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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11과 붙잡히시고 심문받으심
(Taken and Tried)
<9월 7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부패하고 우상숭배하는 백성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씀이 여기에 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백성을 위하여 그분 자신의 특별한 형상이신 독생자까지도 예비하셨거늘 어떻게 그분께서 그 백성을 포기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를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내어 주도록 허용하셨다. 그분께서는 친히 죄를 짊어지신 분을 향해 아버지라는 사랑스러운 자질을 벗어 버리시고 심판자의 신분을 취하셨다.
이런 점에서 지극히 경이롭게 그분의 사랑은 반역한 인류의 마음을 끈다. 천사들이 볼 때에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롬 5:8)셨으니 인간에게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가!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를 위해 고난 당하셨다. 그분께서는 나무 위에서 그분의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목사, 245~246)
◎ 우리가 잃어버린 상태로 있는 한 예수님은 천국을 동경할 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비난과 모욕의 생애,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기 위해 하늘 궁전을 떠나셨다. 하늘의 무한한 보화로 부요하셨던 그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분의 궁핍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밟으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리워진 사슬의 고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자비의 계획으로 그분과 하나 되었음을 깨닫고 또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그분과 함께 나아가게 된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분께서 걸어가신 곳을 걸어 보고 그분께서 가르치기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그처럼 자주 머물렀던 들판과 골짜기들을 바라보는 것이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 위해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로 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병자의 침상 곁에서, 가난한 오두막에서, 사람이 많은 대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치료, 105-106)
◎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의 깊이 상고하고 그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를 깨닫기 위한 갈망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으로 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얻게 되는데 이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상고하므로 불순종의 죄와 대조가 되는 순종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나타냄, 132)
<9월 8일/일, 기억해야 할 사랑>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마리아는 예수께로부터 그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을 듣자 깊은 사랑과 슬픔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였다. 개인적으로 크게 희생하여 그녀는 그분의 몸에 부을 “값진 향유” 한 옥합을 샀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은 그분께서 왕이 되려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였으며 그녀는 제일 먼저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열망하였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다. 그리고 울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써 발을 적시고 길게 물결치는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씻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녀의 동작은 타인의 주목을 끌지 않게 진행되었으나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으므로 그녀의 행위는 마침내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
구주의 시신에 아낌없이 부으려고 했던 향기로운 선물을 마리아는 그분의 산 몸에 부었다. 장사 때에 이 향기는 무덤에만 가득할 뿐이지만, 지금 이 향기는 그녀의 믿음과 사랑의 보증으로서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분이 받으실 큰 시련의 어둠으로 내려가실 때 그분이 구속하신 자들에게서 받게 될 열렬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 행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가셨다. (소망, 559~560)
◎ 사탄은 유다를 속여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다의 마음은 항상 육적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능한 역사들을 목격해 왔으며, 봉사 기간 중 줄곧 그분과 함께 했고 그분이 메시아라는 압도적인 증거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인색하고 탐욕이 많았다. 그는 돈을 사랑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진 값진 향유에 대하여 화를 내며 불평하였다. … 유다는 자기의 탐욕에 대한 변명으로서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이기적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위하여 그에게 맡겨 둔 것들을 자주 자신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님의 안락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분의 결핍에도 무관심했다. 그리고 자기의 탐욕을 변명하기 위하여 자주 가난한 자들을 언급했다. 마리아의 이런 관대한 행위는 그의 탐욕적인 성향에 매우 날카로운 견책이 되었다. 사탄의 유혹이 유다의 마음 속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이 준비되었다. (초기, 165)
◎ 유다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병을 확보하기를 얼마나 열망하는지를 알고는 은 몇 냥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배반하겠다고 제의했다. 돈을 사랑한 나머지 그는 그의 주님을 그분의 철천지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기로 동의하고 말았다. 사탄은 직접 유다를 통해 일하고 있었으며, 감명 깊은 마지막 만찬 분위기 속에서도 이 배반자는 그의 주님을 배반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초기, 166)
<9월 9일/월, 마지막 만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들[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유월절을 규례로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들의 자녀들이 그 예배가 무슨 의미인지 물으면 그들이 애굽에서 놀라운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멸망시키는 천사가 밤에 사람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이를 죽이려고 나갔을 때, 그는 그들의 집을 지나갔고, 문설주에 피의 표식이 있는 히브리인 중 한 사람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은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기억을 자녀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주신 이 놀라운 기념 예식에 감사했다. …
