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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b6sSeCnukYw?si=eu8S9AhirwmZ8T8i
혈루증 걸린 여인의 믿음 5:21~34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5: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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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회당장 딸을 고치러 가시는 길에,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자가 그분 옷에 손을 대자 치유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그녀를 구한 것이라 하십니다. 회당장 딸이 죽었다고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아이가 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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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증 걸린 여인의 믿음 5:21~34
믿음의 행동은 치유의 이적을 가져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 가는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발아래 엎드리어’에서 겸손이, ‘간곡히 구하여’에서 절박함이 느껴집니다(22~23절). 예수님이 야이로 집으로 가시던 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한 여인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대고 치유받는 일이 일어납니다(25~27절). 부정한 병으로 규정된 혈루증을 앓는 이는 타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레 15:2).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치유되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평안히 가라’는 말씀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십니다. 믿음의 기도, 믿음의 행동은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꿉니다.
● 더 깊은 묵상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취한 행동은 무엇인가요?
나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믿음으로 표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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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5:35~43
잠시 지체된 사이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집니다.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예수님께 폐를 끼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장례 준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죽음은 잠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애곡하는 무리는 비웃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를 다 내보내시고 야이로 부부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적의 현장에 믿음의 사람만 함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달리다굼”(41절)이라고 명하시니 죽었던 소녀가 즉시 일어나 걷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권자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애곡하는 사람, 비웃는 사람을 다 내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이적의 현장에 함께할 수 있을 만한 믿음의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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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구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셨으며, 구원을 완성하신 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런데 우리 삶을 바꾸는 기독교 신앙은 이를 지성적으로 믿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신뢰’라는 단어는,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신앙을 더없이 잘 담아낸다.
깎아지른 벼랑에 섰다가 발을 헛디뎌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자. 떨어져 내리는 순간, 절벽 끝에 튀어나온 나뭇가지 하나가 보인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다. 몸무게를 지탱하고도 남을 만큼 튼튼하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가 버텨 줄 거라는 지적 확신이 가득할지라도 내가 손을 내밀어 붙들지 않으면 추락을 피할 수 없다. 반면 나뭇가지가 정말 튼튼한지 의심되고 불안한 마음이 가득할지라도 어쨌든 손을 뻗어 단단히 잡는다면 살 수 있다. 실제로 목숨을 구하는 것은 믿음의 세기가 아니라 그 대상이다. 허약한 가지에 대한 강한 믿음보다, 튼실한 가지에 대한 연약한 믿음이 훨씬 유리하다. 의심과 두려움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필요가 없다. 헌신의 품질과 순도에 공을 들이는 것은 스스로 자격을 갖추겠다는 오만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힘은 믿음의 깊이나 순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저 내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기대어 그분이 나를 용납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 된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 팀 켈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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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5장 30, 34절
예수님을 향한 작은 행동은 기적의 마중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분 옷에 손을 댄 여인의 행동을 구원 역사에 참여한 것으로 추켜세우십니다. 한 가닥의 소망을 품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의 애절한 손길을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성도 한 사람의 소박한 기도와 작은 섬김, 보잘것없는 열정, 일상에서의 평범한 예배는 주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수와도 같은 주님 은혜의 역사는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 토미 테니
오늘의 기도
주님, 모든 소망이 절망으로 변한 순간에도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붙드는 믿음을 주소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자애로우신 주님 음성에 순종하며 주님 손을 잡고 일어서게 하소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믿음으로 살아 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92 주 없이 살 수 없네)
오늘 본문은 12년 혈루병을 앓다가 치유 받은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기사입니다. 12년간 혈루병을 않던 여인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대어 치유되고, 주님은 믿음이 그녀를 구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아이가 잔다고 하시고 소녀에게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는 일어나 걷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회당장의 간청,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 소녀의 사망소식,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예수그리스도 등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엎드려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회당장은 유대 회당의 책임자로, 건물의 관리뿐만 아니라 토라의 낭독, 기도문 준비, 설교자 선정 등의 일도 관장하고 있었던 유대교의 중요인물입니다. 따라서 덕망 있는 자 중에 선출되며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고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그런 사람이었건만, 그런 그가 이제 30세 청년인 예수 발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사회적 위치와 명예 등에 연연치 않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체면과 위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아버지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 큰 무리로 에워싸여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소유하고 있었던 능력 중 일부가 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주님께 의도적인 접촉을 함으로 병이 치유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밝히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고 또한 그에게 병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건강한 여성은 월경 시에만 출혈을 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수시로 하혈하여 그 병을 혈루증(만성출혈증)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율법에서 그 병은 유출병(성병)의 한 종류로 보아서 부정한 병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병에 걸린 자를 경멸하고, 병이 나을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병에 걸린 것만 하더라도 억울한데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판단을 받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에 여인은 병 낫기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을 하였는데 그 기간이 12년입니다. 공교롭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이가 같은데, 하지만 큰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요점은 12년간 그 여인은 수많은 의사와 약을 찾았지만 모두 다 허사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여인에게 주님은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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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회당장 장례식장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곡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초상집은 엄중한 분위기 보다는 다소 시끄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자들이나 지도급 인사들의 장례식장은 더 요란하였는데, 전문적으로 우는 사람들과 장례용 악기 연주자들을 돈을 주고 고용한 까닭입니다.
