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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묵상글 들 ( 성체와 성혈 대축일 - 천치밥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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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1.06.06 06:01
성체와 성혈 대축일-천치밥통
오늘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나를 너에게 내어주는 사랑에 대해서 기념합니다.
익히 잘 아시다시피 사랑을 하면 이렇게 주려고 하고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은 뭘 주면 좋아할 지 자못 고민까지 하고
옛날 같으면 연인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도 줘보고
저것도 줘보곤 하다가 어떤 것을 마음에 들어하면 그렇게 기뻐하지요.
이것은 비단 연인 사이만이 아닙니다.
양로원에 가면 할머니들이 제가 올 때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몰래 오셔서 꼬깃꼬깃 돈을 쥐어주십니다.
제가 드려야하는데 할머니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가 그것을 감사하게 받으면 정말로 기뻐하시며 부끄러운 듯 가버리십니다.
저의 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
식사 때면 어머니와 저는 실랑이를 합니다.
제가 알아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만치 먹고 싶은데
자꾸 당신 생각대로 이것 얹어주고, 저것 얹어주십니다.
연세 드시면서 더 하셨는데, 배부른데도 계속 더 먹으라하십니다.
나중에는 결국 제가 짜증을 냅니다.
“제가 알아서 먹어요.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그러나 다음에 가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의 사랑은 가진 것을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때가 되면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줍니다.
자녀의 생명이 위태로우면 부모는 당신 생명을 바쳐서 구하려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때문에 우리 생명이 생겨났고
이미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생명을 태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이 우리 생명이고 우리 생명이 당신 생명입니다.
아니 당신 생명보다 우리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아닙니다.
두꺼비는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잡아먹으라고 구렁이 약을 올립니다.
구렁이도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안 잡아먹으려 하지만
하도 집요하게 잡아먹으라고 약을 올리니 결국 잡아먹습니다.
산채로 통째로 먹힌다니 저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비 어미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새끼 두꺼비들은 두꺼비 독 때문에 죽은 구렁이 살을 먹고 태어납니다.
이렇게 생명을 바쳐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가시고기가 그렇고, 살모사가 그렇고, 모든 나무와 식물들이 그렇고.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무화를 통해 생명과 존재를 피우는 것이지요.
밀알 하나가 썩어야 열매를 맺고 밥이 먹혀야 누가 먹고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자기 실속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천치밥통이라 하고
누가 나를 없이 여기며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대하면 내가 네 밥이냐 합니다.
누구의 밥이 되기 싫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주님은 천치밥통이 되십니다.
얼마든지 먹혀도 좋으니 마음껏 먹으라 하십니다.
계약까지 맺으십니다.
계약의 한 쪽은 살과 피, 전부를 밥으로 준다는 것이고
계약의 다른 한 쪽은 받아먹고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조건이 있으십니다. 건강하게만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체, 성혈로 건강하고 행복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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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보편교회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사목적 이유로 주일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 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체의 의미는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밀떡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합니다. 가시적인 빵과 포도주는 형태에 불과하나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까지도 그 형태 안에 현존합니다.
이 성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실체로 변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머물러 계시며 이를 신자들이 받아 모시는 성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동시에 은총의 성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 거행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대치할 수 없는 중심이며 신앙생활으 활력을 불어 넣는 힘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심적 기도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주일 저녁부터 토요일 까지 자기의 독방에 머물며, 토요일과 주일에만 성찬례에 참석합니다. 일주일간의 영적 투쟁에서 견딜 수 있게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성인들 그리고 은수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삶은 성체가 신앙의 핵심적 삶임을 그들의 삶으로 증거하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 비안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업이란 선업을 한데에 다 모아도 미사 성제만 못합니다. 그 선업은 사람이 한 것이고 미사는 하느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도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이지만, 미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사람에게 주시는 희생입니다. 성체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놓여지는 제대와 성체가 보존되어 있는 감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의 중심이며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 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성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인도된 사람만이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합당하게 만나뵈올 수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성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며 죽음의 해독제이고 불멸의 약’이라 말합니다. 성체는 과거에 당한 상처를 치유해 주고 다가올 해악에 대해 무장시켜 줍니다. 성체는 악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 몸에 성체를 모신 감실을 지니고 다니며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되새기는 신앙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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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6월의 첫 주일입니다.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6월이면, 떠오르는 꽃이 있죠. 수도원 올라오는 길가 젬마 자매님 집 울타리에도, 가타리나 자매님 울타리에도, 우리 성모님 정원 앞에도 뒤에도, 피어있는 장미입니다. “6월의 장미”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입니다.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기쁨의 장미 한 송이로 행복합니다. 그런데 더 기쁘고 더 행복한 것은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피어난 꽃, 용서와 화해의 꽃, 고백성사의 집이라는 꽃이 수도원 입구에 참으로 아담하고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오늘은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을 마련하기가지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은인들을 모시고, 이 집을 축복하고 개장하는 날입니다. 오늘 모두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에서 축복과 기쁨 영적 꽃다발을 받으시길 바랍니다.(이 꽃집의 이름은 미사 후, 축복식 때 원장수사님께서 발표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신비는 “계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계약”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도 “계약”입니다. 계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고백성사의 집’을 축복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입니다.
<제1독서>는 시나이에서 맺은 “옛 계약”으로, 모세를 통하여 맺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계약입니다. <복음>은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성체성사의 설정을 통하여 맺어지는 “새 계약”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하시고 상속재산을 받게 해주셨음을 되새깁니다.
