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그치자 오방색이 살차다. 불지(佛地)를 허락하는 일주문에 물기가 어린다. 천년을 염원하는 도량의 덕망이 무늬마다 맑은 꽃으로 피어난다. 단청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벽체 귀퉁이에 푸른 점 하나 찍고 싶어진다.
‘빛이 그려낸 무늬가 단청’이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무한 대지의 자연과 유한 생명을 비추는 빛이 그려낸 각종 문양은 화려하면서 온화하여 뭉클해진다. 단청은 단벽(丹壁)이라 부르기도 하며 목조건물을 장식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미적 효과다.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목조를 보호하고 방화와 마귀를 쫓는 벽사수의 중책도 겸한다.
단청은 전통 건축의 백미다. 궁궐에서 정전의 당가는 풍련, 칠보문양 등으로 장엄하게 꾸미거나 ‘일월오봉도’ 역시 용상의 권위를 화폭에 펼쳐낸다. 그래서일까, 당대 최고의 단청장이 솜씨를 부린 신비롭고 기이한 무늬와 색감은 주눅이 들 정도다. 그 단청이 산지 가람으로 옮아가면 성과 속의 영역을 분기하는 신성한 생명으로 피어, 수미단에서 빛을 발한다. 목판에 당초무늬와 연꽃과 천상의, 구름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배어난다. 자연과 인간, 산과 들, 나무와 꽃, 상상의 동물까지 조화롭게 하는 가호가 무뉫결마다 새겨져 고요한 미감 속에 빠져든다. 직선과 곡선을 묶고 푸는 단청은 자체가 숭엄하여 침묵 속 기도와 같다.
단청장이 빳빳한 초지를 반듯하게 편다. 붓을 들어 들숨을 모은 후 ‘출초, 천초, 가칠, 타분, 채색, 먹기화’를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날숨을 천천히 내쉬며 밑그림을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것을 ‘출초’라 한다. 출초한 문양의 외곽선을 초바늘로 구멍을 내는 ‘천초’를 할 때, 그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고 잡념 한 점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는다. 기둥은 붉게, 보처럼 수평 부재는 녹색으로 칠하는 과정이 ‘가칠’이다.
다음은 ‘타분’이다. 초지 본을 단청 면에 대고 호분가루가 든 주머니로 분을 바르듯이 가볍게 두드려 ‘채색’으로 이어진다. 세필로 검은 선이나 흰 선으로 문양의 윤곽선을 긋는 ‘먹기화’가 끝날 즈음 단청장은 날숨을 내쉰다. 붓끝을 초지에서 떼어낼 때 그의 눈빛은 단호하다. 단청을 입히는 순서와 사람살이가 무척 닮았다.
사람은 나이의 길섶마다 마감이 다르다. 청소년기에는 단청장이 ‘출초’하듯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는 햇내기 시기다. 20대로 접어들어 청년이 되면 학업을 이어가거나 사회 초년병 새내기가 되거나 이른 결혼을, 하여 부모라는 무거운 감투를 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생의 급물결을 타느라 정신없이 들뜨기도 하는 때가 인생의 기본 칠을 하는 ‘천초’와 ‘가칠’의 과정이다.
30대는 ‘타분’에 해당한다. 원하는 색감으로 인생을 안정적으로 ‘채색’하기 전 과정이다. 이 시기에는 모험적인 삶을 추구하거나 더러는 조심히 두드리고 스며드는 시기로 각자 개별적이다. 나는 두 번의 학원 사업으로 성공과 실패를 한꺼번에 맛보았다. 사교육 현장에서 교사로서 신뢰감을 얻기 위해 옷차림부터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던 어는 날 동료 교사에게 “선생님은 검은색 옷을 너무 좋아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여지없이 정직된 이미지를 심어주었으리라 생각이 스쳤다. 그의 말을 신중히 받아들이고 나서 변화를 시도했다. 어두운색이 주는 무게감과 차가움을 덜고자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거나 밝은 색 구두를 신는 등 노력을 해 보았다. 변화는 쉽지 않은 모험이지만 용기를 낸다면 반전을 기대해 볼 만하다. 그 이후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표정과 옷차림을 먼저 살피곤 한다. 그 사람과 마음의 결을 맞추어 보려는 나만의 색감 찾기다.
불혹이 가까우면서 바빠진다. 자기 삶의 선택에 단호해질 나이다. 그동안 풀다가 만 함수들을 풀어서 경제적 안정을 찾느라 행보가 빨라진다. 지천명을 넘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채비할까. 군더더기 같은 칙칙함은 벗고 어울리는 색감 찾기에 다시 한번 고심할 때다.
단청장이 손에 ‘장척’을 쥔다. 쥔다기보다 긴 자에 의지하여 굵은 선을 천천히 그는 게 쉬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긴 자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 잰걸음의 발자국에 미련을 두는 것, 보다 한숨 돌릴 여유를 찾아서 걸어갈 길을 예견하고 채비하는 편이 지혜롭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단청장 문양의 윤곽선을 긋는 ‘먹기화’를 할 때 미동 없이 진중하다. 젊은 날에 삶의 결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아 낭패를 본 경험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나 역시 그랬기에 붓끝이 흔들려 먹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노후를 채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사는 요령도 체득한 나이로 보인다. 자연스럽고 푸근한 단청의 색감이야말로 세월 속에서 곰삭은 숭고한 무늬가 분명하다. 나무가 불거지고 옹이진 보굿 속에서 나이테를 훤히 드러내면, 시간의 풍화가 그려낸 단청 무늬와 같다. 만물의 길흉화복을 담아낸 무늿결이 순유하길 바라며 입은 갑옷 같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찾는 것이 삶이요, 길이다. 단청장이 오방색에 아교를 섞어 ‘조채’하는 것처럼, 살면서 어떤 일을 겪느냐에 따라 삶의 농담과 질감이 달라진다. 알맞게 조채한 색으로 전통 건축의 표정을 살리는 이가 단청장이라면, 희로애락을 배합하여 평범한 생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평범한 사람도 단청장이다.
잦아든 빗줄기가 굵어진다. 대웅전 앞마당에 호법 신장처럼 서 있는 당간지주가 빗물을 머금기 시작한다. 태양 빛을 받을 때 맑은 회백색을 띤 키를 넘긴 돌리, 흙빛으로 변해가는 것 또한 색을 다시 입히는 단청이 아닐는지, 바깥 풍경을 안으로 들인 차경에 젖는 대웅전, 자연과 사람이 그려낸 선경(仙境).
근엄하던 부처의 미소가 마치 내게 묻는 듯하다. ‘너에게 어울리는 단청 색을 입었느냐?’ ‘아직 아니옵니다. 이제 겨우 나이 색을 입어야 하는 줄은 알았습니다.’ 중생의 크고 작은 소망을 귀히 여기는 불보사찰을 경배하며 문을 나선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색을 궁구한다. 변화무쌍한 색의 농담에 눈과 귀를 연다. 존엄한 대지는, 단과 청이 만들어 낸 선과 색의, 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