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강원도의 아이들이 북어를 가지고 칼싸움을 한다 소리가 제법 칼이다 그렇게 믿고 또 휘두른다 칼에게 칼날이 전부이듯 북어에게 최선은 몸통이다
국으로 끓여 아침 식탁에 올리면 몸 푼 동생이 가장도 아니면서 가장처럼 먼저 한술 뜨는 이유, 젖 도니까
------------------------------ 칼에게 칼날이 생명이듯 온몸으로 바다를 헤쳐 온 명태에겐 몸이 전부다. 세찬 바람에 몸 벼리던 헌신이 뜻밖에도 산모의 젖줄에 이어져 있다는 것. 과연 예상 밖의 효과일까?<김명인·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치……처럼 ㅡ김민정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 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죤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 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 털썩, 하고 앉았는데 아래에 새끼 고양이가 있었네. 야옹 소리도 못 내고 짜부라졌네. 치마에 피가 묻었네. 피죤으로도 안 닦이네. 그런데 저 얼룩, “마치……처럼”이라고 할 때의 그 말줄임표 같다. 달마다 찾아오는 어떤 기억이다. 피 흘린 참혹이자 새어나오는 울음이다. 그걸 점점이 묻은 속삭임이고 요술이고 깨끗함이라 부르는 건 물론 반어다. 저 흔적이 붉은 멍이 아니라 사인펜 뚜껑이 열린 흔적이라 우기는 게 반어이듯. 아기 울음소리로 우는 고양이 뒤에 고양이 울음소리로 우는 아기가 숨었다. 여기 좀 봐라. 생리혈로 서정시를 쓰는 여인이 있다. 씩씩하고 아름답다. ㅡ권혁웅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ㅡ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
------------------------- 시인이 필요한 곳은 인간의 몸, 마음, 정신 중 어디일까. 세상의 어느 자리에 시인은 앉을 수 있을까. 헉, 그게 그런 거였어? 다정과 힐난이 줄넘기 넘는 아이처럼 오락가락하는 거야 인생 다반사 그 모양이니 그렇다 치지만, 차버리고 떠나는 마당에 꼰대 같은 이유씩이나 조목조목 들이대며 ‘안전망’ 구축하는 당신. 마음 변했으면 그냥 쿨하게 잘 가줘요, 당신한테 시 쓰고 살라고 안 할 테니까. 여기서 뭉개져 시 쓰고 사는 거야 내 인생이죠. 난 내 인생이 좋다구요! 애인과 우습게 헤어지고 화가 나서 팔짝팔짝 뛰다가 푸른 밤바다를 보고 온 것 같은 시. 시시콜콜 가르치려드는 꼰대님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로 쓰기 쉽지 않은 바람맞은 시.. 안 착해 보이는 착한 시. 그러니 우리 해피하자구요.ㅡ김선우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 ㅡ김민정
고비에 다녀와 시인 C는 시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다녀와 시인 K는 산문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 읽는 엄마는 곱이곱이 고비나물이나 더 볶게 더 뜯자나 하시고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하는 나는 곱이곱이 자린고비나 떠올리다 시방 굴비나 사러 가는 길이다 난데없는 고비라니 너나없이 고비라니, 너나없이 고비는 잘 알겠는데 난데없이 고비는 내 알 바 아니어서 나는 밥숟갈 위에 고비나물이나 둘둘 말아 얹어드리는데 왜 꼭 게서만 그렇게 젓가락질이실까 자정 넘어 변기 속에 얼굴을 묻은 엄마가 까만 제 똥을 헤쳐 까무잡잡한 고비나물을 건져 올리더니 아나 이거 아나 내 입 딱 벌어지게 할 때 목에 걸린 가시는 잠도 없나 빛을 보자 빗이 되는 부지런함으로 엄마의 흰 머리칼은 해도 해도 너무 자라 반 가르마로 땋아 내린 두 갈래 길이라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조금만, 조금만 더 필요한 위로는 정녕 위로 가야만 받을 수 있는 거라니 그렇다고 낙타를 타라는 건 상투의 극치, 모래바람은 안 불어주는 게 덜 식상하고 끝도 없는 사막은 안일의 끝장이니 해서 나는 이른 새벽부터 고래고래 노래나 따라 부르는 까닭이다 한 구절 한 고비, 엄마가 밤낮없이 송대관을 고집하는 이유인즉슨이다
