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소통이 필요한 현대 한국 가족
한국 가족 안에서 여성 역할의 변화
한국의 전통 가족은 부자관계가 중심인 가부장적 부계 친족제도의 일부였다. 부자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뿐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과 현재의 자손을 잇는 토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께 잘하는 것이 곧 조상을 위하는 것이었다. 가족은 영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족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아들을 낳고, 키우고, 출세하도록 온 집안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전통 가족에서 부부와 미혼의 자녀로 형성된 개별 가정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출가외인으로 키워져 시집을 가 자신의 가정이 아니라 남편 집안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 것이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로 간주되었다. 남편과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남편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친족집단이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을 때 집안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접빈객’, ‘봉제사’였다. 자신의 자녀를 직접 키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여성들은 운명적으로 ‘여성’의 길을 받아들이며 ‘집안일’을 하면서 고된 시간을 보냈다. 여성들의 가정 내 역할은 나이가 들수록 권위를 갖게 되고, 며느리를 보면 집안 내 권력조차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삶은 억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면 좋은 날이 있다.”는 전통적 위로는 근대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교육 받은 여성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가정을 자유가 없는 삶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근대교육의 수혜자인 신여성의 주창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혼과 이혼’의 자유를 주장한 나혜석의 이혼선언문은 이러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현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발전을 위하여 여성의 자율적인 측면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여성이 근대화 이후 자신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이룰 남편을 고를 수 있는 입장으로 변해온 것이다. 여성들이 해야 할 역할도 많아졌다.
여성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림을 하고 자녀양육을 하는 것이다. 근대적으로 또는 신식으로 살림을 하는 것이 가족에게도 좋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집안일을 하는 데 어른의 도움보다는 전문가의 조언이나 책에서 얻는 정보가 더 유용하기 때문에 어른들과 과거와 같이 일상적인 살림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더구나 산업화, 도시화의 영향으로 친척들이 지역적으로 가까이 살지 않아 서로 교류할 시간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척, 친지와의 거리가 소원해지면서 가정생활의 범위는 좁혀져 왔다. 이제 할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손자녀도 많아지는 추세다.
학교교육이 서구적 핵가족을 정상 가족으로 간주하면서 여성교육을 해온 측면도 이러한 추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근대 가족에서 강화된 여성 역할
현재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가족 모델이 한국 가족의 이상형이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부와 미혼의 자녀로 형성되고 사회 경제적인 독자성을 갖고 있는 소가족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가정이 자리 잡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집안의 압력이나 친척 간의 관계에 따라 맺어진 중매혼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념으로서의 근대 가족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데는 얼마나 큰 한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환경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줄어들고, 부계 친족집단 자체의 범위가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시집 식구들의 영향력은 남아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남편과 자신, 그리고 아이들만이 가족관계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래서 형태는 소가족이지만 이념적으로는 부계 직계가족제도를 따르고 있다고 1980년대 사회학자들은 주장해 왔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가족 형태와 기능은 한편에서는 자녀 양육과 살림을 새롭게 하면서 광범위한 ‘집안’ 식구들과의 교류도 소원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가정은 다양한 수준의 친척과 친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집안 내 식구들이 모두를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연고주의’는 친척과의 관계가 지닌 중요성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친족 집단의 영향권에서 자유스럽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친척과의 관계는 활발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선별적 태도는 친족관계를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거리를 두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갖게 한다.