<제1독서>의 시나이 계약에서, 모세는 희생된 짐승의 피를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백성에게 읽어줍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응답합니다. 모세는 나머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여기에는 계약을 구성하는 요소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백성들의 응답이요, 셋째는 피를 뿌리는 예식입니다. 곧 계약은 용서를 위한 피의 의식을 통해서 제정되지만, 동시에 하느님 말씀의 수용을 통해서 제정됩니다. 이처럼, 계약에 있어서 말씀과 의식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어안이 벙벙해지는 놀라운 사실을 드러냅니다. 곧 야훼 하느님과 백성이 같은 피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로의 친교를 말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자손들”(탈출 24,5)은 이 친교로 “야훼 하느님의 혈족, 가족”(‘am’)이 됨을 말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계약인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호의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계약은 나아가서, 우리를 형제 사이로 만듭니다.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형제가 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이며, 서로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형제인 것은 바로 계약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방절(마르 14,12;“무교절 첫 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의 양이 되십니다. 곧 당신의 피를 계약의 피로 뿌리십니다. 그리하여 옛 계약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곧 구원의 사랑이 선포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그런데, 여기에는 구약의 계약과는 다른 것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곧 ‘새 계약’은 구약의 ‘옛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1-34)
그렇습니다. “죄 사함”의 용서가 “새 계약”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 중에 <성찬제정 축성문>에서, 사제는 포도주를 들고서 허리를 굽혀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리는 피다”
나아가서, ‘죄를 사하여’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이 ‘새 계약’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피’, 이것이 바로 성체성혈의 신비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토록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죄 사함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으니, 마땅히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계약의 삶, 타인을 위하여 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이제, 이 미사 중에,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맺으신 “새 계약”을 우리의 삶으로 기념(anamnesis)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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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
⒈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전례의 흐름으로 보면, 부활 대축일에서 시작하여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이어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복음선포의 핵심만을 모아 놓은 흐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고 이 교회에 모인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따라 공동체를 이루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요, 공동체를 이룬 각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성체 성혈을
받아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
그 둘째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에 삼위일체 대축일과
성체 성혈 대축일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⒉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시기까지 이스라엘은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잡아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 유래가 이렇습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이집트인들은 소를 비롯한 짐승이나 상상 속의 스핑크스,
태양을 비롯한 천체 심지어 이집트 왕 파라오 등을 모두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14.6).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⒊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어 계시하시는 과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게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해방시키는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와 역사적 개입이 계속될 것임을
밝히셨고, 따라서 이 계시와 개입의 협력자로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를 불러 시나이 산에서
그 계약의 내용이 될 십계명을 내려 주시려던 참에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의
우상숭배를 본따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경배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모세를 통해
전해 받은, 또 홍해를 건너온 이집트 탈출 과정에서 드러나신 하느님의 존재와
개입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⒋ 십계명 돌판을 받아 가지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를 보고 화가 나서
금송아지 상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부수었고, 금송아지 상을 경배하던 히브리인들
삼천 명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히브리인들도 우상을 숭배한 죄를
씻게 하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산산조각 부순 가루를 타 마시게 하고는, 이를 상징하는
뜻으로 불태워지는 소의 고기처럼 자신의 죄를 불태워 속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금송아지 숭배 행위의 여파가 번제라는 대책으로 나타나서 속죄일이 생겨났고,
나중에 가서는 평소에도 속죄일처럼 소를 잡아 불태우는 번제가 공식 제사로
거행되었습니다(탈출 24,8). 이것이 오늘 제1독서가 말하는 내용으로서,
레위 지파와 사제들이 행하던 제사 직무였습니다.
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세습 사제들을 뛰어 넘는
대사제로서 제사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을 완전히 쇄신시키셨습니다.
제물로 바쳐야 할 것은 이제 짐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요,
제사를 바쳐야 할 곳은 성전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이며,
제사를 바치는 주체 역시 세습 제관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여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로 보여 주셨습니다.
⒍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 삶을 돌보아주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마음과 몸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바친 행위가 그 표현이기도 했거니와,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이기도 했습니다.
⒎ 또한 제사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에 따라 사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예언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동안 틈틈이 하느님과 대화하시는 시간을 가지셨으며,
그 결과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메시지가 산상설교의 가르침입니다.
⒏ 그래서 대사제이시자 예언자로서 당신의 제사를 당신 백성도
계승하기를 바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염두에 두시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고 선언하셨고(요한 2,19),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앞으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과 진리로 하느님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요한 4,24).
그리고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기에 앞서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시며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다짐을 받으신 것도 그래서입니다(요한 13,14).
섬김의 삶이 제물이요 섬기는 현장이 제사의 본 장소이며 섬기는 사람이
제사를 봉헌할 자격이 있습니다.
⒐ 하느님의 백성이 당신의 사제직과 예언직을 계승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섬김의 삶을 당부하시면서
동시에 당신을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로써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인데, 이는 삼위일체 대축일의 뜻과 맞물립니다.
성사와 같은 전례는 반드시 하느님 백성이
모인 공동체에서 거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거행되는 전례를 통하여 섬김의 삶을 자기 스스로 전례의
제물로 봉헌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제2독서의 내용입니다.
⒑ 그리하여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질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즉, 삼위일체의 신앙과 성체 성혈의 신심에 따라서 예수님의 자기 봉헌 제사를
기준과 바탕으로 삼고, 미사 중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는 거룩한 변화를 과정으로 삼으며,
미사에 참례하여 자기를 봉헌하는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를 목표로 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교회 사이에 맺어진 계약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박힌 몸을 뜻하는
빵을 두고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역시 십자가에 못박힌 몸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두고 “내 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체성사가 십자가상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이것이 미사에 참례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신들의 섬김의 희생을 앞당겨 봉헌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중 영성체를 하나의 약속어음을 하느님께 발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되십시오!” 하는 사제의 말에,
“아멘!” 하고 말하며 응답합니다. 그리 하겠다는 동의의 표시입니다.
만일 성체를 영하며 응답을 해 놓고도 거룩한 변화를 삶에서 이룩하지 않으면
약속어음을 부도내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⒒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가 제사를 올바르게 계승해야 합니다.
