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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 (26) 고해성사와 콜롬비아 커피
보속으로 커피나무 심으세요
콜롬비아 커피를 마실 때면 지은 죄를 살펴보려 애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콜롬비아 커피가 속삭인다. 그 소리는 묘하게도 가슴으로 들린다. 대부분 무엇인가를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이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신부님에게서 보속(Penances)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커피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해 마시는 것은 되레 스트레스를 부를 일이지만, 콜롬비아 커피를 대할 땐 그렇게 할 만하다. 콜롬비아 커피는 태생적으로 참회와 회개를 의미한다. 그 사연은 17세기 콜롬비아 산탄데르 주의 작은 마을에서 비롯됐다. 예수회 소속인 프란치스코 로메로 신부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 고행을 실천하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대서양을 건너 오지를 찾았다. 원주민들은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연에 먹을 것이 많다지만 장마나 가뭄이 이어질 때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로메로 신부는 주민들이 대를 이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커피는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금보다 비싸게 팔리기도 했다. 로메로 신부는 어렵사리 커피 묘목을 구해 직접 재배하며 주민들에게 따라 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주민들로선 커피 열매가 매력적일 수 없었다. 주렁주렁 열리는 빨간 열매가 체리처럼 탐스러웠지만, 과육 없이 두 개의 씨앗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커피는 염소가 먼저 먹기 시작해서 밤새 울어 대는 것을 보고 인간이 잠을 쫓기 위해 활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커피나무는 3~4년이 지나야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작물이다. 커피 농사가 주민들에게 외면을 받자, 로메로 신부는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는 주민마다 보속으로 커피나무를 3~4그루씩 심게 했다. 고해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커피나무를 들고 밭으로 가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산탄테르 커피밭은 가톨릭 신앙심을 상징하는 지표가 됐다. 콜롬비아 대주교는 이 소식을 접하고 무릎을 치면서 커피나무를 재배토록 하는 보속을 전 교구에 권장했다. 예수회의 이런 방침이 운동처럼 번져 1850년까지 쿤디나마르카, 안티오키아, 칼다스 등 곳곳이 커피밭으로 바뀌었다. 이런 연유로 콜롬비아는 현재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10%를 차지하는 커피 대국으로 성장했다. 세계인이 즐기는 커피 10잔 중 한 잔이 참회와 회개의 뜻을 담은 콜롬비아 커피인 셈이다.
한 잔의 콜롬비아 커피를 마주하고 고해성사의 의미를 되새긴다. 죄를 지었지만 보속을 수행함으로써 사함을 받는 것은 성체성사를 받은 신자만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거듭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 되레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다는 교회 밖의 시선도 있다. 그것은 보속이 깊은 통회를 거쳐 고백한 이에게 비로소 주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속은 단지 죄에 대해 벌을 치름으로써 용서를 받는 장치나 절차에 그치는 게 아니다. 고해성사는 신자라도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사정을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다. 자선, 금식, 기도 등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하는 보속은 반복되는 가운데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게 아니라 나약한 영혼을 단련시키는 약이 되는 것이다. 로메로 신부가 보속으로 내린 ‘커피나무 심기의 정신’은 4세기가 지나도록 콜롬비아 커피에 남아 우리의 영혼을 참회와 회개로 이끄는 경종이 되어 주고 있다.
[사유하는 커피] (27)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에 담긴 의미
이슬람 음료를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포용
커피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 가운데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는 커피 애호가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 진위를 떠나 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와 신앙인의 첫걸음인 성스러운 세례성사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커피는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선 존재였다. 무슬림들이 밤새 잠들지 않고 쿠란을 암송하기 위해 마시는 이슬람만을 위한, 무슬림의 음료였다. 더욱이 색깔도 시커멓서 악마 중 우두머리인 사탄의 음료라는 꼬리표까지 붙였다. 항간에는 커피를 마시면 사탄에게 이끌려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반면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커피에 대한 찬양이 더욱 증폭됐다. 무함마드가 동굴 고행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커피를 먹여 살렸다는 말이 돌았고, 커피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엉뚱한 신념까지 생겼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때론 진실처럼 통하기도 한다. 커피에 드라마틱한 사연이 담기기를 소망하는 것은 커피 애호가들로서는 인지상정이겠다. 하지만 그릇된 애착이 지나친 과장을 불러 결국 커피 전체의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한다.
