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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한 장이 페북에 올라왔다. 색깔이 옅지만 짙어가는 구름의 심술이 가을 저녁을 지나가고 있는 듯했다. 선은 분명하지 않지만, 웃는 모습이 낯익은 얼굴이었다. 동그란 짧은 머리가 둥근 얼굴에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기억이 더듬기 전에, 한 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소녀였던 그 사진의 여주인공은 바로 같은 교회를 다녔던 동기였다. 한 40년 전의 빛바랜 사진이 아닌가.
3년 전에 온 가족이 고국 방문을 했을 때, 그 추억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가 동기들을 만났었다. 감출 수 없는 하얀 새치들이 염색약이 닿을 수 없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모처럼 웃었는지 어색한 주름살이 철없는 우리들의 행동을 비웃고 있었다. 우리는 웃고 소란스럽게 그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같이 동석한 자녀들의 눈은 그런 아빠와 엄마의 행동이 유치한지, 참지 못할 미소를 숨기며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시간은 늘 똑같다. 옛날이고 지금이고 지구는 똑같은 궤도를 돌면서 우리의 삶을 돌린다. 돌리는 동안, 돈도 돌리고, 경험도 돌리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자동차도 매일 돌렸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의 추억을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래 그때도 짓궂게 장난을 저렇게 쳤었다는 동일한 옛 공감으로 서로를 느꼈다. 언제나 불만 가득한 우리들처럼, 무릎이 퉁퉁 튀어나온 파랑 운동복을 입고 슬리퍼를 낄낄 건방지게 끌면서 시간과 상관없이 친구 집, 녹슨 철 대문을 두드렸던 시절. 친구의 엄마는 나의 엄마였다. 새우깡과 꿀맛이 뚝뚝 떨어지는 부사 사과를 내주시던 내 엄마와 똑같았다.
소년 4명에 소녀 4명. 그냥 친한 허물 없는 친구들이었다. 소년 4명이 집에서 놀면 골방 친구, 방과 후 골목의 허리를 따라 쫓아 달리면 골목 친구, 허전한 주말 시간을 공원에서 공유하면 주말 친구, 여름이면 냇가에 나가 멱 감으며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나누었던 친구들이었다. 딱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추억의 시간은 찡했다. 헤어짐은 추억과의 이별이었고 현실과의 대면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중의 한 친구가 하루빨리 현대 의학 사전에서 없어져야 할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바이올린도 같이 배웠고 연주도 같이하였지만, 부모님들은 서로 경쟁의 대상으로 등수라는 링에 올려놓으셨다. 시험 칠 때마다 그 아이는 자정까지 공부했다더라, 만점을 받았더라등 어디서 흘러나온 소문인지는 알 길 없었지만, 진실처럼 이야기하셨다. 서로 공부를 더 잘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후,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던 수재…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듣고도 그 친구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인생의 반세기를 지나며 자아와 목적, 그리고 삶의 결실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나이. 이때야말로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며 천지의 광활함을 느긋이 만끽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을 집요하게 되풀이한 것은, 오랜 세월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온 삶의 여정에 대한 반향일까.
후회는 깨달음과 늘 늦게 온다. 특별히 죽음이 오는 날짜가 다가오기 전, 버킷 리스트는 점점 길어진다. 중세 시대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올라가는 양동이를 걷어차기(kick the bucket) 전, 해 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 것이었을까. 죽음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재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과 해보고 싶은 갈증은 중요하다. 생명은 죽음보다 더 생생하게 내게 알려 주는데, 아이러니하게 죽음이 오기 전에, 이 목록을 실행하려고 한다. 죽음 전에 생명을 경험하려고 한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어도,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나무의 뿌리가 흙 밖으로 나와도 버킷 리스트라는 진흙으로 한 번 덮어 보았으면 한다. 하루빨리 친구의 버킷 리스트를 보고 싶다.
11월이 어느새 슬그머니 지나가고 있다. 이른 된바람이 불면 단풍은 떨어져 낙엽 소리를 굴리며 사라지게 된다. 어느 인생이 예측하기도 전, 이런 바람이 지인의 아내에게 찾아왔다. 췌장암 4기다. 일주일 전에 웃으며 농담을 나누었는데, 어저께는 산소통을 끼고 있었다. 죽음이 깃든 흑백 사진 한 장의 삶 속에 그분이 있다. 그분의 손을 잡자마자 기도가 눈물로 쏟아졌다. 숨어 있던 신음이 폭풍처럼 내 귀에 들리고, 그분의 검은 눈망울이 내 눈 속에 들어왔다. 그분의 눈에 비친 철새들은 어수선한 생각을 걸쳐 입고 야생 소리를 내며 피난을 떠나는 것 같았다. 그 뒤를 추격하는 하늘의 균열이 금세, 눈물이 되어 반짝였다. 하지만,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하는 신앙의 소리다.
Brendam Graham이 작사한 “You raise me up” 노래 가사 중에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부분이 있다. 옆에 있는 분의 어깨에 기대는 것은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연약함이 쉬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담쟁이 풀은 늘 벽에 기대어 산다. 벽의 어깨를 딛고 기어 올라가 담 넘어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담벼락을 무섭게 내려간다. 삶이 노을로 걸어가 산그림자를 넘어가더라도, 강했으면 좋겠다. 강하게 산 너머의 세상을 걸어 내려갔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어깨에 의지할 때, 그분은 더욱 강하여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흑백 사진 한 장을 안 주머니에 가지고 산다. 사진 속 산봉우리를 닮은 곳으로 모든 사람이 갈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만남을 가질 것이다. 그곳으로 가기 전, 내 양어깨를 내주며 살면 어떨까.
대구 출생
Temple 대학교 약학과 졸업
2020년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수상
2021년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