그분이 알려주신 참 하느님을 우리가 섬겨야 합니다.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경배하던 고대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리가 오늘날 금송아지와도 같은 돈이나
재산, 자본이나 권세 등 세속적인 우상에 굴종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커다란
죄악입니다. 따라서 제사에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식이 없이 습관적으로
참여하거나, 공동체에서 서로가 함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을 다짐하는 의식 없이
그저 복을 빌기 위한 기복적인 동기로 참여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헌금은 자기 봉헌의 표시일 뿐 대체물이 될 수 없습니다.
⒓ 교우 여러분, 2천 년 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듬어지고 정화된
가톨릭 신앙의 정통적인 고백과 실천을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제사를 외면하는 이들을 본받지 마십시오.
오히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이웃 사랑의 자세로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과 성체 성혈 신심이
곁들여짐으로써 공동체와 제사, 섬김과 봉헌이 어우러진 예수의 미사를 우리가
봉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을 먹고
하느님의 기운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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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쳤습니다(박 씨는 한 번도 가져다주지 않더군요). 제비 둥지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특히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둥지에서 새끼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고 예쁜 새끼 제비를 볼 수 있었지요.
현재, 성지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를 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곳에 만든 까치둥지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제비 둥지는 늘 사람이 사는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제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제비는 사람 가까이를 제일 안전한 곳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구렁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안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제비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좋은 새라면서 환영했습니다.
제비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힘 센 분 밑에 머물러서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늘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자그마한 성체 안에 내재하시면서 우리가 쉽게 당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매번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면서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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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할까'하고 괴로울 땐 진실을 말하라(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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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을 할 것인가?
회계사 남편에게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아주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내가 쉽게 설명해 줄게. 예전에 당신 몸매가 36-24-36이었는데 지금은 48-40-48이 되었지? 이렇게 당신의 모든 것이 전보다 커졌는데, 당신의 가치는 옛날보다 떨어졌어. 이게 바로 인플레이션이야.”
어떻습니까? 쉬운 설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쉬운 설명보다는 상처받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상처를 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이해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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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황제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3달 동안 남극의 눈보라를 맞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이 부화될 때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암컷은 바다에 나가서 새끼를 위해 먹이를 잡으러 갑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암컷이 돌아오면 수컷은 이제 먹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갑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황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카르디널 피시(Cardinal fish)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물고기는 암컷이 낳은 알을 입에 넣어서 부화시킨다고 합니다. 알이 부화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컷의 입안에 있는 알은 안전하게 부활 할 수 있습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놀라웠습니다. 알이 모두 부화하면 비로소 수컷은 먹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추기경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면 장기를 기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황제펭귄도, 카르디널 피시도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본인도 힘들게 구걸하는 가운데 더 어려운 할아버지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님은 지금의 꽃동네를 일구었습니다. 걸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맞춤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로로 짧은 사제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을 따르던 학생들은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더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 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5000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십시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내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 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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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난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었고 오늘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축일입니다. 이런 거룩하신 대축일을 통해 역으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고백도 그대로 우리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감동으로 와닿은 참 아름다운 아침기도 후렴과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전례로 감동스럽게 표현됩니다.
“당신 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우리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천사들의 음식이자 하늘의 빵이신 성체성혈을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아가게 될 우리들입니다. 문득 김지하 시인의 '밥'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민중신학자 고故 안병무 박사가 성체성사의 본질을 참 잘 드러냈다고 극찬極讚했던 시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밥이자 성체성혈입니다. 비단 공동 미사전례는 성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서의 공동식사로 또 일상에서 사랑의 나눔으로 연장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들의 삶은 성체성사화된 사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이자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장상 사임후 오랫 동안 양노원에 계신 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 휴가 못간다. 낙樂이라곤 미사 하나뿐인 노인들을 두고 어떻게 휴가 갈 수 있겠나? 나 휴가 못간다.”
나이들어 갈수록 남는 낙樂이라곤 미사뿐이 없다는 고백을 자주 듣곤 합니다. 가톨릭 교회도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가교1324)
자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네 측면에 걸쳐 답을 찾아냈습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당신 수도승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도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당신 존재 전체를 사랑으로 내어 주신 주님께 대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매일 우리의 밥으로 오시는 하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신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주님은 성체성혈을 나누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세상에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이 미사시간보다 행복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치유의 처방도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은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전 성체송가 23절도 참 은혜롭습니다.
“참된 음식 착한 목자 주 예수님 저희에게 크신 자비 베푸소서.
저희 먹여 기르시고 생명의 땅 이끄시어 영생 행복 보이소서.”
둘째, 감사입니다.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는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피를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계약의 피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에는 뭔가 2%가 부족합니다.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는 피는 다름 아닌 동물의 피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피, 성혈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통쾌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 성혈의 정화 은총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더욱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잘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입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우리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구약의 모세를 완전히 능가하면서 보완하는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한 새 계약의 중개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찬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찬미입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의 후손답게 찬미와 감사가 몸에 밴 분이십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시편기도와 미사전례기도가 성체성사적 삶을 완성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중 최후만찬시 분명히 언급되는 두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에 이어,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의 두 말마디에서 찬미와 감사가 한 셋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 복음 말미에서 보는 것처럼 찬미로 시작해서 찬미로 끝나는 최후만찬임을 봅니다.
성무일도시 우리는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화답합니다. 제 행복기도중 강조되는 바 역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넷째, 희망입니다.
성체성혈의 성체성사야 말로 희망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 성찬례는 어제의 예수님을 되새기는 회상제回想祭요, 오늘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현존제現存祭요, 내일의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제希望祭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과거를 새로이하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런 생생한 희망의 은총 선물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영원한 청춘의 영혼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황홀한 미래를 앞당겨 보여 주는 저녁 성무일도 마니피캇 후렴과 성체송가24절도 참 깊고 아름다워 감동을 줍니다.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 세상에 들이시어,
하늘 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은 상속자로 만드소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절망이요 허무입니다. 바로 희망의 성사,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야 말로 절망과 허무에 대한 최고 처방의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임을 깨닫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성체성사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사랑의 사람, 감사의 사람, 찬미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되어 한결같이 성체성사적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정진精進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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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키엣대주교님.