클레멘스 8세 교황의 커피 세례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근거가 될 학술적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윌리엄 우커스가 1922년 펴낸 책 「올 어바웃 커피(All About Coffee)」에서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전제하고 서술한 사연이 현재까지 역사적 사실인 양 회자되고 있다.
1570년대 로마에 커피가 도착한 뒤 삽시간에 퍼져 나가자 일부 사제들이 근심에 빠졌다. 이슬람은 포도주를 가톨릭의 음료라고 해서 엄격하게 금지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게 이내 불편했다. 이슬람은 성체성사를 통해 성찬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부정하며 아예 와인을 마시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던 차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300여 년간 잠잠했던 가톨릭과 이슬람의 갈등이 이젠 민간의 문화 현장에서 격돌할 위기에 빠졌다. 가톨릭 일각에서 커피를 마시면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터져 나오는 험악한 상황에서 클레멘스 8세 교황을 등장시킨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요지는 “일부 사제들의 득달같은 성화에 못 이겨 교황께서 직접 커피를 드셔 보고는 ‘사탄의 음료가 왜 이렇게 맛이 좋은 것이냐. 사람들에게 이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령 사탄의 음료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음료로 만들겠다’며 세례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교황의 커피 세례는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은 사유로 이끈다. 우선 클레멘스 8세 교황이 즉위한 1592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발한 지 75년이 흐르도록 가톨릭과 개신교가 날을 세워 혼돈이 거듭되던 상황이었다. 교황은 내부의 반성을 촉구한 성 프란치스코회를 지지하며 가톨릭의 개혁을 이끌었다. 이슬람마저 품어낼 도량을 지닌 분으로서 커피 세례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클레멘스 8세 교황이 등장한 전설은 커피 논란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큰 인물이 개입할수록 여론을 쉽게 이끈다는 정점이동 효과(peak shift effect)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세례이다. 사탄의 음료가 그리스도인의 음료로 바뀌는 극단의 현상은 죄인을 천사로 바꾸는 일처럼 힘든 일이다. 일곱 성사 중 가장 먼저 받는 세례가 그야말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거룩한 성사임을 드라마틱하게 비유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 잔의 커피가 영혼을 정화할 수 있는 이유다.
[사유하는 커피] (28) 바흐의 커피 칸타타와 인류애
커피에 대한 사랑을 유쾌하게 노래하다
커피는 예술에 적잖은 영감을 주었다. 위장을 다스리는 약이나 수행자들의 잠을 쫓는 도구쯤으로 여기던 커피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덕분이었다. 그가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로 알려진 ‘칸타타 BWV 211’을 작곡한 것은 1730년이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한 바흐는 13명의 자녀를 두었고,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47세에는 맏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로서 심정을 작품에 담았다.
이 작품은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딸과 커피를 그만 마시라고 다그치는 아버지가 승강이를 벌이는 코미디이다. 기업체들의 광고 때문에 커피 칸타타라고 하면 ‘악마의 키스’를 연상하며 괴테의 파우스트 못지않은 무거운 주제일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은 유쾌한 희극이다. ‘종교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바흐가 대중을 위한 희극적 작품을 쓴 것은 ‘커피 애호가로서 커피에 대한 헌정’이라는 견해가 있다. 바흐 자신도 “모닝커피가 없으면, 나는 그저 말린 염소고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극 중의 딸이 노래하는 풍자적인 아리아가 인상적인데, 당시 다방은 여성의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 이 대목을 남성 가수가 가성으로 불러 더욱 재미를 돋우었다. 딸은 이렇게 노래한다. “커피는 너무나 달콤하구나.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백포도주보다 더 부드럽구나! 커피야말로 내가 마셔야 할 것이야. 나를 기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게 커피를 따르게 하세요.”
아버지는 당시 이슬람의 음료로 불리던 시커먼 커피가 딸의 건강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딸은 “커피를 끊지 않으면 약혼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아버지의 최후통첩에 굴복하는 척한다. 하지만 혼인계약서에 ‘커피 자유섭취 보장’이라는 조항을 슬쩍 써넣으면서 결혼에 골인한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엄마도 커피를 마시는데 너를 혼낼 수 없다. 고양이가 쥐 잡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처럼 처녀들도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다”고 유쾌하게 노래한다.
