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 바람에게도 밥 사주고 싶다-최금녀
옛 만주 땅을 돌아보았다. 집안(輯安)에서부터 흐려지기 시작한 마음이 압록강에서도 걷히지 않았다. 집안은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같이 깊었다. 조선말을 하는 사람이 일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초등학생에게 조선말을 열심히 가르치는 조선족 젊은 여교사의 해맑은 눈빛을 마주하면서, 입양 보낸 자식 만난 듯 면목 없었던 것은, 그 땅의 내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한 핏줄임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 꺼내지도 않았다. 중국은 우리 역사상 훌륭했던 광개토대왕의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싹둑 잘라버리고 '호태왕비'라는 줄인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위세 담당했던 광개토대왕비가 갑자기 허수아비로 느껴졌다.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 광개토대왕 비와 장수왕, 그 신하들의 무덤을 그 땅에 놓아두고 발길을 돌렸다. 내친걸음으로 민족이 영혼이 스며든 압록강을 일정에 넣었다.
단둥으로 이동했다. 편한 마음이 다스려지기도 전에 압록강변에 닿았다. 강변이라야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고, 멀리 있는 강 건너편을 기껏 망원경으로 끌어당겨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압록강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몸을 북쪽에 좀 더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단둥 하면 압록강이고 압록강 하면 북조선이 그려진다. 속 깊은 마음을 담아 보내는 눈길. 망원경에 눈을 바싹 대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들. 그쪽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도 그곳에 가면 심각해지는 것인지, 대부분 그랬다. 올 깊은 나무들도 없어 볼품없는 능선이었지만, 어머니 치맛자락에 얼굴 댄 듯 떠나기 싫은 곳이었다. 그 건너편 어딘가에는 부르면 달려올 것 같은 실향민의 고향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태를 묻은 함경남도 영흥도 그곳에 있다. 모천을 찾아드는 것이 연어뿐이겠는가.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을까.
이곳에서 명사십리까지는 몇 킬로미터나 될까. 기차선로는 깔려 있을까. ktx라면 몇분이나 걸릴까. 누가 살고는 있을까? 되지도 않을 계산을 해본다. 요단강보다 더 막막하게 느껴지는 강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말릴 수 없는 이런 마음을 이북 출신 말고 누가 알겠으며 이 원초적인 그리움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나이 오심이면 하늘의 뜻을 헤아린다고 공자는 말했다. 오십 년도 넘긴 첫사랑이 애틋함을 넘어 쓰라림이다. 호호백발의 마지막 사랑이다. 들끓던 정열도 텅 빈 광장이 되고, 아팠던 것, 그리웠던 것. 억울했던 것 모두 만세삼창하고 흩어져버리는, 그 무쇠 같은 세월의 힘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향수병이다. 향수라는 병은 악성 종양보다 더 뿌리 뽑히지 않는다. 맵고 짜다. 핏줄이라는 것, 죽음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핏줄, 생각해 보면 인류를 오늘날까지 이끌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여든여섯의 아버지가 눈 감으며 내게 남긴 유산이 있다. "고향에 가거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아보아라." 실향민 외에는 넘겨받지 못하는 슬픈 유산이라.
우리에게 가호적(假戶籍)이라는 말이 생겼을 때가 있었다.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에게 내린 특혜였겠다. 그때부터 출생지가 서울로 변했다. 창씨개명 같은 것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지, 학교에 입학할 때, 신원을 확인받아야 할 때, 이력서를 쓸 때, 우리는 얼굴 가리고 고향을 슬쩍 서울이라 적었다. 참으로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일제하에서도 창씨개명만은 하지 않았었는데…. 본적지를 묻는 말에는 늘 숙연했다. 어딜 적어야 하나? 아 참 서울이지. 입시 문제처럼 신중하게 서울로 기재했던 시절. 이북으로 적으면 한 번 더 쳐다보던 시절, 지금도 우리는 가호적 인생이다. 가호적으로 사는 이상 몇십 년이 지나도 타향일 수밖에 없다. 본적지가 왜 서울이어야 했었는지. 누구에게 따져봐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그곳에서 태를 끊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광풍 같은 전란으로 고향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반세기를 훌쩍 넘긴 이북 출신들은 강 하나를 가운데 두고 애태우는 가호적 인생들이다.
어쩌다 신문에 남북한 교류니, 이산가족 상봉이니 하는 기사만 보고도 곧 만날 듯 가슴 부풀어 잠 못 이루는 실향민들, 그 한스러운 삶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압록강 이남에서도 압록강 이북에서도 마주 바라보며 마주 바라보며 잠 못 이루는 한 많은 사람들, DNA를 이어받은 2세들이 자라고 있는 한, 1세대들만의 한(恨)도 아니란다. 이제는 돌아가 만나볼 직계들도 모두 세상 떠난 땅이지만, 실향민들은 눈만 뜨면 살아서 저 강 건너갈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원한다. 구천에서도 꼭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날 나는 강 건너 쪽에서 자라나는 나무들, 강물들, 바람들을 불러 내 마음을 전했다.
바람에게도 밥 사주고 싶다
나무들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나 잠시도 너희들 잊지 않았다
강물들아, 울지 마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좋은 시절이 오고 말 것이다
바람아, 우리 언제 모여 맛있는 밥 먹으러 가자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한솥밥
우리들 함께 먹는 밥
한솥밥 먹으러 가자
압록강아
한솥밥 먹는 그날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 흘러만 가다오
위 수필과 시는 <길 위에 시간을 묻다>/문화세계사/ 최금녀 시집에서 키보드로 직접 입력했습니다.
-최금녀
함경남도 영흥 출생
시집 『큐피드의 독화살』 『저 분홍빛 손들』 『내 몸에 집을 짓는다』 『가본 적 없는 길에 서서』 『들꽃은 홀로 피어라』 『길 위에 시간을 묻다』 시선집 『최금녀의 시와 시세계』 펜문학상, 현대시인상, 미네르바작품상, 바움문학상,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으며,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서울신문·대한일보 기자, 사)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역임했으며 국제 펜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