶의 터전을 다 빼앗기고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이민족들의 노예가 되어서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게 된다. 우리 한국인들은 더럽고 추한 민족이며, 단 한 번도 외세의 입김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노예의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일본인들은 전쟁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화를 얻을 수가 있었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평화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화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의복에 염색되어 있는 가문(家紋)의 무늬를 보고 곧 그 사람의 가계를, 즉 그 명예와 권위의 역사를 읽고, ‘한텐’을 입은 장인을 보고 그의 기술과 책임 의식을, 또 상점의 ‘노렌’을 보고 그 가게의 신용도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가문도 한텐도 집단의 추상적인 명예, 신용, 책임 등을 하나의 시각적 기호로 나타낸 ‘축소’의 한 양식이다. 관념이나 조직 등을 하나의 마이크로로 응축한 이 축소지향이 다름 아닌 일본의 역사와 사회 조직을 지배해온 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119면
“일본인은 세계에서도 깨끗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온천장이 많고 습기가 프랑스의 2배나 되기 때문에 일본인이 목욕을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무라이(武士)가 항상 칼을 차고 있듯이 일본의 여인들은 또 빗자루를 잠시도 떼놓지 않는다. 쓸고 씻고 털고 닦는 일본의 생활은 먼지와의 전쟁이다.
일본인은 필요 없는 것과 함께 있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가지런하지 않는 것이라든가, 그냥 남아 뒹구는 것을 보면 견디지 못한다. 티끌만 한 먼지가 있어도, 심지어 보이지 않는 구석에 먼지가 묻어 있어도 혀로 핥듯이 털어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먼지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이다.”
----앞의 책, 149-150면
라는 예문들에서처럼, 자기 자신과 가문과 회사와 가게와 그리고 상점의 명예를 걸고,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에,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가 있었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예컨대,
구두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전문
라는 「그 사람의 손을 보면」의 반대방향에서, 자기 자신과 조국의 불명예를걸고 좀도둑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부정부패의 공화국을 연출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대사상가들과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역사를 다 추적해보았지만,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장점----일본인들의 민족주의의 한계 내에서----은 너무나도 많고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오늘날 일본의 치명적인 약점은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그에 걸맞는 문화적인 영웅이 없고, 또, 그리고, 세계경영에 대한 미래의 전망과 그 전략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사상적으로 매우 미성숙하고,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뿌리는 너무나도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역사 전체를 통 털어서 나처럼 세련되고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테지만, 그러나 그들의 무서울 정도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다. 진정으로 일본이 세계 속의 일본이 되려면, 마르크스, 프로이트, 베르그송, 프란츠 카프카, 아인시타인, 헨리 키신저, 스티븐 스필버그, 오펜 하이머 등과도 같은 세계적인 대석학들을 길러내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두 번 다시 되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국력은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소련과의 냉전의 구도 속에서 하나의 우연처럼 움켜진 행운에 불과하며, 따라서, 전승국가로서 그처럼 관용적이고 너그러웠던 대제국(미국)을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하룻강아지의 경거망동에 불과하며, 그 경거망동은 소위 이웃국가들인 한국과 중국과의 적대감만을 증폭시키게 된다. 과연 일본의 영원한 제국의 꿈은 우리 한국과 중국을 더욱 더 크게 끌어안고 ‘대동아연방’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아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한국과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일본만의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인가? 전자는 일본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실현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우리 한국과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 속에서 절대로 실현 가능하지가 않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대로 미국은 유럽의 일부분이며 유럽인들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가 있지만, 얼굴이 누런 일본인과는 그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결코 한솥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명심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는 극단적인 배타주의----탈아시아주의와 이민족들에 대한 배타주의----에 기반을 둔 특수한 예에 속하고, 그처럼 편협하고 속좁은 사상으로는 영원한 제국은 커녕, ‘세계화 시대’의 낙오자가 되기가 십상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장점은 우연이나 행운을 바라기보다는 무서운 성실성에 기초를 둔 장인들을 탄생시켰고, 다른 한편, 한 푼을 모으고 두 푼을 모아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탄생시켰다. 일본인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상호간의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하고, 그리고 ‘먼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만큼 청결한 민족이다. 성실한 인간은 정직한 인간이며, 성실한 인간은 절대로 좀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성실한 인간은 ‘국물 한 가지와 나물 한 가지’로 만족하는 인간이며, 성실한 인간은 언제, 어느 때나 ‘먼지와의 전쟁’을 하고 있을 만큼 청결한----기초생활질서를 잘 지키는----인간이다. 그리고, 또, 성실한 인간은
‘서양에서는 육체적 용기와 도덕적 용기를 구분하였는데,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이라면 어릴 적부터 ‘대용(大勇)’과 ‘필부지용(匹夫之勇)’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이가 없었다.용기와 인내, 당참과 느긋함, 그리고 용맹스러움 같은 심성은 소년 무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으며, 실제적인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 어릴 적부터 훈련되고 지침이 된, 이를테면 가장 인기 있는 덕성이었다. 소년 무사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유아시절부터 전쟁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다. 혹시 힘든 일로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그 정도도 못 참다니, 그러다가 전쟁에 나가 팔이라도 부러지면 어쩔테냐? 할복하라는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어쩔 셈이야?”라고 꾸지람을 들으며 용기를 키워나갔다.
