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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8,22-23.27-30
그 무렵
22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23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7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30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방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로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곧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이는 단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 관습 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마르 7,7-9)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 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하는 많은 짓들>
예전에 제가 본당에 잠깐 있을 때 옆 교회 전도사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었는데 기도할 때마다 그 여자분 생각이 나서 너무 괴로웠고, 그래서 일생 독신으로 사는 신부에게 무슨 비법이 있나 배우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온 김에 하나는 따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왜 천주교 신부는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느냐?
성경에 술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제가 성경에 하느님께서 흥겨운 술을 주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도 먹보요 술꾼으로 비난받으실 정도로 드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반박했지요.
둘 다 아전인수인 셈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무엇입니까?
저기 논에 물 대는 것이 아닙니까?
물을 끌어다 자기 논에 대듯이 우리 인간은 권위 있는 말을 서로 끌어다 자기 주장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데 쓰지요.
술을 왜 안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안 먹어야 하는 거지요.
술을 왜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먹어야 하는 거지요.
며칠 전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 저녁 식당에 오셨습니다.
지금 저희 <여기 밥상> 식당이 공유식당을 시작하였습니다.
점심은 삼천 원짜리 식당을 그대로 하고 저녁은 이주민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이주민 자매가 제값을 받는 장사를 하고 그래서 술도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옆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시끄럽고 음식에 대한 불평도 막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대 한국 사람들이 술을 먹고 많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아예 술을 못 먹게 하였는데,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손을 씻는 정결례도 이스라엘의 전통일 뿐입니다.
요즘 청결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흙 가지고 놀지도 못하게 하고 돌아오면 꼭 손을 씻게 하는데, 적당히 균들과 함께 살아야 싸워 면역력이 생길 텐데 너무 지나쳐 오히려 아이들의 면역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에 영성적 의미도 있지요.
씻어야 할 더러운 손은 먼지가 묻은 손이 아니라 뇌물을 받아먹은 손이요 피를 묻힌 손이지요.
사랑에 어긋나는 더러운 손은 놔두고, 제 건강을 챙기기 위해 손을 씻는 정결례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해치는 뒷담화나 험담은 하지 말아야 할 짓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을 주는 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짓은 어떤 짓들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 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받아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의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 전례 때에 참회 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제는 미사 때 예물을 준비하고 손을 씻으면서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외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외적인 전통을 고집하면서 내용과 의미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 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는 척하지 말고 사랑을 담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 안에도 암세포가 있고 면역세포도 있다. >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느냐고 따집니다.
사실 손을 씻는 법은 율법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조상들로부터 병들지 말라고 지켜온 전통인 거죠. .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전화 전통은 따르지 않고 인간들의 전통을 강요하냐고 하면서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당신을 헛되이 섬긴다, 결국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암세포는 그냥 병이 들었을 때 그때만 생기는 건 줄 알았더니, 항상 생겨난다고 합니다..
대신 그렇게 생기는 것들을 없애주는 면역세포도 있습니다.
면역세포는 세포가 몸 안에서 지켜야 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 세포를 없애는 역할을 합니다.
몸도 면역세포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이 전체가 인제 죽게 됩니다.
몸을 사랑한다면 자꾸 생겨나는 암세포를 죽이는 면역세포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교회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전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교회 전통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없애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 가톨릭 학생회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 학생회는 데모 서클 중에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어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가니 또 어쩔 수 없이 화염병을 나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라에 저항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만 교회의 전통이 세상의 전통이 스며드는 것을 좌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허물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스파이가 들어오고 그 스파이가 다른 전통의 가르침을 물들입니다.
그것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어느 체계건 무너집니다.
가톨릭교회는 안 그럴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대부분이 교만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예전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반대했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습니다.
암세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지옥 이야기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우리는 어둠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다는 요한 사도도 극단적 이원론자가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할 때 오히려 거부당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삼구(세속-육신-마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김대건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당부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면서 삼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하면 조선시대 사람이냐, 중세 시대 사람이냐고 합니다.
이제는 교리서에 나오거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암세포가 될 것인지, 면역세포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올바른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암세포와 대결하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전통을 지키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세상 전통으로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선은 교회의 성체로만 구원이 이뤄지고 나머지는 피의 세례, 열망의 세례, 혹은 계약에 관한 신학으로 나아가야지, 처음부터 교회를 부정하는 말들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개신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신교 신자로 오해받습니다.
주님이라면 아마도 암세포를 무찌르는 면역세포의 역할을 하는 이들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유달리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료 수준이 극히 낙후되어 있던 시절, 수시로 전염병이 창궐했었는데, 제대로 된 치료제도 없다 보니, 그저 씻고 또 씻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어찌 보면 유다인들이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이 그토록 목숨걸고 소중히 여기며 강조했던 손이나 몸을 씻는 예식, 그릇이나 제구를 씻는 예식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정결례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정결함은 필수였습니다.