주님의 양식
피는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를 나눈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사랑으로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십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
주님의 피는 구원의 피이며, 계약과 용서의 피입니다.
구원의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어린 양의 피가 발라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구원되고 이때부터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 아닌 당신 자신을 바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유월절의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인류는 죽음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입은 영혼의 문입니다. 주님의 피와 몸이신 성체를 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베트남에도 ‘피의 맹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연을 맺을 때 서로의 피를 잔에 부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하나 된 굳은 의지를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를 이루는 신비와 인류에 대한 사랑의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하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피의 계약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용서의 피에 대해서는 구약에 여러 차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사함을 구할 때 하느님께 속죄 양을 바쳤고 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통해 죄를 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주님의 성체 성혈이신 영성체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으로 인류는 구원과 거룩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흘러내리는 그 분의 피는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고, 서로 용서하고 더 많은 용서를 할 수 있도록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립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쳐 피 흘리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세우신 성체 성사를 통해 저희도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영원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 당신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더 사랑하고 봉사해야 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온 인류를 구하신 가장 고귀한 분이십니다. 단 한번으로 온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사제들이 예수님이 맡겨주신 당신의 양들을 위해 온 힘과 마음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매일 미사에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며 내 몸 안에도 고귀하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3. 인류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며 우리도 그 분의 희생과 사랑을 실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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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찬미를 모두 동원하여도 그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부속가 2절에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화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다.
복음: 마르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은 제1독서의 모세의 선언,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약이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되신다. 성체성사는 그러기에 새로운 계약인 것이다.
복음의 앞부분은 희생제물로 바쳐지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파스카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스카 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그리스도 행위의 예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행위의 재현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봉헌하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루카는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축복양식의 이 말씀은 희생제물을 바치며 거행했던(탈출 24,5) 시나이산에서의 계약(탈출 24,8)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분명히 희생제사(레위 1,5.12.15; 3,2. 8.13)에 항상 연결된 죽음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돌아가심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은 당신의 몸이 창에 찔려 피가 완전히 다 쏟아진 성금요일에 입증된 죽음의 상황의 재현이다. 이 모든 것은 희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창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사랑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일 뿐 아니라,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오 산 위에서 바치셨고 오늘도 당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시며 성사를 통해 신비스럽게 재현하시는 바로 그 “희생” 자체이다. 이러한 것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느끼게 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구약의 사제직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물질적인 희생제물을 봉헌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어 당신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상속 재산”(히브 9,15)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상속 재산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보증하셨던 영원한 생명, 구원이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통해 성사적 표징 안에서 미래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서두에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며, 그래서 참 아들딸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화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성체성사를 열심히 거행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수난의 기념이며, 옛 계약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증거”(Opuscolo 57)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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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를 행하여라.>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2-25)”
1)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0-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4-56).”
만일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말씀들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말씀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실제적인’ 지침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주신 빵을 먹는 실제 행위로 실천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제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 제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3-29).”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먹고 마시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1코린 11,17-22).
주님의 몸을 먹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는 이유와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치는 성체를 먹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를 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 없이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의 몸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3)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고,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성체와 성혈이 주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과
그 교리를 진리로 믿는 것은 신앙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과 성체성사를 일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체성사의 정신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랑과 희생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설명 자체는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4)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그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를 언급하신 것은, 그날이 반드시 온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지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를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포도주인데,
여기서는 파스카 음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씀은, “포도주를 다시 마실 틈이 없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곧 닥친다는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파스카 음식을 먹을 틈도 없지만,
머지않아서 하느님 나라 잔치가 열릴 것이고,
그 잔치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성체성사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성체성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시작이고,
하느님 나라 잔치는 성체성사의 완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 잔치에 미리 참여하게 되고,
그 잔치 음식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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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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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 성체성혈 대축일(나해)
제1독서(탈출 24,3-8)는 모세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 조건을 백성에게 알려줬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은 인간의 준수 여부와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영원히 세우신 계약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 조건을 기록했고(탈출 24,4; 34,27), 주님의 말씀(십계명: 탈출 20,1-17)과 법규(탈출 20,22-23,19)를 백성에게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제단에 피를 뿌린 다음 백성에게 읽어준 “계약의 책”은 시나이 계약의 조건인 열 가지 말씀들(십계명)을 하느님의 백성의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약의 책”에 담긴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믿음의 방법)가 먼저 확립된 다음에 자기들끼리 사는 사회적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내용(법규)을 담고 있습니다.
“족쇄”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계약”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아주 오랜 역사(기원전 18세기부터)를 지니고 있습니다. 계약을 맺는 주체들이 소개되고(나는 ~이다.), 계약을 맺는 이유를 말하고, 계약에 따르는 의무 규정들을 소개하고, 계약의 내용을 공적으로 선포하며, 계약의 증인 두 명을 세우면서 계약의 실천에 따르는 축복과 저주를 명시합니다. 이런 예식을 네 발 달린 짐승을 잡아 갈라진 쪽이 마주하도록 두 쪽으로 갈라놓고, 한 가운데에 짐승을 잡을 때 받은 피를 뿌리고 계약의 당사자들이 걸어간 뒤에 합니다(창세15,14). 만일 계약을 어긴다면 갈라놓은 짐승처럼 그렇게 죽을 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예레 34,18).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탈출 24,8)를 뿌린다고 한 것입니다. 계약을 맺은 뒤 계약의 당사자들끼리 반드시 식사를 했고(탈출 24,11), 계약의 당사자들은 계약서를 각자의 신전에 보관했다가 백성에게 주기적으로 읽어주어야만 했습니다.