(.....)
또한 무사의 어린 자식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곳까지 심부름을 간다든지, 엄동설한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로 서당까지 걸어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두 번, 덴만구(天滿宮--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 축제가 있는 날이면 소년 몇 명이 모여 차례로 책을 낭독하며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사형장이나 무덤가, 흉가처럼 으스스하고 살벌한 장소에 가는 것도 소년들이 즐겨하던 놀이였다. 참수형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고 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밤에 혼자 형장에 가서 잘린 목에 흔적을 남기고 돌아오게 하기도 했다.”
----니토베 이나조, 사무라이, 40-41면
라는 니토베 이나조의 말처럼, 사무라이식의 용기와 인내로 무장한 인간이며, 재앙에 익숙하고 재앙을 다스릴 줄 아는 인간이다. 자원빈국인 일본에서의 사치와 낭비는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하고, 수없이 되풀이 되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의 부실공사는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한다. 또한 영원한 제국의 길로 들어선 일본 사회에서의 부정부패 역시도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하고, 저 천박한 전여옥이, 예컨대,
“인간은 저항하고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체이다. 성수대교 사건에서 울부짖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약 고베지진을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성수대교 붕괴는 인재이고, 지진은 천재이니까 우리도 일본인처럼 얌전히 숙명처럼 받아들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수대교 사건 때 정부를 맹공격하고 비난했듯이 천재를 내린 하늘에 대해 저항하고 항의하고 원망을 퍼부었을 것이다. 살려내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일본의 화산지대인 운젠후겐다케에서 화산이 폭발해 약 50명 가까운 이들이 숨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나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숨진 이들의 시체가 모두 한 중학교 강당에 안치되었다. 하얀 보자기가 덮인 관들이 50구 정도 나란히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완벽한 침묵이었다. 시체가 담긴 관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관을 붙잡고 통곡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저 관 앞에서 슬픔을 참고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듯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물론 일본의 문화는 다른 사람 앞에서 크게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을 품위 없는 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죽음 앞에서 그 슬픔조차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억눌러야만 하는 문화와 그 문화에 완전히 함몰된 일본인들에게 나는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전여옥, 「저항하지 말자」, 일본은 없다 41면
라고,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를 몰이해했던 것처럼, 그 자연의 재앙 앞에서 마냥 주저 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것 역시도 고귀하고 굳센 ‘사무라이 정신’의 공멸을 뜻한다. 따라서 사무라이식의 용기와 인내로 무장한 인간은 할복자살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울어서는 안 되며, 그 어떠한 천재지변마저도 두 눈을 부릅뜨고 단 칼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온몸이 갈갈이 찢겨지고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인은 어디까지나 사무라이 민족이고, 오히려, 거꾸로, 두 번 다시 기사회생할 수 없는 패배를 기록하게 되더라도 그 처절한 패배를 완성함으로써, 마침내,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내고 마는 것이 오늘날의 일본인인 것이다.