가족이 친족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었던 과거에 비하여 개별 가족이 개인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렇게 커지는 영향력으로 여성들은 다양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강화되는 경쟁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다방면으로 가족을 위한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초기 근대화 과정 속에서 어려운 가정 경제를 도우려고 나선 많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축소된 가족 내 성원을 위한 여성들의 노력과 희생을 대변해 준다. 이러한 활약상은 자녀 교육을 위한 ‘극성 엄마’와 그 맥을 같이한다. 과거에 ‘봉제사’, ‘접빈객’에 집중되어 일해 왔던 여성들이 이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전업 주부들에 더 집중적으로 요구되어 왔다. 취업 주부의 경우에도 이러한 가정에서의 압력에서 자유스럽기가 힘들다. 미취학 자녀를 위한 교육에 적극적인 노력을 한 것이 나중에는 각종 입시에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어머니들의 참여는 단순히 ‘극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의 새로운 기여, 영역이라고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역할의 축소 또는 집중된 기여는 한국사회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구식 현대 가족과는 다르다. 서구에서 가족이 쉬는 가정의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안식처 기능이며, 이 가정은 개인의 ‘사생활’의 토대가 된다. 가정을 사회와 명확히 구별하여 악에 찬 문제가 많은 사회에서 가족원을 보호하는 역할을 가정이 해야 되는 것이며 그 중심에 여성이 있다. 서구 산업사회에서 가정은 바로 이러한 편안함을 주는 곳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는 성인 남녀가 만나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가정은 이러한 서구식 모델에 비하여 사회와 더 밀착되어 있다. 가정은 사회로 진출하는 가족원을 위한 지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다. 이 기반은 경제적 여건을 만들어주고,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을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로 만드는 데 신경을 쓰기보다 남편과 자녀를 잘 뒷바라지할 수 있는 여건을 장만하는 데 신경을 쓴다. 자녀를 위해, 남편을 위해 살림도 잘하고, 건강도 챙겨주지만 동시에 열심히 주변사람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가져다주어 다각적인 지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가족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집보다는 외부에서 쉬고, 가족은 필요하지만 편하지는 않은 모순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자신들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 중에도 바깥일이나 친구 일을 가족 일에 우선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근대 가족의 위기와 여성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형태적으로 한국 가족은 서구화된 핵가족화를 이상화하고 그 방향으로 변해왔다. 가족관계로 보면 과거 남성 중심의 친족관계가 약해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척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 대신 어머니나 부인의 가족과 가깝게 지내면서 한국 가족이 모계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생기게 되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최근에 급격히 늘어나는 이혼으로 가족 연대가 약화되어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저출산 현상과 함께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 가족을 떠받치고 있는 친족체계와 부부 간의 결합으로 이어진 고리가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한국 가족은 다른 한국사회의 부분들과 같이 압축적 경제성장기에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여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놀라운 교육열은 유능한 인력을 배출시켰으며 가족 중심의 자원 활용은 효율적인 근대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가정은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한국인의 노력이 바로 한국인의 가정생활에 그대로 반영되어 왔다. 가정생활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들이 있으며, 가족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준비된 유능한 한국의 어머니들이 한국사회의 거대한 변화의 단초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치러야 할 비용은 엄청나며, 바로 이 비용으로 한국 가족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서구의 핵가족이 비록 실천에는 한계가 있지만 감정적 안식처로서 가정(home)을 지목하는 데에 반하여 한국의 가족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 아무 데도 갈 데 없을 때 갈 수 있는 곳으로서의 인식이 강해 보인다. 서구사회가 근대화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착되면서 파편화되고 기능적인 사회적 관계가 팽배되었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처로 감정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면 왜 한국 근대 가족에서 어머니들이 그러한 전문적인 ‘감정적’ 관계를 발달시키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설명을 하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가정생활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간에 운명적인 연대가 감정적인 연대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대가족에서 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육받았으며, 살림에 바쁜 엄마도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친지와 교류했지 자녀들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세계가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믿고 지원하는 것이 가족이 할 일이지 가족 안에서 서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는 발달되지 못한 것 같다.
깊이 있는 감정적 교류를 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한국 가족들은 가정으로 돌아온다. 가정 안에 여러 기능을 하고 있는 어머니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족관계는 어머니를 통하여 연결되고 있는 것 같다. 가족 간의 연대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더 이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이 떠나게 된다. 여성이 제기하는 중장년층의 이혼은 바로 이러한 현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족 간의 소통을 회복하려면
현재 한국 가족의 문제는 가족 내부 소통의 부재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지나치게 ‘발전’의 모델을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노력해 온 한국 가정은 서로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요구하는 가족관계에 익숙해져 왔다.
