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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5HtU3bDTCJg?si=3DM0I04OpFbMLSnn
겨자씨 비유 4:30~32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광풍을 잔잔하게 하심 4:33~41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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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땅에 심긴 작은 겨자씨가 자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커지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배 타고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이 광풍을 만나자 무서워하며,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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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비유 4:30~32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는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첫 복음 선포 장소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였고, 복음을 위해 선택된 열두 제자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나 제의법에 능숙한 사두개인, 재력과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이 아닌 어부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겨자씨는 씨들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씨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심긴 후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교훈하십니다(31~32절).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미하지만 결국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는 이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확장되어 갑니다.
● 더 깊은 묵상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어떤 특성을 보여 주나요?
영적 성장을 기대하며 진행할 주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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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을 잔잔하게 하심 4:33~4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35절). 여기서 ‘저편’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거라사’(5:1)를 가리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확장될 것을 암시한 ‘겨자씨 비유’의 실현입니다. 저편으로 가던 중 배가 큰 광풍을 만나 침몰 직전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광풍에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평안히 주무십니다. 깨어 일어나신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집니다(39절).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광풍 같은 두려운 상황일지라도 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안전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하거나 떠올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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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능력 사용하기
예수님의 주권을 신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믿고 신뢰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제 믿었던 그분을 오늘은 믿지 못하고, 예배당에서는 믿었던 분을 회사에서는 믿지 못하며, 어렸을 때 믿었던 분을 성년이 되어서는 믿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바람과 파도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십니다. 그들이 기적을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탄 배가 바람과 파도에 흔들리자 그들의 믿음도 같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많은 노인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화를 거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은 몰라서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제가 길을 가다가 예쁜 꽃을 발견해 “이 꽃 이름이 뭐지?”라고 했더니, 동행하던 직원이 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는 꽃 이름을 찾아내 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전화기의 놀라운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그 믿음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믿음의 능력을 사용해 인생을 항해하고 있습니까?
쉽게 풀어 쓴 누가의 예수 이야기1 / 이동원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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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4장 38절
걱정과 염려는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려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게 합니다. 또한 상황에만 집중하게 해서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겁에 질리고 염려에 사로잡혀 우리가 주님을 못 볼 때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도, 주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인생의 거친 풍랑을 견디는 힘은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비상사태에는 비상한 믿음으로 주님을 찾고 붙드는 비상기도가 필요하다. - 하용조
오늘의 기도
주님, 믿음이 없어서 작은 시련에도 두려워하며 떠는 저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시고, 저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주님을 기대하게 하소서. 숨 막히는 광풍이 불고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제 인생은 평안함을 선포합니다!
오늘의 찬송(새 406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오늘 본문은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설명하는 내용과 광풍이 불어 배가 침몰하는 위기가운데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예수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그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음을 지적 받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겨자씨 비유, 갈릴리 강풍,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 등입니다.
‘겨자씨’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씨앗으로, 특징은 그 크기에 비하여 큰 나무로 자란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설명된 하나님나라는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후에는 강대하고 번성하게 된다는 것으로,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 심겨진 겨자씨 하나가 전 인류에게 안식을 주는 위대한 거목이 된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로 시작된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 편으로 건너가자’ 고 하십니다. ‘저 편’은 바다 건너편 언덕 즉, 곧 이어서 나올 거라사 지방을 말합니다.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는 말은 청중들이 많았던 관계로 해변에 배를 한 척 띄워 단상을 만들었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그 배에서 내리지 않게 하고 그 배로 곧장 떠났다는 말입니다. 제자들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일부가 배를 타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들의 배도 똑 같이 무서운 풍랑을 만났을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한 마디 말씀으로 잔잔하게 변한 바다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0m 아래 위치해 있어 자주 거센 풍랑이 일어납니다. 멀리 해발 2,815m 만년설이 덮여있는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와 낮 동안 뜨겁게 달구어진 사막의 열기가 충돌하는 까닭입니다.