특히 제사에 앞서 정결함은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의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제나 레위인들은 하느님께 번제를 드리기 전, 반드시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정결례, 참으로 유익한 것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으로서 합당히 지녀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과함은 부족함만 못합니다.
정결례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세심주의는 사람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으며, 세부 규정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정결례의 정신, 곧 하느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 사랑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셨던 분, 지극히 자유로운 분이셨던 예수님 눈에 유다인들의 과도한 정결례 준수가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서민적인데다가 파격적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보란 듯이 일부러 정결례를 무시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스승님을 따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준수하는 정결례를 밥 먹듯이 파기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맨소리로 따졌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정결례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분의 자녀로서 당연히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룩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은 필수입니다.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잔도 씻고 제구도 씻지만, 우리 영혼도 거듭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내 탓이라고, 가슴도 크게 치지만, 마음을 찢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규정>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쟁점’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겉만 깨끗이 하지 말고 마음도 깨끗이 하여라.” 라는 가르침은 뒤의 14절-23절에 따로 나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위선은 겉만 깨끗이 하고 마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위선이 아니라, ‘사람의 전통’만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는 위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랍비들의 전통으로서 ‘할라카’ 라고 부르던 ‘일상생활과 행동에 관한 지침’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지침을 지키지 않는 것을 종교적인 불경죄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유다인’이 그 지침을 지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모든 유다인’이 지킨 것이 아니라 ‘모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켰고,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그 지침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민들은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켰습니다.
마실 물도 부족한 지역에서 그런 복잡하고 엄격한 정결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라는 말은 음식을 먹을 때 정결예식에 관한 ‘랍비들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로, 즉 부정한 사람들로(죄인들로) 보였습니다.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도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루카 11,38).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규칙을 무시하셨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라는 말씀과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라는 말씀은 옛날의 랍비들이 정해 놓은 규칙들은 열심히 또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신앙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인생 전부를 바치는 사람인데, 한낱 사람일 뿐인 랍비들이 정해 놓은 규칙은 ‘교리’가 될 수 없고, ‘교리’가 아니라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지침을 왜 그렇게 철저하게 지켰을까?
그리고 왜 그 지침만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은 안 지켰을까?
처음에는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잘 지키기 위해서, 또 사람들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을 도와주려고 만든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 지침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잊어버렸다는 것이, 또는 무시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그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또 각 개인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가 만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들과 규칙들이 있는데, 만일에 지침들과 규칙들을 만든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 지침들과 규칙들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만 집착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또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교회가 만들어놓은 지침들과 규칙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들만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는 계명들과 지침들과 규칙들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지키고, 다른 것들은 무시하거나 대충 지키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또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간에,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일은 항상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루카 16,10)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어디에서 사시는가?” - 존엄한 품위의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어제 오후 뜻밖에 선물처럼 내린 흰눈으로 나무마다 눈꽃들이 만발합니다.
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강론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마다 숙제거리를 가득 안고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참 공부할 것이, 배울 것이 많은 하루하루입니다.
한 일간신문은 “가족파산-조여오는 빚, 가족의 파멸” 1면의 톱기사에 이어 두면에 걸처 상세히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각자도생의 야만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또 다른 일간신문은 “내몸과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주제로 5회에 걸쳐 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별 시리즈 목차는- 1.시간이 새겨진 나이든 몸, 2.크고 아름다운 살찐 몸, 3.다름을 알려준 장애가 있는 몸, 4.이대로도 괜찮은, 아픈 몸, 5.규정을 거부하며 존재하는 몸-으로 이루어졌으며, 어제는 4번째 항목을 다루고 있는 특집기사였습니다.
삶은 몸이라 할만큼 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지혜가 참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모두가 공부의 대상입니다.
공부 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 참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공부의 궁극 목표는 무지에서의 해방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 무지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불행이나 비극은 거의 대부분이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한없이 강조하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불가의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貪瞋癡)도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기후위기의 원인도 결국은 인간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궁극의 필생 공부는 무지에서의 해방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전쟁도 결국은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자 지혜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무지에 대한 승리입니다.
하느님 지혜의 빛, 말씀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퇴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매일미사가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 처방이 이 거룩한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입니다.
여기서 무지와 지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입니다.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무지로 인해 하느님의 계명이 덮여 버리면 완전히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 계명의 지혜로 분별되어야 하는 전통이요 관습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전통과 계명간 관계를 깨끗이 정리해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밝히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인간 무지의 보편적 현실을 가리킵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코르반의 예를 들면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부모 공경을 거스르는 이들의 위선과 무지를 꾸짖습니다.
무지로 인해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 헛되이 주님을 섬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사람되는 공부가, 지혜로운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진정 교회 공동체의 보물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의 건물도, 전통좋고 자연경관 수려한 수도원도 그 안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으면 다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수도원이나 사찰을 찾든지 우선 찾아 확인해 보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는 지혜로운 고승(高僧)입니다.
