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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9일(성령강림절 후 세 번째 주일)
열왕기상 18:1~16
당신이 선 자리가 사명의 자리입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오바댜는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설교 목적: 우리는 오바댜처럼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who?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 「소명」에서 ‘직업이 끝나는 것’과 ‘소명이 끝나는 것’을 혼동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직업은 은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일을 계속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제가 아끼던 수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것인데, 어느새 낡고 오래되어 질감이 까칠해졌습니다. 사실 수건 처지에서 보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해 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건은 속상함보다는 만족함이 더 클 것입니다.
나 자신이 물리적으로 더 나아지고 높아지는 것보다, 쓰임새에 맞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이 수건처럼 잘 쓰임 받고 싶습니다.”
-출처: 김병삼, 「일상의 결정들」(두란노, 2022);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6월호), 83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청년의 고백을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도 오래된 수건처럼,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최근에 엘리야에 관련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시기 위해 선지자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로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17:1).”
이후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를 보호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어야 했고, 시냇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시내가 마르자,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도 여호와의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짧지만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합에게 나아갈 때, 사마리아에는 기근이 심했습니다.
이야기의 장면은 사마리아 왕궁으로 넘어갑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농경사회에서, 삼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자 사마리아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왕과 신하들은 백성보다 덜 고통을 받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낯선 이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오바댜’였습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바댜’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가 여호와를 멸시했던 아합왕의 밑에서 ‘왕궁 맡은 자’로서 일하고 있던 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더구나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고,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3절; 12절)
what’s problem?
우리는 어려서부터 믿음이 좋고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을 보면, “너 나중에 커서 신학대학에 가서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라!”라고 이야기해 주곤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믿음 좋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인재를 신학대학에 보내서, 주의 종 만드는 것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 좋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이 다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나 선교사가 된다면, 누가 이 사회 곳곳에 퍼져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 인터넷 방송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죽’이라는 기업의 대표, 최복이 씨의 간증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최복이 씨에게 ‘본죽’이라는 기업의 비즈니스 성공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최복이 씨가 첫째는 사명감이고, 둘째는 성령 충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왜 이런 대답을 했을까요? 그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업이 지속해서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업이 섬기고 나누는 문화를 만들고, 이윤을 구제와 선교로 사용하기 위해서도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의 은혜는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평신도는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우리가 버려야 합니다.
-출처: 이강천, 「일터 영성, 그대 비즈니스를 박 처지게 하라」(쿰란출판사, 2020), 102.
우리가 사는 대전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 있습니다. 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까, “동네 빵집이 대기업을 이겼다.”라는 문구가 나왔습니다. 대전에 있는 성심당이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인 파리바케트나 뚜레쥬르를 누르고, 2023년 한해에 1,24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전에서 성심당을 운영하는 로쏘 주식회사가 작년 한 해에 315억 원의 매출이익을 남겼는데, 파리바게트를 운영하는 파리크라상은 199억 원을, 뚜레쥬르를 운영하는 CJ푸드빌은 214억 원의 매출을 남기는 데 그쳤다고 합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theenews/223419702394
원래 성심당은 1956년에 대전역 앞에서 찐빵 가게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국적인 인기를 받고 있습니다. 성심당은 대전에서만 매장을 운영하는 향토 기업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성심당이 전국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일단 빵집은 빵이 맛이 있어야 하니까, 맛있고 저렴한 빵을 만들어 팔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심당은 빵도 맛이 있지만, 특별히 봉사를 많이 하는 빵집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태훈 씨가 성심당 빵집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책 제목이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남해의 봄날, 2016)입니다. 현재 성심당을 운영하는 분은 임영진 씨인데, 이분이 가톨릭 신자예요. 이분이 ‘포콜라레 운동’에 동참하면서부터 더욱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포콜라레 운동’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네트워킹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포콜라레’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벽난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운동은 벽난로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자는 운동이겠지요?
이 운동은 1943년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고, 전쟁의 폐허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돕자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23세의 젊은 여성이었던 까아라 루빅(Chiare Rubich)과 그녀의 친구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들이 품고 있던 성경 말씀은 놀랍게도 요한복음 17장 21절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들의 지향점이 잘 소개된 책이 「공유 경제」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기업인들은 사업 경영의 한 기준을 ‘30% 운동’이라고 봅니다.
‘30% 운동’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대략 기업 이익의 30%는 재투자에 쓰고, 30%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쓰고, 30%는 이 운동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 쓰자는 겁니다. 나머지 10%는 예비비 성격으로 급하거나 중요한 일을 위해 쓴다는 거지요.
-출처: 이강천, 위의 책, 102~105.
어쨌건 우리에게 친숙한 성심당도 포콜라레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훌륭한 정신을 가진 기업이 어찌 사람들의 환영과 사랑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좀 흘러가긴 했습니다만, 분명 여러분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what?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바댜가 느꼈을 갈등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오바댜라는 사람은 아합왕의 ‘왕궁을 맡은 자’였습니다. 오바댜는 신앙으로서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고,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지만, 직업인으로서는 ‘왕궁을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왕궁의 책임자로서, 아합왕을 보필하고 왕궁의 실무를 맡아 운영해야 하는 왕궁의 제2인자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오바댜가 섬겨야 할 아합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자,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그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백성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야 할 왕이 백성의 안위보다는 왕궁에 있는 가축들의 안위를 더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가축에게 먹일 물 근원과 냇가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왕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나 파렴치한 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런 파렴치한 왕을 모시고 그 밑에서 충성해야 하는 오바댜는 어떤 갈등을 느꼈을까요?