---------------- * <고비>, 최승호 시인이 몽골의 고비 사막을 여행하며 쓴 시들을 엮어 펴낸 시집. 2006년 5월, 열흘간의 고비 여행 중에 쓴 72편의 시를 수록. (옮긴이 註) -------------------------------------------- 김민정 시인은 이 시에서 두 세계의 대립과 충돌을 보여준다. 몽골과 중국에 걸쳐 있는 고비사막의 ‘고비’와 어떤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뜻하는 ‘고비’가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세계가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이다. 고비사막에 다녀와 시집과 산문집을 낸 두 명의 시인과 화자, 고비사막의 고비와 고비나물의 고비, 자린고비의 고비 등 동음이의어의 연쇄적 충돌과 대립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상호 이질적인 의미는 이 시를 양분한다. 화자는 타자의 “고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이곳의 삶을 연명하게 하는 음식으로서의 “고비”이지 먼 이국의 낯선 사막이 아니다. 구체적 삶이 없는 그곳은 한낱 호사가의 기호 취미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죽음의 공간인 것. 화자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치가 않다. 사리분별이 흐릿한 병든 어미는 “목에 걸린 가시”같은 존재이고, 그 어미와 함께 힘들고 고통스런 현실의 사막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살아내야 하는 처지이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화자는 어디로 가야 옳은 것인지 “두 갈래 길” 앞에서 갈등과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즉 고비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고비사막에서의 위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악다구니 속에 살아 남아야 할 것인지가 화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화자는 알레고리로 기능하는 고비사막의 고비를 “상투” “식상” “안일”이란 말로 단호히 부정한다. 그곳은 고통 속의 화자가 추구할 공간이 아닌 것이다. 오욕칠정의 현실이 그가 살아가야 할 현실이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고비” 전심전력 “이른 새벽부터 고래고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안일한 삶의 방식을 부수고, 반역을 모르고 복종의 미덕만을 아는 낙타의 목을 베는 것. 그리하여 자유와 용기의 상징인 사자의 삶으로 도약하는 것이야말로 화자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이다. 사막에 없는 선연한 삶의 박동이 있기 때문이다. 홍일표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음모陰毛라는 이름의 음모陰謀 ㅡ 김민정
머리털 나 처음으로 돈 내고 다리 벌린 날, 소중한 당신 산부인과에는 다행히 여의사만 둘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자궁경부암 진단용 초음파 화면 가득 잘 익은 토마토의 속살이 비릿한 붉음으로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깨끗하네요, 그런데 자궁 모양이 좀 특이해요, 뾰족하다고나 할까. 거웃 나 처음으로 내 아기집을 구경한 날, 어쩌다 뾰족한 자궁이 된 나는 콘헤드(conehead)의 아이 하나 고깔 쓴 제 머리 꼭지로 내 배를 콕콕 찌르는 상상만으로도 아 따가워 가시를 영 빼버릴 참이었는데 제모 어떠세요? 내 아랫도리를 헤집다 말고 얼굴을 쳐든 여의사아가 코끝까지 밀려내려온 안경테를 걷어올리며 묻는 것이었다. 레이저 기계 새로 들여 행사중이에요, 겨드랑이 털과 패키지로 하세요, 휴가철인데 비키니라인 신경쓰셔야지요. 머리털 나 처음으로 거창까지 상가에 조문가는 날, 안성휴게서 화장실에 쪼그려 오줌이나 누는데 문짝에 덕지덕지 이 많은 스티커는 누가 다 붙여놓은 것일까. 여성 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02-969-6688 여성 무모증 빈모증 수술하지 않고 완전 해결!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거다.
