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막의 기구들(출 25:10-40).
(1) 법궤(Ark,출25:10-16)
법궤는 히브리어로 아론이다. 이것은 네모지게 만들어진 것으로 그 길이는 2규빗 반(112cm),넓이와 높이는 각각 1규빗반(68cm)이였다. 이 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
"이 아카시아 나무는 에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자라는 것이라8)"고 한다. 그 안, 팍을 순금으로 입혔다. 윗 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저편에 두 고리였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에 메게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출 16:33)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다(출25:16.40:20).그 두 돌비를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출 24:12)인데, 언약의 말씀(출 34:27-28,신4:13.10:1-2),언약의 비석(신9:9.15)라고도 한다9). 또 그후에는 그 궤속에 아론의 싹난지팡이를 넣어 두었다(민17:10)10).
(2) 속죄소(출25:17-22).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카포이다.
그 말은 히브리어 동사 에서 온 것인데 그 근본 뜻은 "덮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벗은 몸을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덮어 주었다. 스가리아서에 대제시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는데 그것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가리워 주었다. 그와같이 덮거나, 가리운다는 그 말이 후에는 "속죄한다"로 되었다. 즉 죄를 가리우고 제한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70인경에는 "Hilasterion"(힐라스테리온)으고 되었고, 미국 표준역 성경(A.S.V)에서는 "Mecrcy Seat"(시은소)로11),우리 한글 성경에는 속죄소로 되었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었고 길이가 2규빗 반(3휘트 9인치),넓이는 1규빗 반(2휘트 3인치)이었다.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두 그룹을 만들어 한 그룹은 이끝에, 또 한 그룹은 저끝에 연하여 있게 했다. 그 그룹들은 두 날개들을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다. 그 그룹들은 얼굴을 속죄소를 향하게 하였다. 그 그룹의 형상은 사람,사자,송아지,그리고 독수리의 모양이었고(겔1:6,계4:7-8),서 있는 높이와 두 날개의 넓이가 약 15피트였다. 한다. 그 그룹은 천사들 중의 한 종류였다(창3:24).이상의 것들은 지성소의 기구들이다.
(3) 진설병 상(출25:23-30).
이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2규빗(90cm),높이가 1규빗 반(68cm),너비가 1규빗(45cm)이고 순금으로 싸았으며, 그 위에는 항상 12덩어리의 떡이 놓여 있었다. 그 떡, 즉 진설병은 좋은 밀가구로 만들어 구운 것으로, 매 안식일에 새것으로 갈아놓았다. 그 떡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다(단 누룩과 꿀은 전혀 넣지 않고 반드시 기름과 소금을 넣게 되어 있다).
그 상의 특징을 든다면 사면에 손바닥 넓이 만큼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두르고,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네 모퉁이에 달고, 금으로 싼 조각목 채로 꿰어 메게 했다(출 25:24-28). 또 정금으로 대접, 숟가락, 병과 붓는 잔을 만들었다(출25:29-30).
(4)촛대(출25:31-40).
촛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있었고 그 줄기에는 가지 여섯이 나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꽃 형상이다. 셋은 이편으로 셋은 저편으로 향하여 총 일곱 가지의 촛대였다. 스가랴서 4장2-3절을 보면 등대 좌우에 감람나무가 있어 그 기름을 공급했다. 즉 감람유로 불을 밝히여 비취게 했다.
또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있었는데 다 정금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만드는데 소요된 금은 한달란트였다. 그 금의 싯가는 현재로 약 35,000$의 값어치가 되었다13)고 한다.
그 촛대에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고 했다(출27:21). 이것은 등불을 황혼부터 아침까지의 어두운 동안 밟힐 것을 말한다. 곧 낮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 등불은 앞을 비추게 하였다(출25:37). 그 앞은 두가지 면으로 볼 수 있는데 성소의 입구를 중심하면 출입구 쪽을 비추이게 한 것이고, 성소 내에서 앞쪽이면 진설병 상 쪽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 등불이 비취는 방향이 문제가 안되는 것은 성소 내부를 전체 밝혔기 때문이다.
(5) 향단(출37:25-29.30:1-3)
향단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모두 1규빗(46cm)으로 네모 반듯하고, 높이가 2규빗이었다. 향단은 위와 전후 좌위와 네 뿔을 금으로 싸고,주위에 금테를 둘렀고, 고리 네개를 만들어 채에 꿰게 했다. 그 채는 금으로 싸고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을 제조하는 법은 출애굽기 30장22-25절에 기록이 되었다.