성실한 민족은 재앙을 다스리는 민족이며, 성실하지 못한 민족은 재앙을 다스리지 못하는 민족이다. 전자는 백전백승의 민족이며, 후자는 백전백패의 민족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더럽고 추한 민족이며, 이 세계에서 가장 성실하지 못한 민족이고, 그 어떠한 재난(외국)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의 학교, 군대, 병원, 회사, 국회, 정부, 법원 등은 부정부패의 잔치판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고, 날이면 날마다 ‘가음난무’로 그들의 건강과 국력을 탕진하게 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대학원에서부터 국회까지, 그리고 모든 장관들과 대통령까지 속속들이 썩어버린 인간들 뿐이고, 한국정신과 한국문화는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기는 커녕, 좀도둑들의 양성소로 그 명성을 떨쳐가고 있다. 부실공사, 대형아파트, 대저택, 산해진미의 진수성찬, 600만 명의 신용불량자, 불법복제와 표절과 해적판, 쓰레기 더미와 거대한 공룡같은 서울공화국----.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이 한국정신과 한국문화의 본질이며, 이 한국정신과 한국문화가 뿌리깊게 번성하고 있는 한,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처럼, 영원한 제국으로 향한 ‘사기’를 치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한탕주의에 물든 좀도둑들이나 탄생시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의 이 말을 확인해보려면 속칭 평창동의 대저택가를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대저택들의 웅장하고 화려함에 반하여, 골목,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꾀하다가, 끝끝내는 외국으로 도망을 가는 대재벌들의 행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성실하지 않은 민족이며, 눈 앞의 이익만을 쫓아가고 공동체 사회의 이익은 전혀 돌보지 않는 민족이다. 대영제국도 로마와 바이킹족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오늘날의 유럽도 로마와 바이킹족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도,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대동아전쟁에의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날도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보호국)에 지나지 않는다. ‘미일안보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에 지나지 않는다----도 외세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가 兵家의 常事라면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역사는 그처럼 대수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요즈음의 한일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떼를 쓰고 있고, 마치 승자처럼, 일본의 역사를 제 멋대로 쓰려고 하는 서툰 짓을 되풀이 자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은 미래의 일본이며 나날이 새로워지지만,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패배주의로 물들어 있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온화한 기후가 우리 한국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우리 대한민국을 방풍림처럼 감싸고 있는 일본은 그들의 최악의 생존조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일본인들은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고 재앙에 익숙한 민족이고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때나 불성실하고 재앙 앞에서 울고만 있는 민족이다. 이처럼 어리석고 못 낫고 자그만 재앙 앞에서도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오늘에 살고 오늘에 죽는 우리 한국인들(하루살이들)이여! 그대들은 언제, 어느 때, 그 울음을 뚝 그치고 모든 인간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우리 한국인들이여, 지혜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만일, 나의 말대로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모든 인류가 우러러 보는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최악의 생존조건(기후, 풍토, 물, 토지 등)이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을 탄생시켰다면, 이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으로 끌어올린 자들도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유태인, 노르웨이인, 게르만인, 일본인, 영국인 등은 전자의 민족에 속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니체, 쇼펜하우어, 알렉산더 대왕은 후자의 인간에 해당된다. 최악의 생존조건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비옥한 토양이며, ‘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으로 몰아넣는 방법은 문화적 영웅 탄생의 제일급의 교수법에 해당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것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제국의 꿈을 부여하고, 그 꿈을 위하여 오직 단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래, 너는 정말로 훌륭한 인간이야. 이 세상에서 너만이 영원한 제국을 건설해낼 수가 있어”라고, 끊임없이 자기 확신과 그 최면요법으로 그의 의지에 기름을 부어주고, 다른 한편, 그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실패만을 되풀이 하고 있을 때에는, “이런 바보 같으니라구, 너는 훌륭한 인간이기는 커녕,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자격조차도 없어”라고, 자기 자신을 더욱 더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고, 그리고, 마침내, 끝끝내는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만든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년경--기원전 480년경)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어두운 사람’, ‘수수께끼 같은 사람’, 혹은 ‘숨어 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에페소스를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그리고 에페소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자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껍질만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르다. 또한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고, 어제의 나무는 오늘의 나무가 아니다. 그는 이처럼 ‘변화와 운동’을 이 세상의 근본법칙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역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 곳에서 바라보면 바다는 넓고 푸르지만, 그러나 그 바다에는 더러운 물과 맑은 물들 간의 싸움이 있고, 그 바다 밑에는 수많은 천적들과 천적들간의 숙명적인 싸움이 있다. 하지만 그 투쟁은 단지 무질서의 그것이 아니라, 그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도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고, 오늘날의 현대 문명사회도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이밖에도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愛知’를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이었고, 그는 명실공히 최초의 철학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0년경--기원전 450년경)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조국을 빼앗기고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다가 엘레아에 정착한 포카이아인의 후손이었고, 그는 엘레아의 법을 만든 정치인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학문을 위해서 정치인의 길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철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변화와 운동’의 논리적 가능성까지도 부정한 유물론자이었고, 그 ‘만유불변의 법칙’ 속에다가 자기 자신의 신전을 지은 철학자이기도 했다. 