—시집『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 최근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약진이 눈에 띄는 더구나 여성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남녀 불평등이나 여권 신장 문제는 한 방에 해결될 것이란 은근한 기대까지 가진 것도 사실이다. 지난 3월8일이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전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아직 우리 사회가 불만스럽고 온전히 양성 평등도 정착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내 보기엔 ‘마르크스도 이런 불평등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겨드랑이 털과 비키니 라인에 거슬리는 부위의 ‘제모’와 동시에 ‘여성 무모증 빈모증’도 함께 엉켜 고민해야 하는 자기모순의 현실을, 남성 시선의 젠더적 권력을, 여성 스스로가 극복해 내지 않는 한 성적 불평등 관계는 지속되고 따라서 양성 평등의 길도 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순진(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ㅡ김민정(1976~ )
초콜릿색 피부에 컬러풀한 경기복, 마른 미역단 같은 머리칼에 짙은 색조 화장, 길게 이어붙인 색색의 이미테이션 손톱으로 그녀는 관중들의 공통된 소실점이 되고 있었다. 탕 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폭발하는 그녀의 본능적인 스타트, 발산하고 발광하는 근육, 그 머리채에 휘감긴 뼈들의 유기적이면서 능수능란한 몸놀림은 소리 없이 차분했고 그래서 더더욱 힘에 넘쳤으며 고지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어떤 조율의 증거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한 미소…오오 축복하노라 대지여…무릎 꿇고 트랙 위에 입 맞추는 그녀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의 역사다.
10초 49 죽어서도 살아 있는 그녀, 詩.
*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 1988년 서울 올림픽 3관왕. 이때 세운 100m, 200m 세계신기록은 지금껏 깨지지 않고 있다. 1998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시집『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2009년) ........................................................................고탄력 검은 유희로의 질주… 시인 김민정 [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⑩ 국민일보 2012.04. 김민정(36) 시인은 단거리 육상선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TV로 서울올림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미국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가 100m 달리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한다. “100m는 순간적이잖아요. 온몸의 근육이 그때 쏟아지지 않으면 세계적인 기록을 낼 수가 없지요. 그때 감각이 아직 저한테 남아 있는 거예요.” 조이너가 1988년 7월 16일 서울올림픽에서 세운 10초49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건 1998년. 다음 해인 1999년 김민정은 시단에 데뷔했다. 달리기와 시는 감각이 열리는 순간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닮아있기도 할 것이다.
“자물쇠 단단한 철창 안에서만 잠들 줄 아는 날 내다팔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포수로 그림자를 갈아 입는다 나는 도망치지만 발빠르게 헛돌아가는 외발자전거는 땅속 깊이 층층 계단으로 쌓아 내린 뼈 마디마디를 뭉그러뜨리며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 빠진다 끝도 없이 페달을 감아대는 레이스 끝에 홈스트레치에 접어들자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내 나침반을 겨냥한다 어서 어서 속력을 더 내렴, 너만 도착하면 완성된 퍼즐 속에서 우리들 되살아날 수 있을 거야”(‘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도입부) 왜 시에서 아빠가 엄마가 찌그러져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이 걸작이다. “시에서 제가 왜 부모를 뜯어 먹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뜯어 먹을 게 부모밖에 없었던 거예요. 믿을 수 있는, 걸고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 제 감수성이 반짝반짝할 때 누구부터 시작할 것인가, 라고 고민하다가 부빌 언덕이 부모였던 것이죠.” 김민정의 시가 놀랍도록 그로테스크한 것은 그에게 나쁜 동화적 충동의 과잉을 허용할 만큼 자유분방한 가정환경과 성장기를 마련해준 부모 덕분일 것이다. 김민정의 수사학은 실제적 경험이나 목적 혹은 상징적 비유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텅 빈 수사학인 동시에 문장 표면에 기표들이 넘쳐나는 과잉의 수사학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는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여성 선배들이 매달렸던 억압과 원한과 신파가 없다. 그래서 김민정은 힘 센 변종의 시인으로 불린다.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를 받아 본 아빠의 반응에 관해 일기 형식으로 쓴 시가 있다.