유월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돌아보는 동시에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위해 죽임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상징이었다. 문설주에 뿌려진 피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 했고, 죄 많은 인간이 사탄의 권세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그리고 최후의 구원을 위해 그 피의 공로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예표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고, 그날 밤에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여 지키도록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영적선물 3권, 223, 225)
◎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저녁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막 14:27)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위험을 알지 못했다. 자부심(自負心)이 그의 판단을 그르쳤다. 그는 자기 자신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 시험이 이르러 왔을 때 그는 저주와 맹세로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가 이제 막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하여 놀라움과 충격을 느끼면서 자기의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도 그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뒤섞인 서글픈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를 그윽히 바라보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통회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환점에 이르러 베드로는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였다. 그는 세리처럼 통회하고 회개하였고 세리처럼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에게 용서를 보증해 주었다. (실물, 152-154)
◎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분의 제자들을 바라보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시련에서 구원할 수 없었으나 그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무덤의 속박을 깨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약해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그들은 용서의 보증을 받았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들은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그리스도께 소중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망, 674)
<9월 10일/화, 겟세마네>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구주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계셨다. 유월절의 크고 둥근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순례자들의 천막이 이룬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러나 겟세마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분은 이상하게도 침묵에 잠기셨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기도와 명상을 하기 위하여 이 곳에 오셨으나 그분의 이 마지막 고민의 밤처럼 이렇게 슬픔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오신 적응 일찍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서 행하셨다. …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붙드시는 임재의 빛을 차단당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분은 범죄자들과 같이 헤아림을 받으셨다. …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으시고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으신다. (소망, 685)
◎ 이 두려운 위기, 만물이 위험에 처하고 신비로운 잔이 고뇌 하시는 분의 손에서 떨고 있던 그 때 하늘이 열리며 폭풍이 몰아치는 그 위급한 시간의 흑암 가운데 한 빛이 비추었는데, 사탄이 떨어져 나간 그 지위를 차지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힘 있는 천사가 그리스도 곁에 내려왔다. 천사는 그리스도의 손에서 잔을 취하려고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사랑의 보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마시도록 격려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겸하여 가지신 탄원자에게 힘을 주려고 왔다. 그분의 고통의 결과로 구원을 얻게 될 영혼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천사는 그리스도께 열려 있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 천사는 그분의 아버지께서 사탄보다 더욱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시므로, 그분의 죽음은 사탄이 완전히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 세상 나라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그분께 보증하였다. 큰 무리의 인류가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을 볼 때에 그분은 영혼의 수고를 보고 만족하실 것이라고 그 천사는 말하였다. (소망, 693-694)
◎ 우리는 지금 약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태도로 안전할 수 없다. 모든 능력을 사용해야 하며, 예리하고, 침착하며,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떤 인간의 지혜든지 이러한 시대에 일을 계획하며 구상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주 예수님 앞에서 금식과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계획을 공개해야 하며 그대의 길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의 길을 지시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허락의 말씀이 있다. 주님께서는 무궁무진한 자원을 가지고 계신다. 만물을 그 이름으로 불러 내시고 하늘의 별들을 제자리에 붙들고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개인적으로 보호하고 계신다. …
나는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를 저들의 만족하고 신뢰할 분으로 삼을 때에 저들에게 온갖 가능성과 실현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숨기운 자의 생명은 언제나 피난처를 갖게 되며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할 수 있다. (2기별, 364)
<9월 11일/수, 다 버리고 예수에게서 도망하니>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잡아 묶도록 허락하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예수께서 굴욕을 허락하시는 데 대하여 그들은 상심하였다.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폭도들에게 굴복하는 예수님을 힐책하였다. 분노와 공포 가운데서 베드로는 이제 그들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같이 도망할 것을 미리 예언하셨다. “보라 너희가 다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소망, 697)
◎ 예수께서는 살의를 품은 폭도들의 수중에 홀로 남겨졌다. 오, 그때 사탄이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반대로 하나님의 천사들의 슬픔과 서글픔은 얼마나 컷겠는가! 거룩한 천사들의 많은 중대의 선두에는 지휘하는 천사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대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도록 파송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던져진 모든 모욕과 그분에게 가한 모든 잔인함을 기록하고 예수께서 당하시는 모든 고뇌의 아픔을 낱낱이 등재할 것이었다. 이는 이 두려운 장면에 가담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생생한 글씨체로 그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168)
