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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1,4-13
솔로몬 임금이
4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5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6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7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8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9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10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11 그리하여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뜻을 품고, 내 계약과 내가 너에게 명령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12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13 그러나 이 나라 전체를 떼어 내지는 않고, 나의 종 다윗과 내가 뽑은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 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깊은 눈>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 말씀이 설마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일까 의심도 하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송구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고, 의심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잘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너무도 교만하시기에 우리처럼 깔보신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처럼 교만하시고 우리처럼 깔보시는 분이시라면, 그런 분을 우리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그런 분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실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동족이라고 더 사랑하고 이방인이라고 덜 사랑하는 분이 절대로 아니고, 모든 족속을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그래서 동족 의식이나 민족주의는 아예 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신 것인지,
분명 숨겨진 좋은 의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숨겨진 의도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중에서도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려는 것일 겁니다.
'이방인도 이런데 너희는 더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도전 말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스라엘 동족은 주님을 죽이는데 오히려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미리 아시고 도전하셨습니다.
당신이 동족 주의자인 거처럼 이방인인 자기를 무시하셔도 이 여인은 당신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사실 여인이 그것도 이방 여인이 유대 남자를 찾아온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여인에게 주님은 유대 남자가 아닙니다.
겉모습은 유대 남자지만 그것을 초월하시는 분,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하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신 분임을 믿음으로 이미 안 것이고 믿음의 깊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의 깊은 눈.
저는 이것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눈 속의 풀을 보고 얼음 밑의 고기를 보듯 겉모습과 겉 행동 속의 본질을 보는 깊은 눈.
그것이 믿음의 눈이고,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의 앎입니다.
주님께서 이방 여인에게서처럼 우리를 거칠게 다루셔도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을 보는, 그런 믿음의 깊은 눈을 우리도 이방 여인처럼 가져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헛배가 부른 사람>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고,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 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이유>
영화 ‘백조의 노래’(2020)는 깊은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생각을 자극하는 공상 과학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카메론 터너에 초점을 맞춥니다.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카메론은 스콧 박사로부터 혁신적인 과학적 해결책을 소개받습니다.
그 해결책은 자신의 클론, 즉 모든 면에서 같지만, 불치병이 없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은 스콧이 죽어도 그것을 모르고 제2의 스콧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기 대신 자기의 복제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이 이미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더 주는 자기 이기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콧 박사에게 청합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왠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아내나 아들이 두 카메론을 동시에 보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복제 카메론은 자기만큼 카메론을 아는 인간이 없기에 자기가 숨어줍니다.
카메론은 그런 자신의 복제 인간에게 가족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콧 박사도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카메론이 편하게 죽게 해주는 좋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카메론이 스콧 박사에게 무언가 청할 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은 믿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로 페니키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악령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언가 이 여인처럼 목숨을 걸고 청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 청할 때 우선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강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도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대에게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과 자비가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청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자비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결국 내가 이용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주님을 좋은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모진 분으로 여겨 불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주님께 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칼과 총을 사달라고 청한다면 부모가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아서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에 어긋남을 알기 때문에 계속 청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기 딸이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면 내 청함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도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자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헛갈릴 때는 주님의 기도나 십계명, 혹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는 것이라면 죽기까지 청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는 이의 청을 주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거나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과 더없는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오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어머니에게 드러내신 행동이나 표현들은 우리가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보다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통상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데 있어, 이유나 목적이나 우선적인 순위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특히 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더 중증이고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절박한 이교도 부인의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도 하시고, 잔뜩 뜸도 들이기도 하십니다.
더구나 아주 모진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당하는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예수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로 여겨집니다.
이방인 부인 입장에서는 엄청 큰 모욕이고 수치였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의구심을 품을 상황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지만, 유다인 가운데 태어나셨고 유다 문화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사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일련의 절차랄까 우선 순위가 있었습니다.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이방인들은 그다음 차례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가련한 이방인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즉각적으로 들어주시지 않고 무척이나 뜸을 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일종의 밀당을 계속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고 더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지니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도 단 할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여인의 태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지극한 겸손,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 그리고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그 극진한 마음이 마침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아들 딸들이,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무너져가고 죽어가는 자녀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이방인 여인의 그 지극한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그리고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이 합쳐져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자녀들도 말끔히 치유될 수 있는 기적과 희망을 청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방인 구원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고,
어떤 백인대장의 이야기와 함께 이방인 복음화의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1-32)
하느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어떤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 8,10ㄴ-11)
이 말씀도 이방인 구원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 지역으로 가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신 것은 아마도 제자들 교육과 휴식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이 그 지역에 퍼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만 언급되어 있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 일이 일어난 것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로 보였던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복음서에 기록했는데,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그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해서 하신 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이든지 간에, 주님께 은총을 청해서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든지 간에,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일의 주도권은 언제나 항상 주님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능동적으로, 또 당신이 먼저 원하셔서 사람들의 청을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자’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상 숭배자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상 숭배자가 주님께 은총을 청해서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서 얻으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강아지에서 자녀로 변화되어라.”, 즉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계속 우상을
숭배하면서 강아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겸손한 태도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 말 앞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응답의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말은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여자가 우상 숭배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딸이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보다 더 큰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여자는 딸 때문에 예수님께 왔지만, 그 자신이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청한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은 은총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를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혹시라도 미신을 믿거나 미신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됩니다.
