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시산맥》신인상_ 서영택, 안은주
심사위원 : 박남희, 나금숙, 유정이, 이가을
겨울 폐가 외 4편
서영택
보름달이
시린 발을 눈 속에 푹, 푸욱 담은 채 오들오들
해안 경계선에서 보초를 선다
한파를 못 견딘 늙은 별들은
저체온에 동사하였고 눈치 빠른 별들은 몸을 녹이려
주인 없는 폐가를 찾는다
구안와사에 걸린 마루가 삐걱거리며 구멍 뚫린 천정을
올려다본다
차가운 구들 위 넘어진 양말 한 켤레가 따뜻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끼어들고
여독 풀리지 않은 바람이 끄덕끄덕 안방을 넘나든다
힘겹게 매달려 있던 녹슨 경첩이 풀썩, 문짝을 내려놓는다
몸을 녹이려고 바람을 따라 손님이 들어온다
별이 깨진 술잔에 잠들어 있다
겨울 폐가는 취해야 잠든다
자폐
화단을 정리하면서 꽃 한 그루 남겨두었다
혼자 서 있기에 지주목을 세워주었다
가지를 붙잡고 오르는 눈매가
담쟁이인가 했더니 어느 날 꽃이 피었다
실가지 늘어뜨린 능수버들을 닮았던가
봄꽃 피고 입하 지나도록 게으름 피워
눈길 한 번 안 주었더니 저리 고운 꽃 피우려고
내공을 홀로 키웠구나
제철 만난 것같이 붉은 볕으로 씩씩하다
바람결에 흩날리고
적황색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있다
담장을 붙잡고 붉은 꽃등을 켜는 능소화야,
가을이면 고향 꽃밭에 옮겨 심는다는
그 꽃말 잊지 않으려고
마음 한켠에 옮겨 심는다
독(毒)
1.
날름거리는 가늘고 검은 혀, 타원형의 눈을 꿈에서 본 적 있다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 뱀은 산에서 흔히 본 것이다
머리에 점이 일곱 개 등에 검은색 가로줄 띠가 길다 치켜 뜬 놈의 눈과 콧구멍 사이의 홈이 틀림없는 칠점사다 턱에 난 독아(毒牙)가 날카롭다 살무사 가운데 가장 무서운 독을 지닌 놈의 눈빛, 사납게 날 쏘아보는 바람에 생각을 놓칠 뻔했다
신경독을 가졌다는 칠점사는 물리면 일곱 발짝 밖에 갈 수 없다는 맹독성을 가졌다 일화로 손가락을 물린 폐암환자가 완치되고 그 자리에서 죽은 뱀이 칠점사다
2.
산길, 사람을 피하려다가 쇠꼬챙이에 머리가 눌려 붙잡혔다
좁은 그물 안에서 기다란 몸이 꽈배기처럼 꼬였다 꼬불꼬불 산길처럼 베베 꼬인 칠점사 위엄, 사람의 손모가지에 꽉 잡혔다 올려다 본 하늘 어지럽게 흩어진 구름들 숲의 나무들 풀잎들 바람에 스친다 사위가 독처럼 숲을 감고 돈다 혀를 깨문다 흘러드는 맹독 부드럽게 몸을 파고든다 달콤한 감각이 고통을 달랜다
나는 공격하지 않았다
커다란 발이 오수를 깨웠다 나는 산 속의 은둔자였다 푸른 숲을 거처로 한 나의 휴식은 끝났다 숲은 사람의 거처가 아니다 독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바람의 葬歌
등 뒤에서 부는 출처를 모르는 바람의 葬歌
풀들 먼저 엎드리고 죽음을 예감한 임팔라들 사방으로 뛰어요
멀리서 다가오는 회색눈동자 심장이 피를 품어요
불안은 오른쪽으로 달리고 놈은 왼쪽에서 달려들어요
어느 갈림길에서 생사가 갈리겠지요
치타의 무기가 속도라면 리카온은 지구력이라네요
빠르고 오래 달리는 놈 앞에서 긴 목이 널브러지네요
둔부에 커다란 톱날이 박힌 통증을 아나요
통각을 잊고 내 것이 아닌 몸,
놀란 호흡이 스타카토처럼 끊겨가네요
葬歌가 노을에서 먼저 흘러나오네요
몸의 부피가 줄어가고 코끝으로 스며드는 마지막 초원의 냄새!