이 향단은 성소에 있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와 또 저녁에 등불을 켤때에 향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그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게 되었고, 번제, 소제와 전제의 술을 붓지 못하게 하였고, 아론이 1년에 1차례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속죄하게 되었다9출30:1-5).
이상의 것들은 성소의 기구들이다.
(6)놋단 (출38:1-7.27:1-8)
이 단은 다른 단과 특이하다. 다른 단과 특이한 것은 놋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을 놋단이라고 한다.그것은 물론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놋으로 쌌다. 길이와 너비가 5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고, 높이는 3규빗으로 그 위 네 모퉁이에 각각 뿔이 있다. 또 그 단에 부속된 기구들인 통,부삽,대야,고기 갈구리,불 옮기는 그릇 등을 놋으로 만들었고, 단 중앙에 그물을 만들되 고리 넷을 만들어 불쳐서 채로 꿰게 하였다. 그 채는 조각목을 놋으로 쌌다. 이 단은 제단에 드릴 짐승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주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희생 제단이다.
(7) 세수대야(출30:17-21.40:30-32).
세수대야는 놋으로 만들어 회막과 단 사이에 두었던 것으로 전체가 놋일뿐 아니라 밭침과 그릇도 다 놋이었다. 그곳에 물을 담아서 성소 앞에 놓아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성소의 지성소를 출입하기 전후에 수족을 씻게 하였다. 만약에 여기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8) 거울(출 38:8.31:9).
거울은 출애굽기 38장 8절에 물두멍으로 나왔다. 그 물두멍은 세수대야와 연결되어 있음이 나타나 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민수기 4장 23절에 보면 레위 자손이 25세에서 50세까지가 회막에서 봉사하게 했음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 라고도 하겠다(민8:23-36 참고).
2) 성막의 모형(출26:1-27:21)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휘트,너비가 15휘트,높이가 25휘트인데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구조를 보면 아래와 같다.
(1) 휘장(출26:1-6)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다. 그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그 각 막은 길이가 28규빗 너비는 4규빗이였고,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자색,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그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을 만들어 달고, 또 금 갈고리 50을 만들어 달아 서로 연결되어 한 휘장이 되게 했다.
(2) 덮은 막(출 26:7-14).
덮는 막은 성막을 덮는 막이다. 이 막은 지성소와 성소를 동일하게 덮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염소털로 만들되 11폭으로 만들었다. 각 폭의 길이는 45휘트에, 넓이는 6휘트였다. 여섯 폭을 연결하되 여섯째 폭의 절반은 성막이 전면에 접어 드리우게 했다. 마지막 폭 가에 고리 50을 달고,놋으로 갈고리 50을 만들어 그것으로 고리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했다. 나머지 좌우편은 성막 뒤에 드리우게 했다. 그 다음 나머지는 성막지 반 막에 각각 15휘트(1규빗)씩 드리웠다. 또 붉은 물드린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어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옷덮개를 만들어 씨웠다.고로 덮막은 3중으로 되어 있었다.
(3) 널판(출26:15-30).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순금으로 쌌다. 그 널판의 길이는 10규빗,넓이는 1규빗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장부(구멍)을 내어 서로 연결되게 하였다.성막 남편을 위하여 20을 만들고, 그 널판 아래 은으로 만든 받침 40을 만들어 각 널판 아래 두 장부를 내어 끼워 바치게 했다. 북편에도 남편과 동일하게 했다. 성막 서편을 위하여 널판 여섯을 만들고, 또 성막 뒷 두 모퉁이를 위하여 널판들을 만들어 아래에서 위까지 각각 두겹 두께로 만들어 윗 고리에 이루게 했다.
그러므로 은 받침은 12개이다. 또 조각목으로 성막 띠를 만들되 금으로 쌀 것이다. 그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5개,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5개이다. 성막 뒤 서편 널판을 위하여 5개를 만들었다. 성막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꿸 금 고리를 만들고, 띠를 꿰여 널판을 연결했다(사진8참조).
(4) 안 휘장(출26:31-37).