있는 것은 영원히 있고, 없는 것은 영원히 없다. 물도 있는 것이고, 불도 있는 것이고, 사람도 있는 것이고, 동식물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無에서 有가 생겨날 수도 없고, 有에서 無로 소멸되어 갈 수도 없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사물은 형체만 바뀔 뿐, 그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최초의 에너지 보존법칙의 주창자이며,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의 스승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은 그의 ‘역설’을 통하여, 토끼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은 물론, 射手가 쏜 화살마저도 오늘날의 정지화면으로 바라보면 매순간 정지해 있기 때문에, ‘변화와 운동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바가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운동의 법칙’을 통째로 부정하고, 그 만유불변의 법칙 속에다가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지은 철학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460년경--기원전 370년경)는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태어났고, 그는 매우 부잣집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처분해서 그 돈으로 세계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여행을 다녔고, 그 여행을 통하여 탈레스의 천문학, 동양의 자연철학, 이집트의 기하학, 피타고라스 학파와 엘레아 학파의 사상, 그리고 그밖의 예언술과 점성술까지도 배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달리, 일상생활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단 하나의 목표를 부여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혹하게 채찍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요컨대 그는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끊임없이 위험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정원 한 구석에 굴을 파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눈을 피해 그곳에 숨기를 좋아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만의 상상의 공간을 갖기 위해, 오랫동안 사막에서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공동묘지의 무덤 사이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서정욱, 만화서양철학사 1, 자음과 모음, 2003년, 235면에서 재인용)
니체는 그의 책 서광(도서출판 청하)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비범하고 선발되고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역사의 전 과정 속에서 언제나 나쁘고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느껴지고,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느꼈다는 것에 의하여 얼마나 괴로워했는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풍습의 윤리의 지배 하에서는 어떤 종류의 독창성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꼈다”라고 말한 바가 있듯이, 진정으로 성실한 사람은 풍습의 윤리에 반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는 그 성실함의 결과, 최초의 원자론자가 될 수가 있었고, 그의 원자론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원자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며, 그것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이 먼지와도 같은 입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별(물질)들이 생성되고, 그 원자들의 흩어짐에 의하여 수없이 많은 별들이 소멸되어간다. 원자는 “변하지 않고 단단하며, 나누어질 수 없는 영원한 하나”라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영원한 하나’와도 같고, 다른 한편, 그 원자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서 다양한 별들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변화와 운동의 법칙)과도 같다. 이처럼 데모크리토스 역시도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하고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원자론)을 지은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이라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왕위를 버리고, 파르메니데스가 정치인의 길을 버리고, 그리고 데모크리토스가 그의 전재산에 대한 소유 욕망을 버렸듯이, 자기 자신의 최선의 생존조건을 헌신짝처럼내다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지 자신의 최선의 생존조건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수 있는 사람은 호머가 그의 서사시를 완성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의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이 그의 교향곡을 완성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이며, 모든 인류의 문화적 영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았던 출신성분에 의한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그러나 그들의 은둔의 삶은 얼마나 성실했고,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삶이란 말인가? 그들은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행복)을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렸던 것이며, 오직 이 세상의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꼈던 사람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운동’이 이 세상의 근본법칙임을 밝혀내었고, 파르메니데스는 만유불변(萬有不變)의 법칙을,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상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원자임을 밝혀내게 되었던 것이다. 부의 척도도 성실함의 척도이며, 행복의 척도도 성실함의 척도이다. 성실함은 거꾸로 그 주체자에게 돈과 명예와 권력을 안겨다가 주고, 또한 성실함은 그가 비록 실패만을 되풀이 하여 알거지가 되었을지라도 성공보다도 더욱 더 빛나는 자긍심과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가 주게 된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김수영 시인 이후로, 일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또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 유용주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첫 시집, 가장 가벼운 짐은 그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사명감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전문
이라고, 노래한 바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고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일은 우리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생존수단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해 나가는 삶의 수단이다. 노동자나 농민들처럼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본가들이나 지식인들처럼 지적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계급과 신분의 위계질서와 그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일 자체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돈 자체를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인간 관계와 도덕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된다. 유용주는 이러한 사실들을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일용잡급의 천역을 더없이 거룩한 순교자의 성역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를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움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나갈 것인데