그동안 한국 가정은 한국사회 발전에 중요한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이 가족에 대한 감정적 배려를 하지 못하게 한 측면도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 착취적인 면을 갖고 있는 가족의 도구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가족 성원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가족의 도구주의는 개인들의 성공을 위한 것이다. 이 측면은 이타적인 요소까지도 포함된 돌봄(caring)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의 감정까지 포함된 필요성과 욕구에 대한 예민함을 갖추지 않은 도구적 지원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가족은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핵가족으로 살아온 전통이 미흡하다. 이 미흡함이 더욱더 가족 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랫동안 한국 가족은 집안이라는 막연한 범위를 지닌 친척들과 이웃 속에서 서로 교류해 왔다. 직접적인 감정적 대립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고 보인다. 최근에 급증하는 이혼, 가족 내 폭력 등도 고립된 가족 안에 감정적 교류의 단절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 가족 내 여성들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 가족을 위하여 도구적인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 이제 가족을 너무 실제적으로 도우려고 하기보다 무엇을 느끼고 좋아하는지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감정도 식구들에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을 배워야겠다. 이 과정에서 이웃과 친구들을 초대하자.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성경 속 여성 들여다보기
“집이란 인기척에 따라서, 살고 있는 사람의 손길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참 좋은 집이 되었다가 참 이상한 집이 되었다가 그러는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랑 닮아지는 것 같습디다.” 몇 해 전 우리 사회에 엄마에 대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251-252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엄마의 시점에서 적고 있다.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엄마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이 아닐까. 엄마가 끓여주시던 구수한 내음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된장찌개며, 일일이 가시를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 위에 올려주시던 흰 생선살이며, 집안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게 쓸고 닦으시던 엄마의 모습.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엄마는 그렇게 처음부터 엄마였다. 엄마의 다른 모습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내 나이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를 바라보게 되는 요즘, 난 엄마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엄마도 한 여성이었다는 것을. 여성으로서 엄마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보았을까?
이런 상상에 잠기다 보니, 생각의 꼬리가 성경에까지 미친다. 성경 속 여성의 모습은 어떠할까?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어떻게 드러냈을지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었다. 아울러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제 이름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던 여성들의 삶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사적 영역인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
가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바이트 아브’로, ‘아버지의 집’이란 뜻이다. 이 표현으로 보건대, 한 가정의 주인은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부계 중심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자녀에 대한 부권(夫 權)을 가지며, 남편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고(탈출 20,17; 신명 5,21) 아내의 주인으로 여겨진다.
히브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딸아이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부권을 갖는다. 열두 살이 넘어 혼인하게 되면, 딸아이에 대한 부권은 남편에게로 넘어간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과 이방인을 제외하면, 혈연으로 맺어진 대가족의 한 집안은 부모와 자녀 등 여러 세대가 조상들의 땅에서 함께 살았으며, 최고의 권위는 족장인 아버지에게 있었다.
부계 중심의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라는 전통적 여성상으로서 여성은 가축 떼를 돌보고 밭에서 일도 하며 낟알을 갈아 가루를 내고, 빵을 굽고 빨래를 하며,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잠자리를 준비하며, 옷감을 짜고 남편의 얼굴과 손발을 씻어준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여성이 집 안에서 책임감 있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만 집안일을 하며 생활해야 했던, 고대 그리스 여성에게도 해당된다. 당시 공공장소는 전통적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었다. 남성은 시장과 법정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공적 연회와 극장, 강연장에 공개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유다인 철학자 필론은,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영성은 사적 영역에서 활동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공공장소와 의회, 법정, 단체 활동이나 모임, 전쟁과 평화에 관한 대화나 이를 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이 모든 일은 남자들에게나 어울린다. 하지만 여자들은 집안살림을 돌보고 사회와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 … 따라서 여자는 집안일 외에 바깥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고독 또한 집 안에서 찾아야 하며, 성전에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랑객처럼 거리를 나다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사회가 여성들의 역할을 집안에만 국한시켰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여성이 공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에 여성이 공적으로 활약한 예가 있다. 아탈야는 아들 아하즈야가 죽자 유다를 통치하기도 했고(2열왕 11장), 여예언자 훌다는 사제와 서기관, 임금의 시종에게 조언을 하기도 한다(2열왕 22,14-20). 또한 유딧기와 에스테르기는 한 나라의 구원이 한 여인의 손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느님의 법을 전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
가정이 사적 영역이라고 해서, 여성이 살림만 했던 곳은 아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정은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가정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잠언 4,209), 형제들 간에(잠언 18,19) 가져야 할 태도며,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잠언 27-29) 교육적인 가르침이 전해졌다.
부모는 함께 자녀들 교육을 맡았는데,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잠언 1,8; 참조: 6,20)라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야 할 책임이 어느 한쪽 부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에게 모두 있다는 점이다.
사실, 가정에서 가장 먼저 자녀를 교육하는 이는 어머니다. 오늘날에도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면, 하루 스물네 시간 아이와 함께 있으며 모성을 한껏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아이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친밀감과 신뢰를 배우게 된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이 커가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 다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로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잠언 31,1 참조).
