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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욥기의 말씀 7,1-4.6-7
욥이 말하였다.
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4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제1독서에서 욥은 기도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도 “기억해주십시오.”(욥 7,7)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늘 복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1고린 9,19),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음(1고린 9,22)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고,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장면입니다.
곧 ‘섬김의 봉사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구절에만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마르 1,31)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져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니 우리가 고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치유 받으면 믿을 것처럼 여기지만, 믿음이 치유를 불러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보다 먼저 앞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믿음’입니다.
둘째 장면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당신의 삶은 아버지 성부와의 친교와 유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사제직’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가지 차원,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결코 ‘기도 없는 활동’이나, ‘활동 없는 기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활동에 앞서 먼저 기도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도가 곧 활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곧 ‘선포와 증거의 예언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곧 그것은 ‘먼저 하느님과의 유대와 친교를 앞세우는 기도의 삶’이요, ‘선포된 복음을 영접하고 그를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삶’이요, ‘형제와 이웃에게 봉사하는 섬기는 삶’입니다.
이러한 사명의 삶은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은총, 이 사랑을 입고서 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뼛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 선포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는데, ‘고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 ‘테라퓨오(therapeuo)’는 ‘존중하다. 사랑하다.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봐줬다는 의미입니다.(홍승모)
몸이 약해지면 마음까지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병이 깊거나 길어지면, 신앙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한탄과 원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으로 함께 아파하시면서 이겨내길 바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열병은 우리말로 홧병, 울화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서 가슴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 불안과 소화불량,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는 등 여러 반응이 다양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성 암 환자 85%가 화병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에 쌓인 것을 풀지 못하면, 비우지 못하면 정신적 장애는 물론 육체적인 장애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뤄야 가벼워집니다.
사실 모두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이 지배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보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병을 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한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격한 환경에서 늘 통제받고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을 지배하고 과시하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앓고 있는 열병입니다.
이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명의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을 지니신 주님,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면서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겉모양을 다스리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근원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남 탓을 멈추고 내가 변합니다.
열병이 인간을 괴롭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에서 구원에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들, 귀찮고 짐스럽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인근 마을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만하거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이른 새벽 홀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조금 잘 나가면 자신이 무슨 큰 능력이 있는 양 으시대기 쉽습니다.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파견받은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신 행동이 외딴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딴곳으로 가서 한참 기도하고 계실 때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께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추종자들 곁에 머물길 좋아합니다.
요즘도 우리는 패권 정치니, 팬덤 정치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물론 팬덤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9)
예수님 삶의 중심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바로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있었기 때문에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떠나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즉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까닭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해야 하고 또 행함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듯이 우리도 이런저런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고 일어서서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가신 기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도 산 위에 올라가 기도하셨고(마르 6,46),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마르 14,32-39).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을 때에도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루카 6,12).
기도는 우리를 안주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1코린 9,16. 19.22)
그야말로 바오로는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 약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확인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앞길을 예수님의 길로 가꿀 수 있길 희망합니다.
멈칫거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당당히 걸어야 합니다.
쉬고 있는 동료를 찾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알릴 수 있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삶에 의미나 목적을 꼭 찾아야만 하는가?>
저는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건강만 챙기고 놀거나 쉬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생을 즐기다 오라고 창조하셨다고도 하고 그런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인생은 그냥 소풍이고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자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가 삶의 의미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미는 찾고 싶었습니다.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삶이 감옥처럼 느껴져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감’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신에게 휘둘리나 사람에게 휘둘리나 같은 것이라 여겨 고독한 초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맞는다고 여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니체는 삶의 의미는 있는 게 좋지만, 결국 신은 부정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수영 회장은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나이가 87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전혀 자신의 그러한 결정에 후회가 없어 보이고 당당해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기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산 카메라를 메고 이탈리아 소렌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일본 관광객들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능적으로 옷으로 자기 카메라를 가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니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이 외국에도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신문사를 나와 소와 돼지를 키웠고 그 종잣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그러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희대 한의과에 1,300억을 기부한 분도 있습니다.
이란 왕실 주치의로 있었던 이영림 한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시 자신을 가르쳤던 신상주 교수님과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의학상이 나올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로 버는 돈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란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왕실 한의사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궁즉통이라 바라는 게 있으면 길이 뚫리는 법입니다.
물론 그 돈을 기부하기 전에 신상주 교수님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분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가 새벽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이십니다.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살던 부족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사막화로 더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사막을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길을 잃고 죽거나 되돌아왔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여행하던 영국인 켄 리먼은 길을 찾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갈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원고를 다시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음은 창조자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찾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그렇듯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창조자에 의해 의미와 목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불변하는 대상,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주님 한분 뿐입니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며 지난 시절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경제의 어려움으로,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면 나이를 속여가며 공사 현장에 나가 육체 노동을 했습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뭔 대단한 일을 시키겠습니까?
