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먹는 달팽이> 우리 동시에 바란다
오래, 깊이 들여다보면 좋겠다/김재복(평론가)
동시에 관해 그동안 내가 쓴 글은 내 나름의 취향과 기준을 갖고 선택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물들이다. 어떤 동시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동시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내가 동시에 대해 각별하게 매력을 느끼는 점은 동시의 눈이 아니고서는 없는 줄도 몰랐던 것을 보았을 때였다. 보았으나 적당한 말을 몰랐거나 봤어도 말할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줄 때였다. 가령 이안이 떨어지는 벚꽃 엉덩이에게 그림자 방석을 가져다 놓는 그림자 방석 같은.(「그림자 방석」(『오리 돌멩이 오리』 문학동네, 2020) 시공간, 비가시적인 영역을 넘나드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 때야말로 동시가 가장 매력적일 때다.
그뿐인가. 방주현이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론 슬러시를 껴안고 자전거를 타며 흔들흔들 넘어지지 않고 가는 훈이(「훈이」(『내가 왔다』, 문학동네, 2020)를 포착했을 때, 나는 가슴이 뜨뜻해졌다. 이 동시를 지금 다시 생각만 하는 중인데도 여전히 나는 헐거워진 생의 기운이 팽팽하게 조여 오는 것 같고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 동시 속 세계나 인물이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실감 나는 존재여서 내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 밖에도 그동안 내가 좋아 읽은 동시를 떠올려 봤을 때 내가 말할 수 있는 동(시)이란, 통쾌한 소통, 발랄한 긍정, 가능한 상상, 생기와 상승의 감각으로 동시의 몸과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물활론적 자연관에 기댄 세계와 이곳의 언어가 거칠고 탁한 나의 일상에 생기가 돌게 했음은 당연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가 새로 돋는 싹이다. 싹을 만져보면 알 수 있는데 연할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달리 싹은 매우 단단하다. 끝이 딴딴하고 뾰족한 것은 언 땅, 혹은 껍질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탓 아닐까. 우리가 새로 돋는 싹들과 싹들의 계절 봄을 노래하는 까닭은 그 싹에서 본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동시의 낭만성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삶을 긍정하기로 선택한 변증법적 모험의 결과이며 그것이 내가 믿고 있는 동시의 윤리다. 동시 쓰는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동시들은 이러하다. 이것은 취향의 성격이 강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평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취향의 문학을 하는 게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같아 괴로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은 아직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에 가깝다. 이것은 동시 독자가 만끽하는 자유로운 감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동시에 대해 요구하는 게 많아지다 보면 자칫 동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경험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잡지에 1년 동안 동시 계간 평 형식의 글을 연재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 잡지에 실린 동시를 읽어야 하는 계간 평은 형식적 한계 탓에 한 권의 시집을 읽듯 깊이 읽지는 못한다. 대신 다양한 동시창작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계간 평을 넘긴 뒤 남은 생각을 정리하면 현재 내가 우리 동시에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우리 동시가 사물의 유용함을 설명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은 달리 보면 무용의 가치를 발견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게 아니라 문학의 전통이었다.
우리 동시가 사전처럼 대상을 자꾸 설명하려고 하는 이유는 독자를 어린이로 못 박은 데서 오는 것 같다. 동시는 정보 전달 매체가 아니지 않나. 이 말은 독자를 위해 동시를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동’은 세계를 보는 시각과 태도의 도구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동’으로써만 동시를 쓰면 어린이나 어른 상관없이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하나, 우리 동시가 환상과 상상의 세계 못지않게 생활을 발견하고 유머는 발명하기를 바란다. 윤동주, 윤석중, 이원수, 권정생, 류선열, 임길택 등이 살피고 쓰다듬었던 속 깊은 생활과 특히 권정생이 보여준 커다란 유머의 동시 전통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발명이다. 나는 요즘 아주 우연히 사랑의 관찰자로 사는 경험을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가능할법한 사랑의 형식이라고 해두자.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말, 그 말을 읽고 보고 들을 때 몸과 마음에 생기는 긍정적 변화를 감지하면서 나는 끝내 “사랑이 다예요”! 라고 말해버렸다. 사랑하는 주체도, 사랑받는 대상도 아니고 오직 관찰자의 역할만 했을 뿐인데도 그렇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깊이 사랑하려면 깊이 들여다보고 자세히 오래 봐야 하는 것 같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분노할 줄 안다. 그 분노의 말은 사랑의 다른 말로써 그 또한 뜨겁고 강렬해서 지켜내지 못할 게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읽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이때 생기는 긍정의 변화가 생기를 돌게 하는 것을 체험했다.
사랑에 대한 거라면 당연히 동시도 한 말씀 할만한 주제다. 사랑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오래, 깊이 보면 사랑하는 이만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생긴다. 그렇듯이 우리 동시가 대상을 오래, 깊이 들여다보면 좋겠다. 서둘러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생각의 파편이 곰삭아 마침내 감각으로 얻어지는 그것을 보여주면 좋겠다. 동시 쓰는 주체와 동시의 대상이 발명하는 사랑의 형식, 그렇게 동시가 오기를 기다린다.
김재복(kj-bok@hanmail.net)
내가 어린이청소년문학 작품을 읽고 배운 것은 사랑이었다. 다시 사랑을 배울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아예 굳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다. 어쩌면 굳은 심장을 녹인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다행이다.
첫댓글 오늘 공부 끝!
비문학적인 글을 읽고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다니.. 역시 나는 갱년기야^^~
공부 끝! 기특합니다,~^^동감입니다 갱년기 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