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선거 예비후보자 선출을 위한 예비경선 결과 발표에서 본경선에 진출한 김두관·박용진·이낙연·정세균·이재명·추미애 후보(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현 정부의 ‘계승’과 ‘차별화’.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이 고민에 빠지는 딜레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무시할 수 없는 숫자라면 계승이란 선택지를 무시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는 차별화를 좀 더 고민하게 된다. 지지율 외에 또 하나 고려할 게 있다면 열혈 지지층의 의중이다. 이들은 지지율의 움직임에 구애받지 않고 ‘계승’에 방점을 찍는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통을 이을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은 마치 전쟁 같았다. 당시는 친노(親盧)의 분화가 극에 달했던 때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에서 3강 중 두 축이었던 정동영 후보와 이해찬 후보는 ‘친노 대 친노’의 싸움을 펼쳤다. 경선에서 승리한 정동영 후보에게는 ‘정통들’이라고 불리던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이란 조직이 있었다. ‘정통들’의 모태는 ‘국민의힘’인데, 이 조직은 노사모에서 파생됐다. 정통들과 정동영 캠프에는 노 전 대통령의 대역전승을 이끌었던 노사모 출신 국민경선 주도 멤버들이 포진했다. ‘미키루크’라는 별명으로 조직의 밑바닥을 다지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이상호씨는 정동영 캠프의 홍보기획단장을 맡았다. 노사모의 서울·경기·부산경남 조직에서 수장을 맡았던 사람들은 ‘정통들’에서 정동영 후보를 도왔다. 당시 ‘정통들’의 공동대표가 이재명 경기도지사였다.
친노 조직 중 또 다른 일부는 이해찬 후보를 도왔다. 기존 노사모 멤버에 이해찬 지지를 선언한 유시민 후보의 팬클럽인 ‘시민광장’, 노무현 대통령 직계인 ‘의정연구센터’, 청와대와 노무현 정부 출신들이 이끄는 ‘참여정부평가포럼’ 등이 이 후보를 도왔다.
“이재명 비토? 너무 나간 이야기”
당시 정동영 후보는 비노(非盧) 후보로, 이해찬 후보는 친노 후보로 분류됐다.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 정 후보 측에 참여한 노사모 출신들은 이해찬 지지자들을 향해 ‘활노(活盧)’라고 공격했다. 노 전 대통령을 활용했다는 얘기였다. 반대로 이 후보 측 지지자들은 정동영 지지자들을 ‘배노(背盧)’라고 비난했다. 노 전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이유에서다. 비슷한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난 지지자들의 줄기는 경선 이후에 하나로 결합하지 못했다. 26.1%라는 정동영 후보의 대선 득표율은 분열로 한배를 타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가 됐다.
14년 전 노사모 이야기를 지금 끄집어낸 건, 당시의 이야기가 이 순간에도 어느 정도 접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의 주요 등장인물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통들’ 멤버였던 이재명 지사는 지금 민주당에서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선후보가 됐다. 다만 ‘비노’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던 이력 탓에 지금은 ‘비문(非文)’ 후보로 분류되기도 한다. 2007년 예비경선에서 떨어졌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2021년에는 컷오프를 통과해 본 경선에 올라갔다. 정동영 후보와 겨루던 이해찬 후보는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뒤 당대표를 지내며 지금도 민주당 안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구도는 비슷한 듯 다르다. 민주당은 친노에서 친문으로 이어지는 정치 팬덤이 두 명의 대통령을 만들었고 그 영향력이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정당이다. 2007년 친노가 흩어지듯 2021년 친문도 여러 갈래로 흩어져 후보를 지지한다. 다만 구도는 다르다. 한 민주당 당직자의 얘기다. “2007년 정동영 후보는 노무현 정부와 정치적으로 차별화한 탓에 경선이 내전처럼 진행됐다. 지금 민주당 후보 중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차별화하려는 후보는 없다. 다만 누구나 인정하는 친문 후보가 없어서 갈래가 생긴 거다. 과거에는 분열이었다면 이번에는 분화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민주당 예비경선을 통과한 6인 중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친문 후보는 없다. 친문 의원들이 일괄적으로 한 후보를 지지할 수 없는 후보군이다. 이낙연 전 총리·이재명 지사·정세균 전 총리 등 매머드급 캠프를 꾸린 후보들은 모두 친문 인사 끌어들이기에 나선 상황이다. 2020년 이낙연 대세론이 통하던 시점만 해도 친문 상당수는 그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지율의 변화와 함께 그 강도가 지금은 달리 나타난다.
친문이 분화하는 중심에는 이재명 지사가 있다. 당내 지지율 1위 후보를 친문 의원들이 비토할지 여부는 경선의 관전 포인트다. 친문 의원들이 어느 캠프에 합류하느냐는 당내 열성 지지자들을 위한 내비게이션이 된다.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의 합류는 표심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지사가 우려하는 건 지지자들과의 거리감이다.
단순히 정통들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2017년 당내 경선에서 문 대통령을 매섭게 몰아붙였던 기억을 지지자들은 잊지 않고 있다. 반대로 선거 당사자들은 큰 문제가 없었다고 얘기한다. 당시 캠프에 있었던 전직 민주당 의원은 “당시 이 지사보다 안희정 후보가 감정 섞인 공격을 해서 더 우려했던 기억이 있다. 만약 경선이 양강 구도로 진행됐다면 친문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비토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을 텐데 지금은 어쨌든 다자구도 아닌가. 단지 지난 경선 때문에 이재명 비토론이 나오는 건 너무 나간 이야기”라고 말했다. 친문 의원들을 캠프에 영입하는 데 성공할 경우 누구보다 정치적 이득을 많이 취할 후보는 이재명 지사다.