◎ 향기로운 향연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있는 동안에 대제사장이 속죄소 위에 따뜻한 피를 뿌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효력을 간구할 때, 우리 기도는 구주의 품성의 공로의 향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한 모든 죄를 그분은 제거하신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의 생명이다. 광야에서 모세에 의하여 뱀이 들려지고, 불 뱀에게 물린 모든 이에게 쳐다보고 살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져야만 했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죄인이 들림을 받으신 구주를 바라보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그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지 않고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던 베드로처럼 구원받을 수 없다. (목사, 92-93)
<9월 12일/목, 너는 누구냐?>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베드로는 그분이 배반당하신 후에 그의 주님을 쫓아갔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당하시는지 보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안전을 염려한 나머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단언했다. 제자들은 그들의 단순한 언어로 인해 눈에 띄었는데, 베드로는 자기를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저주와 맹세를 하면서 세 번 그런 비난을 부인하였다. 베드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슬픔 어린 책망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셨다. 그러자 그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자기의 단호한 선언을 기억했다. 그는 심지어 저주와 맹세를 하면서까지 그의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베드로의 마음을 녹였으며 그를 건져 주었다. 그는 심히 통곡하며 자기의 큰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그리하여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초기, 169-170)
◎ 예수께서는 성난 군중이 그분에게 가장 악랄한 희롱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들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서 계셨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 언젠가는 그들이 피하여 숨기를 바랄 얼굴이요 하나님의 도성에 빛을 비추고 해보다 더 찬란하게 빛을 비출 바로 그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성난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분의 머리를 낡은 천으로 덮어씌우고 그분의 눈을 가리고는 얼굴을 치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조롱하였다. 천사들 가운데 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즉각 그분을 구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휘하는 천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제지했다. (초기, 170)
◎ 나는 진실로 우리의 기분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못 되는 것이 아님을 인하여 기뻐한다. 원수는 그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일들을 행하였으므로 그분께서 그대를 다시는 사랑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그대를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동일한 경우를 위하여 언질이 주어진 것을 그분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시며, 그대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귀하신 구주께서는 그대가 시험을 받아 연약함 가운데서 정복을 당한 까닭으로 그대를 내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대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베드로는 시련의 때에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가련한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다. 비록 베드로가 자신을 미워하였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에게 사랑의 기별을 보내셨다. 오, 우리에게는 얼마나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구세주께서 계시는가!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잘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을 알기 위하여, 285)
◎ 이제 사랑하는 구세주의 품에서 걱정하며 벗어나지 말고 믿음으로 신뢰하며 쉬어라. 그분은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돌보신다. 그분은 그대를 축복하시고 그대에게 평화와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그대에게 "그대의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는 신체적 허약함으로 우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매일 그대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분은 그대를 용서하시되 풍성하게 용서하실 것이다. 그대의 영혼에 하나님의 다정한 약속들을 간직하라. 예수님은 우리의 변함없는 확실한 친구이시며 그분은 그대가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바라보라. (영문 서신 49, 1896)
<9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자만심을 삼가라” (높은 부르심, 30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 13:37~38).
베드로가 넘어지기 바로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눅 22:31)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은 얼마나 참되었는가! 그분의 경고야말로 얼마나 동정적이었는가! 그러나 그 경고는 분개하게 했다. 베드로는 스스로 만족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경고한 그 문제에 대하여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로 준비하였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자기과신은 그를 무너지게 하는 데 이르렀다. 그는 자기를 시험하도록 사탄을 시험하여 그 간교한 원수의 꾀에 넘어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제일 필요로 하였을 때 그는 원수의 편에 서서 공공연히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다. …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아 신뢰 가운데서 그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부르짖을 때는 베드로가 선 곳에 서게 되며 또한 저들의 자아 만족 때문에 저들은 쉽게 사탄의 꾀에 밥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자들은 자신보다 더 큰 힘을 의뢰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때는 사탄은 우리를 대적할 아무런 힘이 없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은 쉽게 패배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원수의 땅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자들을 그들이 받는 상처에서 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만족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자신이 주님보다 더 잘 안다고 행동하는 자에게 그의 상상적인 힘대로 가도록 내버려두실 것이다. 그때 고통이 오고, 불구가 되며 아마도 패배와 죽음이 이를 것이다.