모세가 선포한 계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절대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신다(탈출 20,3-6)고 합니다. 이것이 파스카 축제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계약을 어긴 쪽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계약을 어길 때마다 구약의 사제들은 짐승의 피를 제단 위에 뿌렸습니다.
복음(마르 14,12-16.22-26)은 최후의 만찬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로마인들의 날자 계산으로는 같은 날 저녁 무렵(오후 4시 전후)을 가리키는데,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어린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릴 넉넉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신 것처럼(마르 11,1), 제자 두 명을 파견하시면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하십니다. 그 시간은 실로아 샘에서 물을 긷는 사람들이 많은 때인데도,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있듯이, 더군다나 간청이 아니라 명령으로 통보하라고 하십니다. 물을 긷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이 그에게 “스승님”의 말씀이라면서 자기들과 함께 할 방을 찾는다고 하면,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는 말을 제외한다면 복음에서 파스카 축제 분위기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건너감(πάσχα)의 축제가 아니라 고통을 겪어야 하는(πάσχω) 죽음의 축제를 말하는 듯합니다. 제자들과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축복하셨다(εὐλογήσας)는 것은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이며, 제물로 바쳐질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마실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εὐχαριστήσας) 것은, 예레미야의 말대로(31,31), 당신의 “피로 맺은 새 계약”(1코린 11,25; 즈카 9,11)을 두고 하신 말씀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팔아넘겨질(마르 14,18)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라고 하셨는데, 슬프게도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양들이 있다(마르 14,27.50)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사에서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1코린 10,16). 유다인들이 파스카 만찬 끝에 늘 그랬듯이(시편 114-118장), 제자들은 찬미가를 부르면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겟세마니로 갔습니다(마르 14,32-53).
제2독서(히브 9,11-15)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완벽한 종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완전한 성막”에 들어가신 것은 새로운 사제직을 수행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옛 계약의 사제직(히브 9,6-10)과는 달리 예수님의 사제직은 불멸하는 생명의 힘으로 세워진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히브 7,16-17). 새 계약이 이루어진 장소는 지상성소가 아니라 천상성소입니다(히브 9,1.24). 새 계약의 제사에서 바쳐진 제물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래서 새 계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사제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단 한 번 바친 속죄 제물로 거행한 새롭고 완전하며 유일한 제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헌하신 새 계약의 제사는 구약의 관습에 따라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의 피를 가지고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가져다주셨습니다(콜로 3,24). 영원한 상속 재산이란 하느님을 합당하게 섬길 수 있는 영원한 해방이며, 참되고 완전한 구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헌하신 제사를 통하여 “참성소”(히브 9,24)에 들어가는 길과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히브 9,8).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대사제로서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은 자신의 고귀한 피를 많은 이들을 위하여 바치심으로써(1베드 1,19) 우리의 죽음의 행실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어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계약을 어길 때마다 제단에 동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하느님께 다시 성실하겠다는 약속을 반복해서 다짐했던 구약의 백성과는 달리 이제 새 계약의 백성인 우리는 더 이상 제단에 동물의 피를 뿌릴 필요가 없는 완전하고 충만한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옛 계약을 완성하시고 모든 이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봉헌된 제물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히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48.58)이시고, “생명의 빵”(요한 6,3)이시며, “참된 양식”(요한 6,55)이십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의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참된 음료”(요한 6,55)입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죽음에 비교하시면서 옛 계약을 완성하실 새로운 계약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옛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불러들이고, 스스로 불러들인 그 고통을 기꺼이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겪으신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살려내셨으며, 그것으로는 모자라서 우리가 튼튼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의 음식(성체)과 생명의 음료(성혈)를 주셨으며,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그 안에 살아계십니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만들고, 교회는 성체성사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절정이며,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합니다.
성찬의 전례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간직한 채 우리 구원을 위하여 먹혀질 몸과 피로 변화되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과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으로만 설명이 가능하고, 사랑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믿을 때에만 이해가 가능한 신비입니다. 구원의 음식으로 자신을 먹으라고 내준다는 것은 사랑이 고통의 다른 표면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해가 가능한 신비입니다. 성찬의 전례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넘겨주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즉 말씀의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할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때에만 이해가 가능한 신비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의 말씀을 잘 되새길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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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간직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마르 14,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방" 즉 당신의 방을 찾고 계십니다. 파스카 예식을 치르면서 함께 음식을 나눌 방이 필요하신 건데 왜 굳이 "내 방"이라고 하셨을까요?
"내 방"
이는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방'을 의미하고 또 '그분께 속한 방'이란 의미도 포함합니다. 머리 둘 것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에루살렘 도성 안에 당신 방을 소유하셨을 리는 없을 터이니, 이 "방"은 그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예수님께서 파스카 예식 중 쪼개어 나눠주는 빵이 당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행하였던 의식이고, 빵 나눔인데, 당신의 영원하고 결정적인 파스카 제사를 준비하시는 이 때 그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피를 뿌리는 예식은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주고, 이 모두를 실행하겠다고 백성이 응답한 뒤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기 직전, 주님의 백성이 문지방과 상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대살육의 재앙에서 보호해 주었지요.(탈출 12,23 참조) "피"는 함부로 흘리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생명 그 자체로서, 이제부터 주님과 백성을 마치 혈연관계처럼 결속시켜 주는 동시에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이루어진 새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히브 9,14)
성자의 희생 제사로 우리에게 더 이상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뿌리는 예식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봉헌하는 미사성제야말로 우리 구원을 위해 새롭게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십자가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이스라엘이 짐승의 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새 포도주를 기다립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 사랑, 그리고 영원한 일치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도 눈물도 없을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줄 피는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합일로 이어져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영성체송)
오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전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내주시는 그분의 몸과 피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을 보증하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설령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이어도 주님께 머물러 차츰 주님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우리 자신이 파스카 예식이 이루어지는 "내 방" 곧 '주님의 방'이 되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성체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의 조심스런 상황에서 첫영성체를 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들로 인해 우리 가정과 교회, 세상이 더욱 정화되고 성화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 있는,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소박한 나눔으로 성체의 삶을 완성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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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14,22)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날, 곧 예수님께서 미사(Missa)인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되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최후만찬 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받아 먹어라.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내 피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현존하는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한 밥이 되십니다.