폼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파는 데 자신 없는 사람이
포옴을 먼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게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유용주는 그 무엇보다도 “일은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하고, 그렇지만 일은 “정당하게 품을 팔며” “땀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정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용주가 역설하고 있는 품은 그 무엇보다도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첫째는 어떤 일에 드는 힘 또는 수고를 말하고, 둘째는 그 일에 대한 힘 또는 수고가 금전적인 댓가만이 아닌, 그 노동하는 사람의 인품(人品)을 파는 것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윤리설의 주창자로서 거짓말(사기)이 나쁜 것은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가 있고, 칸트는 법칙론적 윤리설의 주창자로서 거짓말(사기)이 나쁜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하지만 유용주는 그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이전에, 아니, 그것을 뛰어 넘어서서, 일 자체의 사랑을 역설하고, 돈 자체를 사랑하는 모든 기만적인 태도를 매도하게 된다. 포움(form)은 하나의 형식, 혹은 외양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일의 중요성이나 그 본질과는 동떨어진 사기꾼의 태도에 불과하다. 품(品)을 파는 사람은 지혜, 용기, 성실함으로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그 일의 목적에 비추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폼을 파는 사람은 주체성의 확립이나 일의 목적은 커녕, 돈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타인들의 눈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도 기만을 하게 된다. 일은 어느 특정 계급의 전유물만도 아니며, 그것의 과실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일은 계층과 계급, 남녀노소, 출신성분,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생존수단이며, 그것의 과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같이 달콤하고, 또 달콤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싫어하는 데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일의 성격과 그 산물(소득, 즉 경제적 이익) 때문에,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크고 작은 분쟁들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용주의 일 자체의 사랑은 그의 홀로서기를 통한 존재론적 모험의 결과이다. 이때의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은 “정직하게 품을 팔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간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라는 시구처럼, “우리 主 容珠”를 “그리스도”의 위치로 끌어 올리겠다는 것이 된다. 이미, 앞에서 전제한 바가 있듯이, ‘역도인과성의 세계’, 즉 미래의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가 그의 목표가 되고, 그 목표가 유용주의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이유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품을 팔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가겠다는 것은 이처럼 ‘주체성의 확립’(내재성의 확립)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와 동시에, “하루일당 사만 오천원에” 자기 자신의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고” 이 세상의 공사판을 “20년 가까이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점에서,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 즉, 외재성의 확립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홀로서기는 이 내재성과 외재성, 즉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과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이 동시다발적이면서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론적 모험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험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들의 생사의 문제가 걸린 것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모험을 통해서만이 청동보다도 더욱 더 강하고 튼튼한 영생불사의 인간이 될 수가 있다. 그 영생불사의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유혹, 질투, 시기, 장애, 불안, 공포 등과 맞서서----의 대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을 완성해낸 신성모독적인 싸움----‘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의 싸움이라는 점에서----의 대가이다. 이 안과 밖의 운동이 홀로서기이며, 그 존재론적 모험이다. 유용주는 그가 인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 자체의 사랑이 육화되어 있는 시인이며, 이 시대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목수가 목수일 때는 돈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목수가 목수일 때는 모든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그 땀방울의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까지 튼튼한 ‘사랑의 집’ 한 채를 짓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다. 하지만 그가 온몸으로 짓는 집 한 채, 혹은 시 한 편은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다같이 유용한 시-- 집이 된다. 어느 누가 그 시를 읽고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고, 또 그 지치고 힘든 몸을 편안히 뉘여도 상관이 없다. 유용주의 가장 가벼운 짐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무거운 짐’이며,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목수의 금언이 오늘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반경환, 「넓어지는 지평선」(행복의 깊이 1, 도서출판 애지 간) 에서