전쟁에서 원수는 방어하는 자들의 가장 약한 점들을 공격하므로 유익을 얻는다. 여기에서 그는 가장 맹렬하게 공격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방어하는 데 약점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경의 도움으로 방어해야 한다. 시험받은 영혼은 유혹자를 만났을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대하셨던 모본이신 분을 따른다면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씀으로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설 수 있다. (높은 부르심, 306-307)
◎ “유다” (소망, 716~722)
유다의 생애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던 삶의 슬픈 종말을 보여준다. 만일 유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 전에 죽었더라면 그는 열두 제자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크게 아쉬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 세기를 통하여 그를 따라다닌 증오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생애 종말에 나타난 특질들 때문이었다. 그의 특성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다처럼 신성한 직분을 배반할 모든 자에게 일종의 경고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월절 조금 전에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다시 했다. 그때 그는 구주께서 기도하고 명상하기 위하여 자주 가시는 곳에서 그분을 잡기로 계획했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있은 후에 유다는 자기가 하기로 약속한 행동을 반성할 기회가 있었으나 자신의 의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종 한 명의 몸 값인 은 삼십에 영광의 주를 팔아서 치욕과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유다는 본래 돈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행동을 할 만큼 늘 부패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악한 탐욕의 정신을 길러서 마침내 그것이 그의 생애의 주된 동기가 되도록 했다. 돈에 대한 애착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을 능가했다. 한 가지 악의 노예가 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유다는 군중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을 때 제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들이 회당과 바닷가와 산 위에서 들은 그분의 말씀에 도취되어 있을 때 구주의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유다는 마을과 도시로부터 예수님께 모여드는 병자들과 다리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보았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구주의 큰 이적을 목격했다. 그는 몸소 그리스도의 능력의 증거를 체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일찍이 그가 들은 모든 가르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크신 선생님을 사랑하였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그는 자기의 품성과 생애가 변화되기를 바랐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연합시킴으로 그 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했다. 구주께서는 유다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열둘 중의 한 자리를 유다에게 주셨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전도 사업을 하도록 위탁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 그는 세속적인 야망과 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 사신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거룩하신 분께서 하시는 인격 형성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평하고 비난하는 성질을 길렀다.
유다는 제자들에게 몹시 존경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유다는 자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그의 동료들의 판단력과 능력을 매우 열등하게 보았다. 그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오는 기회를 볼 줄 모르고 환경도 이용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이러한 근시안적인 사람들을 지도자로 삼아서는 결코 번영하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는 성급하여 생각 없이 날뛴다. 유다는 요한을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진리나 주워 모아 간직하는 보잘것없는 재정가로 생각했다. 모든 일에 정확하게 행하도록 훈련받은 마태는 유별나게 정직하지만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사숙고하고 이 일에 너무 골똘하여 그에게 민첩하고 긴 안목을 요하는 사업을 하도록 위임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유다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유다는 모든 제자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고 살림꾼으로 자신의 수완이 아니면 교회는 때때로 혼란과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우쭐했다. 유다는 자신을 실패를 모르는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이 사업에 영예를 더해 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으며, 항상 자신을 그렇게 나타냈다.