지금이야 웃으며 감상할 수 있지만, 당시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로 간주하며 터부시하는 상황에서 이 작품은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가히 혁명적인 시도였다. 커피 칸타타가 바흐와 같은 해에 태어난 ‘종교음악의 어머니’ 헨델에게서 나오지 않은 대목도 곱씹을 만하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했으며, 대부분 교회음악가로 살아갔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궁정음악가의 길을 살아간 헨델과 달리, 바흐는 거리의 악사인 아버지와 함께 일터에서 서민과 호흡했다.
음악은 신의 숭고함을 기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종교음악의 시대를 비집고, 음악을 향유하는 대상에 서민을 세운 바흐의 첫 곡이 커피 칸타타였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문화와 예술이 있지만, 통념을 깨고 경계를 넘는 지식에 의해 인류의 삶은 발전해왔다. 그 방향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평등해지는 세상을 향한다.
한 잔의 커피를 두고 연민에 빠졌을 바흐를 떠올린다.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들의 삶은 고달프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에서 스스로 내려와 허름한 카페의 한켠에서 작은 오페라 칸타타를 공연하는 바흐의 모습에서 해 질 녘 양 떼를 이끌고 높은 언덕을 힘겹게 넘어가는 목자의 모습이 비친다.
음악이 커피이고, 커피가 음악인 것은 모두 우리의 기분에, 관능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커피 칸타타가 좋은 커피만큼이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선율보다는 그 곡에 담긴 정신, 인류애에 있다. 지금 우리의 커피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유하는 커피] (29) 세례명과 커피명
좋은 커피에 걸맞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면
이름이란, 얼굴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곧 잊혔고, 내 삶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휑한 바람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일학교에 들어가 세례명으로 불릴 때에서야 어머니의 태중에서 받은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점차 세례명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인간에게 이름이란 물건에 붙는 꼬리표 이상의 무엇이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세례명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는 징표이다.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14세기 비엔 공의회(1311~1312) 이후 도입된 일종의 문화이다. 세례명이 신앙심이 깊고 죄짓지 않는 선한 사람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잊지 말고 선행을 실천하라는 가톨릭의 당부이자 당사자의 다짐이다.
세례명이 삶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19~20세기 우르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은 아브람(Abram)이었다.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브람은 99세가 돼서야 하느님에게서 ‘수많은 군중’을 뜻하는 하몬(hamon)이 합쳐진 이름 ‘아브라함(Abraham)’을 받았다. 그 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얻고 이스라엘, 이슬람 등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됐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부활에 대한 약속이 이름에 담겨 있다. 아브라함과 예수의 사례를 통해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이끌어주고 응원하는 축복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이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본능적이다, 그 사례는 18~19세기 아프리카 노예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와 노예생활에서 구한 인물이나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한 인물을 성경에서 찾아 이름을 붙였다. 당시 노예 이름의 24%가 모세, 새드락, 솔로몬 등 성경 속의 인물들이다. 새드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로니아 포로 시절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에 던져졌으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남은 인물이다.케빈 코스트너가 열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여주인공은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라는 인디언식 이름을 받으면서 비로소 그들의 세계로 동화된다. 사회학자 밀러는 “이름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붙여주고 인정해주는 사회적 개성(social personality)”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이름은 그 이상의 신비함을 담고 있다. 이름으로 커피를 생각한다. 커피에서 신을 보았다는 둥, 장미향이 풍긴다는 둥 온갖 찬사를 보내며 귀한 커피라고 자랑하는 커피들을 보면 이름이 실망스럽다. 게이샤, 모카, 루메 수단, SL23, H16, 마르셀레사 등 커피 이름들이 외래어이기에 신비감을 주지만 유래를 알면 화가 치민다. 이런 이름은 깨끗한 커피들이 지닌 고귀함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게이샤는 커피나무가 자란 아프리카 마을명인데, 그마저 게샤를 틀리게 부르고 있다. 모카는 커피를 실어 나르는 항구의 이름이고, 루메 수단은 커피가 자란 나라에서 따왔다. 무엇이 특별한지 이름을 봐선 잠재력은커녕 정체성조차 알 수 없다. H16은 교배시험장에서 샘플에 붙었던 표기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마르셀레사는 프랑스의 지명 마르세유이다. 스페셜티 커피의 유행과 함께 혈통까지 따지며 고급문화를 만들겠다고 부산을 떨면서 이름은 이렇게 붙이고 있다.