자녀가 되었다면, 끝까지 충실하게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정주 영성과 믿음 -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
잠 깨어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여니 은은한 봄향기가 온몸에 젖어들었습니다.
어제 제 75회 생일을 맞이하여 선물받은 안개꽃과 후리지아꽃이 잘 어울리는 꽃꽂이에서 나는 봄향기, 꽃향기였습니다.
즉시 꽃말을 찾아봤습니다.
안개꽃은 죽음,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 간절한 기쁨, 기대, 밝은 마음, 약속, 슬픔등 꽃말을 지니고 있고, 후리지아는 순백, 결백, 천진난만, 기대, 우정, 감사등의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꽃같은 영혼으로 살라는 깨우침을 주는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말들입니다.
26년 전 동양난(東洋蘭)을 선물받고 형제님께 써드린 “난(蘭)같은 당신”이란 답시도 생각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蘭)같은 당신입니다”
-1998.3.31
어제 제 생일은 뜻하지 않게 참 행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수도원 봉사왔던 꽃같이 향기로운 네 분 자매들은 축하케이크 선물에 축하노래에 이어 제 자작시(自作詩)들을 돌아가며 읽으니 얼마나 꽃처럼 향기로웠던 시간이었던지요!
대표 자매님의 감사 메시지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 모두에게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끔씩 모여 신부님 시낭독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한복판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고고한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치과 의사 형제님으로부터 향기 그윽한 꽃꽂이 택배 선물을 받았고, 즉시 19년전의 “어느 치과 의사 예찬”이란 시도 보내드렸습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풀냄새가 난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쉴 틈이 별로 없는 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이다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예술가이고 세속 안에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 예찬이다”
-2005.3.
놀랍습니다.
19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서 정주하면서, 위 시처럼 한결같이 변질됨이 없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치과 서비스업에 전념하면서,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살아가는 제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입니다.
또 알게 된 지 1년 채 못되지만 수도원과 저를 끔찍이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평생 간직하고픈 수필집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제, 등짐을 내려놓다.-전국 가톨릭 성지순례완주, 그 발걸음 에세이>
표지 제목에 이어 안에는 저에게 보낸 글이었습니다.
“고마우신 분, 하늘 만큼 존경하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순례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한 웃음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드리며, 2024.1.20., 저자 박온화(朴溫花) 루시아
뒷 표지의 이해인 수녀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단아한 추천글도 일부 나눕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너무나 성실하고 단단하게
인내로운 신앙인의 본을 보여주는
박온화 작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글을 통해
우리에게도 영적갈망이 은은하고 새롭게 피어오르는
참 기쁨을 맛볼수 있으니 거듭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위해 목숨바친 순교성인들을
더 깊이 더 고맙게 기억하면서
기도의 하얀 꽃 한송이 바치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 계시듯 성인들도 언제 어디서나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윗분들은 물론이고 제 주변에는 하늘의 별처럼, 땅의 꽃처럼,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정주영성과 믿음을 살아가는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성인같은 분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60대 초반에 병사한 약 55년전 제 고향 충남 예산의 옆동네 홍성 출신의 교대시절 절친이었던 분의 교대부국 동산에 세워진 돌판 묘비명에 “한결같이”란 친필 글자도 문득 생각납니다.
“한결같이” 절친의 삶의 모토였던 듯 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온 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이 내내 회한(悔恨)으로 남아있습니다.
강론 서두가 길었습니다.
얼마전 “1.책 더 많이 보고 싶어서, 2.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 했는데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3.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습니다.
어느 고승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 유언을 남겼다는데, 저는 하루하루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고, 공부할 것 가득 안고 강론을 씁니다.
다산 어록의 오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탐내기보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재물보다 풍성한 만족을 준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정주 영성과 믿음을,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참사람의 성인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한결같은 믿음과 독서의 솔로몬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다윗과 솔로몬에게 적용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솔로몬은 한결같지 못했고 날로 변질 부패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의 반면 교사 역할을 하는 다음 솔로몬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 못하였다.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르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 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솔로몬은 700명 아내와 300명의 첩을 두었다 하니, 그 변질 부패 인생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면 얼마나 부패 변질되고 망가지고 무너질 수 있는 지 보여줍니다.
이래서 광야인생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잘못 미치면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종교도 국적도 빈부의 격차도 남녀노소도 보지 않고 믿음만 보십니다.
주님은 한결같이 당신 중심의 정주영성과 믿음에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챙기십니다.
