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가수 안나 게르만이 부르는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 스텐카 라진은 17세기 러시아의 로빈 후드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맨 아래는 또 다른 러시아 민요 <저녁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두 곡 모두 러시아 정서
를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 레핀의 작품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 천개의 얼굴, 천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1844~1930) ]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처음 일리야 레핀의 작품을 접했을 때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됩니니다. 숨이 멎을 만큼 긴장감이 흐르는 순간을, 책장에서 책을 뽑듯 정확하게 뽑아내어 묘사해낸 그의 능력은 단연 압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은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입니다. 특히 그는 세밀화, 인상주의, 성화, 역사화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점은 세밀한 표정의 묘사와, 찰나의 순간을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리야 레핀은 1844년 우크라이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습니다.
* 레핀의 작품 <러시아 혁명>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를 만났습니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습니다.
* 이동파
‘이동파’란 레핀이 속했던 미술가 단체로 러시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농민 계몽을 목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칭이 이동파로 된 것입니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 말년의 레핀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습니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아래에서 소개)>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레핀은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188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 레핀의 작품 <성직자>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아래에서 소개)>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습니다.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 레핀의 작품 <톨스토이>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습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습니다.
* 레핀이 마지막을 살다간 레피노의 저택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습니다.
[ 대표 작품 감상 ]
*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코사크들
이 작품은 코사크크족의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재로 해서 그려졌습니다. 17세기 중엽 터키의 술탄 마호멧 4세가 드네프르 강변에 사는 코사크족에게 자기 밑에 들어와 일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코사크족은 용맹성과 대담성으로 명성을 날렸고, 뛰어난 전사로 알려져 있었죠. 그래서 터키 술탄에게는 자기 군대에 그러한 병사들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 그리고 명예를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던 코사크인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터키 술탄에게 모욕적인 말과 조롱으로 가득 찬 편지를 썼습니다.
레핀은 바로 편지를 쓰고 있는 코사크인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한 가운데 서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이 불러 주는 대로 편지를 받아 적고 있고 주위의 코사크인들은 터지는 웃음을 못 이겨 배꼽을 잡고 껄껄대고 있습니다.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온화한 파스텔톤의 벽과 피아노, 아이들이 둘러앉은 식탁. 화목한 분위기가 흐르는 평범한 가정의 거실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간 냉랭한 정적이 흐릅니다. 추레한 외투를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이 집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다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왔습니다.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일리야 레핀)은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통해 혁명의 시대에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을 보여줍니다. 혁명가였던 그림 속의 아버지는 사회 개혁을 향한 원대한 포부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의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채 고난을 떠안았던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었습니다. 힘겹게 되찾은 평온 속에서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거죠.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감격의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어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오래전에 아버지 얼굴을 잊은 아이들은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 역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그림 속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아버지들은 세파에 시달리느라 정작 가족에겐 무심했고, 남은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그의 빈자리를 메워버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겐 퇴근 후 무뚝뚝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가 불편한 존재랍니다. 지금 '혁명'이 필요한 곳은 바깥이 아니라 집안일지도 모릅니다.
*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일리야 레핀 하면 유명한 작품이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입니다. 이 작품을 그린 것이 1870~1973년 사이인데 당시 러시아에는 강에서 밧줄로 배를 끌어 올리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핀이 1860년대 말 네바 강변을 산책하다 목격한 것이 ‘더럽고 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거운 하역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레핀은 큰 충격을 받았고, 1870년 볼가강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하고 수많은 스케치를 했다고 하네요. 이 작가가 얼마나 일꾼들의 내적인 세계를 경외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인 힘이 힘든 노역에 의해서조차 굽혀 질 수 없다는 작가의 신념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체념한 듯 밧줄을 몸에 걸치고만 있는 사람, ‘뭐 구경났소?’하는 눈빛으로 힘을 주고 있는 사람, ‘에이 제기’하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젊은 사람,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떼는 맨 뒷사람, 괴로운 듯 제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 등 여러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레핀이 이들의 내적 세계를 경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듯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라는 겁니다. 세계는 ‘배와 배 끄는 사람들’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고, ‘배 끄는 사람들’속의 사람들은 배 끌기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마다의 삶의 이야기와 생각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나타납니다.
얼굴 표정이나 상체의 모습뿐만 아니라 다리와 발 모습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이들을 열심히 관찰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놀라울 뿐입니다.
* 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
이 작품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533년 고작 세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에 오른 후 러시아 최초의 차르가 되었던 이반 4세는 ‘그로즈니(잔혹한) 이반’, ‘이반 더 테러블’, ‘뇌제’라는 별칭이 함의하듯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폭군이었습니다.
친위부대 오프리치니키를 조직해 ‘살인면허’를 하사한 후 무자비한 강압정치를 펼친 최악의 군주. 오프리치니가 반대세력을 처형하는 광경을 직접 관람하며 희열을 느끼던 사이코 패스이기도 했고, 황궁 자문관들이 구국의 심정으로 시정을 촉구하자 그들은 물론 가족과 친지, 심지어 마을주민까지 씨를 말려 학살해버린, 전두엽 기형 장애를 앓고 있었던 게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말종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에서만 6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학살했고, 이반 4세는 “아무리 나쁜 놈도 제 세끼한테는 좋은 부모일 수 있다”는 생물학적 질서까지 파괴해버린 패륜 황제이기도 했는데, 사연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며느리가 임신을 한 까닭에 세 겹 이상의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황실 전통을 어기고 한 겹의 치마만 입은 것을 목격한 이반 4세. 태자비가 황족의 품위에 먹칠을 했다며 쇠지팡이를 휘둘러 폭행하려 하자, 임신부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황태자가 나서 이를 만류합니다. 격노한 이반 4세, 휘두르던 쇠지팡이로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고, 황태자는 즉사합니다.
황제는 뒤집힌 눈을 뒤늦게 다잡은 후 제 세끼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에 절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휘둘러버린 쇠지팡이, 끊어져버린 숨통일 뿐. 1581년 11월 러시아의 황태자는 그렇게 사망했고, 현장에서 이 충격적인 살육을 목격한 황태자비는 유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