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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을 갖자(눅 24:13-35)
영국에 아주 훌륭한 설교가 '생스터'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령이셨는데 전신마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누워서 지냈습니다. 부활주일이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이 딸에게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오늘은 부활주일이구나! 부활절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 다시 사셨다"고 크게 소리치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구나! 그래서 아빠는 답답하기 그지없단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보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이 있을 것 같구나! 그것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 다시 사셨다'고 소리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소리치고 싶어도 소리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목소리가 있음에도 소리치려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다같이 외쳐보자. "예수 다시 사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그대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빈무덤의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의 교주, 성자, 영웅호걸은 다 무덤이 있고 시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빈 무덤뿐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태양이 솟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봄이 오면 꽃이 피어나듯이, 불법과 불의가 불신의 세력이 부활의 새 아침에 여지없이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 두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6-17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습니다. 그들의 내려가는 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리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시신이 보이지 않았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베드로가 직접 빈무덤을 확인하였다 해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신앙에 사로잡힌 사람은 부활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눅 24:11절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그들에게 부활이란 허탄한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허탄한 이야기란 어리석은 이야기, 허튼 말, 잡담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조차 부활은 믿을 수 없었던 허황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성은 한계에 부닥칩니다. 부활을 이해하려고 하면 허튼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생선을 잡수시고 직접 손발을 보여 주시면서 부활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너무나 신비롭게 변화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영화로운 몸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몸이었습니다. 이 몸은 이다음에 우리가 부활할 때 가질 영광스러운 몸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을 직접 뵈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셔서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슬픈 빛을 띠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절망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 무덤에서 장사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무슨 희망을 갖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사랑했던 예수님은 이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입니다. 그저 옛날로 돌아가서 살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슬픈 빛을 띠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에 십자가의 복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대속하신 예수님, 거기서 나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에서 나의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믿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렇치 않으면 제자들처럼 부활은 허탄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을 수 없다면 보이는 현세만을 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문제는 이처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 현세적인 축복과 성공, 자기성취를 이루고 세상적 성공을 꿈꾸며 로또같은 축복이 없을까? 기대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나의 성취, 나의 축복, 나의 만족을 위해서 주님을 따른다면 반드시 이처럼 실망하고 슬픈 빛을 띠고 옛생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십자가를 몸으로 체험하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도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며 자기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몸이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끝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저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좀 더 보십시다. 이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23절,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 말과 일에 능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선지자로서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부터 해방을 시켜 줄 구원자로 알았는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를 보지 못하고 천사들이 전하는데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지금 내려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믿음없는 이 두 제자를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 주시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보게 되자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여전히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슬픈 빛을 띠고 세상을 향해 내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은 무덤의 신앙입니까? 부활의 신앙입니까? 엠마오로 내려가는 신앙입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자아성취의 신앙입니까? 자아죽음의 십자가신앙입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현재의 고난을 넘어서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부활을 기대하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이 부활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저들을 찾아가셔서 깨우쳐 주시고 돌이키게 하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부활하신 주님이 저들을 찾아오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25-26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저들이 지금 성경을 알지만 더디 믿는다는 것입니다. 더디 믿는다는 말은 이미 알고 있는데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말씀을 손에 쥐고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하게 부활의 신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속에 부활의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신앙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의 시작은 예수님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전 15:3-6)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4번에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믿지 못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도 어지간해서는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자세히 풀어 주셨습니다.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경이 누구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구약전체는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 저들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들의 귀가 열린 것입니다.(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부활의 말씀을 들을 때 부활의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활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부활의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일낮예배 나오는 것이 성경책을 읽는 것의 전부라고 한다면 10년을 다녀도 믿음이 제자리걸음 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가운데 길가와 같은 마음밭은 아무리 뿌려도 금방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버립니다. 가시떨기밭은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유혹 때문에 금방 자라다가도 기가 꺽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개간하고 깊이 파헤치고 옥토로 만들어 말씀을 받을 때 100배,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보여주시기 전에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말씀을 들려주니까 믿음이 생기면서 저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 교회안에서 감사한 것은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41번째 성경을 통독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또 여러 성도들이 성경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다보면 읽는 것과 다르게 말씀이 보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읽고 필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중요한 신앙적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양식인 밥을 먹는 것처럼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읽을 때 읽고 쓰고 깊이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인격이 되고 삶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될 줄 믿습니다.
2. 떡을 받아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본문 30-31절을 보시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실망하고 낙담하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자세히 가르쳐 주심으로 믿음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곁에 다가와서 함께 이야기도 하고 함께 길을 걸으셨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눈이 닫히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겠습니까? 오늘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치 성만찬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음으로 주님과 하나된 것처럼 저들이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영적인 눈이 열려야 주님을 보고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이 육의 눈으로 우리는 사물을 보고, 산천을 보고 하늘과 땅을 보고, 사람도 봅니다. 그러나 눈은 파스칼이 지적한 대로 지극히 큰 것도 지극히 작은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눈으로는 이 지구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아주 작은 세균이나 미생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눈은 불완전합니다.
보여지는 것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눈은 아무리 치겨 떠도 자기 눈위에 있는 눈썹은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크게 떠도 뒷통수는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눈입니다. 또 하나는 영의 눈입니다. 이 눈은 육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이 영의 눈이 봅니다. 신령한 세계를 봅니다. 영의 세계를 봅니다. 믿음의 눈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당장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영의 눈은 믿음으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는 이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이 밝아질 때 주님의 나라를 봅니다. 주님의 계획을 보고,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보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명한 찬송작가 크로스비 여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난 후에 신령한 영적인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6천여곡을 작사했습니다. 그중에 우리 찬송가에 실린 은혜로운 찬송이 21곡이나 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갈길 다가도록,나의 영원하신 기업, 십자가로 가까이, 나의 영원하신 기업, 자비한 주께서,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그녀는 진정으로 영의 눈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합니다.
"주안의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288장,3절) 눈이 밝아 질 때는 예수님이 보입니다. 눈이 어두울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영안이 닫쳤을 때는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영의 눈이 열려 구속한 주만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이 감동되었다는 뜻이요,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들은 때 믿음이 생기고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니까 저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33절]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저들은 이제 고향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즉시 저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뜨거운 가슴은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뜨거운 가슴은 저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저들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은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사실이고 진리라는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메시야요, 우리의 구세주였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깨달은 두 제자가 어떻게 가만히 집으로 가서 농사일만 하겠습니까? 저들은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부활은 회개를 일으켰고 부활은 저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끝낸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의 문을 깨트리시고 영원히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교회로 돌아간 것입니다. 34,35절,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저들은 서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만났던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증인들입니다.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증인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고 외쳐야 합니다. 이제 저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하며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 떡을 축사하신 후 떼어 주시자 가리어졌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영안이 열리자 지금까지 함께 계셨던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려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언공동체였습니다. 부활은 교회의 소망이었습니다. 부활은 모든 시련을 이기는 능력이었습니다. 부활은 절망하던 제자들이 일어설 수 있는 생명의 복음이었고 부활은 저들로 하여금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재림 공동체로 만든 것입니다. 저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고 우리에게 보이셨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가 임하길 바랍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이 있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져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