안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여 막는 휘장으로 청색, 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고 그 위에 그룹을 수놓아 만들게 했다. 그 안 휘장은 조각목으로 만든 네 기둥에 금갈고리에 꿰어 드리우게 했다. 그 네 기둥은 네 은 받침 위에 두게 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게 위하여 들어 갔음으로 이 안에 휘장은 1년에 한번씩 그 때에만 대제사장에 의하여 걷히웠다가 다시 닫힌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때 그 안 휘장이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 갈라져서 지성소와 성소가 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안 휘장이 제거된 것이다.
(5) 안 마당(뜰)(출27:9-19).
이것은 성막 안에 있는 마당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뜰의 남편 길이가 100규빗(45미터)으로 그 길이의 세마포 포장을 치게했다. 그 포장의 기둥이 20이요. 놋 받침이 20이였다.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다. 북편도 남편과 동일하였다. 서편에는 길이가 50규빗의 포장을 치게 하되 기둥이 10이고, 놋 받침도 10이었으며 동편도 마찬가지로 50규빗의 포장이 기둥 셋과 놋받침에 걸쳐 있었고,뜰 문 이편에 15규빗의 포장이 기둥 셋과 놋받침에 걸쳐 있었고, 뜰 문 저편에도 이편과 같이 되어 있었다. 뜰 문을 위해서 청색,자색,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 놓아 짠 휘장으로 길이가 20규빗이고,기둥이 4,놋받침이 4이었다.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다.
세마포 포장의 높이는 5규빗이었다. 그리고 이 안 마당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은 다 놋으로 만들어졌다. 이 안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마당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마당에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였으며, 또 제물을 가지고 들어와 제사드릴 자도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6) 바깥마당
이곳은 소위 이방인의 마당으로 이 마당은 매우 넓다.성막 밖의 전지역이 이방인의 마당이다. 그 이유는 이방인이 이곳까지는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도둑질,여러가지 불의와 악이 행해지는 죄의 처소이다. 사죄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버린자의 거처요, 장망성이 이방인의 마당이다.
3) 성막 봉사자의 의상
그림 : 정장한 대제사장의 모형(암스텔담 성경박물관) : 가장자리로 둘려가며 금방울과 석류 모형을 교대 로 단 청색의 예봇받침 겉옷과, 그 보다 짧은 에봇과 그 위에 매ㅐㄴ 에봇띠 그리고 열 두 지파 를 각각 대표하는 열 두 보석이 달린 흉패가 보인다. 손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민17장).
제사직을 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제복으로 이 제복을 입지 않고는 제사를 드리려고 성막에 들어 가지를 못했고 제사도 드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반드시 제복을 입고야 백성을 위한 제사나, 백성의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다른 제사도 마찬가지로 제사장들에게 제복은 귀중하고 큰 뜻이 있다. 그 뜻에 대하여는 후에 생각하겠다.
먼저 대제사장의 제복은 "대제사장이 입고 있던 것과 머리에 쓰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합하여 일곱가지이다. 7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 수이다. 일곱가지 중에서
a) 속옷(고의-하체를 가리우는 것)(출28:4).
출애굽기 39장 27절에도 "그들이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라고 하였다. 이 속옷은 대제사장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들도 입었다. 그 재료는 직조한 가는 베이다(출28:39). 그 베 속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게 되어 있다.
b) 긴 옷(겉옷)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었다(출39:22)라고 하였고,또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짓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하고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청색,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아 간격하여 금장울을 달되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한석류..."(출28:32-34).
c) 에봇
에봇은 긴 앞치마와 같이 생겼는데 대제사장이 흉패 밑에 입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제복의 특징으로 금실,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의 재료들과 같은 것으로 에봇에 붙여 짜며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에봇 견대에 달게 하였다.
d) 흉패
금실,청색,자식,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박되 각 줄에 세 보석씩, 합계 열두 보석을 물리체 하였다. 이것은 열두지파(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의미함)의 이름대로 이다. 정금으로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두 고리에 매어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를 매고, 또 두 고리를 만들어 에봇에 닿은 곳에 매게했다. 그리고 그 흉패를 가슴에 부치고 그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게 했다(출 39:8.28:15-29).
e) 허리띠
이 띠는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수놓아 띠를 만들었다. 이 띠는 허리에 띠는 것으로 에봇 속에 맨 것이다(출28:39-40.39:39-).
f) 금패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패를 청색끈으로 대제사장의 관 전면에 맨 것이다(레8:9).
g) 성관
이것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이다(출28:40)15).
