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7/200203]경자년庚子年 정초正初 세배歲拜 이야기
서울에서 친구 두 명이 어제 오전 우리집을 역부로(일부러의 전라도지역 방언) 다녀갔다. 그전날밤 부안의 친구 상가喪家에 문상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인데도 굳이 들른 것은, 해도 바뀌었고, 친구(내)가 고향집을 고쳐 구순이 넘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므로, 우리 아버지께 세배歲拜를 하러 왔다는 거다. 요즘 세태世態(세상 돌아가는 모습. 이 단어를 극도로 쓰지 않는 것은, 아버지 함자가 세世자 태泰자이기 때문이다)에 흔치 않는 풍경일 것이다. 무척 황공해 하신 아버지는 ‘그냥 앉는 게 인사’라며 절을 받지 않으려 손사래를 쳤건만, 친구들은 막무가내로 넙죽 절을 하며 ‘강녕하시라’는 덕담을 올렸다. 아, 폐백幣帛으로 한우韓牛와 천혜향 한 박스씩을 사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정말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배 이야기를 쓰려니, 문득 몇 년 전 친구와 부안 변산지역 여행을 했던 게 생각난다. 동진강을 지나자마자, 친구는 일행을 어느 야산의 묘소로 이끌고간 후 “울 아부지 산소다. 같이 절하자”고 하였다. 나로선 그분을 생전에 뵙거나 장례식장에서 영정影幀으로도 뵌 적이 없었으나, 친구의 아버지시기에 의당 절 두 번 하는 것은 기본예의일 것이므로, 마음에서 우러나 재배를 드렸었다. 친구들의 부모께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셨거나 기회가 되기만 하면 절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아름다운 풍습風習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멀리 선물를 갖고 세배를 하러 찾아준 친구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아버지도 맞절 형식으로 절을 받았지만, 속으로 무척 고마워하셨으리라.
절이란 무엇이고 절은 왜 하는 것인가?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깊고 길게 얘기할 주제가 못된다. 다만, 절과 관련한 일화逸話 몇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둘째 아들이 청소년시절 유난히 공부를 싫어했다. 오죽했으면 "공부라는 게 없어져버리면 좋겠다"고 했겠는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생각이었기에, 큰 걱정은 안되었어도 왜 걱정이 되지 않으랴. 하지만 아들의 장점은 많았다. 한번 제 마음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집중했다. 유도를 배우고 싶다기에 등록하라 했더니10개월도 안돼 유단자가 되기도 했으니. 그런아들의고교시절 어느날, 3천배를 같이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는데, 의외로 ‘좋다’고 했다. 성북동의 ‘길상사吉祥寺’(법정 스님이 백석 시인의 평생여인 김영한 자야 보살님의 시주를 받아 세웠다)에서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 밤 8시부터 일반인 대상으로 3000배 의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에서는 조금 편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라더니, 한 스님이 쉴새없이 ‘나무아미타불’만을 마이크로 외고 또 외우셨다. 그 염불에 맞춰 절을 하는 것. 자정이 되자 30분 휴식. 미음 한 그릇씩을 먹고 다시 또 행진이 계속 되었다. 100여명이 시작했는데, 그때쯤 임신부도 계속하는데 3분의 1은 이미 포기한 상태. 내가 먼저 하자고 한 마당이라 안할 수도 없는데, 1시가 넘어가자 기진맥진, 절을 억지로 한 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앉아 졸기까지 했는데, 아들은 악착같이, 끄떡없이, 짱짱나게 새벽 4시쯤 스님의 독송讀誦이 멈출 때까지 절을 하고, 또 절을 하고, 마침내 3천배를 완수한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무수한 절을 했을까? 정신적으로 조금은 성숙해진 것일까? 스님의 운전 조심하라던 말도 생각난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다동의 해장국을 사줬던, 그것도 ‘아, 옛날이여!’가 된지 오래다.
최근 670여 페이지나 되는 ‘성철性徹 평전’을 독파했다. ‘김대중 평전’을 쓴 김택근(신문사 다닐 때 친하게 지내던 형님으로 내공이 깊다)님의 작품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법어法語로 유명한 스님은 열반 직전까지 3천배를 먼저 하고 오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인들 겁이 나랴, 단박에 거절해 대통령을 민망하게 했다던가. 불교의 세계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데는,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나 반야심경 해설 못지않게 큰스님의 탄생에서 열반까지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왜 그렇게 절을 시키느냐’는 질문에 ‘3천배를 하다보면 부처님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어리석은 중생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게 너무 안타까워서 만든 규칙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회만 된다면 3천배를 하고 싶다. 날마다 3천배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도 많다고 한다. 스님들은 1만배, 10만배도 예사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을 담아, 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절을 한다는 것, 두 무릎을 꿇는다는 행위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몇 년 전 오색약수터에서 새벽 4시부터 ‘머리등head light’에 의지한 채 대청봉을 오른 적이 있다. 오전 10시쯤일까, 봉정암 법당에서 ‘나홀로’ 108배를 했었다. 앞서 말한 둘째아들이 호주 유학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기원하는 의미에서다. 부처님의 가호 덕분이었을까, 아들은 너끈하게 합격하여 유학을 가고, 지난해 9월 졸업을 하여 간호사nurse가 됐다. 나무아미타불.
아버지가 고향에 계시니까, 친구들의 세배가 줄을 잇는다. 참 고마운 일이다. 얼마 전에는 71세의 ‘S누님’(15년 전쯤에 남원 사매면에 있는 혼불문학관 관람을 하면서 당시 해설사인 누님을 사귀게 되었고, 곧바로 우리 부모의 큰딸을 자청했다)이 온갖 음식을 해갖고 세배를 하러 오셨다. 또한 ‘인간극장’으로 인연을 맺은 광주의 막내 수양딸도 곧 세배를 하러 올 것이다. 내 친구들만 해도 새해 세배를 다녀간 친구가 지금껏 열 명이 넘을 정도이니, 우리 아버지는 요즘 아들친구들의 절 받기에 바쁘시다. 한 친구는 일요일 새벽 하루 1만5천걸음 운동을 하는 김에 들러 세배를 했다. 이 아니 좋은 일인가. 아예 “야, 우리 아버지한테 세배하러 안오냐?”며 전화를 할까보다. 흐흐. 나이가 환갑을 지나 6학년 4반이나 5반이 되었다한들, 친한 친구의 부모에게 넙죽 절하는 것이 복 받을 일이고 칭찬받을 일이지,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은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