수면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에 그 때는 기류가 갑자기 변해 회오리 같은 바람이 일어나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광풍이라고 표현했는데 심한 것은 보통 2m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에 물이 가득 찬 것입니다. 당시 배는 지금의 거대한 배가 아닙니다. 주님이 탔던 배는 고기배로 추정됩니다. 그런 배에는 선실이 따로 없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귀한 손님을 위하여 고물(선미, 배 뒤편)에 의자와 간단한 침구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침구도 하나, 베개도 하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밖의 상황에 관계없이 평안히 주무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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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 광풍으로 혼이 빠진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나무라는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방금 전 저녁집회에 하신 주님의 설교 제목은 ‘겨자씨 믿음’입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아무래도 이 사건은 겨자씨 믿음의 적용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비록 작지만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의 모든 염려 곧 재물, 질병, 인간관계, 등등을 꾸짖어 물리칠 수 있는 믿음으로, 그래서 이 땅에서도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보기 좋게 믿음의 복습에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아직 소화하기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침몰해 가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은 곤히 주무십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깨우자 즉시 일어나 바람과 바다에 명령합니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바람은 그치고 물결은 잔잔해집니다. 주님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니, 연약한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적과 기적이지요.
믿음이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신뢰와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이적과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과 기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그것 역시 창조의 기본원리라 그렇습니다. 다만 그 질서를 깨트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라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정상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의 바람과 욕심으로 믿는 다른 믿음인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잘 살면 좋겠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자녀들도 잘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여,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내노라고 살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로또라도 당첨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며 진실되게 사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봅니다. 지식적으로도 하나님을 믿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대로 마귀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풍랑까지도 잠재우는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날 바람과 풍랑이 잔잔해진 현장에 12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후에 이적과 기적 없이 한결같이 순교하고 맙니다. 그 날 주님께서 지적해 주신 그 믿음이 성장해 맺은 결실입니다. 비록 우리 믿음이 부족하지만, 더욱더 성장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12제자를 보면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나아가는 자가 제자입니다.
믿음은 이적과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단지, 이적과 기적은 그분의 소관사항일 뿐입니다.
1월10일 동인천 지하상가
성경은 세상을 바다로 비유합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요 왜냐하면 바다에 갑자기 광풍이 불듯이, 우리의 세상살이에도 미친바람이 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광풍 앞에 우리는 한없이 나약해지고 무기력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사역할 때 홍수에 휩쓸린 적이 있었는데, 온 힘을 다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물 위에 뜬 낙엽처럼 무기력하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죽음을 직감하고 단지 당황한 눈빛으로 하늘을 우러러 봤을 뿐인데, 주님은 천사의 손을 빌어 홍수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을 뿐인데, 일어나셔서 미친 바람을 고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4:38~39)
세상이라는 바다에 삶의 배를 띄워 일할 때에 갑자기 닥친 위험 때문에 영혼이 녹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시107:23~27)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소망 없이 비틀거리다 좌초하고 파선하여 침몰하고 말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즉시 들으시는 인자하신 하늘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107:28~29)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그 항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107:30~31)
그러므로 이 믿음으로 굳세게 되어 주의 평안을 누리며 감사하기 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겨자씨가 자라나듯 하나님의 나라는 한없이 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한마을에서 가르치고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하셨고 그 고된 사역으로 피곤에 지쳐 폭풍이 휘몰아치는 배 위에서도 베개를 베고 주무실 정도였지만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수많은 이적을 보고도 믿음이 연약해진 그들은 주님의 상상할 수 없는 권능을 보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데도 우리는 그 믿음이 겨자씨와 같은 생명력이 없고 더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얕은 감정의 돌밭과 사탄이 주는 유혹과 욕심의 가시덤불에 갇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배와 같은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세상과 사탄이 주는 유혹과 두려움의 파도도 주님을 믿는 믿음보다 클 수 없고 그분의 통치를 흔들 수 없다는 믿음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뢰하고 그 진리를 바라보며 담대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0-32절 하나님 나라는 그 시작이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합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덮을 만큼 엄청난 생명력으로 자라납니다. 처음 예수님이 갈릴리 변방에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을 때, 그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리가 따르는 듯했지만, 대부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적극적으로 배척했고, 그분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나라는 주께서 무덤에 묻히실 때 이 땅에서 사라져버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놀라운 생명력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가지에 깃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온 세계 교회들이 더 이상 새들이 찾지 않는 앙상한 나무로 말라가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외적 규모에 있지 않고
내면에서 나오는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에 있음을 잊은 까닭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자라나게 하십니다(30~34절).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겨자씨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지만,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0~32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겨자씨처럼 그리고 낟알 하나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에게는 초라하고 미약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심히 창대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많은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33절).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34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것에 더한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7)입니다. 겨자씨가 거대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자랄 것을 믿지 못하고 지금 당장 따 먹을 이 땅의 열매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나의 모든 노력과 땀 흘림이 헛되고, 허무한 결과를 만들고 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짜릿함과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쉼을 가져다주는 것에 내 마음과 열정을 쏟는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겨자씨가 자라면서 그 존재 가치를 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찬란한 영광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배우고 깨달아 영적인 성숙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곧 자라나게 하실 하나님 나라에 집착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생의 풍랑을 이겨내는 삶