제가 주로 했던 일은 도목수의 먹줄을 잡아드리는 일, 지상에서 삼층까지 커다란 나무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한겨울에는 건설 경기가 안좋다 보니 구두 만드는 공장에서 조수로도 일을 했습니다.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그야말로 단순 작업이 전부였습니다.
재봉틀에 앉으신 사수가 넓디넓은 가죽에 구두본을 그려주면 죽으라고 가위로 잘라댔습니다.
접합 부위에 본드를 칠하고 망치로 두드리고 완제품에 도달해서는 또다시 가위를 들고 마무리 작업에 전념했습니다.
때로 강한 본드 냄새를 하루 온 종일 맡다 보니, 오후가 되면 정신이 혼미해질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삶의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극한 고통의 체험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좁디 좁은 제 삶의 지평을 넓혀주었고, 그저 하루하루 생존하느라 각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동료 인간들을 향해 연민의 정을 지니게 했습니다.
구두 공장 조수로 있을 때, 재봉틀 옆에 붙어있던 '북'이 기억났습니다.
잔뜩 감켜 있던 북의 실은 재봉틀이 돌아가면서 순식간에 줄어들었습니다.
실이 바닥나면 저는 재빠른 동작으로 북을 갈아주곤 했습니다.
오늘 욥기의 한탄 어린 하소연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 뭐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별것 없습니다.
그야말로 베틀의 북 같습니다.
서른 살이 어제 같은데, 순식간에 세월이 흘러 곱절이 넘었습니다.
그토록 목숨 걸던 인연도 세월 흐르며 다 지나갑니다.
그토록 중요시 여겼던 가치관이나 사상도 세월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불변하는 대상, 영원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주님 한분 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시몬과 그 일행’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이른 아침부터 병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병자들이 치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사람들이 아직 모르던 때의 모습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던 때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바란 대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머물러 계시면서 병자 치료만 하셨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를 세우셨다면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처음에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요한 7,2-5)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당신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다녔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 했던 여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3-5)
예수님을 찾아다닌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닌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만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살아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받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치유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만을 바라면서 예수님을 찾는 것,
그런 일들은 모두 살아 계시는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나의 신앙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얻기만을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신앙, 즉 ‘죽은 신앙’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 치유를 거절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기 전에 치유를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다른 이웃 고을들’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인데, 사실상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에는 ‘이곳에서 한 것처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복음 선포의 한 방식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병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말씀의 은총’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당신의 활동의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병을 없애신 것은 아닙니다.
또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세 번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또 승천하신 뒤에도,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 나라로,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영원한 생명만 있는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분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병고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쪽 세상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느냐?”입니다.
‘몸의 치유’와 건강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우리 나이로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결같은 열정적인 사목자로의 청년같은 모습은 늘 신선한 감격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늘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교황님에게 참 놀라운 것은 사적인 시간이 없이 늘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적인 시간이라는 것이며, 날마다 찾는 모든 이들에게 참 적절한 삶의 지침이 될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그의 백성들을 섬겨라.”
교황님을 방문한 스페인의 마드리드 교구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진리의 연인들이 되고 변화에 마음을 열라.”
역시 교황님을 만난 이탈리아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새벽 카톡을 열어보니 수도원에 피정왔다가 갑작스런 대모의 죽음으로 장례미사차 돌아간 자매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수녀님이 그 자매에게 주었다는 위로의 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 선종하신 대모님, 하늘나라 가는 길 많은 교우분들과 잘 바래다 드리고 왔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때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으니까요.
잠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건너감이듯, 죽음은 우리의 시간에서 하느님의 영원으로 옮아가는 건너감이지요.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영원까지 함께 가자 하시는 주님 손 꼭 잡고, 오늘도 빛과 생명을 활짝 피우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인생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2024.1.4.21쪽 하단부) 두 기사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1월24일 서품 받은 살레시오회 세 사제와 한 부제의 사진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1월28일 향년 43세로 선종한 서울 대교구의 젊은 사제의 사진과 더불어 1월31일 명동대성당에서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참으로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물음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때때로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루하루가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살아온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살 날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실 뿐 결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삶을 주목하십니다.
그러니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불행이 아닌 행복을, 어둠이 아닌 빛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신,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결연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의 샘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요,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전사로서 삶의 현장에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전사란 말마디가 적절하고 좋아 전사란 말마디를 씁니다.
오늘부터 파스카의 봄의 전사로 살라하여 입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욥기의 분위기가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입니다.
