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1] 김기영 (金基榮) - 나의 삶을 돌아보며 11. 남편의 교통사고와 상경 - 2
14 참아버님께서는 목회의 빈자리를 오래 둘 수는 없기 때문에 36가정의 홍성표씨를 바로 후임으로 보내셨다. 나는 이사라기보다 서너 개의 짐 보따리를 옮기는 정도로 아이들 넷을 데리고 기차로 상경하였다.
15 이상분 집사님은 너무도 안쓰러워하시며 여자 청년 식구인 이병순(430가정), 홍연표(430가정)를 함께 보내셨고, 병원 근처인 이대 후문 인근 대신동에 셋방을 얻은 후 두 언니는 돌아갔다. 나는 네 아이를 돌보랴 남편 수발하랴 병원과 집을 정신없이 오갔다. 16 2차 수술 때는 거의 매년 재수술을 해야 할 우려도 있으므로 고관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인공적으로 유착시키는 수술을 하자는 의사의 의견이 있었으나 3차 수술을 하더라도 이번에 다시 해보자 하였고 그것이 잘 되어 재활 운동을 하며 오래도록 3차 수술 없이 지낸 것은 하늘의 보우하심이었다.
17 정형외과 의사팀들은 1년 후 퇴원을 시키면서 그때의 수준으로서는 매우 세심하게 잘 된 수술이라고 말하며 평생 지켜야 할 수칙을 강조하였다. 늘 지팡이를 짚을 것, 뛰지 말 것, 음주하지 말 것, 관절에 무리를 주지 말 것 등등이었다. 18 우리가 서울로 옮긴 뒤 참부모님께서는 ‘서울공략’을 새로운 목표로 세우시고 전국의 지구를 교구로 개칭하며 교구의 숫자를 늘리시는 조직 개편 가운데 지방에서 근무하던 지구장들을 모두 서울의 교구장으로 발령하셨다.
19 퇴원 후 한동안 집에서 쉬고 있던 남편은 1969년 10월경 협회 경리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몸이 불편하니까 협회 가까운 청파동으로 이사하려 했으나 아이들 넷이 많다고 전세방을 주려 하지 않았다.
20 집이 구해지지 않는 동안은 친정살이를 하기도 하며 효창동 전농동 청파동 1가 청파동 3가 등으로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큰아이는 거의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해야 했다. 21 그러던 중 참부모님께서 36가정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는 은사를 내려 주셔서 처음으로 원효로 1가에 내 집을 갖게 되었다.
22 그것이 우리 가정의 터전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집 없는 설움은 당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신 참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