이 엄청난 은총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화답송)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덩어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내려 받은 이 극진한 사랑에 대해,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합당한 준비와 자세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나도 너를 위한 사랑이 됩시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에게 먹히는 사랑이 됩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체성사 제정이후 계속해서 거행되어져 오고 있는 '미사'이고, '거룩한 미사에 참여'이며, 나도 지금 여기에서 '먹히는 삶', '내어줌의 삶'인 '성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권고1, '그리스도의 몸', 중에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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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증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양식으로 주십니다. “성체로 그분께서 오시는 이유는 또 하나의 천국,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양식인 성체로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지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 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리고 “성체는 우리의 보약입니다”(성필립보 네리). “영성체는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우리의 나약함을 치료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매일의 빵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가롤로 보르메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1코린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성 안토니오 클라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미사참례 회수를 늘리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고 하루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으시기 바랍니다.“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송가를 보면 “선인 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모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난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는 생명의 빵을 먹는 영성체의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을 부러워하겠지요? 그리고 눈물로써 그분의 발을 씻겨드렸던 죄 많은 여인과, 그분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시중을 들었던 갈릴래아 여인들, 그분과 친밀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분의 입술로부터 솟아나오는 은총과 구원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지요? 제대 가까이 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영성체로써 그분을 느낄 수 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분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다닐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성체성사는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을 생산한다.”고 토마스 데 아퀴노는 말합니다. 사랑에로 이끄는 구체적 성체의 기적은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많이 얘기합니다. 약 1,200년 전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가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마친 순간 빵이 살아있는 살로,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게 된 사건입니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과 71년에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이 기적의 피는 ‘진짜 피와 진짜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은 심장 근육이며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처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1973년에 세계보건 기구에 검사결과를 제출하여 다시금 핵 의학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연구했지만 결국은 성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이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믿는 이뿐 아니라 깊은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경외심과 존경을 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살아계심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체기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보이는 표징입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모두가 성체께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란치아노 성지 방명록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기록한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욱 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그 기도를 함께 올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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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의 반대말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고 음식엔 이기심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엇이든 먹어야 삽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먹었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에 따라 그가 어디에 살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모기는 어미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음식도 못 받습니다. 물론 탄생할 때는 부모도 조금은 희생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음식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습니다. 공동체가 더욱 끈끈할수록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깁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으로 길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부모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어야 부모가 있는 곳에 살 능력이 생깁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인간도 분명 사랑이 섞인 양식을 새끼 원숭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포함합니다. 미사가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부족해도, 혹은 그 가르침이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은 새끼 원숭이는 원숭이 무리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1990년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상태를 찍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요람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들이받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요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뿐, 아이와의 따듯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식이 아니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비단 식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도 먹고 동영상도 먹습니다. 뉴스에서 보니 15초짜리 ‘틱톡’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많은 사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공유되는 동영상인데,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율동을 따라 하다가 저수지에 빠지거나 기찻길에서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기차에 치이거나 스프레이로 불장난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는 경우들입니다. 음식만 찾다가는 이와 같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음식과 양식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양식은 분명 그 안에 이기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틱톡은 그것을 올리는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지만 양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으면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음식만 먹는다는 말은 낮은 짐승의 수준에 머물고 모기나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식을 이루는 사랑과 진리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겨 우리에게 오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사는 곳에 머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 안에는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이 사랑과 진리는 모기와 같은 본성을 벗고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의 수준으로 우리를 향상합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 예를 봅시다.
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마이크라는 진행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의 목장에서 살고 12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로건이라는 소년의 전화였습니다.
“마이크,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로건. 무슨 일이니?”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어제 우리 아빠가 송아지를 줄로 옭아매셨는데, 이 송아지는 매우 늙은 소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너무 늙어 건강한 우유를 먹지 못했어요. 비타민 C나 그런 좋은 성분이 있는 우유를 못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아지가 그만 등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가서 묻고 왔어요.”
로건은 통화 중에도 계속해서 훌쩍거렸습니다.
“하느님께 물어봤어요. ‘하느님, 왜 제 송아지를 데려가셨나요? 저에게 소중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 송아지를 참 아꼈어요. 하느님의 아들도 매우 소중했어요.”
“로건, 네 말이 맞다. 사실이야. 로건,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말하고 싶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이해하세요. 하느님은 언제나 이해해 주세요. 그냥 하느님께 나아가면 돼요.”
동물이건 사람이건 본인이 보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이와 같습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그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시는 아버지 앞에서 이기적으로 음식만 팔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이 사시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양식을 먹는다고 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수준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으며 천상의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에 따라 양식 안에 든 사랑이 소화되기도 하고 사랑은 버려지고 음식만 소화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마치 피자나 햄버거를 사 먹듯 헌금을 내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봉헌하는 헌금도 나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거저 내어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음식이 되고 맙니다. 음식은 먹히거나 썩어버립니다. 잊히는 것입니다. 누가 생선 몇 마리, 돼지나 소 몇 마리를 먹었는지, 혹은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을 준 이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그런 양식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양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된 양식이 되게 만드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습니다.