바로 그 좋은 예가 복음의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과 인내의 정주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그녀의 믿음에 감동한 주님의 치유의 응답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참으로 주님의 불퇴전(不退轉)의 여전사(女戰士),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한 믿음, 인내의 믿음, 탄력좋은 백절불굴의 믿음,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 목숨을 건 믿음이 딸을 살렸습니다.
솔로몬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하는 탄력좋은 믿음으로,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으로 살 때 영적승리의 삶이요,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네가 그렇게 말하니">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 만난 하느님께 굳이 이름을 붙여 드리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마르 7,24)
예수님께서 가신 티로 지역은 갈릴래아 북쪽과 경계가 맞닿은 곳으로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섞여 살면서 주로 이방 종교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교도들 사이에도 이스라엘에서 온 젊은 예언자의 소문이 금새 퍼진 것 같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마르 7,25)
이 여인은 불쌍한 딸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곧바로 소문을 듣고 당장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기민하고 적극적인 모습에 겸손까지 갖추었습니다.
제1독서에 드러난 솔로몬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입은 상처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 이교 여인을 통해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임금 중 하나면서도 한분이신 주님만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이교 신들을 추종한 오점을 역사에 남긴 바 있습니다.
"강아지"
(마르 7,27.28).
예수님 입에서 다소 충격적인 비유가 흘러나오지요.
이교인들을 강아지에 비유하신 겁니다.
그런데 언어 통념상 흔히 "개"를 들먹이면 욕설처럼 들리기 십상이지만, 이 경우는 그런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또 반려견의 위상이 시대와 문화마다 다른데 당시로 보면 아무리 집 안에서 귀하게 기르는 강아지라도 먹을 것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 강아지들도 ...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여인은 담대하지만 불손하지 않게 지혜와 겸손을 다해 답을 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이 믿는 이교 신이 여태껏 하지 못한 일을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자기가 이교인이라 해서 다른 유다인들처럼 함부로 자신을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신뢰도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그분 인격에 대한 신뢰로 이처럼 청을 드리지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
(마르 7,29)
예수님은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 주십니다.
인간의 말에, 그것도 이교도 여인의 말에 하느님 말씀의 권능을 부여해 주시는 통큰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주체는 겸손하게도 예수님 당신이 아니라 여인의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기까지 하는 이교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준 사람에게 받은 만큼만 되돌려주는 장삿속이 아니라 모두와 전부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분이 어느 한 집단만을 전담하는 특정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지요.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1열왕 11,12).
특별히 더 사랑하고 아끼는 이의 배반은 더 깊고 슬픈 상처를 남깁니다.
아마도 솔로몬의 우상 숭배가 하느님께 그러했을 것 같지요.
당장 분노를 터뜨리셔도 모자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 자애를 거두시지 않겠다고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어(2사무 7,12-15 참조) 징벌을 유예해 주십니다.
만일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니라, "그래서 하느님", "그러므로 하느님"이기만 하셨다면, 우리가 과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삶의 질곡마다 우리에게 내리시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의 죄악을 뛰어넘는 반전의 역설이었음을 우리가 모르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청한 이교 여인에게 그녀가 바라던 은총이 온전히 주어졌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엎드려 간청하는 우리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말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이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바람을 담고 또 닮기를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이 최고의 덕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덕의 어머니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참 멋진 말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지혜로운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과 권력 그리고 오래 사는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재물과 건강까지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아이 어머니라고 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정 그렇다면 아이를 둘로 갈라서 나누어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진짜 엄마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아이를 포기한 엄마에게 아기를 주었습니다.
진짜 엄마는 죽은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벌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왕자였을 때입니다.
다윗 왕은 대장장이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지에 어려움에 처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성공했을 때에는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새겨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대장장이는 무슨 말을 넣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대장자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장장이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글을 반지에 새겨서 다윗 왕에게 주었습니다.
다윗 왕은 크게 만족하며 반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왔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하였습니다.
솔로몬을 축복하며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과 멀어졌습니다.
교만함이 솔로몬의 지혜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꾀에 스스로 속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솔로몬도 교만함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뽐내며 기도하는 바리사이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거만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많은 헌금을 했던 바리사이의 봉헌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작은 헌금을 했던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는 잔치에 초대 받으면 제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집주인이 와서 너희를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미국 댈러스 한인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20세기 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마다 순회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마단에 불이 난 것입니다.
곡마단의 광대는 분장을 지우지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광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광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제는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광대는 진짜 불이 났다면서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광대가 정말로 연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곡마단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불이 번져서 마을까지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워낙 거짓이 많아서인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에서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믿음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며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정확한 답을 위한다는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인간이 정확한 진리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욱더 주님 뜻에 집중하면서 그분 안에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만든 힘든 삶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딸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에 심한 모욕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랑의 딸에게서 마귀가 쫓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믿지 못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라면서 비판을 받던 이방인 여성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굳은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디게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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