생의 끝에 후각만 남네요 바람이 털을 쓰다듬고 이젠 아프지 않아요
공양도 자비도 공포를 떠나요 두려움을 모르는 날이네요
존재가 항문을 빠져나가면 소멸이겠지요
죽음의 과녁은 과녁이라 부를 수 없어요
한 번 꽂히면 과녁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마사이 마라 초원의 바람 속에서 葬歌 노래가 끝나가네요
꼬리 아홉 개 달린 비
검은 구름 광속으로 달려 나간다
동쪽 방향이다
쪽 마루에 햇빛, 격자창을 두드린다
삼바 리듬 물방울무늬다
마당 뒤꼍에 번졌다가 멀어지는 햇빛물결
아홉 개의 줄무늬가 그려져 있다
물방울무늬가 도르르 말린다
햇빛 줄기가 만져진다
순간이동이다
화단을 뛰쳐나온 능소화가 바람에 몰려다닌다
급보일까
생각의 틈새로
아홉 가닥의 빗줄기 와락, 쏟아진다
부풀어 오르는 꽃등의 점막
신발을 벗는다 발등을 쓰다듬는 햇빛
손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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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택 / 충남대 동물자원과학과 한양대 경영학석사. 호서대 경영학박사. 대진실업(주) 근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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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계보 외 4편
안은주
산새가 울고 있는 아버지 무덤에 가보고 알았다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는 것을
새 울음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
잘 익은 소리의 무게 때문이다
새 울음이 공중을 선회하여 몇 바퀴 구르는 것도
몸 안에 웅크렸던 소리가
나선형을 그리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소리는 새의 몸 어디에 고여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울음은
숨구멍이 열리는 순간부터
어둠을 거슬러 온몸으로 뜨거워지며
부리 끝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서 또 하나의 잘 익은 리듬을
익히고 다듬어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울음이 서서히 말라가는 것도
소리가 빠져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울음과 공명 사이에 더 푸르고 탱탱한 소리를 채워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소리는 따로 문패를 달지 않아도
태초(太初)부터 수억 년을 이어온 계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리는 죽지 않는다
상여 소리를 타고 날아간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내 몸이 새가 되고 싶은 것도
날개보다는 소리의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탄생과 사랑과 죽음 속에 소리의 비밀이 있다
엑소플래닛(Exoplanet)
— 사랑에 대한 변명
달맞이꽃이 달을 숨기는 건 달아오른 꽃 속에 달을 품고 있기 때문이죠 달맞이꽃 속에 붉은 달이 뜨거든 가만히 눈 감아 보세요 달무리 곱게 지는 몸에서 127광년 떨어진 거리에 그대와 비슷한 행성이 보일 거예요
그 별에서는 우주의 시간을 블록처럼 맞추어 쓰지요 시공을 가볍게 건너뛰고 어둠을 기르던 달까지는 저녁 산책 코스로 환상이에요. 물고기가 은하를 헤엄치고 솜털 뽀송뽀송한 별들이 홀씨처럼 날아오르는 광경도 볼 수 있지요
또 별과 별 사이의 농담과 꽃의 속삭임까지 다 읽어내는 그 별에서는 더 이상 사랑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같은 건 없어요 검색창에 이별, 눈물이라고 입력하면 오류메세지가 뜨지요 연인들은 고치처럼 몸을 말며 자유롭게 우화의 빛을 즐기고, 안개의 입술로 서로를 맛있게 핥아먹지요