나도 양식이 되어야 영원히 삽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되고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됩니다. 이는 내가 음식, 즉 고깃덩이가 될 것인지, 양식 곧 그리스도가 될 것인지의 결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뱀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뱀이고 소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소가 됩니다. 각자가 소화하고 싶은 것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것인지 천국에 속하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했다면 그 살고 싶은 곳에서 오는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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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인생의 핵심 주제, 성체성사>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자들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한명 한명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면 천차만별입니다. 미사가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승리의 잔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감사의 축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전례이기에 당연히 행복에 겨워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얼굴들도 많습니다.
주일미사가 의무라니, 빠지면 귀찮게 고해성사를 봐야하니 어쩔 수 없이 오셔서 '제발 좀 빨리 끝나라'는 표정들도 눈에 띕니다.
더 심한 분들은 도대체 의욕이 없는 분들입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소가 닭 바라보듯이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흥미도 반응도 없습니다.
때로 연옥벌이라도 받는 것 같은 모습의 신자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는 표정도 눈에 띕니다.
진지한 얼굴, 단정한 자세, 미사 전례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려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마치도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인 듯 정성이 지극합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속죄의 제사, 희생의 제사, 십자가의 제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기쁨의 축제입니다.
따라서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은 환희의 순간입니다.
감사의 순간입니다.
은총의 순간입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천상잔치에 참여하니 너무도 기쁜 나머지, 너무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나머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흐르는 은총의 순간이 미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만년에 이르러 그 힘든 상황에서도 죽기까지 성체성사와 끈을 놓지 않으셨던 분, 그래서 그분께서 세상에 보낸 마지막 편지 역시 성체성사가 핵심주제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분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지가 벌써 꽤 지났네요.
만년에 이르러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위급한 순간마다 자주 가시던 병원이 로마 시내에 위치한 제멜리(쌍둥이란 의미) 병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원하셨던 2005년 3월 성목요일을 기해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셨던 모든 사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이 편지 주제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틈날 때 마다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교황님 유서다 생각하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 감동 깊고, 또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다른 환자들과 나란히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며 성찬례를 통해 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시키면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온 교회가 성찬례에서 생명을 얻으므로, 사제의 삶은 더욱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에게 '성찬 제정문'은 축성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조문'이 돼야 합니다."
"성체성사 때 모두 경건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엄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 사제들은 이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특별한 전령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설득력 있는 전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제들을 향한 교황님의 충고말씀은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정작 가장 성체성사 가까이 서 있는 저, 매일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저는 별 감흥이 없던 때가 많았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성찬 제정문을 낭독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지녀보고자 노력하렵니다.
"나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를 이용해도, 돌아서서 험담해도, 나를 구박해도 나는 묵묵히 견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런 나를 통해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에 굶주리고,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몸은 은혜롭게도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성체성사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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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김로마노 형제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탈출24,3-8)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6)
원문은 모세가 피의 반을 가져다 대접에 담고, 그 후에 또 반을 취해서 제단에 뿌렸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피'로 번역된 '핫담'(haddam)은 '그'라는 뜻의 정관사 '하'(ha)와 '피'를 뜻하는 '담'(dam)이 결합되어 '그 피'로 해석된다. 즉 다른 피가 아닌 희생의 제물에서 받아 낸 '그 피'라는 것이다. 이제 막 생명을 취하여 잡아 죽인 바로 그 짐승의 피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창세9,4.5) 각종 제사와 계약 체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히브9,22).
이런 맥락에서 모세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희생의 피를 취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하고 그 계약을 기필코 준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반영하는 행동이다.
한편 '가져다'(취하여)로 번역된 '익카흐'(yiqqah)는 '손으로 붙잡다', '얻다'(창세4,19)는 뜻을 가진 '라카흐'(laqah)의 단순 미완료로서, 번제와 화(목)제에 사용될 희생의 피를 받아서 잘 간수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여러 대접에'라고 번역된 '빠악가노트'(baagganoth; in basons;in bowls)의 원형 '악간'(aggan)은 구약 성경에 3회 등장하는 단어로서 '대접'(양푼)으로 번역했지만 아가서 7장 3절에서는 '동그란 잔'으로, 이사야 22장 24절에서는 '작은 그릇'(종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못에 걸어 놓을 수 있는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이었다.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뿌렸다'라고 번역된 '자라크'(zaraq)는 단순 능동태 완료형으로서 여러 번에 걸쳐 거듭 뿌린 것이 아니라 한번에 모두 뿌렸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모세가 새로 세운 제단 위에 피의 절반을 뿌린 행동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속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 피로 말미암아 계약의 백성들이 거룩하여지며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계약 체결에 있어서 피를 뿌리는 것은 계약을 지키지 않을 때는 죽음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반드시 계약을 지키겠다는 굳은 약속의 표시이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8)
앞의 탈출기 24장 6절에서 희생의 피 절반을 거룩한 제단에 뿌렸던 모세는 이제 여러 대접에 받아 두었던 그 나머지 절반을 다시 가져와 백성들에게 뿌리게 된다.
이같은 행위는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이스라엘을, 대속의 의미를 갖는 피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백성 개개인이 하느님과 계약 당사자가 된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계약을 위반할 경우, 피 곧 생명으로서 그 값을 치르게 된다는 심판의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생명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피는 자신의 죄로 죽었던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자원으로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을 예표한다(1요한1,7; 히브10,3-14).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원문은 '힌네 담 합베리트 아세르 카라트 예흐와 임마켐 알 콜 핫데바림 히엘레'(hinne dam habberith asher karath yehwa immakem al kol haddabarim haelle)이다.
본문 서두에 나오는 '힌네'(hinne)는 '이는'으로 번역하였지만, 원문상으로는 '보라'(behold)라는 뜻이다. 이것은 앞으로 언급되는 말들이 매우 중요하므로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대로'(알 콜 찻데바림 하엘레; al kol haddebarim haelle)는 특별히 '이것들'(these)이라는 의미의 지시형용사 '엘레'(elle)라는 표현까지 사용해서 이번 계약의 기초와 내용이 되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모세에게 명하셨던 바로 그 계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탈출20,22-23.33).