우리 교회나 수도원을 저는 서비스업이라 합니다.
서비스업의 삼대필수조건도 첫째도 사람이요 둘째도 사람이요 셋째가 환경입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고 거룩하고 좋아야 하며,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비스업에는 병원의 예가 적절합니다.
이 서비스업의 세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분이, 26년 동안 제 치아를 치료해주고 있는 독실(篤實)한 믿음의 치과의사 형제입니다.
감히 명의(名醫)요 성인(聖人)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사람 좋고 실력 좋은 의사에 환경 좋으면 최상이겠지만,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식, 무능한 의사라면 정말 문제입니다.
무식, 무능한데다 자기를 몰라 용감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제1독서의 솔로몬의 기도가 참 멋집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너무 중심을 두는 듯 솔로몬의 무지가 엿보입니다.
저는 거대한 건물의 성전을 볼때마다 믿음의 위력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땀과 피를 흘렸겠나 생각하곤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전통적 기도 자세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옳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물이 아닌 땅위의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안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참 거룩하고 좋은 형제들의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이 거하는 집임을 몰랐습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잘 살면 묻히는 어느 곳이나 명당이라 합니다.
<어린왕자>에 사막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샘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 말도 있듯이, 명산대찰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고승(高僧)이 있어서이고, 외적 건물이 성전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참 좋은 거룩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 거룩하고 좋은 사람들이 없는 건물뿐이라면 참 공허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솔로몬은 착안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입니다.
시작도 웬지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솔로몬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사십니까?
창세기에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화려한 건물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로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한 우리들 안에, 우리들과 함께 사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하느님의 현주소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나 어떤 바리사인들의 손씻는 거룩한 행위도 인간의 거룩한 품위의 존엄에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의 공동체 성전에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빛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제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이어 일본의 순교자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박해중 예수회 회원인 성 바오로 미키는 33세에 체포되어 교토의 옥에 갇혔다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2명, 일본인 신자 15명 등 23명과 함께 1597년 1월3일부터 오사카를 거쳐 1월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합니다.
이들은 무려 한달이상 혹한속을 걸어서 2월5일, 도중에 자진하여 합류한 신자 2명과 함께 모두 26명의 신자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합니다.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를 보면, 이들의 순교장면 시 신앙고백을 대하면, 감동 그 자체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일본 순교자 26명의 순교성인 공동체 성전을 통해 영원히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성 바오로 미키가 포함된 순교자들 26명은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안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성인영성의 디엔에(DNA), 순교영성의 디엔에(DNA) 같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당신이 머무시는 거룩한 거처로, 성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국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해 서로 연대하는 사회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삶의 대화입니다.
이웃 종교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서로를 가로막는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신학자들의 대화입니다.
여러 종교의 전문가들이 각자 자기 교파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성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대화’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이는 충분하지 못한 신학 지식과 교리 이해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한 종교인들이 서로의 교리와 생활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 공정하지 못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 가톨릭은 마리아교다.)
타 종교에 대한 교리와 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공동선을 위한 협력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보편적인 가치에 따라서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폭넓은 협력 활동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학문과 예술을 진보시키기 위해서, 기아와 재난, 문맹과 빈곤 등 소외 계층이 겪는 곤경에 대한 대책 마련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특히 생명 경시 풍조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 운동과 창조 질서 보존을 위한 생태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전쟁과 폭력을 막고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넷째,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종교인의 공동의 언어입니다.
기도는 일치를 이루는 힘입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한다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교황청은 2023년 12월 18일에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사제의 ‘동성 커플’ 축복을 공식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교황청 교리성은 선언 내용과 관련해 “축복은 모든 규정에 어긋난 상황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모든 이를 환영한다는 의미”라며 “축복을 통해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아선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교리성은 또 “가톨릭교회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상에 따라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고 풍부하게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교황청 선언문을 옹호하는 측은 이번 결정을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뒤집는 역사적 결정’이라며 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것이라며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교회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부모나 자신이 죄를 지어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될 여인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그들이 죄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 소수자를 포함해서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미국 댈러스 한인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바위 안에 천사가 갇혀 있음을 느끼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는 원석을 다듬어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원석만을 보고서는 “여기에 아름다운 다비드상이 있군.”, “여기에 천사가 갇혀 있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지금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의 사랑에 큰 힘을 얻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게 만드는 사랑을 향해 ‘사랑의 미켈란젤로 효과’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천사를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천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원석만을 바라보고서 ‘쓸데없는 돌이네.’라며 단정을 지어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안에 천사가 있는데, 사랑을 통해 그 안의 천사를 꺼낼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분명 조상들의 전통에 맞지 않는 행동이고, 또 비판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두고 위선자라며 꾸짖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 7,8)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결 예식이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서원을 채우고자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의무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그저 사람의 전통일 따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오로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곳에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관심과 반응을 통해 사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의 몸과 성장을 응원하면서 이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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