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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세계 평화를 절규한 유길준(兪吉濬, 1856년∼1914년)
유길준(兪吉濬, 1856년 11월 21일∼1914년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 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 조사시찰단과 1883년 미국 보빙사 파견시 수행원 이었으며, 그곳에 잔류하여 조선 최초 유학생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귀국 하였지만 1885년 말부터 7년간 가택연금을 당한다. 이후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참여하여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한일 합방 야욕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이다.
유길준은 1856년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한성부 북촌 계동에서 진사 유진수(兪鎭壽)와 이경직(李耕稙)의 딸 정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회준(兪會濬)이 있고 동생인 유성준(兪星濬)이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청송부사를 지낸 유치홍(兪致弘)이고, 당시 진사였던 아버지 유진수는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 당시의 사림파 학자인 유여주의 형 유여림(兪汝霖)의 후손으로, 유길준은 본래 인조 때의 영의정 김자점의 외할아버지이자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12대손이다. 그러나 유홍의 9대손 유인환의 아들들 중 유치홍이 유홍의 삼촌인 숙민공 유강의 10대손 유돈환의 양자가 되면서 유강의 13대손이 되었다. 유강의 증손자이며 유길준의 10대조 유성중은 강원도관찰사로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양 증조부 유돈환의 할아버지이자 5대조인 저암 유한준(著菴兪漢雋)은 저명한 학자이자 서예가로, 유한준은 이재의 문인인 남유용의 문인으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했으며, 유한준은 평생 송시열을 흠모하여 송자대전을 늘 옆에 두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인들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많은 한성부 사람들이 피난을 하자, 그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덕풍리로 피신, 은거했다. 광주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만인 1869년 봄에 한성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 한학 성리학을 배웠다.
어려서 소년 유길준은 암기력에 능하였고 홀로 사색하거나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책을 스스로 읽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조숙하여 음식과 잠자리로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외할아버지 이경직은 최종 관직이 정3품임 도정(都正)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한성부 북촌(北村)의 노론 실학파 학자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했고 살림도 넉넉하여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의 문하에서 한학, 성리학을 배운 뒤 소년기에는 외할아버지 이경직 댁에 머무르면서 각종 고전과 서양의 서적을 접하게 됐다.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외조부로부터 소개받은 서구에 미지의 문명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흥미를 품게 된다.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소년기에 홍대용과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서적을 두루 탐독했다.
15세 때 아버지 유진수에 의해 부인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청주로 분가했다가 다시 한성부로 올라와 낙산서재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때 민영익(閔泳翊) 등을 만나 친구가 된다. 본부인 경주 김씨는 1874년(고종 11년)에 병사하고 다시 충주 이씨와 재혼하였다.
1870년경 그는 외할아버지 이경직을 통해 소개받은 환재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습득하였다. 1871년(고종 8년) 봄, 경기도 지역의 향시(鄕試, 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그는 지공거로 있던 박규수를 찾아갔다. 당시 박규수는 청나라의 북학파 사상에도 정통하였으며, 사절(使節)의 대표로 중국에 갔다온 뒤로 새로운 사상, 즉 개화사상을 펴고 있던 경륜가(經綸家)로서, 관직 생활 보다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했고, 또한 다른 개화사상가인 오경석, 유대치, 개화승 이동인 등과도 접촉했다.
박규수의 서실에서 유길준은 최초로 지구본을 접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박규수가 추천한 중국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등 개화 사상서를 접하면서 국제정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은 박규수의 집에서 《해국도지》를 읽은 뒤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박지원의 저술들,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윤웅렬(尹雄烈),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 등 뒤에 개화파로 활약했던 인물들과 사귀었다. 이어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도 친분관계를 형성해 두었다. 이후 그는 과거시험이 나라를 병들게하는 원인이라며 시험을 거부하였다.
1870년경부터 그는 과거 시험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했다. 그는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과거에 합격할 길이 있었지만, 당시 뇌물과 배경, 연줄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단념한다.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으로 죽은 뒤 김옥균 등을 따라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던 중인 출신 하급 관료 유홍기(劉鴻基)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유홍기와 오경석 밑에서 지도를 받은 김옥균 등은 급진개화파가 되었으나 그는 유홍기, 오경석의 문하 외에도 김윤식 등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도 함께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박규수 가문과의 인연
연암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본래 문우이자 친구였다가 원수로 변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풍자한 데서 감정싸움이 오고 가다가 유한준과 박지원은 끝내 원수가 되었다. 후일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심하게 험담하였다.