그렇다면 근면이 광기가 되고 성실함이 맹목이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반하여, 어떻게 성실함을 연주하고, 또한 어떻게 그 성실함의 열매를 수확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성실한 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할 수 있는 삶의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분명한 목표를 구상하는 것은 지혜가 담당을 해야 하고, 그 목표를 향한 중단없는 정진은 용기가 담당을 해야 한다. 지혜와 용기를 가진 자는 목표와 수단을 얻은 자를 말하고, 이제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두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하기만 하면 된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 그 싸움을 연출해낼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이며, 만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해나갔던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고독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불행을 모르고, 또한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향유해나갔던 사람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좌절하거나 우회하지 않는 사람이며, 또한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부모형제, 처와 자식,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와도 같은 사소한 인간 관계를 위하여, 그들의 분명한 목표를 탈색시켜버린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꿈(목표)의 인간이 되어야 하지, 타인들의 꿈(목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등은 자기 자신의 꿈의 인간들이며, 그러나 그들의 성실함의 열매들----‘변화와 운동의 법칙’, ‘萬有不變의 법칙’, ‘원자론’----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체 인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더욱 더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빛을 발하고 있단 말인가? 대부분이 진정으로 성실했던 사람들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주인공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이 현실적으로 패배(실패)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고독 속에서, 그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 이 세상을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며, 궁극적으로는 전체 인류의 문맹(어리석음)과 절대 빈곤으로부터 모든 인간들을 구원해냈던 문화적 영웅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도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의 사회성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시킨 자들에 불과하고,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도덕과 관습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개인의 자유(독창성과 천재성)를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의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버리고, 언제, 어느 때나 전체의 이익만을 돌보는 문화적 영웅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실함은 문화적 영웅의 모태이며, 게으름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사기꾼들)의 모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기꾼들의 양성소이며, 그들이 강조하는 근면은 광기가 되고, 또한 그들이 강조하는 성실함은 맹목이 된다. 성실한 자의 목표는 하늘의 태양이며, 그의 약속은 늘 푸른 소나무이다. 게으른 자(사기꾼)의 목표는 언제, 어느 때나 밤하늘의 먹구름이며, 그의 약속은 썩은 고사목(枯死木)의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여!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근면이 광기가 되고, 성실이 맹목이 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가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면
십년 면벽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은 무엇이라 할까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
----천양희, 「알피니스트」 전문
천양희의 「그 사람의 손을 보면」은 ‘성자가 된 청소부’의 삶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구두를 닦는 사람’은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나게 만들고, ‘창문을 닦는 사람’은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나게 만든다. 또, 그리고, ‘청소하는 사람’은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나게 만들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나게 만든다. 청소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청소부가 된다. 다시 말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아름다운 천국을 희원하는 천양희의 예술가적 자질이 그 기적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닦고 또 닦는다는 것의 기적, 빛을 내고 또 빛을 낸다는 것의 기적, 나는 이 기적의 모태는 인간의 이상도 아니고, 예술가적인 자질도 아니고, 무서운 성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서운 성실성이 없는 이상은 맹목적이고, 또 그것이 없는 예술가의 재능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무서운 성실성은 금욕주의에 맞닿아 있고, 금욕주의는 그 어떠한 ‘정신의 암벽’도 극복할 수 있는 ‘알피니스트’, 즉, 성자의 출현의 모태가 되어준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법정에서 형이상학을 공개처형하고 비판철학의 시대를 활짝 열었던 칸트, 칸트의 흄적인 현상론을 비판하고 정신형상학을 구축했던 헤겔, 헤겔의 절대 정신을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역설했던 마르크스, 헤겔의 낙천주의를 비판하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마저도 부정하면서 염세주의를 옹호했던 쇼펜하우어, 칸트의 비판철학을 더욱 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밀고 나가면서 그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켰던 니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최선의 생존조건을 마다하고 최악의 생존 조건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사람들이며, 그 ‘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그 무서운 성실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들을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문화적 영웅들이었던 것이다. 종교는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며,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 즉, 미래의 인간에 대한 삶의 기록들로 집대성되어 있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부처, 예수, 마호메트, 시바, 제우스는 모두가 미래의 인간들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했던 철학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들의 영원한 제국(사상의 신전)을 위하여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했고, 그 결과, 人神으로서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철학예술가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상의 신전을 건축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서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펼치는 사람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날개를 돋아나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인간들, 자기 자신의 목숨을 하루살이나 파리처럼 가볍게 여기면서도 더욱 더 깊이 있게 사랑하는 대담한 뱃짱과 용기와 인내심의 영웅들, 하늘이 낮아지고 별들이 파아란 바다에서 몸을 씻고, 그리고, 마침내 사나운 파도마저도 잠들게 하는 영웅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어렵고 힘든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외롭고 고독한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아름답고 신명나는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성실한 자의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만인 대 일인의 싸움’보다 더욱 더 극적인 역전의 드라마는 없다.
