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녀 엄상궁은 누구인가
아관파천’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이다.
이는 한 나라의 왕인 고종에게나, 그 왕이 통치하는 국가를 믿고 또 국가에게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국민들에게 시린 부끄러움인 동시에 매우 뜨거운 아픔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조선 땅 안에서 일본의 위협이 두려워 러시아의 공사관 안으로 피신하여 생활을 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며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가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엄상궁’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사실 아관파천은 엄상궁이라는 여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후에 ‘순헌황귀비’가 되는 엄상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의 생모였다.
한 때 고종의 후궁이었던 그녀는 실로 대담한 담력과 연출력, 그리고 놀라운 배짱과 지략을 가진 여인이었다. 때문에 임금 부자의 왕궁 탈출 기도가 오직 단 한 번의 실행으로 그처럼 완벽하고 뛰어난 성공을 거둔 덕 역시 오로지 엄상궁에게 돌아간다.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후며 황제의 아내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이었다.
고종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고종의 불안은 점점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엄상궁은 고종 곁에서 고종을 은근히 위협하며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부추겼다.
그녀는 친일파들이자 궁을 지키는 자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놓도록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범진, 이완용 등 외부에 있는 친러파 인물들과 물 샐 틈 없이 완벽하게 연락을 유지하여 탈출방색을 모의하여 도출해냈다.
또한 도피 당사자인 고종이 그녀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하여 몸을 던져 따르게 할 만큼 신임을 끌어냈다. 한낱 궁녀인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는 고종과 왕세자가 탄 가마를 러시아 공사관까지 메고 갈 가마꾼들까지도 완벽하게 자기 사람으로 장악해냈고, 출입할 궁문의 수비병들에게도 일주일에 걸친 공작을 펼친 결과 눈뜬 허수아비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고도의 심리적 전술과 뛰어난 담력과 배포를 통해 만들어낸 연출을 통해 아관파천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사전 준비 단계 중 단 한 군데에서만 어긋나도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엄청난 파문과 역작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이범진 등이 은 4만 냥을 엄상궁에게 주어 엄상궁으로 하여금 거사에 나서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뇌물을 받은 엄상궁이 임금에게 변란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 밤마다 고한데다 또 거사 당일에는 울면서 오늘 밤에 변란이 일어날 기미가 있으니 궁궐을 나가서 피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놀라고 의심을 품은 고종이 엄상궁 말대로 아관으로 파천하게 됐다는 것이다.
소설가 송우혜씨는 엄상궁이 뇌물을 받은 사실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은 4만냥 때문에 엄상궁이 이 엄청난 일들을 모두 맡아서 계획하고 실행시켰다고 보는 것은 아마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서둘러 비를 간택한 것 때문에, 새 중전이 들어오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엄상궁이 친일파 세력을 일시에 괴멸하면 새 왕후 가례가 없던 일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고도 해석했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엄상궁이 실로 대단한 여인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후에 엄상궁은 러시아공사관에 있을 때 임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 아이는 뒷날 영친왕으로 책봉되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다.
시해된 명성황후의 자리에 들어 선 엄상궁, 즉 엄비는 영친왕 이은을 나은 후 온 대궐의 권세와 임금의 총애를 누리며 대한제국의 엄비 천하를 맛보며 누리게 된다.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 추한 얼굴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쥐고 흔든 엄상궁, 그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엄상궁은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엄진일의 셋째 딸로 고종 5년에 태어나 일곱 살 때 대궐에 들어왔다.
그 후 스물여덟에 임오군란을 당해 명성황후가 실종되자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이 되었고, 서른네 살 때 고종의 은총을 입었지만 이 사실이 황후에게 알려지면서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 후 궁궐에서 다시 불러올려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 때 나이 마흔두 살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선의 실세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때문에 고종도 언제까지 러시아공사관 안에 머무를 수 없었고, 자연스레 엄귀비 천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종이 1년하고도 6일간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끝낸 후 돌아간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다.
고종으로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싫었겠지만,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에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외국공사관들이 위치한 정동에 있는 덕수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고종은 자신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때 이미 태후와 태자비를 덕수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의 빈전과 열성조의 초상화도 함께 옮겨오게 했었다.
또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덕수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덕수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을 떠나 덕수궁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1904년 덕수궁은 큰 화재를 당하게 된다.
때문에 고종은 1897년 덕수궁의 확장에 따라 덕수궁에 편입되었던 황실 도서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때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온 후 덕수궁에 머문 것과 같은 이유로 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이 있는데도 굳이 화재가 난 덕수궁 내의 중명전에 머물렀다.
이후 중명전은 덕수궁이 복원될 때까지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외국 사신들을 알현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중명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욕의 역사현장이 된다. 바로 그 곳에서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 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다.
고종이 중명전으로 옮겨간 지 1년만의 일이었다.
중명전에서는 고종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 곳 중명전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을 체결하라며 고종을 윽박질렀을 것이고, 을사 5적이라 불리는 이들도 고종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을 것이다. 나약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그렇게 을사늑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아관파천에서부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제로 박탈당한 을사늑약까지,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된 구 러시아대사관과 덕수궁, 그리고 중명전은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정동 일대에 모두 위치해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정동, 그 역사적 무대를 한 발 한 발 걸으며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 역사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더듬고 또 보듬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