이어서 '임마켐'(immakem; '너희와')는 '~와 함께'(with)라는 뜻이 있는 전치사 '임'(im)과 2인칭 남성 복수 어미인 '켐'(kem)이 결합한 형태로서 '너희와 함께'라는 뜻이다. 이것은 계약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상호간에 맺어지는 '쌍방적인 계약'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는 말이다.
따라서 이 계약 체결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각자 자신이 지금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있다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참석해야 했다.
여기서 '맺으신'이라고 번역된 '카라트'(karath)는 '자르다','베어 버리다'(탈출4,25)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이 '계약'을 뜻하는 '뻬리트'(berith)와 함께 사용될 떄에는 '계약을 맺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통상적으로 희생 제물을 죽이고 그 제물을 둘로 잘라, 그 제물 사이로 함께 지나갈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서로 나누어 먹었던 풍습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이어서 '계약의 피다'라고 번역된 '담 합베리트'(dam habberith)는 '계약을 맺은 내용을 공식적으로 인준하고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피'라는 의미이다.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계약을 체결할 경우,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피를 먹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희생 제물이 된 짐승의 피를 서로 마시거나 뿌림으로서, 계약의 체결을 확고히 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의식을 통해 계약 당사자는 피로써 맺어진 관계임을 공식화했고, 만일 계약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 계약을 깨뜨렸을 경우, 계약 파기자의 운명이 피 흘리고 죽은 그 짐승의 운명처럼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한 것이다(예례34,18참조).
이런 맥락에서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의 피를 뿌렸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모세가 뿌린 희생의 피는 훗날 십자가 상에서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짓는 죄악을 대속하시고, 인류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있는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흘리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배롭고 거룩한 피를 예표하는 것이다(히브10,10.12-14; 마태26,28; 루카22,20; 1코린11,25)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복음(마르14,12~16.22~26)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2~25)
마르코 복음 14장 22~25절까지는 과월절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신비적 일치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교 성사의 절정이기에 공관 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26,26~29; 루카22,17~20),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교회의 잘못된 영성체 (모령성체)를 지적하며 성찬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언급하고 있다(1코린11,23~26).
여기서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labete; take)의 원형 '람바노'(lambano)는 앞 문장의 (빵을)'들고'로 번역된 '라본'(labon; took)의 원형과 동일하며 '손으로 잡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복수 2인칭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너희는 각자가 받아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십자가상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바쳐질 당신의 몸을 이렇게 영혼 생명의 양식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서 '몸'으로 번역된 '소마'(soma; body)는 '시체', '살아있는 몸', '죄에 속박된 몸' 등의 다양한 의미로 신약에서 쓰이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신체와 더불어 '전인'(the whole person)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내 몸이다'에 해당하는 '투토 에스틴 토 소마 무'(touto estin to soma mou; this is my body)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누룩없는 빵이 예수님의 실제 몸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과월절 만찬 중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셔서 당신께서 죽어 부활 승천하셔도 그 제자들과 계속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22,19)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 그리고 당신의 구속 사업에 동참하고 재현하는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14장 22절에서는 '찬미를 드리신 다음'에 해당하는 '율로게사스'(eulogesas; and blessed)가 사용되고, 마르코 복음 14장 23절에서는 '감사를 드리는 다음'에 해당하는 '유카리스테사스'(eucharistesas; gave thanks)가 사용되었는데, 원형인 '율로게인'(eulogein)과 '유카리스테인'(eucharistein)이 여기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원래의 뜻을 살펴보면, '감사'(eucharistia)는 받은 은혜에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고, '찬미'(eulogia)는 그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밖으로 드러내어 외적 영광을 기린다는 뜻으로서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르코 복음 14장 24절의 원문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을 제외하면 '이것은 ~나의 피 곧 계약의 피다'에 해당하는 '투토 에스틴 토 하이마 무 테스 디아테케스'(touto estin to haima mou tes diathekes;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로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포도주가 계약을 확정짓기 위하여 그 표시로 흘리는 예수님 당신 자신의 피라는 말이다.
구약에 모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계약을 중재하면서 소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24,8)라고 선언하였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을 확정하는 계약을 세우면서, 그 확정의 표로서 소의 피가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신 구속주(구원자)이신 예수님 당신 자신과 그 구속의 계약에 동참하는 사람 사이에 그 구속의 계약을 확정하는 표로서 당신 자신의 피를 언급하신다.
여기서 '피'에 해당하는 '하이마'(haima; blood)라는 단어는 계약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따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마르코 복음 14장 24절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휘페르 폴론' (hyper pollon; for many)에서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리스'(polis)는 '다수의'라는 의미의 형용사이지만, 여기서는 명사적 의미로 쓰였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모든 사람'으로 번역이 가능한데, 이때 '모든 사람'이란 모든 인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계약에 동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hyper; for)는 '~을 위하여', '~을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이며, 여기처럼 소유격과 함께 쓰인다.
따라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뜻은 '많은 사람,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계약에 동참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라는 의미로 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죄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피흘림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흘리는 '대속적 희생'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며, 이사야서 53장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예언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흘리는'에 해당하는 '에크퀸노메논'(ekchynnomenon; is shed; is poured out)는 '쏟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크케오'(ekcheo)의 수동태 현재 분사로서 '외상에 의해 현재 쏟아져 나오고 있는'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현재 분사 시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의 효과가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끝으로, 마르코 15장 25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만찬을 드시는 것을 이번으로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내용인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번 과월절 만찬을 끝낸 직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이 땅에서 가지던 성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신랑을 맞이하는 혼인 잔치가 베풀어질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분과 더불어 그 혼인 잔치의 축제에서 먹고 마실 것(묵시19,6~7)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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