유다는 자기 품성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것을 알고 고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처지에 그를 두셨다. 제자들을 위한 회계로서 그는 그 적은 집단의 필수품을 준비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유월절에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께서 그에게 잔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사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명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통하여 유다는 이기심 없는 정신을 계발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날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고 그분의 무아의 생애를 보면서도 유다는 탐욕적인 기질에 사로잡혔다. 손에 들어오는 적은 돈이 그에게 계속 유혹물이 되었다. 가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적은 봉사를 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시간을 쓰게 되면 그는 이 빈약한 자금에서 자기 자신이 한 봉사의 대가를 챙겼다. 자기가 볼 때는 이러한 구실이 자기 행동에 대한 핑계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도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주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유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셨으면 하고 바라는 일에 선을 그어 놓았다. 그는 침례자 요한이 옥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해 놓았으나 요한은 결국 목 베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분의 왕권을 주장하고, 요한의 죽음에 복수하는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셨다. 유다는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원했다. 만일 예수께서 저들의 계획 수행을 막지 않으신다면 사업은 더욱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적개심이 증가하는 것에 유의하였으며 그들이 그리스도께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요구할 때 저들의 도전이 무시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은 불신에 대해 열려 있었고 원수는 의심과 반역의 정신을 넣어 주었다.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용기를 꺾는 일에 그처럼 골똘하시는가? 왜 그분은 그분 자신과 제자들에게 시련과 박해를 예언하셨는가? 새 왕국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리라는 기대가 유다가 그리스도의 사업을 지지하게 하였다. 그의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는가? 유다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사실을 의심했고 예수님의 크신 이적들에 대한 어떤 설명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구주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하시리라는 생각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그는 그 일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유다는 배고픈 군중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도왔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축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만족이란 항상 하나님께 봉사함으로 이르러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군중 가운데서 병자와 고통하는 자를 그리스도께 데리고 오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크신 회복자의 치료 능력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큰 구원과 기쁨과 즐거움이 이르러 오는지를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방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다. 유다는 떡 덩이의 이적으로 일어난 군중의 열광을 이용하려 한 첫 번째 사람이다. 유다는 강제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희망이 컸기에 실망은 더 쓰라렸다.
회당에서 하신 생명의 떡에 관한 그리스도의 강론은 유다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유다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속적 유익보다는 오히려 영적 유익을 제공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스스로 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명예도 갖지 못할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높은 지위도 주지 못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였다.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너무 가까이 밀착시키지 않게 해서 원할 때는 언제든지 떨어져 나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로 했고 그렇게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유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켜 제자들이 당혹스럽게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반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논증을 되풀이하면서 논쟁을 끌어들이고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유다는 복음 사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과 시련, 고난과 표면상 장애물들은 복음의 진실성에 불리한 증거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성경절을 소개하고자 했다.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이러한 성경절들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밀려오는 낙담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성실하게 보이는 방법으로 이 모든 일을 해나갔다. 제자들이 크신 교사의 말씀을 굳게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찾고 있는 반면에 유다는 그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다른 길로 인도하려 했다. 이와 같이 유다는 매우 종교적이고 표면상으로는 현명하게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빛과는 전혀 다른 견지에서 문제를 제시하고 그분의 말씀에 주께서 전달하시지 않은 다른 의미를 첨가하고 있었다. 그의 제안은 현세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켜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중대한 일들을 생각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큰 자가 될 것이냐 하는 분쟁은 대체로 유다가 일으켰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하셨을 때 유다는 불쾌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였다. 이 관원과 같은 사람들이 신자들과 연결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유다는 자기를 고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작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많은 계획을 제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원칙과 방법이 그리스도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일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는 유다가 마음속으로 동의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제자들 중에 불만의 누룩이 빨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일으키는 참 매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으나 예수께서는 사탄이 그의 특성을 유다에게 전달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통로를 열게 하는 것을 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배반당하시기 일 년 전에 이런 사실을 발표하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구주의 가르침을 공공연히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 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불평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구주의 발에 기름을 부었을 때 유다는 자기의 탐욕적인 기질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자, 그의 이러한 정신은 원한으로 변하는 듯했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장벽을 무너뜨렸고, 오랫동안 품고 있던 탐욕이 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죄와 뒷거래하기를 고집하는 모든 사람의 경험이 될 것이다. 저항하지 않고 정복하지 않은 부패의 요소들은 사탄의 유혹에 응하여 영혼으로 그의 뜻에 복종하게 한다.