반면, 아버지는 어린 자녀가 어느 정도 자라면 아들에게 종교적 내용뿐 아니라(탈출 10,2; 12,26; 13,8; 신명 4,9; 6,7.20-25; 32,7.46 참조) 엄격한 교육을 전하기도 한다(잠언 1,8; 6,20; 특히 집회 30,1-13 참조). 종교적 내용이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규정들로, 아버지는 이를 아들에게 가르친다(탈출 10,2 참조). 그뿐만 아니라 직업도 아들에게 전수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가르친다면, 어머니는 훗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자녀의 어머니가 될 딸에게 아내와 어머니로서 알아야 할 모든 내용을 가르쳐준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의 함께 언급하며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탈출 20,12; 참조: 신명 5,16; 레위 19,3).
여성은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겨지지 않던, 남성 중심의 구약성경 세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란히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전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자녀로부터 공경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로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하느님을 대변하는 이들이기보다는 자녀에게 하느님의 법, 곧 토라를 전해주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훈계했고, 자녀는 하느님께 순종하듯이 부모에게 순종했다.
“매를 아끼는 이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벌로 다스린다.”(잠언 13,24; 참조: 19,18; 23,14)라고 성경은 말한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일은 자녀가 지혜를 사랑하며(잠언 29,3)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잠언 10,5) 복되게 살라고 일러주기 위함이다(잠언 7,2 참조).
연로하신 부모를 욕하거나(레위 20,9) 부모의 뜻을 거스르거나(신명 21,18-21) 도둑질이나 돈 때문에 부모를 버려서는(잠언 19,26) 안 된다. 부모를 멸시하는 행위는 계약 공동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을 반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자로서 가정교회를 이끌었던 여성
예수님께서 혈연관계를 넘어 하느님의 새로운 가정으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제시하셨다면, 초기 교회는 개인 집에 모여 모임을 가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가정교회’다. 집안(household)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가정교회는 ‘집’이라는 사적 영역과 ‘교회’라는 공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던 터라,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처럼 편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교에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남녀 구성원은 ‘새로운 백성’이라는 이해 속에서 빵을 쪼개고 친교를 나누고자 가정교회에 모였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어 가정교회 안에서 선교 파트너십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속해있다는 분명한 자의식 속에, 가정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애를 통한 친교와 사랑의 일체감을 나누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의 권능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된다. 이제 하느님의 집안으로서 가정교회는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며, 예외 없이 모두 ‘형제자매들’이 된다.
이제 가정이란 울타리를 넘어 가정교회를 이끌었던 두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자.
복음 선교사인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사도 12,12-17)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절, 여성이 제 집을 공동체 모임 장소로 사용하도록 기꺼이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집에 모인 교회에 큰 활력을 불어넣으며 가정교회를 이끌었다.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로서만 성경에 언급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녀의 집에 모여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복음 선포와 가르침을 전한다.
그리스도교가 처한 상황에서 볼 때, 가정교회를 이끌어가는 일은 투철한 신앙심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 터. 누구의 어머니로서만 머물지 않았던 그녀였다.
한편, 부부 선교사로, 가정교회 지도자로 언급되는 부부가 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다(사도 18,2-3.18.26; 로마 16,3; 1코린 16,19; 2티모 4,19). 부부 이름이 함께 나올 때는 보통 남편 이름이 먼저 나오게 마련인데, 아내 프리스킬라가 남편 아퀼라보다 앞서 나온 곳이 네 곳이나 된다.
이는 프리스킬라가 남편 아퀼라보다 사회적 신분이 더 높았고 장인인 남편보다 교회 안에서 더 활동적으로 일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가정교회 지도자로, 부부 선교사로, 또한 복음 선교사인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준 교사이기도 했다.
프리스킬라는 예수님께서 제시한 제자직의 모델로서, 유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적 장벽을 허물고 참된 동등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여자, 아내라고 해서 남자, 남편에게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투철한 자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가정교회와 관련하여 여성이 신약성경에 거론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콜로 4,15; 필레 1-2; 로마 16,3.5; 1코린 16,9). 이는 가정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할과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직책’보다는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 곧 은사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1코린 12장 참조).