직업적으로 우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가슴을 치거나 손바닥을 치며 구성지게 함창 또는 교창을 하니, 지역유지의 초상집이었으니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많은 조문객들까지 합친다면 매우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순간에 얼음장처럼 변합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 때문으로, 그 아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곧장 비웃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로 보아서 인간의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 이 원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의 형태로 그들의 조롱 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 그들을 다 내쫓으시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죽음에서 깨우십니다. 그 말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쓰는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초상집에서 쓰기에는 극히 어색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을 아침에 깨울 때 사용하는 극히 평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말을 매우 자연스럽게 쓰십니다. 주님에게는 죽음과 잠이 큰 차이가 없으니, 생명과 부활의 주인의 입장에서 사람의 죽음은 잠깐의 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치 해가 뜨는 밝은 아침에 아이를 깨우는 부모처럼 그 소녀를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목숨의 주관자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재이나, 그러나 한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곧 수면상태와 같은 것으로, 진정 죽음과 삶의 통치권을 가지신 이의 말씀으로 다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샘플이 바로 회당당의 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이는 장차 우리에게도 일어 날 일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종말이 아닙니다. 주안에서의 단지 안식일뿐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을 여는 시작일 뿐입니다. 잠자듯 죽어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그때 우리도 소녀처럼 일어 날 것입니다. 그 말은 매우 평범한 말로, 우리 귀에도 들릴 ‘달리다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5-34절 한 사람을 배제하여 공동체의 정결을 유지하던 시대를 끝내시고, 모든 이를 포용하여 정결케 하는 새 시대를 여십니다. 혈루증은 한 여인을 열두 해 동안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유대의 ‘정결법’(레 15:25)은 그를 회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어 공동체에서 배제시켰습니다(참조. 겔 36:17).
정결법은 부정한 것과 접촉하여 부정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존재에 접촉하여 그를 정결케 하시는 분입니다(참조. 마 8:2-4). 그분의 정결함이 우리의 모든 부정을 깨끗케 하십니다. 그로 인해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 공동체 안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공동체 안에 있는 혐오와 배제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것을 정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이 일에 어떤 해답으로 다가옵니까?
35-43절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셔서 죽은 딸을 살리십니다. 악한 세상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체제를 벗어나면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상식으로 포장하여 우리 믿음의 진의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상의 시끄럽고 회의적인 말들을 잠시 내보내고, 믿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내 삶에서 내보내야 할 불신의 말들은 무엇입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5-34절 믿음의 선택은 삶의 전부를 거는 모험입니다. 여인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죽은 듯이 살아야 했습니다. 전 재산을 치료에 쏟아부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이 비극을 숙명으로 여기며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여인이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일은 율법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살겠다는 그 믿음이 그녀를 구원하였습니다. 나는 삶을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절반의 믿음, 절반의 헌신은 절반의 불신, 절반의 불순종을 염두에 둔 허울뿐인 신앙임을 기억합시다.