의원들은 흩어지고 지지자들은 쏠리고
이 지사는 지난 7월 12일 KBS와 가진 인터뷰에서 “난 친문이고 친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중심에서 보면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후원회장으로 영입한 것도 이런 거리를 줄이는 작업이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 지사의 화학적 결합 여부 역시 ‘친문이 정말 이 지사를 비토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14년 전 상대 캠프로 대결했던 두 사람은 지난 5월 21일에 열린 ‘2021 DMZ 포럼’을 공동 주최하면서 관심을 받았다. 이 전 대표가 이 지사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이 지사 캠프에는 이해찬계 인사들이 여럿 포진해 있다.
이낙연 전 총리는 문재인 정부의 계승을 내걸면서 친문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첫 총리를 거치며 유력주자로 떠오른 과정 덕에 그는 자신이 문 대통령의 지지율과 ‘동기화’돼 있다고 판단했던 때도 있다. 이낙연 캠프의 주축 세력은 문재인 캠프 출신과 당대표 시절 꾸린 ‘친문’ 참모진이다. 당대표 시절 사무총장으로 호흡을 맞춘 박광온 의원은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친문으로 분류되는 최인호 의원이 상황본부장을, 홍익표 의원이 정책본부장을,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출신인 윤영찬 의원이 정무실장을 맡으며 핵심 역할을 한다.
정세균 전 총리는 친문 인사 영입에 보다 적극적이다. 단일화 이후 캠프에 합류한 이광재 의원이 친노 껴안기를 상징한다면 강기정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정무수석 출신인 한병도 의원 등은 문 대통령의 청와대를 거친 인사들이니 친문 껴안기에 해당한다. 이들 모두 정 전 총리 지지에 나선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당내에서 ‘친문 핵심’으로 통하는 홍영표 의원이 캠프에 합류했다. 정세균 캠프 정무조정위원장인 김민석 의원은 “앞으로도 친노와 친문으로 표현되는 핵심 인사들이 속속 결합할 것이고, 이미 예정돼 있다”라고 말하며 지지자들에게 강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의원들의 분화와 함께 챙겨 봐야 할 건 지지자들의 분화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재보선 이후 문 대통령과 민주당 팬덤은 다소 축소된 친문과 40대다. 이들은 차별화에 부정적”이라고 지적한다. 요즘 노사모와 같은 오프라인 조직은 사라졌다. 하지만 지지 여론을 조성하며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게 온라인 커뮤니티의 몫이다. ‘친문’ 성향의 커뮤니티들에서 읽을 수 있는 흐름 중 하나가 이재명 비토가 지지로 전환됐다는 점이다. 반대로 이낙연 지지는 비토로 바뀌었다. 의원들의 행보와는 사뭇 다르다.
지지자들이 차별화보다 ‘계승’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은 이낙연 전 총리에게 불리한 지점이다. 과거에는 ‘친문 이낙연’이었다면 지금의 포지션은 ‘비문 이낙연’에 좀 더 가깝다. ‘전직 대통령 사면 발언’으로 점수를 잃은 데다 ‘1위 이낙연’이 아니라는 점은 지지율 회복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선명성 경쟁이 가지는 독
친문들이 꼽는 유력한 상대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 대상이었던 검찰 출신의 윤석열 전 총장으로 친문 지지자들이 절대 져서는 안 될 상대다. 이재명 지사에 대한 비토가 옅어진 건 정권 재창출을 우선 순위에 두고 판단하면서 경쟁력을 중요한 지표로 삼게 된 게 컸다. 친문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여러 캠프에 흩어지면서 대표 주자가 없는 것도 이 지사에 대한 반감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법무부 장관 시절 윤 전 총장과 대립했던 추 전 장관에게 호의적인 흐름이 있는 것 역시 야권 후보 윤석열의 존재 때문이다. 최근 이낙연 전 총리가 사이다 같은 메시지를 내는 것 역시 친문 지지자들을 코어로 삼기 위한 정치적 수사다. 수비적으로 나섰다가 점수를 잃은 이재명 지사가 “원래의 나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세균, 추미애 두 후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동참하고 있는 건 차별화보다는 계승이 당심 공략에 중요해서다.
다수 후보가 출마하는 당내 경선에서 지지층이 분화하는 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분화를 경계하자는 목소리는 자연스레 나온다. 분화가 분열로 확장될 경우가 가장 두렵다. 2007년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재명 캠프의 관계자는 “당심에 부합하기 위해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 선명성은 정책에서 겨뤄야 할 덕목”이라고 말했다. 다른 캠프 관계자는 “경선에서 마음을 얻으려고 당심에 맞는 메시지를 내다가 본선에서 중도 확장하겠다고 바꾼다면 핵심 지지층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본선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각기 다른 캠프에 속하거나 응원하며 치를 민주당의 치열한 전투는 결선투표가 없다면 9월 5일에 마무리된다. 그때쯤이면 분화된 친문들이 다시 한배를 타며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는 여의도의 격언을 실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