따라서 은사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다양성만 있을 뿐이며, 그 은사를 받은 이들을 서로 존중하여 교회 공동체 건설에 이바지하는, 공동선을 위하는 일만이 중요할 따름이다(1코린 12,7).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의 은사로 충만한 공동체였기에,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던 사회의 틀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관에 충실할 수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가정 공동체」는 가정을 ‘소규모의 교회’(가정교회)로 정의하며(49항 참조), “복음화의 장래는 대체로 가정교회에 달려있다.”(52항)고 강조한 바 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은 그 자체로 이미 작은 교회다.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 모여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구현해 나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면, 가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회와 교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서 작은 교회인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 사회의 기본 세포, 사회를 향한 열린 공동체, 친교와 섬김, 나눔이 이루어지는 작은 교회로 가정을 제시한다. 작은 교회인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남녀 구분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신분을 뛰어넘는 열린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일이다.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며 실제로 가족을 해체하지만 그와는 달리 또 다른 많은 사람이 여전히 가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며 ‘열린 가족’ ‘불량 가족’ ‘가족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떠올리면서도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우리에게 가족이란 …
이전에 익숙했던 개념들이 더 이상 현대인의 가족관에 적합하지 않기도 하고 이제껏 가족을 설명하던 많은 개념이 새로운 가족 형태, 현대인의 생활 감정, 삶의 현실을 적절하게 묘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묻고 싶은 질문,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주민등록 또는 호적에 같이 올라있는 사람?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한 집에 사는 사람? 가장 아쉬울 때 찾게 되는 사람? 절대적인 내 편?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긍정적 힘을 주는 사람? 생애 최고의 축복받은 선물? 마음이 맞는 사람? 어느 소설에서처럼 발가락이 닮은 사람? 그것도 아님 방귀 트는 사이? 아니, 가족이란 이 가운데 어느 것 ‘이기(being)’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로 ‘되기(becoming)’의 과정일 게다.
가족이기? 가족 되기!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면 자연스레 엄마가 되고 남성이면 자연스레 아빠가 되며 사람들은 누구나 본래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자녀가 된다고 여긴다. 생후 한 시간 이내에 엄마의 젖꼭지를 찾아 스스로 빨기 시작한다는 연구 결과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성의 경우에 더욱더 만연하다. 새끼를 보호하려고 맹렬하게 행동하는 어미 쥐, 수유할 때 평소보다 세 배의 열량을 뺏겨 체중이 10퍼센트 이상 줄어든다는 어미 개, 새끼가 무리에 어울릴 수 있을 때까지 품고 다니는 캥거루나 영장류들의 이야기들은 인간 어머니에 유비되면서 모성 본능의 실체를 단단히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 자녀, 모성 등을 생물학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은 우리가 엄마 되기, 아빠 되기, 아내 되기, 남편 되기, 자녀 되기의 사회적 맥락이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특성상 아기 생명 보존의 능력이 여성보다 훨씬 덜한 남성들을 영원히 아이 양육에 불필요한 존재이거나 양육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으로 내던져 두게 한다.
사실 인간은 생물학적 특성 이상의 존재이다. 출산한 엄마의 몸은 아기를 위해서 젖 먹일 준비태세를 갖추지만 모든 엄마가 다 자연스레 수유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유를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몸의 변화에 따른 엄마의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배고픔을 호소할 때마다 수유를 할까, 시간을 정해놓고 할까, 아이가 원하는 시기까지 해야 할까, 시간적 제한을 두고 수유를 해야 할까 등의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분명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선 사회적 영역의 것이며, 아이를 낳은 여성이면 자연스레 ‘엄마임’이 아니라 ‘엄마 되기’의 과정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빠 되기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은 저절로 아빠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의 과정을 통해 아빠가 된다. 생물학적 특성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많은 남성이 엄마와 아이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서운해한다. 그래서 아빠가 되기를 포기하고 아빠이기에 그친다. 엄마 되기와 마찬가지로 아빠 되기 역시 새로 태어난 아이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에 참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빠이기에 그치는 남성들도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턱받이에 얼룩이 묻는 정도나 바닥에 음식이 떨어지는 것 등에는 관심 두지 않는다. 아내가 부탁했으니까 또는 아이가 원하니까 음식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는 아빠 되기를 하는 남성이 어떻게 하면 턱받이에 음식을 묻히지 않고 좀 더 잘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유쾌하게 아이의 용변 시중을 들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은 부부관계에서 특히 더 필요하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만나서 생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야말로 그저 사랑해서 결혼하니 부부인 것이 아니라 부부가 되어야 한다.
1992년에 출간된 존 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원래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서로의 말에 오해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의 차이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이혼 직전에 놓인 부부들을 상당수 구제했다는 선전은 부부 되기의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책의 효과는 단지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가설 자체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들의 다름이 서로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을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
부모이기, 자녀이기, 부부이기가 아니라 엄마 되기, 아빠 되기, 자녀 되기, 부부 되기 등이 가족 되기의 구체적 과정이라고 할 때 이들의 여정에는 무엇이 놓여있어야 할까? 특히 가족 되기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영성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까?