“유한준은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평한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당시 경주김씨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과정록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유한준을 아버지의 원수를 뛰어넘어 백세 동안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고 성토하였다. 저암 유한준은 연암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 집안 끼리도 인연이 있고 연배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 문학공부를 같이한 문우(文友)이자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여러번 비평하다가 연암은 저암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혹평했다. 반면 저암은 연암의 저작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몰아붙였다. 그 뒤 유한준 집안과 연암 박지원 집안사이에는 박지원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의 묘를 이장한 곳이 유한준 선산 근처였다. 유한준은 연암 박지원의 이장을 반대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자신보다 먼저 요절한 15세된 손자의 묘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했고 쟁송문제로 발전했다.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는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하였다.
1871년 홍문관 대제학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들였다. 시를 지은 이는 16세의 유길준이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아들이며, 유길준은 유한준의 아들 유회주의 4대손이었다. 유길준이 처음으로 박규수를 만나러 갈 때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는 '우리집과 서로 원수같이 지내왔는데 어떻게 그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게 아니겠냐'며 감개무량해하였다. 박규수는 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백세의 원수에 대한 생각은 잊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오히려 집안간의 불화를 잊자며 유길준의 뛰어난 재주를 거듭 칭찬하였다. 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며 자주 찾아올 것을 권고했다. 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오히려 박규수를 스승으로 받들고 그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았다.
과거 제도 비판과 개혁론 주장
1871년(고종 8년]]의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대리시험 등 부정 시험을 치루는 명문 거족의 자제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1877년(고종 14년) 그는 과거 제도의 해악을 비판하는 과문폐론(科文弊論)을 지었다. 그는 과거 제도가 양반들의 신분 세습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하급 관료 시험인 취재 조차도 세습과 인맥으로 채용하는 등 부작용이 심함을 지적하였다.
격물진성(格物盡性)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격물한 바와 진성한 바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본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에 몽매하니 그 용(用)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어찌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안태(安泰)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과문이란 것은 도를 해치는 함정이자 인재를 해치는 그물이며,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자 인민들을 학대하는 기구(機具)이니, 과문이 존재하면 백해(百害)가 있을 뿐이며 없더라도 하나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위로는 조정의 백관에서부터 밑으로는 민간의 글방 서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문으로 부몰(浮沒)하니, 필경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다가 끝내 각성하여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지나친 관직열과 과거 만능주의는 국익과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과거 제도의 부패상을 지적하는 그의 글이 발표되자 당시 정부와 기득권층은 크게 충격받고 당황해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이 어린 소년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1881년(고종 18년) 조선인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 게이오 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스물다섯 살 때인 1881년(고종 18년) 봄 민영익의 천거로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에 선발되었다. 조사 시찰단의 여행 비용은 국고가 아니라 고종이 내린 특별 내탕금에서 지급된 5만냥의 돈으로 조사와 수행원 등 63명, 일본인 통역 2명이 파견되었다. 당시 그는 배경이 없었지만 민영익의 천거 외에 조사로 선정된 홍영식과 어윤중, 박정양의 후원으로 수행원으로 선발될 기회가 부여되었다. 일각에서 유길준의 과거 제도 비판 전력을 꼬투리 잡았지만 당시 김옥균은 한 사람이라도 더 일본에 파견해야 함을 역설했고, 민영익 등의 강력 추천 결과 그의 수행원 선발은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었다.
한편 조사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던 민영익이 갑자기 시찰단원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민영익은 자신의 수행원으로 정해진 유길준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추가로 배치하게 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어윤중의 수행원은 이미 윤치호, 유정수(柳定秀), 김정한이 정해져 있었지만 민영익의 건의로 유길준을 특별히 추가로 포함시켜 어윤중의 수행원은 3명에서 4명으로 늘게 되었다.
1881년(고종 18년) 5월 7일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출항, 일본에 건너갔다. 신사유람단은 부산항을 떠나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도착하여 규슈,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고베, 요코하마 등지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5월 25일에 도쿄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다른 시찰단원들과 함께 9월까지 4개월 간의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 체류하면서 일본 정치, 군사, 문교, 내무, 농상공부 등 각 부처의 업무, 각 성의 시설과 세관, 군사, 조폐, 무역, 외국인 출입과 교역 등과 농업, 제사, 양잠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하였다. 유길준은 이들과 함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된 부국강병책의 결과물을 시찰하고, 일본인 통역관과 일본인 성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각 담당자의 조언과 첨삭으로 귀국 후 고종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만들었다. 일본의 변화된 모습에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술좌석에 끼이지 않고 홀로 숙소에서 달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였다.
1881년 5월 25일 도쿄에 도착한 이후 일본의 신문물을 시찰한 뒤 일본에 유학,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났다. 유길준은 일본의 개화된 풍경을 보고 일본에 남기를 희망하였다. 그 뒤 일본에 남아서 더 배우고 오라는 김옥균, 민영익의 권고로 그는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일본어, 신문물과 영어, 의학, 세계사 등을 배우다가 1년 만인 1882년에 귀국하였다.
