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논어 ‘자한’편에서 공자 왈, “날이 추워진 후에야 비로소 송백의 절개를 알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썰렁한 그림 〈세한도(歲寒圖)〉 제목이 여기에서 유래했고, 뭔가를 적어보겠다고 컴 앞에 앉은 낭만배달부가 정작 막막해지면 돌파구로 가끔 끌어다 쓰는 말이기도 하다. 막막하기는 오늘도 마찬가지. 그래서 또 끄집어냈다. 세한연후...
해밀 방장의 투병 소식을 처음 접한 이후 지금까지 멍~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안녕하세요~ 새로이 회장직을 맡게 된 Haemil 입니다."
둥지의 2대 방장 취임 신고가 있었던 2020년 12월 2일, 팬 카페의 허드레 회원으로 처음 인사 올렸으니 이제 겨우 15개월. off라고 해봐야 2021년 11월 평창 공연에서 딱 한번 대면했으니 굵고 긴 인연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그런데 아리다. 세한연후... 한 자락 통증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를 챈다. “가늘고 짧았던 게 아니었구나.”
사실 느닷없는 병마에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주변인으로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고작해야 힘내라는 몇 마디 위로가 전부다. 인내와 고통은 오롯이 투병인의 몫이다. 1년 전의 내가 딱 그러했으니까.
2020년 10월 배달 중 사고가 났다.
잔 골목이 많아 밟기도 뭣한 완경사 2차선 도로에서의 사고치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데미지를 입었다. 이가 깨지고 눈두덩이 터지고 어깨가 부러졌다. 6조각 난 견갑골을 이어 붙이고, 얼굴도 (성형 없이) 대충 바느질로 때우자 그나마 살만해졌다. ‘배달 인생에 이 정도 쯤이야’ 안도할 즈음 수상한 징후- (평소에 없던) 두통이 찾아왔다.
내 치명적 문제점 중 하나가 자연치유력에 대한 과신.
더하여 병원&약국을 구미호만큼 저어하는 터라 그냥 버텼다. 삼복에 급히 퍼먹은 빙수처럼 골이 띵한 증세까지 나타나자 어쩔 수 없이 타이레놀을 깠다. 그런 상태로 버틴 기간이 대략 10여 일. 몇 걸음 되지 않는 방-욕실 이동에 몸이 휘청거렸다. 어어~ 이게 아닌데... 그렇게 병원을 찾았다.
“아니, 이 지경이 되도록”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의사에게서 들은 말이다. 반으로 깔끔히 갈라진 호두 속 같아야 할 뇌 CT 화면의 1/4 정도가 검정색이었다. 고인 피가 뇌를 압박하고 있다며 보호자를 부르란다.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 없이는 불가하단다. 50 중반이 되도록 미장가에 딸린 식구가 없으니 보호자를 어디서 구해온단 말인가. 노부모가 아시면 기함 하실 터, 만만한 여동생을 호출했다. 양자를 앉혀두고 적의까지 내비치는 의사가 툭 던진다. “시기를 놓쳐 (수술의) 성공 확률이 10% 미만입니다. 수술 후 Facial palsy(안면마비) 정도로도 만족해야 할 상황입니다.”
입 돌아가는 구안와사 정도면 다행?
수술 중 사망 확률은 물론이려니와 무사히 수술을 마친 후라도 코마/반신불수/치매 등의 후유증을 각오해야 한단다. 또한 이 정도 수술을 감당할 병원이 별로 없다며 전원 하려면 바로 연락하라고 서너 곳을 소개해준다. 미련&무지 환자인 나는 지은 죄가 있어 그렇다 치고, 자다가 홍두깨- 아니 출근과 동시에 바로 조퇴한 동생은 무슨 죄란 말인가. 어쨌거나 의사란 사람이 막말을 던진다고 핏대 세우는 여동생을 겨우 만류해 동의서를 작성했다.
겨우 반나절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CT를 확인하고, 여동생을 부르고, 동의서를 작성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사후방안을 일러주고...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에 누웠다. 1월의 병원은 너무 추워 오한이 일었고 복도의 조명은 눈이 부셨다. 덜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화면이 병원 천장이라니...
인명재천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입도 돌아가지 않았으니 대성공을 넘어 기적 같은 성공이었다. (아직까지는) 일말의 후유증도 없었고, 회복도 빨랐다. 언제나 인상만 쓰던 의사가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코뚜레를 하고 있는 내게 학회자료로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뿌연 입원실 창 너머론 2021년의 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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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분투하고 있는 해밀 방장님께 혹시 격려가 되지 않을까... 1년 전 기억들을 모아 적어봅니다. 옆에 누가 계신지 모르겠으나 혹 필요한 게 있으시면 주저 없이 알려주세요. 시집, 음반... 등은 물론 짜장면에서 호두과자까지 이병상련의 낭만배달부가 당일 배송해드립니다.
첫댓글 어려운 수술 하셨었네요 회복하셔서 다행이네요 💚
해밀 방장님도 수술잘되어 낭만님과 같이 회고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둥지 온 식구가 기도하고 있으니...
명년 이맘때쯤엔 해밀방장님의 회고담을 들을 수 있을 겝니다.
잘 이겨내셨네요. 우리 회장님도 화이팅!!!
만일의 사태까지 설명해주는 의사샘들 덕에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잔뜩 먹죠.근데 막상 해보면 잘 되는 경우가 참~~많습니다~~
우리나라 의학계 👍
💚 그러게여. 울 나라 의사샘들 칼질이 깔끔하더라구요.
힘든 과정이 잘 지나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날을 잘 극복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쯤되면 인간승리입니다,
또한 방장님께서도 이겨내시리라고 믿습니다.
💚 울 해밀 방장님이 강단 있으시니 잘 버티실 겁니다.
@낭만배달부 근데 짜장면 참 먹고 싶은데. . 언제 먹을수 있을런지. . 😢
헙. . 🙏🏻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응원과 기도 하나하나 적립하며 힘내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
무사히 살아나 주셔서 고맙고, 이렇게 글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격하게 공감가는 부분들. . 작년8월에 한번 수술대위에 눕고, 이번에 또 수술대에 누우면서 저도 '이 추운 수술방 조명이 내가 보는 세상의 마지막이려나. . ' 싶은 생각을 했었죠.😌 머지않아 한 번 더 수술실을 들어가겠지만. . 저도 명년 이 맘때?를 그려보니 살짝 웃음도 나고, 용기도나고 그러네요.
(낭만님 글을 실은 한번에 못보고 끊어서 보았어요. 글이 너무 현실감이 팍팍. . ㅎ ㅎ )
💚 종일 추적거리는 비에 핸들 움켜쥐느라 몸살 날 지경이었눈디, 반가운 해밀 방장님의 댓글에 피곤이 풀리는 듯여.
세브란스라고 하셨나여? 제가 그쪽에서만 40년. 꽉 잡고 있는 동네이니 문병 가능한 날짜만 지정해주시면 철가방 들고 뛰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