달맞이 꽃인 그대가 붉은 달을 품었다면 전설의 자바처럼 결혼 없이 주혼(走婚)만으로 평생 사랑할 수 있는 별, 엑소플래닛으로 오세요
내면에 대하여
뿌리 없이 떠 있는 섬에서도
까마득하게 흘러 온 것은 몽돌이 된다
벼랑처럼 닳고 씻기면서 검게 빛나는 기록이 된다
몽돌은 물살에 새겨진 무늬의 귀가 살아 있어서
모든 것을 소리의 파동으로 만지고 반응한다
음악처럼 쏟아내는 파도 소리도
무진장한 바다의 기억이 옮겨가는 노래 소리다
묵묵하게 엎드린 몽돌을 가만히 귀에 대 보면
내면 깊숙이 침잠되어 있는 소리는 더욱 검고 비릿해서
유적처럼 아득하고 적막하다
아무도 없는 바다가 허기지게 쓸쓸한 것도 그런 이유다
언어를 소리로만 기억하는 몽돌 속에는
바다의 유전자가 내장되어 있다
포식자에 의해 무수히 죽어간 물고기의 눈물과
바다의 생존 방식이 저장되어 있다
더러 홍어 주낙에 묶여 물고기처럼 방생되는 것들도 있지만
몽돌이 단단하게 접혔던 귀를 열어
끝없이 몸속 길을 풀어 보내는 것도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파도를 불러 모으는 것이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모를 때
몽돌은 젖은 몸에 새겨진 지도를 꺼내 들고
끝없이 출렁거리는 소리의 기록을 더듬어 본다
저녁 강
그때 그 강은 분명 맨 발이었어
술이 취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다족류가 쭈뼛거리며
바람의 문지방 넘어오는 걸 보았지
한 묶음의 물살을 굽이굽이 끌고 와서는
내 생의 퍼즐 한 칸을 차지하고
길쭉한 표정으로 엎드리는 거야
들숨과 날숨의 간격을 재기라도 하듯
헐렁한 다리를 늘어뜨리고
긴 생각에 잠겨 있었지
끌고 온 물살의 조각이라도 맞추고 있었던 것일까
어둡고 눅눅한 곳을 떠도느라 마디가 많고
등줄기가 휘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했어
생을 덮은 허기와
축축함이 배어든 수십 갈래의 다리에서
물비린내가 진동을 했지
자주 방향을 잃어버리고
뒷발에 차여 쫓기듯 가야하는 앞발과
어딘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밀고 가는 뒷발이
노을의 시간에 툭툭 채이고 있었어
잠시 후, 어둠에 움츠렸던 길을 펼치며
더듬더듬 어디론가 걸어갔지
스적스적 걸을 때마다
다리와 다리 사이에서 연결되지 못한 길들이
퍼즐처럼 떨어져 내렸어
그 강이 지나간 자리엔
맨발로 걸어 온 내 생의 긴 문장이 놓여있었지
아버지의 유서처럼,
소나무재선충
푸르고 뾰족한 잎사귀 밑을 들추자
쏴아― 소리를 내며 일시에 수런거리는 바늘잎들,
그녀는 몸의 이력을 꺼내 가지 쪽으로
빠르게 이동시켰다
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녀 몸속 자물쇠를 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들이밀었다
단단한 껍질에 비해
그녀의 무른 내부가 향기로웠다
속은 한없이 약하고 따스했으며
향기의 중독성도 강했다
내가 꿈틀거리며 더 깊숙이 파고들수록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면서 잎마다 붉어지고
갈증이 독처럼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녀 몸 여기 저기 균사(菌絲)의 길이 생기면서
직선과 곡선의 길들이 연결되었다
마침내 그녀의 살과 피로 만찬이 차려졌다
상처가 날수록 향기로운 내부, 그 속에서
푸른 별 하나가 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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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은주 / 태을서예문인화 대전 문인화 초대작가. 전국 시낭송대회수상 시낭송가.
—《시산맥》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