이때 유길준과 유정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후쿠자와는 일본 사회에서 문명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특히 그가 저술한 〈서양사정 西洋事情〉·〈문명논지개략 文明論之槪略〉·〈학문의 권유 學問の勸め〉 같은 책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후쿠자와와의 대화에 감명받은 그는 조선 정치가 썩고 부패했다고 규정, 자신 역시 이러한 책을 써서 조선 국민들을 계몽시켜야겠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미국과 수교를 체결한 조선은 1882년(고종 19) 주조선 미국 공사 루시어스 H. 푸트(L. H. Foote)가 방한하자 조선도 미국에 친선사절단(보빙사)을 파견하였고,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백인을 상대하는 방법을 문의하였다. 이 무렵 후쿠자와는 많은 저작물을 발표함과 동시에 1882년 3월 1일부터 일본에 지지신보(時事新報)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일본의 후쿠자와로부터 편지를 전달받고 원고 요청이 있자 그는 감격, 일본 사회에서 신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그해 4월 21일 '신문의 기력을 논 함'이라는 제목으로 보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명문이라며 자신의 지지신보에 게재했다.
게이오 의숙 재학 중 그는 일본, 조선, 중국 등 동양 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일본인과 청나라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의 도쿄 지부에도 참가해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 청나라 등에서 유학온 다른 유학생들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다.
일본 유학기간 중 생물학자이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관장인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를 만나게 된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찾아가 항상 가르침을 청했고, 후쿠자와에게 조선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안을 물었고, 후쿠자와는 부패하고 무능력한 관료들의 축출, 관직 세습 독점 체제의 타파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힘들 것이며 조선왕조는 끝내 멸망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1882년 6월 민영익의 귀국 권고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7월 23일 한성부에서 구식 군인들의 월급으로 주는 쌀에 모래와 돌멩이 및 썩은 쌀을 주자 여기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그는 임오군란 사태 당시 행동을 삼가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13일 박영효, 김옥균 일행이 수신사(修信使) 겸 사죄사(辭罪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이 파견되자, 그는 박영효와 김옥균 일행이 도쿄에 방문했을 때 사절단의 통역을 맡아보았다. 수신사는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일본의 여·야당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 면담하고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한학을 배워 중국어와 일본어의 기초 실력이 있었던 그는 사절단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박영효 등이 귀국할 때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박영효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임오군란 무렵 유길준과 윤치호는 대원군을 타도하기 위한 일본군의 파병을 청하는 서한을 일본정부에 보냈다. 양쪽 모두 모처럼 시작된 개화가 무산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1883년 봄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 (漢城旬報)》라는 근대 신문 창간에 기여하였고,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 발간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이어 외무 낭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나 신문 발간에 전념하겠다며 사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계속된 권고로 외무낭관이라는 직책만 갖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신문 발간을 위해 일본의 은사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자신의 저서 《문자지교》(文字之敎)를 국,한문으로 혼용, 번역해서 조선에 소개해보라는 부탁을 받는다.
곧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부탁한 문자지교라는 그의 저술을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하였다. 이후 그는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 발간을 추진하였지만 박영효가 좌천되자 신문 발간의 꿈은 무산되고, 뒤로 미루게 된다.
한편 그는 경쟁 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하였다.‘경쟁’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서 1883년에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 그 뒤 그는 어윤중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후일 한국사학자 박노자는 훗날 박정희의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마치 예견하듯이 경제 발전을 위한 일본의 대규모 차관을 들이려고 한 사람들도 바로 어윤중·유길준 등의 ‘실무 개화파’였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러나 유길준과 어윤중의 일본 차관 도입 주장은 고종에 의해 거부되면서 실패한다.
1883년 7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되자, 외무 낭관을 사퇴한 유길준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절단은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고 유길준은 홍영식, 서광범, 고영철, 변수, 현흥택·최경석 등과 함께 사절단에 임명되어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보빙사 일행은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사절단은 40여일 간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 미국 뉴욕을 방문한 유길준은 사람 키보다 월등히 높은 건물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어 워싱턴 D.C를 방문한 그는 미국의 대통령 체스터 A. 아서(Chester Alan Arthur)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박영효의 부탁으로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으나, 재정난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는 1884년(고종 21년) 초에 미국에 파견되는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된다고 하자, 그는 자원하여 보빙사 겸 주미 전권대사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유길준은 미국에 계속 남아서 국비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민영익의 권유로 미국에 남은 유길준은 퍼시벌 로웰의 추천으로 에드워드 모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보빙사 통역을 맡은 퍼시벌 로웰(『조용한 아침의 나라』저자)은 하버드대를 졸업했는데 그의 형은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는 유길준을 대학 친구인 모스에게 데리고 갔다. 유길준은 모스의 개인 지도 아래 공부를 계속했다.