“2005년 5월 25일의 詩, 나는야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왜 우리 딸이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야? 꼼꼼히 한번 읽어봐. 말 잘 듣는 아빠는 밑줄을 쫙쫙 그어가며 내 시집 읽기에 몰입했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무진 웃겨, 근데 이거 시 맞아? 재밌으면 그걸로 말씀 끝이야. 하지만 지인들에게 시집 돌리기 재미에 푹 빠졌던 아빠는 얼마 안 가 밤낮으로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걔네들이 뭐라 막 그래. 날더러 집에서 애들은 왜 그리 개 패듯 패냐, 민정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남자 경험도 많은 것 같은데 얼른 시집이나 보내지 그러냐, 근데 이거 다 사실이냐…. 그래서 뭐랬는데? 개새끼들, 시도 좆도 모르는 것들이. 히히 잘 했는데 담부터는 이렇게 말해, 그만 씨불대고 너나 잘하세요!”(‘詩, 雜이라는 이름의 폴더’ 부분) 아빠와 딸은 이 대화에서처럼 격의가 없다. 김민정의 시에서는 불안과 공포, 혼미와 착란, 분열의 징후와 심정적 두려움이 삭제돼 있다. 흡사 아이의 그것처럼, 철저하게 유희를 수행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웃음을 거세하고 차단하는 ‘검은 유희’로 돌변한다. 기존의 가치 평가, 교양과 품위의 강조, 학습된 감각의 획일화 등에 대한 거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김민정의 시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전위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피날레ㅡ 김민정
혁대로 내 목을 조이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까 그는 떠났다
한 시인이 닭에게 그러했듯 나를 먹일 수는 있었으나 나를 잡을 수는 없었던 예민한 그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오늘, 그의 뒷주머니에 선물로 찔러 넣었던 오른손이 되돌아왔다
왼손보다 양옆으로 약 3센티미터 가량 손바닥이 자라 있었다 손톱 또한 오렌지를 살찌우는 뜨거운 태양 아래 즙을 내기 좋은 고깔처럼 다듬어진 뒤였다
닭살을 긁은 뒤 울긋불긋 솟은 살진 여드름을 짜기에 더없이 좋았으므로 나는 내 안의 작디작은 죽음을 잊었다
그렇게 흔들흔들 안녕 새로운 나여
............................................ 혁대로 목을 조이는 연애라니, 유별나다. 이 연애와 이별한 것은 썩 잘한 일이다. 이 별에서 겪는 이별은 피날레, 경미한 뇌진탕 같은 작은 죽음이다. ‘영혼 표면에 난 작은 스크래치’ 같은 것. 사람은 작은 죽음들을 겪은 끝에 큰 죽음을 맞는다. 이별 뒤 “그의 뒷주머니에 선물로 찔러 넣었던/ 오른손이 되돌아”오는데, 그새 오른손은 조금 더 자라 있고, 손톱은 잘 다듬어져 있다. ‘나’는 이별의 아픔 따위는 금세 잊을 수 있을 만큼 발랄하다. 랄랄랄랄 랄랄라! 그렇게 잊고 새로운 ‘나’를 기운생동(氣運生動) 속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안녕 새로운 나여! 어제를 잊은 오늘의 ‘나’는 여전히 약동(躍動)할 것이므로! 장석주(시인)
입추에 여지없다 할 세네갈産 —마음이 아주아주 우주 5 ㅡ 김민정
