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부 장관 제안하는 이승만과 군인의 삶 다짐하는 백 장군
늘 전쟁터를 서성이다
1946년의 겨울은 혼란스러웠다. 고향인 평양을 떠나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의 풍경을 접했을 때 느낌이 그랬다. 군사영어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한반도 남쪽의 군문(軍門) 생활에 접어든 지 14년에 나는 군복을 벗었다. 4.19가 벌어진 직후였다. 그런 뒤에 나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60년 자유중국(대만) 대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5.16이 벌어진 뒤에는 다시 주(駐)프랑스 대사로서 서방 6개국, 아프리카 13개 국가의 대사를 겸임했다. 우리의 국력이 약해 여러 나라에 동시에 대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뒤 나는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교통부 장관을 약 1년 반 정도 지낸 뒤 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맡아 석유화학 산업의 근기(根基)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산업화를 이뤄 국력을 키우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나라가 부유해져야 병(兵)을 키우는 법이다.
동양사회의 오랜 꿈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선후(先後)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지 않으면 강병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해방 뒤의 혼란에 김일성 군대의 남침은 그 도를 크게 더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우리는 우선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꺾은 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편승해 국력을 놀라울 정도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전쟁 뒤의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산업화에 전력을 기울인 까닭이다. 그 모든 과정은 정말이지,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4.19 뒤 외교관으로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펼쳐지는 산업화의 일선에서 그런 점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교관으로 약 10년 동안 해외에 주재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에 대사로 주재할 때였다. 사람들이 간혹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나서는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발걸음은 유럽의 옛 전쟁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전쟁터 주변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접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의아심을 품기도 했다. 나는 나폴레옹 군대와 영국의 웰링턴 군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던 워털루 전쟁터를 아주 여러 번, 미군 주도의 연합군이 상륙했던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비치 등을 자주 배회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진격하면서 독일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라인강의 강변 또한 내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싸움을 회고했다. 사람 사이의 전쟁은 왜 벌어지는가, 그리고 전쟁은 어떻게 펼쳐지는가, 누가 그런 싸움에서 이기며 어떤 이가 질까, 왜 이 지형에서 커다란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 벌어졌을까 등을 묻고 또 물었다.
▲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전사자 명부를 보고 있다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런 싸움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품어야 한다. 그런 참혹한 싸움에 나서는 군인의 어깨는 따라서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내게 군대를 좀 더 일찍 떠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 때문이었다. 1956년 5월 25일에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3선에 성공했다. 부통령 투표가 화제였는데,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 장면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개표 시비가 벌어져 정국이 매우 소란했다.
6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호출했다. 경무대에 들어서자 대통령은 “자네, 내무부 장관 자리를 맡게”라고 했다. 개표 시비로 사직한 김형근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내무부 장관은 매우 비중이 높은 자리였다. 그로써 개인적인 영달은 이루겠지만, 전국 각 지역의 행정과 선거 등을 관리하는 자리여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민감했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며칠 생각해 본 뒤 결정하겠다”고만 했다.
사흘 뒤 나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의견을 피력했다. 가족과 상의한 결과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끝까지 군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만 했다.
스러지지 않는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의 꿈
그러나 그런 내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4.19가 벌어진 뒤 타의에 의해 군문에서 일찌감치 떠났고, 예기치 않았던 외교관 생활에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 초석 닦기에 나서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전쟁터를 쉬이 떠날 수 없었다. 외교관 시절에 유명 전쟁터를 찾아다녔고, 석유화학산업에 종사할 때도 각종 전쟁 기록을 찾아 읽었다.
그런 나의 습성은 아무래도 참혹했던 6.25전쟁터를 누볐던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전쟁의 기록을 살피면서도 내 마음은 늘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터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 싸움에서 제대로 싸웠던 것일까’를 물으면서 말이다.
당시의 전쟁에 나섰던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은 대개 경험이 없었다. 그를 대신할 교육의 기회도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느닷없이 벌인 김일성 군대의 침략 전쟁의 초반에는 우리 모두 당황했다. 쉽게 나아가고, 쉽게 무너져 등을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싸우려는 의지는 약하지 않았으나 싸움터의 참혹함을 견디면서 침착하게 적의 약점을 노리는 일에는 강하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할 때는 매우 용감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요동을 칠 때는 쉽게 무너지는 모습도 보였다. 오랜 훈련과 치밀한 조직을 통해 성장한 군대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 백선엽 장군
나를 이겨야 남을 이긴다
따라서 중공군 개입과 1951년 봄까지 벌어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보였던 우리의 싸움 방식은 스스로 지닌 기질, 습성, 사고 등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봐야 옳다. 그런 방식은 여러 교훈을 준다. 감성적 반응은 활발했지만 전쟁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면서 움직이는 이성적 측면은 부족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나아감은 빠르지만, 불리한 경우에 도달하면 스스로 공황상태에 쉽게 빠져들어 물러섬이 또한 신속했다.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옆에서 함께 싸우는 아군과의 연계를 쉽게 잊은 점도 눈에 띈다. 그로써 전선을 허물어뜨리고 옆의 아군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인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상황이 자주 닥친다. 결정적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할 때가 전쟁터에 선 군인에게는 잦다는 얘기다. 그럴 때의 결단(決斷)이 부족하다는 점도 당시 전쟁터의 한국군 지휘관에게 자주 눈에 띈다.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이 무너졌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일이다. 피비린내 가득 풍기는 전쟁터에 서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아주 일반적인 감성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두려움에 젖어 스스로를 먼저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다.
오랜 훈련, 치밀한 조직, 그를 뒷받침하는 화력과 장비 및 물자 등이 싸움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내면적인 요소를 따지면 결국 두려움을 비롯한 사사로운 감정을 누가 억누르고 싸움터에 나서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 점을 극기(克己)라는 낱말로 표현할 때가 많은 편이다.
장병(將兵)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일반 사병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 기능을 숙지하면서 유사시에 대오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장교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오랜 사고와 훈련을 통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싸움을 이어가며 승리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제 나라 군대가 그렇게 가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치적으로는 무풍(無風) 지대를 형성하고, 장병 개개인이 군대의 조직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낌없는 지원이 덧붙여져야 하고, 나라 경제의 강고함을 이뤄 물자와 화력 등을 철저하게 받쳐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까. 우리 장병들은 60여 년 전의 전쟁 경험을 살려 전기(戰技)와 함께 정신적 역량을 제대로 쌓고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의 모든 과정이 싸움과 다름이 없다면, 우리사회는 그런 싸움의 철리(哲理)를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두루 마음에 걸려 이 회고를 적었다. 성원해주신 많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스러져간 6.25전쟁의 숱한 영웅들을 기리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