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성씨 (姓氏)의 변천사
성씨 姓氏란,
성 姓은 글자 모양대로, 본시 本是 모계 혈통 母系 血統을 나타내고,
씨 氏는 부계 혈통 父系 血統을 의미하였는데,
나중에 그 의미가 뒤바뀌게 된다.
석기시대 石器時代에 이어 청동기 靑銅器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조직이 복잡하게 변화되니,
석기와 청동기 초기시대에 형성된 부락 部落 단위 즉, 혈연으로 구성된 소규모
모계가족 母系家族 집단을 다스리던, 여 부족장 女 部族長의 시대 時代가 끝나게 된다.
대내외적 對內外的으로 활동하기에 불편한 임신기간 妊娠期間 및 긴 육아기간 育兒期間(이를 천형 天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동식물 動植物을 막론하고 모든 생물체 生物體가 후손을 남기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자 의무이며, 대부분은 즐겁고 행복한 삶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여기고 있다.)에 매달려야만 한다.
그리고 정착 생활로 부족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체력이 약한 여 부족장을 대신 代身하여,
수렵이나 농경 생활에 필수적 조건인 힘이 세고 체력 좋은, 활동적인 남 부족장 男 父族長이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른 부족을 통합시키며, 전투에서 사로잡혀 온 여성 포로들을 자신의 후처 後妻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원시시대의 일처다부제 一妻 多夫制에서, 일부다처제 一夫 多妻制로 가족구성의 양상 樣相이
급변 急變하게 되고, 남성이 가계 家系의 중심이 되면서, 부계 혈통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자 국가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청동기 말기시대, 문자 文字가 보편화 정착화 되어가는 시기
즉, 춘추시대 春秋時代부터 그 의미가 묘하게 뒤바뀌어 사용하게 된다.
성(姓) - 아버지의 출신. 부계 혈통을 나타냄.
씨(氏) - 어머니의 출신. 모계 혈통을 의미함.
명(名) - 본인의 이름.
제 齊 나라의 건국자,
동이 선사 東夷 仙師 강태공의 원래 이름은 강여상(姜呂尙)인데,
성은 강, 씨는 여, 이름은 상이다.
나중에는 씨(氏)인 여 (呂)를 빼고 강상이라고도 불렀다.
진시황의 본 이름은 영조정 贏趙政인데,
성은 영, 씨는 조, 이름은 정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씨는 사라지고 성과 이름만 남아,
성명(姓名)이 영정 贏政으로 불린다.
그러니 한 漢 나라 이전 以前, 진나라 초기 때까지는 [성명 姓名]이 아니라,
[성씨명 姓氏名]이라 칭하여야 할 것이다.
진나라 이전, 춘추시대 이전 즉, 청동기 시대에는 성씨에 대한 개념이 희박 稀薄하였다.
여 부족장 女 部族長이 최고 권력자로 부족을 통치 統治하니,
다음 부족장은 자기가 낳아, 손수 기른 장녀 長女가 자연스럽게 물려받는다.
현재도 지구촌 몇몇 곳의 원시 부족민들은 모계 부족장 제도를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여인왕국 女人王國이 전설 傳說이 아니라, 현재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즉, 부계 성씨 父系 姓氏는 그 중요성이 뒤떨어진다.
원시시대 原始時代,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눈으로 직접 확인되는 혈통이 중시됨이 당연하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직접 기르니 그것보다 더 확실한 혈통은 없다.
그러니 모계가 우선이고 외가 外家가 중요한 것이다.
부계 父系는 뒷전이다.
구태여 알 필요성도 주장할 이유도 없었다.
어머니만 확실하면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인정하면, 그걸로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충분조건 充分條件이 완성 完成되는 것이다.
[* 집단생활을 하는 지능 知能이 높은 코끼리나 야생 멧돼지, 하이에나 구성원들도 철저한 모계사회다. 사자나 늑대, 들개 무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성평등 兩性平等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암컷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런 동물들의 생태계를 보면 집단생활을 하지 않는 독신주의인 곰, 그리고 고양이과의 호랑이를 비롯한 몇몇 종 種을 제외하면 무리 생활을 하는 포유류동물 대부분이 모계 중심 체제다.]
그런데,
인구가 증가하고 부족 집단이 커지자, 자연스럽게 목소리 크고 활동성과 통솔력이 뛰어난
남 부족장이 등장하게 되고, 부족 간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절대적인 권력을 갖춘 왕 王이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모계 조직이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모계를 의미하는 씨 氏가 사라진다.
그렇게 진나라 시기 時期부터 중국의 경우, 두 자 이름이 성행 盛行하기 시작한다.