1884년 미국 유학 중 그는 자발적으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는다. 외모보다 한복과 긴 머리가 활동하기 상당히 불편하다고 인식한 그는 귀국 후에 단발을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에드워드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1838 - 1925) 교수의 지도하에 유학 준비를 하며 지내다가 1884년 가을학기에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들어간다. 학비가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미국 체류 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구타와 멸시를 당하고 이방인 취급을 당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모스 교수를 비롯한 소수만이 그를 차별이나 편견 없이 대한다. 유길준은 귀국한 뒤에도 오랫동안 자신의 진로와 행동에 대하여 에드워드 모스 교수와 상담, 상의하였고, 모스 교수는 자신의 일처럼 조언해주었다. 유길준은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면서도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중퇴하고 만다. 그 뒤 2003년 거버너 더머 고등학교에서 그의 후손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거버너 더머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나, 8개월간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기독교 목회자인 E. S.모스에게 영어와 미국 문화에 대한 개인 과외를 받고 있었다. 1884년 8월 그는 모스의 주선으로,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매사추세츠주 바이필드에 있는 바이필드 더머 학원에 입학했다.
보스턴 대학 중퇴와 귀국
자기보다 열 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영어·수학·지리·라틴어 등을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학습 능력은 뛰어났다. 석 달 만에 독학으로 영어회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유길준의 후견인이라고 할 모스 교수와의 편지에서는 학교생활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유길준은 1884년 11월 3일 편지에서 “화산·지진·간헐천 등에 관한 지구과학 시험에서 94점,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다른 편지에서는 “어제 시험을 보았는데 87점을 맞았다. 다른 학생보다 16점 더 높지만 만점인 100점보다 13점 낮은 점수”라고 말하고 있다. 유길준이 유학 중이던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이후 그는 학업을 계속하여 1885년 더머 학원을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미국 유학 시절 그도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깊이 연구했지만, 윤치호와 달리 전통적 가치관을 폐기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참정권, 시민윤리, 합리주의 등을 보고 조선의 처지를 비관, 좌절한 윤치호와는 대조된다. 그도 양반관료의 횡포로 일반 국민들이 공평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폐단이 있음을 예리하게 비판했지만, 조국이 적절한 개혁만 단행한다면 백인종들의 문명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은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1885년 9월 약 2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된다. 보스턴 대학교를 중퇴한 뒤 그는 1885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1885년 미국에 체류 중 그는 버스와 기차에 처음 탑승하였다. 유길준은 버스의 빠름을 놀라워했지만, 유독 기차를 증기차라고 부르면서 놀라워하였다. 한번 움직이면 몇 분의 촌각 안에 수십리 길을 가는 것이 신마보다도 빠르고, 축지법을 쓰는 것 같더라며 놀라움과 감격을 금하지 못했다. 그는 윤치호와 이상재, 박정양, 박중양 등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신의 저서 서유견문 등에서 기차의 속도와 움직임을 놀라워하였다.
서유견문에 기술한 기차에 대한 그의 생각은 '증기차의 속도는 화륜선에 비할 바 없이 빠르며, 신기하고 놀라운 규모와 편리함이 놀랍다'고 하였다. 그는 이 기차에 한번 타기만 하면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고, 마치 바람을 타거나 구름에 솟은 듯한 황홀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버스에 놀랐고, 기차에 다시 놀라게 된다. 또한 유길준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전기가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로 열을 발산하는 원리를 이해하게 된 유길준은 이후 개화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
미국 보스턴에 체류 중 그는 갑신정변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3일 뒤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개화 인사들은 실종되거나 도주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접하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했으나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그는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세계를 견문할 목적으로 배를 타고, 7월부터 유럽 일주를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진학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유학비도 끊어지자 귀국하게 되었다. 미국인 친지들은 그의 귀국을 만류하였으나 그는 배편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출항하여 1885년 12월 16일 인천부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1885년 12월말 그는 미국과 국제정세에 관련된 저서인 조선중립론(朝鮮中立論)을 발표한다. 여기에서 그는 미국을 맹신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미국은 우라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니 의지하여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미국은 멀리 대양(大洋) 건너편에 있으며 우리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더구나 미국이 먼로 독트린(蔓老約, the Monroe Doctrine)을 선포한 후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설사 우리나라가 위급해지더라도 그들이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군대를 동원해서 구원해 줄 수 없다. 옛 말에 천 마디의 말이 한 발의 탄환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의 통상의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
그는 갑신정변이 지지층도 폭넓게 포섭하지 못했고, 시간이 너무 이르다는 점을 들어 실패를 예상하였고,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변은 예상대로 실패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는 민중을 혐오, 경멸하였고 이후 민중을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