날이 저물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 때에 광풍이 일자, 제자들은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자신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바람을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은 바다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 인생의 풍랑 속에서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인생의 물음표에 정답을 주십니다(35~37절).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새번역)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36절). 이는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 이상이었음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나 파도가 배로 덮치고, 이미 배 안에는 물이 가득 찼습니다(37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다가 광풍이 일어서 큰 파도가 배로 달려들었고, 배에는 물이 가득 채워지는 인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름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경험하는 것은 실패와 거센 풍랑입니다. 인생의 물음표가 생기게 됩니다. 도무지 주님이 하신 것이라고는 받아 드릴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또 다른 신앙의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의 피난처와 보호자와 그늘이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삶은 순풍에 돛 단 듯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불어 닥치는 거센 풍랑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서 주님은 나의 인생의 물음표에 정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38~39절).
거센 풍랑 앞에서 사람들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공포감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배 안에 있던 제자들 상당수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이제 자기들은 죽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 날의 풍랑이 얼마나 심하고 위태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큰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은 배의 뒤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곳에서 모래주머니나 또는 그 비슷한 것을 베개 삼아서 주무셨을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이 표현은 매우 원색적인 비난조의 표현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원망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 가려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며,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십니다. 곧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39절).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큰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있는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맡기라 말씀하십니다(벧전 5:7). 맡길 때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고 아룀으로 모든 환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죽고 사는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전히 내 삶 가운데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거야?’라며 불평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노라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 문제는 주님만이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쌓여 있는 문제 하나하나를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풍랑 속에서 나의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인생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40~41절).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절)며 책망하십니다. 그동안 동거 동락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고, 간접적으로 해석까지 해 주셨건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몰려오는 광풍과 밀려드는 파도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에게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41절,새번역)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세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안위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해군에서 군 복무를 할 때, 근무했던 군함이 서해 NLL(북방한계선) 경비 임무를 맡고 있어서 웬만한 풍랑에도 경비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집채만한파도를 수시로 경험했습니다. 처음엔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의 파도 앞에서 얼마나 두려워했던 지요...
그런데 몇 번의 경험을 하고 나서는 이 군함은 절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서 그런 집채만한파도가 쳐도 태연하게 나의 임무를 완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함이 가장 안정합니다. 두려움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서 주님은 나의 인생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참된 안식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한 일을 도모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므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막 3:1~19절)... 빛이 있으라...
17/1.겨자씨 비유(30-34절)
우리가 볼 때에 보잘 것 없고 아주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큰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12명의 사도로 시작하여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된것과 같이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행하는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정말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가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 그를 통하여 위대한 믿음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믿음의 삶이 비록 겨자씨와 같이 지금은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온전히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크게 성장케 하신다는 것을 믿고 항상 담대함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천국의 비밀을 믿고 신뢰하며 사는가?
2.바다를 잠잠케 하심(35-41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몰라서 자신들에게 닥치는 풍랑 앞에 믿음 없이 행동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깨워서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지만 막상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 앞에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 버리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칠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생길 때 제자들처럼 믿음 없이 행하지 말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당당하게 그 환란을 이겨내는 믿음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와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가?
겨자씨 만한 믿음(26-34)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여기저기에는 겨자나무들이 풀이나 곡식들보다 훨씬 크게 자라서 그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겨자나무가 돋아난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았다. 처음에 그 씨가 연약한 싹을 내지만 거기에는 강한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자라고 커져서 결국에는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큰 나무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나라도 처음에는 미약하고 변변치 못하게 보인다. 세상 나라와 비교할 때에 그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작은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장을 조소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생명력이 들어 있는 위대한 진리 속에서 복음의 왕국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위탁되어 있었다.