구운 갈치를 보면 일단 우리 갈치 같지 그런데 제주 아니고는 대부분이 세네갈産 갈치는 낚는 거라지 은빛 비늘에 상처 나면 사가지를 않는다지 그보다는 잡히지를 않는다지 갈치가 즐기는 물 온도가 18도라나 우아하기도 하지 즐기는 물 온도를 알기도 하고 어쨌거나 갈치의 원산지를 검은 매직으로 새내갈, 새대가리로 읽게 만든 생선구이집도 두엇 가봤단 말이지 세네갈, 축구 말고 아는 거라곤 시인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세네갈,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도 시 좀 읽으세요 했다가 텔레비전 책 프로그램에서 통편집도 당하게 만든 세네갈, 수도는 다카르 국가는 ‘모든 국민이 그대의 코라와 발라폰을 친다네’ 코라와 발라폰을 치며 놀라고 대통령이 권하는 놀라운 나라라니 세네갈, 녹색 심장의 섬유여 형제들이여, 어깨에서 어깨로 모여라 세네갈인들이여 일어나라 바다와 봄에, 스텝과 숲에 들어가라* 역시나 시인 대통령이 써서 그런가 보우하사도 없고 일편단심도 없고 충성도 없고 만세도 없구나 세네갈, 우리는 갈치를 수입하고 우리는 새마을운동을 수출하고 마키 살 현 세네갈 대통령을 초청한 자리까지는 좋았는데 방한 기념으로 수건은 왜 찍나 그걸 왜 목에 둘둘 감나 복싱 하나 주무 하나 결국엔 한번 해보겠다는 심사인가 ‘새마을리더 봉사단 파견을 통한 해외 시범마을 조성사업’ 돔보알라르바와 딸바흘레, 이 두 마을이 성공했다는데 본 사람이 있어야 믿지 가본 사람이 아니라야 믿지 재세네갈한인회 회장보다 부회장이 낫지 않을까 헛된 믿음으로 찍히고 말 발등이라면 재기니한인회, 재말리한인회 두 회장에게 속아보는 게 차라리 나을까 세네갈, 갈치 먹다 알게 된 거지만 사실 갈치보다 먹어주는 게 앵무새라니까 세네갈産 앵무를 한국서들 사고 판다지 아프리카라는 연두 아프리카라는 노랑 아프리카라는 잿빛 삼색의 세네갈, 앵무새 앵에 앵무새 무 한자로 다들 쓰는데 나만 못 쓰나 鸚鵡 이 세네갈, 앵무
——— * 녹색 심장의 섬유여 형제들이여, 어깨에서 어깨로 모여라 세네갈인들이여 일어나라 바다와 봄에, 스텝과 숲에 들어가라—세네갈 국가 후렴 부분에서
—《현대시》2015년 7월호 ------------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ㅡ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우리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
있을 때 사둔다 무침으로도 버무리고 국으로도 끓이고 죽으로도 불린다 봄이 가면 냉이는 잡초 따위라지 않는가
봄처녀도 아니면서, 나물 이름 보고 나물 이름 따라 읽는 한글 떼는 중에 아이도 아니면서 애나 개나 생기면 아꼈다 불러야지 지천으로 나물 향이나 퍼뜨릴 욕심으로
냉이는 왜 냉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부르면 명찰이지 냉이야 쑥아 달래야 두릅아 개중 씀바귀는 씀바귀야 씀박아 호명으론 좀 쌉싸래해서 별로다 싶고 손맛보다는 이름맛이 나물맛이라 국산 냉이 두 움큼 크게 집어 달아주십사 하니 2,960원
산에 가 뜯어봐야 알까나 장에 가 팔아봐야 알까나 싼 건지 비싼 건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냉이더미를 놓고 나물값을 매기는 플러스마트 나물 코너 아저씨가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 적에
냉이는 그냥 냉이네요 한자로는 제채라 부른다는데 보니까 겨잣과에 속한 두해살이풀이래요 겨자는 노랭인데 냉이 어디가 노란가 5월에서 6월에 흰 꽃이 핀다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나도 모르겠네요
계산대 뒤로 줄 선 나를 끝끝내 찾아와 휴대폰 속 두산백과에 뜬 냉이를 굳이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한 아저씨의 친절이 내일의 시나 될까 싶었는데