아아, 온몸이 갈갈이 찢어져 가면서도 더욱 더 행복한 영웅들이여!
아아,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혈의 핏빛으로 아침해를 떠오르게 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이여!.
*이 글을 쓰는 나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하기만 하다. ‘사색인의 십계명,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는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를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대한제국의 꿈’을 모색해본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글을 피상적으로 천박하게 읽으면 우리 한국인들의 전체 의사에 반하는 ‘친일적인 글’로도 읽힐 수가 있을 것이며, 대부분의 우리 한국인들은 나를 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간주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매국노 이완용의 분신이 아니며, 오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일 뿐인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의 왜곡, 일본헌법의 개정, 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 등은 우리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일본인들의 미래의 운명이 달린 死活的인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자국의 영토확장을 무자비한 살육과 침략의 역사로 기록하고 그 민족의 영웅들을 민족의 반역자이자 전범들이라고 처벌한 적이 있었던가? 또, 그리고, 전쟁의 포기와 비무장을 헌법에 명시하고 자국의 군대를 불법으로 양성한 나라가 어디에 있었으며, 세계 제2위의 UN분담금에 반하여 그 어떠한 발언권도 지니지 못한 나라가 또한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패전 이후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대일본제국의 길을 가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그처럼 엄청나게 반대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결행한 것이며, 아베 신조를 관방장관으로, 아소 다로를 일본 외상으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철두철미하게 사무라이 정신(일본 정신)으로 무장한 정치인이며, 그의 정치적 행보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당당하게 대일본제국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이러한 일본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국교를 단절하거나 전쟁을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하거나 자나깨나 일본에 대한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을 퍼부어 대며 밤샘 데모로 일관할 것인가? 일본은 군사적으로도 세계 제2위의 대국이고 경제적으로도 세계 제2위의 대국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철두철미하게 일본의 자본과 일본의 기술에 종속되어 있으며,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이러한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적인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자나깨나 일본에 대한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을 퍼부어 대며 밤샘 데모로 일관하는 것----, 그러나 이것만은 이제 제발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헌법의 개정, 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는 우리 대한민국이 막을 수도 없고, 또 막아서도 안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길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한 일본의 길이며, 우리 한국인들은 그 일본의 앞길을 가로막는 추한 한국인이 되지를 말고, 이제부터는 일본을 극복하고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한제국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초생활질서의 확립, 부정부패의 청산,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백만 두뇌의 양성, 바로 이것만이 일본의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는 지름길이며,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나의 이 글은 ‘친일’과 ‘반일’을 뛰어 넘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대한제국’을 염원하면서 쓰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된다면, 바로 그때에는 일본은 우리 대한제국의 문화적, 경제적 식민국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오늘도 언제, 어느 때나 기초생활질서를 전혀 지키지 않고 온갖 부정부패와 당파 싸움만을 연출해내며, 온갖 표절과 논문만을 조작해내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인간 쓰레기와도 같은 더럽고 추한 한국인들아! 우리 일본인들은 대일본제국의 길을 걸어 갈테니, 어디 한 번 너희들 마음대로 떠들어 보려므나. 국교를 단절시켜도 좋고, 전쟁을 해도 좋고, 경제적 봉쇄조치를 취해도 좋다. 대일본 제국을 향한 우리의 길목을 가로막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다.”
아아, 우리 한국인들이여, 부끄럽고 또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 한국인들은 중국인과 미국인과 일본인들을 욕하기 이전에, 조국의 영토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천박한 민족에 지나지 않으며,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남의 탓----자기 자신들의 조국의 영토와 민족정신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주제에, 왜, 그처럼 불평과 불만이 많은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민족이 우리 한국인들인 것이다----으로 돌리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되돌아 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우리 한국인들이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미국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강자에게는 철두철미하게 경의를 표하면서 강자의 미덕을 배우고, 그리고 진정한 강자로서 거듭거듭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욱 더 강력해질 것이다.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욱 더 부유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