초한지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성 姓에 외자 이름을 사용하니
성명이 간단하게 두 자로 표기 表記된다.
그러니, 성명 姓名이다.
그 이전에는 성씨명 姓氏名으로 이름이 3자가 보편적인데, 씨를 생략해 버리니,
간단하게 성명 姓名으로 두 자로 축약 縮約된 것이다.
성 姓 뒤에 씨 氏를 덧붙이면, 씨 (氏)와 이름 (名)의 혼란이 일어나는걸, 방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들 간에 형성된 기득권 旣得權 층에서 일어난,
일종의 부계 父系 혈통 과시적 血統 誇示的인 시대적 유행 流行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춘추 春秋와 전국 戰國 시대부터 씨 氏가 생략되는 성명 즉, 외자 이름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외자 이름이 보편화된 것은, 어머니 조 태후의 방탕한 행실에 질려버린,
진시황이 성씨명 姓氏名에서 모계인 조씨 趙氏를 고의 故意로 누락 漏落 시켜 버린
이후 以後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는 듯하다.
즉, 성씨명 姓氏名에서, 성명 姓名으로 정착화 定着化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진나라 및 한나라 이후에는 모계 혈통인 씨(氏)가 사라지고,
부계 혈통인 성(姓)만 사용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었다.
성씨 姓氏 중 복성 複姓은 대부분이 흉노계 선비족 출신이다.
독고 獨孤, 우문 宇門, 탁발 拓跋, 동방 東方, 선우 鮮于, 하후 夏候, 모용 慕容씨 등
즉, 정통 동이족이라고 보면 된다.
반면,
그렇게 20세기까지는 성씨(姓氏)의 의미가 부계 성(姓)만을 가리켰는데,
근래에 와서는 일부에서는 어머니 성을 갖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씨의 전통적인 의미가 부활하는 조짐이 엿 보이기도 한다.
한편,
개인 막사로 돌아온 이중부.
요람 속에 누워있는 아들을 한번 안아보고는 순진무구 純眞無垢한 을지 미앙에게
본인과 우문 청아, 사로와의 관계를 차마 꺼내지를 못한다.
본시 아들 이름을 ‘사로’라고 짓기로 마음먹었는데, 이제는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사로국의 고향 마을 지명 地名인 근오지 斤烏支 (현재의 포항시)의 ‘근오’로 하기로 하였다.
요람에 든 아들을 안고 어르고 있는 이중부를 보고있던 을지 미앙은
“흉노의 소왕을 역임한 명문대가 名門大家인 친정 親庭의 대 代를 이을 후손이 없다”라며,
“친정 親庭의 성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듯이 은근히 청탁 請託을 한다.
하긴 흉노의 소왕이라면, 시대를 초월하여 당대 當代에는 굴지 屈指의 직위 職位다.
굴지 屈指란 손가락을 굽힌다는 뜻이다.
즉, 어떤 분야든 간에 다섯 번째 안에 들 정도의 큰 규모나 명성 名聲이라는 의미다.
흉노 역사 전체를 살펴보아도 한 시대에 만부장 즉, 소왕이 여섯 명이 넘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작위 爵位나 호칭 呼稱이 소왕 小王이면, 휘하 麾下의 병사를 만 명 萬 名을 거느리는 만 부장 萬 夫長이
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는 5천 명에도 미달 未達되는 적은 수의 병사를 거느리는 소왕도 많았다.
그 이유는 원로 元老 우대의 의미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휘하에 만 명을 두고 있었지만,
전투에서 병사를 잃거나 사상자 死傷者가 많아져, 그 병력수가 줄어들었다고
소왕 자신이 고의적 故意的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이미 부여 附與 받은 작위 爵位를 취소하거나,
그 호칭을 낮추어 부르기에는 개인의 명예나 군의 사기진작 士氣振作 등,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게 되면, 선우 아래에 소왕의 칭호를 받는 자가 6, 7명이나 된다고 하더라도,
거느리는 전체 병사 수는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었다.
역설적 逆說的으로 보면, 흉노족 병사가 5만 명 이상이 모이게 되면, 천하무적이라는 의미다.
본의 아니게 저질러 놓은 죄도 있는 이중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승낙하고 말았다.
그래서 아들의 대외적인 성명은 외조부 外祖父, 을지 담열 소왕의 성 姓을 따른 ‘을지 근오’가 되었다.
이중부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갑자기 아들이 두 녀석이나 생겼는데,
자신의 성씨 姓氏를 이어받은 자식은 없다.
큰놈의 성씨 姓氏는 우문 씨 宇門 氏고, 작은 녀석은 을지 씨 乙支 氏다.
살다 보니 별 희한 稀罕한 경우가 다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 151.
첫댓글 👍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