저기 저참으로 간 아저씨의 손으로 코 푸는 소리 들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식당에서 냉이 국을 먹어보고 당장 냉이를 샀어요. 만지작거리다 고른 것은 한 움큼도 아니고 비닐에 들어있는 세척냉이예요. 몇 번을 씻어도 검불이 나와요. ‘사람을 따라다니는 풀’이어서 그런가, 엉뚱하게 갖다 붙이면서 물에 좀 담가놓았어요. 플러스마트 아저씨는 냉이더미를 놓고 2960원, 절묘한 나물 값을 매길 수 있죠. 냉이를 들고 있는 나에게 굳이 휴대폰 속 냉이를 보여주죠. 이 또한 플러스마트 아저씨답지만, 이런 친절은 오늘의 시가 아니라 내일의 시예요. 집 살림이든 나라 살림이든 지금 여기, 이 삶의 살아있는 현재성과 구체성에서 비롯된 것, 즉 ‘오늘의 시’여야 향긋한 제 맛이 날 텐데 말이죠. 봄 내음을 쬐그만 안에 가득 저장하는 냉이처럼요. 한낱 힘없는 풀이어서 땅을 간절하게 붙잡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생명을 품고 기르는 땅은 그걸 알아봐주었던 거예요. 플러스, 즉 1+1 식의 정확한 계산법과 정확한 덤에 익숙해졌지만, 계량이라면 아무리 정확한 아저씨라도 코는 손으로 풀잖아요. 봄이 좋은 것은, 많이 가져와서가 아니라 안에 담긴 것, 그 자체가 봄이기 때문이죠. 안 올 듯하던 봄이 다시 오네요. 위트와 무심타법을 품은 김민정 시인이 플러스마트에 오늘의 시가 담긴 새 이름 하나 지어드려야겠어요.ㅡ이원 (시인)
춘분 하면 춘수
머리가 희게 센 할머니가 매실차 세 잔을 탁자에 놓고 갔다 사모님은 아니라고 했다 잔의 크기며 모양새가 제각각이었는데 서두르는 이가 없어 가장 큰 잔을 내가 들었다 뜨시지도 차지도 않았다
선생은 거실 창을 한참이나 쳐다보시었다 일행으로 동행한 사진작가나 나나 셋이 다가 초면이었던 만큼 선생을 따라 한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 그럭저럭 예의 같아 그리하였다
넓적한 갈색 뿔테 안경 너머 깡마른 선생은 손잡이 없는 작은 표주박과 닮아 있었다 작고 오목한 것이 애초에 물을 퍼낼 용도가 아니라 전주한지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던 철제 금속으로 형을 뜬 장식용 박 같았다
—아내가 아프오
물 쟁반을 든 할머니가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직사각형으로 드러누운 푹 꺼진 보료를 보았다 흙만이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구나* 이불과 베개도 네모라서 네모라고 메모하는 참인데
—어쩌면 좋소 아내가 할 줄 아니 나는 평생 은행 한 번을 안 갔겠지 않소 이제 그만 나는 큰일이 났소
나는 들고 간 민음사판 『김춘수 시전집』에서 선생의 시 「은종이」에 끼워뒀던 은색 껌종이를 꺼내어 접었다 폈다. 사지 달린 은색 거북이 한 마리 댁네 탁자에 놓아두고 왔다
훗날 선생은 1999년 4월 5일 새벽 5시경이라 아내의 임종을 기억해내시었다
우리가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와 술잔을 기울이다 1999년 이른 봄쯤이라는 계산을 마치는 데는 선생의 아내 사랑이 컸다
———— * 송찬호 시인의 시집 제목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에서.
—시집『아름답고 쓸모없기를』(2016)에서 ------------- 김민정 / 1976년 인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대학원 수료.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