아합왕과 오바댜는 땅을 두루 다니다가,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오바댜가 혼자 길을 걷고 있을 때, 엘리야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그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습니다. “너는 아합왕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 이때 오바댜는 자신의 죄를 떠올리며, 자신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려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오바댜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합왕은 부하들을 시켜 엘리야를 샅샅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찾지 않은 나라와 족속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만약 어떤 나라나 족속이든지 엘리야를 보지 못했다면,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것을 맹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났다고 보고한다면, 그가 어떻게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아합왕에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엘리야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오바댜는 거짓을 말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댜가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기는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는 오바댜에게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오바댜에게서 ‘두려움’의 감정을 느낍니다. 오바댜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오바댜가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고,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지만, 그는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업인으로서 여호와를 멸시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는 포악한 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신앙인의 정체성과 직업인이 정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이와 비슷한 갈등을 느껴보지 않으셨습니까?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예센이 공저한 「가짜 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 아웃의 세계」라는 책이 있습니다(자음과 모음, 2022).
이 책에는 2013년도에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조사한 ‘전 세계 직장 순위’ 자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는 전 세계 142개국에 다니는 온갖 종류의 회사원들을 비교해서 그들의 직장 만족도를 조사한 것입니다.
갤럽은 직장인들의 노동 상태를 세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은 단지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많은 63%의 직장인들이 ‘무성의(無誠意) 범주’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일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전혀 전념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회사에 적대적인 부류가 24%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 이불에서 나와서 일터로 향하는 것을 힘들어할 뿐 아니라, 자신이 출근하는 직장을 증오하고, 크든 작든 적극적으로 반항합니다. 이 적대적인 부류에 전 세계 3억 4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갤럽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의 두 배가 적대적인 부류의 직장인들입니다.
-출처: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예센, 「가짜 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 아웃의 세계」(자음과 모음, 2022), 71~72.
이 책의 저자는 가짜 노동은 의미가 없고, 가치 있는 결실을 보지 못하며, 실제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가짜 노동을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노동, 노동과 유사하지만, 노동은 아닌 활동, 무의미한 업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시간 낭비라는 것을 아는 큰 과제를 상대적으로 어린 직원에게 그저 뭔가 할 일을 주기 위해 맡긴다면, 이것이 가짜 노동인 셈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짜 노동에 대항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짜 노동에 대항할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타인을 신뢰하라.
복잡성을 줄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타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시하고 끊임없이 보고서를 요구해서는 결코 신뢰를 쌓을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동료들에게 할 일을 주고, 그 일을 마칠 때까지 그들을 신뢰하라고 제안합니다.
둘째, 타인에 대한 모방을 경계하라.
저자는 이웃 회사가 하거나, 그들이 가진 것을 쫓지 말고, 대신 쉬는 시간을 더 늘리고 핵심 사업에 더 신경을 쓰라고 제안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논문을 쓰거나 출판하지 말고, 대신 중요하게 느끼는 것만 공유하라고 제안합니다.
셋째, 진짜 일에 헌신하라.
저자는 우리가 일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면 큰 그림을 봐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즉 우리가 회사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일하지 자기 직장인 병원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닙니다.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일하지 자신의 법무 법인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닙니다. 교사는 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일하지 특정 학교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가운데 의미 없고, 결실을 보지 못하며, 실제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가짜’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은 없었을까요?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의 정체성과 직업인이 정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우리가 ‘진짜 일’에 헌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즉, 우리가 직업보다 더 큰 소명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존재하지, 자기 직장인 병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가 왕궁 맡은 자 오바댜의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왕궁 맡은 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고위직 공무원입니다. 물론 요즘의 공무원 개념과 과거의 신하 개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공무원이 사회와 공공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자기 직장인 왕이나 왕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빗나간 생각일까요?
오바댜가 신앙인의 정체성과 직업인의 정체성 가운데 갈등을 느꼈을 때, 그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던 일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하는 오바댜에게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리이라.”라고 맹세했습니다. 이 맹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한 맹세였습니다. 이제 오바댜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합왕에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합왕과 엘리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저는 오바댜가 직장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오늘날 성도들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일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무교, 혹은 기독교인에 대해서 적대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행히 직장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들과 업무상 대화 외에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나눌 기회를 얻기는 흔치 않지요.
만약 여러분의 직장 상사가 아합왕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안하무인(眼下無人) 같은 사람이어서 여러분이 자주 고통을 겪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장을 때려치워야 할까요?
저는 그런 경우라도, 여러분이 상사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댜가 아합왕의 신뢰를 받아 왕궁을 맡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일을 계속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자세로 일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바댜의 경우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오바댜는 위기에 처한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굴에 숨기고, 그들을 떡과 물로 먹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오바댜는 신앙적 결단과 ‘왕궁 맡은 자’라는 자기 직위를 선용해 잔인한 살육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오바댜처럼 여러분의 직위를 선용해 사람들의 억울한 피해를 막고, 정의를 실천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통해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how?
북한 사역을 하는 한 선교사님이 다음과 같은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병색이 완연한 79세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구하러 강을 건너왔습니다. 나는 거룩함이 느껴지는 그분께 탈북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도 찬송 한번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내가 도와 드리겠다고 하니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십니다.
10분 정도 기도하고 오신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를 북한에 남겨 두는지 아느냐?”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굶는 것도 하나님 뜻이랍니다.”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께 저는 한 번 더 탈북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자유가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 하시니, 자유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하는데 우리 천국에서 만납시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몇 년 후, 나는 그곳에 다시 가서 그 할아버지를 찾았는데, 할아버지를 비롯해 그곳 사람들이 다 수용소에 끌려가다가 매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출처: 김양재, 「그럼에도 사랑하심」(두란노, 2018);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6월호), 6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소명 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부름을 받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오바댜는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때로 그가 갈등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오바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아합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제가 서두(序頭)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직업은 은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일을 계속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여러분이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