희망이 빛살이 보이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때로 이런 극한 상황을 겪기도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욥의 실감나는 적나라한 넋두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날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같은 현실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 곳이 지옥입니다.
이런 절망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결연한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화답송 시편을, 제1독서의 바오로를, 복음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로, 예수님과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무지와 허무,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쳐주신다.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미를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니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이 없네.”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좋습니까?
시편의 하느님 찬미의 찬란한 빛이 지옥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그러니 욥의 절망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의 희망과 기쁨을 선택해 찬미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처럼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무지와 허무, 절망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얼마나 멋집니까!
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무리 주님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워도 욥을 선택하지 마시고 참으로 멋진 주님의 용사 바오로를 선택하세요.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니 욥이 아니라 복음의 전사, 바오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복음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생명을 주는 복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복음,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복음, 신망애의 삶을 살게하는 복음, 진선미의 삶을 살게 하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좋은 복음입니까!
새삼 예수님 자체가 참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삶을 삽니까?
바로 오늘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얼마나 영적전투치열한 예수님 하루하루의 삶인지요!
지칠줄 모르는 예수님의 열정이 놀랍습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이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장면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 안의 마귀를 쫓아내실 분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모두인 예수님뿐입니다.
복음 선포에 저절로 따라 오는 치유이적이요 구마이적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복음 선포에 충실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생기를 잃고 빛을 잃고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지요.
병든 이들도 많고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영적건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답은 복음선포뿐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 모두가 불퇴전의 복음의 전사,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 선포의 원천은, 분별력의 지혜의 원천은, 이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기도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찬미기도와 더불어 외딴곳에서의 개인 관상기도도 필수입니다.
참으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의 밤기도였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외딴곳에서의 깊은 관상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키고 사명감을 새롭게 확인한 후, 다시 홀가분하게 성과에 집착하거나 “모두 스승님을 찾는다”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 선포에 여정에 오른 예수님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서 얼마나 복음 선포의 사명감에 충일한 예수님의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올해를 기도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시편 저자처럼 찬미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예수님처럼 복음선포의 전사가, 복음의 전사가, 기도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외딴곳 성전에서 거행되는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당신의 일당백의 주님의 영적전사, 찬미의 전사, 복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마태 8.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19년 8월 21일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교구에서 저를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파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뉴욕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소셜넘버(SSN)를 받고,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말 그대로 따는 것입니다.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필기, 실기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은행 계좌를 열면서 뉴욕에서의 첫 출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열정적인 홍보 덕분에 신문사의 재정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을 준비하면서 야심차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볼리비아에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LA에 있는 여행사 대표와도 일정을 조율하였습니다.
2달에 걸친 신문홍보 일정을 만들었습니다.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버지니아, LA, 밴쿠버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LA에는 한인성당이 많기에 세 성당에서 홍보 및 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꿈에 부풀게 2020년을 시작하였습니다.
장밋빛 인생이 제게도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뮤지컬도 보고, 박물관도 가고, 센트럴파크도 걸었습니다.
뉴욕이 저를 환영하는 것 같았고, 저도 뉴요커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합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하느님께 충실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었던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시련은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부푼 꿈을 안고 2020년을 시작한 제게도 시련이 스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의 스나미입니다.
2020년 2월 한국은 코로나가 열병처럼 퍼져나갔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미국에 있는 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는 코로나는 1달이 못 되서 뉴욕으로 건너왔습니다.
2020년 3월 13일 미국은 사회가 문을 닫았습니다.(Lockdown)
박해의 시기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문홍보와 사순특강도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그해 9월 10일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멀리 뉴욕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교황님은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기도를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코로나의 스나미도 지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발, 발전, 성장, 자본’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잠시 멈추어 있는 동안 공기는 깨끗해졌고, 더불어 사는 생명은 풍부해졌고, 자연은 회복되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면서 대화하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료사제들과 함께 하면서 코로나의 스나미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할 수 없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브루클린 한인성당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2020년 8월에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와 함께한 시간들은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5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의 기도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립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미사를 끝으로 댈러스 한인성당으로 갑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브루클린 한인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입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순간,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화냈던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차의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남자도 가까이 다가선 다음에야 뒤에 붙인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가가야 그 마음의 스티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운전 면허를 취득한 뒤, 동창 신부 차로 운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창 신부는 운전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왕초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청색 테이프로 돌려 붙였습니다.
창피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해 준다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줄 모르고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닐지 싶어서 창피해도 붙이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스티커를 봐야 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 스티커를 상대에게 보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이 가십니다.
사위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있으니, 화병이 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바로 장모의 마음을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역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들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즉,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함께 하면서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복음 선포만이 주님의 마음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우리 역시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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