그러나 유다는 아직 완전히 마음이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두 번이나 구주를 배반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후에도 회개할 기회는 있었다. 유월절 만찬 때에 예수께서는 반역자의 의도를 폭로하심으로 그분의 신성을 밝히셨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제자들에 대한 봉사에 유다까지 포함시키셨다. 그러나 마지막 사랑의 호소가 무시되었다. 바로 그때 유다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예수께서 씻기셨던 발이 그분을 팔기 위하여 나아갔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면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유다는 추리하였다. 구주를 파는 그의 행동이 결과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죽지 않도록 되어 있다면 그 일은 오직 그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하게 할 것이다. 좌우간 유다는 자기의 배반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했다. 그는 주님을 파는 일로 빈틈없는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유다가 그분을 배반하는 까닭은 그분께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구주께서 그때부터 자기에게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도록 그 일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주께서 비유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자주 그분의 뚜렷한 예증에 넋을 잃었던가! 얼마나 자주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정죄를 선언하였던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저희 마음에 느껴졌을 때 종종 그들은 몹시 화가 나서 그분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그분은 피하셨다. 예수께서 그처럼 여러 번 올무를 피하셨으므로 그분은 이번에도 분명히 잡히지 않으실 것이라고 유다는 생각했다.
유다는 그 문제를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아라면 그분이 백성을 위하여 그처럼 큰일을 하셨으니 그들이 그분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분을 왕으로 선언할 것이다. 이번 일이 지금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고정시켜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다는 다윗의 보좌에 왕을 즉위시킨 공적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그가 새 왕국에서 그리스도 다음 자리를 얻도록 해 줄 것이다.
이 가짜 제자는 예수님을 파는 일에 자기가 담당한 몫을 잘 수행하였다. 동산에서 그는 폭도의 두목에게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마 26:48)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손에서 피하실 것을 분명히 믿었다. 그리하여 만일 그들이 그를 놓치고 자기를 비난하게 되면 그는 내가 그분을 빨리 꼭 잡으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다는 자신의 말을 따라 그리스도를 단단히 포박하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주께서 자신을 끌어가도록 놔두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는 근심하면서 동산에서부터 재판정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 이르렀다. 매 순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수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모든 음모와 권세를 무색케 하여 그분의 원수들을 놀라게 하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예수께서 그분에게 퍼붓는 모든 욕설을 묵묵히 참으시는 것을 보고 그의 주님을 팔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반역자는 말할 수 없는 무서운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재판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자 유다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무죄합니다. 오! 가야바여! 그를 살려 주소서”라는 목쉰 음성이 갑자기 재판정을 울렸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전율을 느꼈다.
놀란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는 키가 훤칠한 유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수척했으며 그의 이마에는 큰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곧장 재판석으로 달려가 대제사장 앞에 그의 주님을 판 값으로 받았던 은전을 내던졌다. 그는 가야바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분은 죽음에 처할 만한 일을 결코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간청했다. 가야바는 화를 내며 그를 뿌리쳤으나 당황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지를 알지 못했다. 제사장들의 불성실이 드러났다. 저희가 이 제자를 매수하여 그의 주를 팔게 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유다는 또다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부르짖었으나 대제사장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마 27:4)라는 조소 섞인 대답을 했다. 제사장들은 유다를 자기들의 도구로 삼은 것을 기뻐했으나 그의 비열함은 멸시하였다. 그가 통회하며 그들에게 돌아갔으나 그들은 그를 쫓아 버렸다.
유다는 이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정하면서 그분께 그분 자신을 구원하시라고 간청하였다. 구주께서는 그분을 판 자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고 그의 자복 역시 그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부인한 일에 대해 마음 찢는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죄에 대한 공포심과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에 가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죄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측은한 마음으로 유다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때를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온 회중은 놀라 술렁거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배반한 자를 관용으로 대하시는 태도를 경탄하면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또다시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그분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왜 자신의 속박을 풀고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는가 하고 의심하였다.
유다는 자기의 간청이 헛된 줄 알고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라고 부르짖으며 재판정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살아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 중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바로 그날 늦게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갈보리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장소로 끌고 가던 악한 무리의 부르짖음과 조롱 소리가 멈췄다. 그들이 으슥한 곳을 지날 때 한 죽은 나무 아래서 유다의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몹시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가 나무에 자기의 목을 매었던 끈은 그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져 있었다. 땅에 떨어진 그의 시체는 무시무시하게 망가진 데다가 개들이 그것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의 유해는 곧 보이지 않게 매장되었으며 군중 가운데 조롱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많은 사람의 창백한 얼굴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징벌이 이미 예수님의 피를 범한 자들에게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망, 71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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