이상의 일곱가지는 대제사장과 또는 제사장에게 속한 제복의 용품들이다. 물론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제복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는 후에 기록하겠다.
4) 성막에 대한 반 성서적 사상
이제까지는 성서적 입장에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나서는 반 성서적 사상을 가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 주석가들은 모세 오경의 저작자와 저작 연대를 파괴, 또는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성을 흐리게 한다. 그들은 오경의 문서설을 주장한다. 즉 오경은 J.E.C.P라는 단편 문서들을 모아 어떤이가 편집하였을 뿐,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경의 저작 또는 편집 연대를 포로시대 이후로 잡는다16). 그 자유주의자들은 웰하우젠(Wellhausen) 드라이버(Driver)와 파이퍼(Preiffer)...등이다
그들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계에도 침투하여 자유주의 누룩이 부식되어 그 독소가 풍기고 있음은 통찬할 일이다.
그들은 오경 뿐만 아니라 기타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파괴하려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있는 성막에 대하여서도 성막의 제조와 제사장들과 제사의식에 관하여 P문서설을 내세운다. 즉 J.E.D에다가 제사법전을 추가한 과정이다. J.E.D.에 P.를 결합한 편잡자를 R피 라 부른다. R피가 편집한 장소는 바벨론(Babylon)이라고"한다. 또 그 편집 연대는 주전(B.C) 43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19). 그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하여서도 파괴하려 한다.
케일(Kyle)의 그의 책에서 "성막과 그것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들에 대한 근원지에 대하여 아무 이야기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적이고, 시대적으로 보아 그것은 바벨론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애굽적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나타내는 그 시대 성막문화가 증명한다. 애굽의 건축 안 마당이.. 현대에 증거가 된다. 고고학의 발굴자들에 의하여 잘보여 준다."20)고 했다. 또 그는 계속해서 "그것들은 애굽의 것과 같다. 즉 성막의 기구들과 제사장의 의상이 같다"21)고 했다. "그러나 이것들의 그 확실한 애굽의 특성은 바벨론(Babylon)의 영향 밑에서 성막의 기원을 만들어 후대에 출애굽기의 성막을 낳았다."22)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이 잘 말씀하고 있고, 또 선민 의식이 강하고 배외사상이 강한 그들이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모방할리 없으며 하필 신광야에서 나와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동안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는 구태여 애굽의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상황으로 보아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이 아님이 확실하다.또 그것들이 애굽과 바벨론의 것과 대동소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동소이 하다거나 같은 것으로 이야기함은 큰 잘못이 아닐까?
또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인 진화를 믿고, 초자연성과 계시성을 인정하지 안는 비신앙성에서 나온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5)성막의 역사적 변화
성막의 이동 상황과 그 성막의 외형적인 변화와 성막의 기구들의 변화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으나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특별히 취급할 문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이다. 이 출애굽 시기에 따라 성막의 건조 시기가 크게 차이가 있다. 이 출애굽 연대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니
할레이(Henry H.Halley)씨는 그의 "성경 핸드북"에서 두가지의 학설을 제시하고 독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 즉 "아멘호텝 2세(Aamenhotep II.1450-1420 B.C)와 메렌프다(Melenphtah,1235-1220년 B.C)로 만약 출애굽이 아멘호텝 2세의 치하에서 행하여 졌다고 하면 토트메스 3세(Thotmese III)는 이스라엘을 중압한 자로되고 그의 자매는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 자매가 유명한 할셉서트(Hatshepsut)여왕이다.... 만약 출애굽이 메렌프다의 치하이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의 대 압박자는 람세스 2세(Ramses II)로 그의 딸이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와같이 모세는 도드메스 3세의 치하, 또는 람세스 2세의 치하나 그 어느 사람에게 양육이 되었다"23)고 했다. 이에 대한 결판을 나린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Dictionary"와 Bible Dictionary는 "성막의 소개 날자는 1220 B.C경이라"24)고 했다. 즉 할레이씨가 내세운 두 학설 중에 후자를 택했다. 이에 반하여 "구약사기를 쓴 소안론 박사는 전자를 택하여 주전 1491-1451로 보았다"25).그러나 전자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연대의 차이가 있다. 김윤국 박사는 "구약 세계 역사"에서 주전 약 1450-1400년으로 잡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했다"26) 본인도 위의 연대가 합리적이고 실제의 연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고고학적인 증거는 본인의 "구약고고학"을 참고 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50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하의 문제를 생각하기로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그림 : 시내산 출애굽기 40장 2.17절에 의하면 제2년 1월 1일에 시내산밑에서 성막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오랜시일을 소비하여 성막을 제조하여 세웠는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 없다. 물론 솔로몬왕이 세운 성전에 대하여는 제조 연대와 기한이 나타나 있다(왕상5장.6장).그러나 이 광야에서 제조한 성막의 연대는 미지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할 때는 법궤와 모든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 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각각 맡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분해하여 가지고 운반했다(민 3:31-32.4:15).그 외에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옮기는 부분도 있었다(민 7:1-11).