한 잔의 커피가 우리의 관능을 어루만지며 깊은 사유와 묵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렇게 무심해서는 안 된다. 세례명을 부여하는 심정으로 커피 품종의 혈통과 잠재력에 알맞은 이름을 선사하는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사유하는 커피] (30) 번식하고 번성하라
인간의 욕심, 커피의 다양성 위협
창세기를 살펴보면, 하느님이 모든 생명체에 내리신 축복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로 요약된다.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늘어서 널리 퍼져 나가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생명체에게 내린 사명이기도 하다.
최근 2~3년 커피 분야에 생소한 명칭의 품종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체의 등장을 보는 것처럼 낯설고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는 임무를 받은 인간으로서는 새로운 유전형질을 지닌 생명체의 등장을 허투루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티피카, 버번, 카투라, 모카, SL28 등 익숙한 커피 이름들도 사실 유래를 보면 실험실과 샘플 꼬리표에서 따왔거나 단순히 커피가 자란 지역이나 거래된 항구의 이름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T5175, ET 47, H10, BM139, EC14 등 새 품종들의 이름을 보면 섬뜩한 마음마저 든다.
더 걱정되는 것은 새로운 품종들의 탄생 배경이다.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았다지만, 품종의 다양성이 줄어들어 위협에 대처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대목은 번식할 순 있어도 번성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창세기 말씀에 어긋난다.
새 품종 개발은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결과물은 마땅히 그들의 소유물이 된다. 가난한 산지의 농부들은 새 품종을 심으려면 이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 묘목을 사야 한다.
새 품종들은 F1 교배종들이다. 부모 세대의 다음 세대라는 의미인데, 이게 참 영악하다. F1에서는 부모가 지닌 우수한 형질만이 발현된다. 커피에 비유한다면, 병충해에 강하고 맛도 좋은 커피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F1 교배종은 다음 세대인 F2에 가면 열성인자들이 다시 드러난다. F1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부모 세대의 약점들이 다시 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센트로아메리카노(Centro americano)라는 F1 교배종은 사티모르와 루메 수단을 교배해 만들었다. 사티모르에는 로부스타의 피가 흐르고 있어 병충해에 강한 형질이 있고, 루메 수단은 에티오피아 원종으로서 좋은 맛을 지니고 있다. 이 둘을 교배한 센트로아메리카노는 씨앗을 뿌려 증식시킬 수 없다. F2에서 병충해에 약하고 맛이 떨어지는 나무들이 절반 이상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새 품종들은 씨앗을 뿌리지 않고 묘목으로만 거래돼 밭에 심게 된다. 커피 농부들로서는 비용 부담이 커졌고, 이것은 커피값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비용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커피나무의 우수성을 돈벌이에 급급해 맛과 병충해 내성만 보고 판단하는 거대 자본의 짧은 생각이다. 씨를 뿌리지 않고 묘목으로 옮겨 심은 커피 밭은 모두 얼굴이 같은 복제인간으로 가득 찬 세상과 다를 바 없다. 가벼운 독감 바이러스 하나에도 형질이 모두 같은 탓에 순식간에 커피 밭의 모든 커피나무가 사라질 수 있다.
한 잔의 센트로아메리카노 커피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이 커피의 유전자에는 100만 년 전 아버지 카네포라와 어머니 유게니오이데스가 만나 자연스레 아라비카를 탄생시킬 때 부여된 좋은 향미의 특성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병충해와 가뭄, 때론 홍수와 싸우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깨우쳤고, 1927년에는 로부스타와 결합된 ‘하리브리드 티모르’의 과정을 거쳐 지구온난화에 따른 병충해에 대처할 힘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았다.
커피 품종을 자연 속에 그대로 두는 것이 섭리이다. 서둘러 과실을 따려는 인간의 욕심이 위협을 자초한다. 번식하고 번성하기 위해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각자 존재해야 할 사명이 있고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