과연 그 나라는 얼마나 빨리 자라났고 그 영향은 얼마나 멀리까지 미쳤는가!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새 왕국을 대표할 사람은 몇 안 되는 갈릴리 천민들에 불과했다. 그들의 빈곤함과 수효의 적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는 순진한 어부들과 연합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거듭거듭 주장되었다.
그러나 겨자씨는 자라서 그 가지를 온 세상에 뻗을 것이며 한때 그들의 영화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세상 왕국들이 멸망해 버린 때에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강하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도 처음에는 지극히 미미하다. 한마디 말을 들려주고 한줄기 빛을 비춰 주고 새 생애를 시작하도록 감화를 끼친 결과를 누가 능히 측량할 수 있겠는가?”(실물, 77-78)
광풍을 잠잠케 하심(35-41)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 폭풍을 대하셨을 때 그분은 극히 평온하셨다. 그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말이나 표정에 두려워하시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분은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제자들이 그분을 의뢰하였다면 저들은 평강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당했을 때 저희의 두려움은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예수님을 잊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자아 의뢰의 절망에서 그분께로 돌아갔을 때뿐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흔히 제자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가! 시험의 태풍이 점점 거세지고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리며 파도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 계심을 잊어버리고 홀로 폭풍과 싸운다. 우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멸망 직전에 빠질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뢰한다. 그 때에야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구해주시도록 그분께 요청한다면 우리의 부르짖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자아 신뢰를 슬프게 책망하시지만 우리가 요청하는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 육지든 바다든 우리가 구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구주께 대한 산 믿음이 인생의 바다를 잔잔하게 할 것이요, 그분께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내실 것이다“(소망, 336).
▧ 적용
1. 나는 겨자씨 만한 믿음의 씨앗을 소유하고 있는가?
2. 나의 마음에 어떤 두려움과 염려의 바람이 불고 있지는 않는가? 문제의 해결자이신 주님께 가져가자.
3번째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30)
겨자씨 한 알과 같다(31)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겨자씨를 본적이 있다.
서로 먼저 볼려고 하다가 옆사람의 콧바람에 씨앗이 날려 가버려서 못 보았다.
작은 비닐 봉투에 넣어서 겨우 보았다. 아주 작은 씨앗이다.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앗보다 작은 것이다.(31)
심긴 후에 자라서는 공중에 새들이 깃들 정도로 자란다.(32)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는 보잘것 없고 작고 초라한 것 같아도
계속 확장하고 확산되어서는 크게 된다는 말씀이리라.
마치 2천여년 전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편만하게 전파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하나님 나라의 성장성 확장성에 대한 말씀
본문에서 주목해 보고 싶은 이적의 사건이 소개된다.
마치 출애굽 때 홍해를 가르시는 것이 연상되는 기적과 같은 말씀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가르치시던 날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 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셨고 주님의 음성 듣고 출발한 길에 문제가 생긴다.
주님이 말씀하셔서 떠난 길이라면 분명히 형통하고 축복되고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고 행복한 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37)
가자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배의 선미 구석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나는 이 때 어떻게 하겠는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뒤돌아 설수도 없다.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다.(38) 할렐루야.
일단 내 안에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일이 첫번째 내가 할 일이로구나.
잠자는 거인을 깨운다는 말씀이 이 말씀인가 보다.
그리고 형편을 주님께 말씀드린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 말씀드린다.
그렇구나 내 형편 상황을 주님께 말씀 드려야 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나의 지금 상황과 형편을 깨워서 말씀드려야 한다.그러면 해결책이 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39)
잠잠하라 고요하라 "Quiet! Be still" 명령하신다.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예수님과 함께한 인생은 예수님이 책임을 지시는 구나.
예수님이 가자고 한 길은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구나.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부르고 찾으려는
기복적인 신앙과 세상과 사탄의 시험 앞에 두려워 떠는
연약한 믿음을 내려놓고 주님과 변함없이 동행하고
그 뜻에 온전히 의지하는 주님의 제자 되길 소망합니다.
어떠한 폭풍과 파도가 우리의 삶 가운데 몰려와도
하늘 아버지의 크신 권능의 손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과 용서로 허락되는 성령의 바람을 타고
주신 비전을 향해 날아가는 거룩한 군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
저 북녘땅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체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