그것은 가족 되기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넘어서려고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에 따른 보살핌에 의지하면서, 그 보살핌을 가족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마련된다. 또한 의식적으로 가족 되기의 과정을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가운데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다음의 세 가지 여정으로 펼쳐진다.
하나. 서로 보살핌의 실천
우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 보살핌의 관계에 있음을 떠올리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내가 기분 나쁜데 저 사람은?’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내가 남의 자리에 앉아보는 방법, 내 자리에 남을 앉혀보는 방법을 통해서 다가설 수 있다. 부모는 자녀의 입장에서, 자녀는 부모의 입장에서,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성경은 자녀들을 찬미할 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이들을 칭송한다.
“보라, 아들들은 주님의 선물이요, 몸의 소생은 그분의 상급이다. 젊어서 얻은 아들들은 전사의 손에 들린 화살들 같구나. 행복하여라, 제 화살통을 그들로 채운 사람! 성문에서 적들과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시편 127,3-5).
시편의 이 말씀은 자녀를 하느님이 주신 복으로 말함으로써 자녀가 지니는 의미와 부모 역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부모 되기의 영성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그러기에 부모 된 이는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자녀들을 저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 되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편함과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불평하는 태도, 자녀를 돌보는 일의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시며 만족과 기쁨을 채워주옵소서.”
서로 보살핌은 또한 부부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다. 에페소서에서 보여주는 아내 되기와 남편 되기를 위한 구절을 조금 바꾸어서 이해해 보자.
“아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에페 5,21-2.25.29 참조).
둘. 소통을 위한 실천적 영성
가족 되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가족 구성원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이 어느 한쪽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이들이 인정되고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소통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차이, 다름, 특수성이지 동일화나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 안에서 원활한 소통은 말하기와 듣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통에서 ‘말할 수 있음’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말할 수 있음이란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세계에 기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 공동체 안에서 부모가, 자녀가, 아내가, 남편이 말할 수 있는 주체이어야 함은 가족 되기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할 수 있는 이만이 유의미한 세계 경험의 주인으로 세계에 현상할 수 있으며, 역으로 말할 수 없는 이는 경험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간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늘 강조되지만 가족 모두가 말하기와 듣기의 윤리에 입각해서 대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물음에 “괜찮았어.”라고 답하는 형식적인 대화를 한다.
오늘부터는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오늘 하루 어땠어?”에서 그치지 말고,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일은 뭐였어?” “가장 안 좋았던 일은 또 뭐였어?” 등등으로. 사실 말하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결국 ‘들리도록 말하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말하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말하지 못하는, 들으려는 노력이 포기됨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들으려는 노력이 포기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화와 소통은 그저 말하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말을 듣겠다고 결정할 때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셋. 가족의 범위를 확장하는 실천적 영성
혈연가족에 대한 사랑을 유달리 강조한다. 공자는 혈연관계 특히 부모자녀의 관계를 그 어떤 다른 인간관계보다도 가까운 사이라고 말한다.
“섭공이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것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정직한 사람이란 그와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는 그 가운데 정직함이 있습니다.’”(「논어」, 자로).
혈연애를 강조하는 공자에게는 정직함의 의미도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자식은 부모의 잘못을 숨겨주고 싶은 감정에 솔직한 것이 진정한 정직함이라고 한다. 자식은 부모가 한 행동의 맞고 틀림을 문제 삼지 않으며 상호관계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요지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부모 자녀 관계 또는 혈연관계에 있어야 함을 전제하는 공자의 생각은 본의와는 달리 현실 속에서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부모 자녀 관계 또는 혈연관계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대다수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없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없으며 또 다른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없다.
이렇게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혈연가족에 대한 사랑이 모든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규정짓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또 혈연가족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은 배제와 분리의 문화를 낳을 수 있다. 내 가족, 내 부모, 내 아이를 강조함으로써 남의 가족, 남의 부모, 남의 아이를 무시하게 되는 경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제시해 주는 확장된 가족의 범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마르 3,31-35 참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성인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마태 19,4-6; 마르 10,6-9)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자칫 혈연가족으로만 그 사랑이 제한될 것을 우려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그저 가족임이 아니라 가족 되기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따라서 단지 혈연가족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더 먼 데까지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5월, 가정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그저 ‘가족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되기’를 위한 실천적 영성을 키우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혈연가족 안에 가두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남의 가족, 사회적 약자, 주변인, 소외된 이들까지도 돌보는 확장된 가족 되기의 영성 훈련이어야 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