우리는 성막 제조의 시간을 알 수는 없으나 그 성막이 제조된 후에 시내산 밑에 정주한 기간은 알 수 있다고 본다. 민수기 10장 11절에 의하면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1월 1일에 제조되었으니, 약 50일간 정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여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어 "아라비아 중심지인 호렙과 유다의 네게브(Negeb)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를 사이에 두고 무섭고 험한 광야를 따라 나아갔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들이 여행때 통과한 지명과 기한은 민수기 33장16-4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는 약 38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때 성막은 37년간 여기에서 배회했다. 이 기간에 하나님께 정규적인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암5:25).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하여 몇가지 밖에는 알수가 없다(민 10:33-36)27). 즉
첫째,하나님께서 행진케 하였고,
둘째, 대적들과 전쟁중에 있었고,
끝으로, 성막을 정상적으로 세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 가나안 정착
그림 : 가나안의 성소 / 므겟도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제단으로 현재의 지층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마침내 요르단을 건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성막 안치의 장소이다. 그 장소는 (1) 사람들이 살지 않고,(2) 가능한 한 사람의 무덤들로 더럽힘이 없는 곳이라야 하는데 이런 곳은 여리고 근처였다. 그곳은 길갈로 알려진 곳이다(수4:19.5:10.9:6.10:6.43).길갈은 임시 장소였다. 그래서 마침내 성막의 이동을 단행했는데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졌다. 성막이 그곳에 정주하게 된 때는 여호수아 당시에 된 것으로 아는데 길갈에서 약 32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즉 길갈에서 실로로 이동한 것이다(수18:1.19:51).이 실로에 있을 때 성전(Temple)으로 되었다(삼상1:9-,수1:9.3;3).28)
이때까지 성막의 구조와 성막의 기구는 별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성막이 분해되고, 제단이 새로 건립이 되었다. 그 이유는 레위 자손이 분산되고, 그들로 인하여 새 제단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제단 분립의 시작이다(삿 19:1-31).벧엘에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다(삿20:29-). 이때에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삿21:19-).
(3) 실로의 멸망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초기에 가졌던 명성을 잃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다. 사무엘서 초기의 블레셋과의 전쟁은 심히 파격적이었다. 실로에서 언약궤를 옮겨다 놓게 되었고(삼상 4:1-),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법궤와 같이 전장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법궤와 같이 계시고, 법궤가 움직이는 곳으로 하나님도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를 전장에 나가고 제사장들이 전쟁에 나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군사들의 신앙무장과 정신적인 사기의 진작을 위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법궤에서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사기는 무용했고 그들의 기대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언약궤, 즉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고, 그 궤를 섬기던 두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앞에서 아무 도움이 없이 패하고 말았다..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서 망한 것이 확실하다.
실로의 파괴는 역사들이 암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시78:60)라 하였으며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렘 7:12)고 함은 의심없이 실로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막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 같으며 법궤와 성막이 놉에서 다시 만난다 29).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멸망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변혁을 가져와, 시간적인 신앙으로 돌아 간 것 같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 섰으며, 인위적인 면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간것 같다. 그 증거는 대제사장의 성격이 상실된 것이다. 사무엘은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와 정치적인 지도자의 역활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반환되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명성과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것 같다.
법궤는 벳세메스에 잠간 머물렀다가(삼상 6:19-)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여년간 있었다(삼상 7:1.2). 그런데 사무엘은 벧엘.미스바,라마와 길갈 등을 순회하며 그 뜰(안 마당)에서 예식과 공중생활과 형사상의 관리 등을 장악하여 시행하였다(삼상 7:15-17). 즉 이것은 지성소가 비 지역화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생활에 큰 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었으며 완전히 비 지역화 되기는 다윗왕 때가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는 지역을 초월하신 신임을 직접 말씀하셨다(대상 17:1-15).
(5)놉과 기브온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망명해 온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자로(삼상 21:1-6) 아히멜렉은 사무엘 상 14장 3절에 나오는 아히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놉은 예루스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나 떨어진 높은 곳으로 시온보다 90미터나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사울왕에 의하여 모든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아비아달 하나만이 (삼상 22:1)구원 받을 때까지 몇년간 있었다. 그후에 사울왕은 성막을 기브온(대상 16:39.21:29)으로 옮긴 것 같다. 기브온은 예루스에서 10킬로미터,벧엘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6) 법궤의 복귀
사울왕이 법궤를 옮긴 후에 다윗왕에 의하여 한 가지 일이 행해진 것이 있다(대상 16:40). 다윗이 노획한 여부스(후에 예루스)의 요새에 그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지었다. 또 다윗은 법궤를 위하여 한 곳을 택했고, 기브온에 있던 성막의 모형인 장막을 시온에 쳤다(삼하 6:17,대상 16:1). 그는 제단도 준비했다. 그후에 그는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이곳으로 가져왔다(삼하6:11).그때 웃시아의 일로 예루스 가까운 레위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놓았다가 거기서 3개월 후에 다시 다윗성에 봉안하게 되었다.
(7) 두 성막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 제단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어 성막에 안치 된 것 같다(왕상 3:1-4). 그 법궤와 제단은 성전이 건축되므로 하나로 통합이 된 것 같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에 있던 제단이 솔로몬왕 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 같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분실된 것이 많았으나, 그런대로 남은 기구들을 가지고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 제사드렸다(대상 2:19,대하 1:5-).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분산된 유품들을 모아 그 성전에 안치하고 보존하게 되었다(왕상 8:4).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약 200년후에 역사에 나타나 기를 그쳤다30).이때는 모세의 성막과 성막의 기구와 부속품들이 사라지고, 변형되고 개조된 것 같다. 그 예로 성막이 두 곳에 있은 것이나,솔로몬이 성전의 모든 것을 금으로 제조한 것이라 하겠다. 위 두 성막 중에 어느 것이 모세 시대의 성막과 그 기구에 가까우냐?하는 것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브온의 것이라 한다. 그 이유는 기브온의 것은 큰 것이었고,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었으나, 예루살렘것은 솔로몬에 의하여 신축된 것이기 때문이다(왕상 3:1-). 또 성경에 보면 솔ㄹ오몬이 기구들을 만들어 두었다(대하 4:19-) 고 했다.
위의 성구는 솔로몬이 새로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 기구들을 새로 만들어 둔 것도 되지만 옛날 성막과 그 속의 기구들이 없어진 증거도 된다고 하겠다. 오랜동안에 여러가지 재난과 혼란으로 없으진 것도 같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는 두 돌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왕상 8:9,대하 5:2-10참조).이 때는 솔로몬, 시대였다.
(8) 성막과 성전의 수난사
성막의 성구오 비품들은 솔로몬시대 이전에 전쟁.재화등으로 인하여 파괴, 또는 유실된 것 같다. 성경에 의하면 전쟁과 여러 재화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성막에까지 미친 흔적이 적지 않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법궤가 빼앗겼다가 얼마 후에 다시 찾은 일이 있으나 그때에 법궤만이 아니라 법궤속의 소장품과 법궤를 덮었던 어떤 막도 있었다면 그것도 탈취되었을 것이다(삼하 4:-6:).
그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으로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타락과 악한 왕들에 의하여 손상과 피해가 컸던 것이다. 역대기하 28장 24절에 여호와의 전의 기구가 훼파되었다고 기록이 되었고, 역대기하 12장 9절에는 외세에 의한 겁탈과 재건이(대하 29:1-)나타나 있다. 그 보다 더욱 확증이 되는 것은 바벨론의 포로인 것이다. 그 때에 성전의 모든 기명이 겁탈되고,또 소실되었다(왕하 24:13,슥1:3,단1:1-2.5:2,대하36:18).
성경에 나타나기를 성전은 두번 탈취를 당했는데 첫번째는 여호야김 왕때(대하 36:7)며, 두번째는 여호야긴 왕때(대하 36:7)며, 두번째는 여호야긴 왕때(대하 36:10)이다.
성전이 소화된 것은 역대하 36장 19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최후도 되지만 모세의 성막의 최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