1월12일 동인천역
예수님께서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한 사람은 상류층으로 권위 있고 존경 받는 회당장 야이로였고, 한 사람은 하류층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름도 모르는 한 여자였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라 약자인 여성은 못 본 체 하면서, 강자에게는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 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야이로가 먼저 와서 죽게 된 어린 딸을 안수하셔서 살려 달라고 간청했고, 그래서 집으로 가는데, 열두 해 혈루증 앓던 한 여자가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믿고 손을 대었는데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만 품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며 굳이 그 여인을 찾으셨고 사랑의 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름도 모르는데 그가 겪은 모든 상황은 너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적인 사람들은 하찮은 여자 잡담이나 들을 시간을 아껴서 서둘러 갔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예수님과 여인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도 귀중히 여기셨고, 야이로도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시고,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곧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살아나 걷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는 그 여인도 약자고, 야이로도 약자고, 우리 모두가 다 약자입니다 그래서 약자 중에서 건져 강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그래서 약자로 요긴하게 하시고, 천한 자로 귀하게 하시고, 못난 자로 아름답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12:22~23)
그래서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60:22)
나을 수 없는 그 여인이 회복되는 시간, 낫기를 기다리던 야이로의 딸은 그만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회당장의 사람들이 ‘선생님’께 더 이상 폐를 끼칠 상황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체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모든 이들은 주님의 말과 행동을 비웃고 조롱했지만 ‘일어나라’는 그 생명의 권세는 그 아이로 하여금 뛰어다니며 다시 먹을 수 있게 하셨고 그 부모와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 세명은 그 부활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눅 8:51)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43절) 그 빛과 능력은 감추어질 수 없었습니다(마 9:26).
지금도 세상은 주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하게 하며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공중 권세와 악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두려움을 이기는 자’에게 자유함을 얻게 하시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를 도우셔서 ‘증인’으로 세워 가십니다. 부
족한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을 따라나서며 또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며 간절히 부르짖는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의 삶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됩니까?
➲ 겸손과 교만의 선택이 주어집니다(21~24절).
거라사인을 떠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셨을 때, 거라사인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왔습니다. 이때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합니다. ‘...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절)... 회당장은 회당 건물과 예배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 높은 지위를 가진 지도자이며, 회당 구성원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부르는 존경의 칭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이지만 예수님의 권세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오시면 죽어 가는 자신의 딸이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가실 때에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어댔습니다(24절). 이 표현은 곧 나오게 될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 앞에 굴복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나의 일상의 삶을 보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야이로는 비록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왔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선 그는 겸손했습니다.
나의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그러지 않는 삶이 바로 교만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교만의 기로에서 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믿음과 불신의 선택이 주어집니다(25~34절).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계속 피를 흘리는 병이기 때문에 매일 부정한 상태였으며, 결국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배제되어 피폐한 상태에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파산 상태에 처한 것이 이 여인의 현재 상태였습니다(26절).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곧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이 나간 줄을 알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고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스스로 두려워하여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녀가 믿음대로 구원받았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34절)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임을 보여줍니다.
마음으로 믿고 행할 때,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절,새번역)이기 때문이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롬 10:10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놀라운 이적과 권세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31절).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응답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무지와 불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큰 무리들이 밀고 있는 현실에 갇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여인은 큰 무리들 때문에 답답한 현실의 벽 너머로 그리고 자신이 처한 참담한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실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과 불신은 그야말로 한 순간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평안과 치유와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믿음과 불신의 기로에서 믿음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과 실소의 선택이 주어집니다(35~43절).
예수님이 말씀을 계속하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35절,새번역)라고 말했습니다. 딸의 죽음 소식을 들은 회당장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위로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처음 가졌던 그 믿음(22~23절)을 계속해서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회당장 집으로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절)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롱까지 하는 불신앙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한 제자들과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이 광경에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즉,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입니다. 엎친 데 덮치고, 인생의 험난과 고비를 쉼 없이 넘어가야 할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을 지라도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진짜 믿음입니다. 롯이 사위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비웃던 사람들은 잠시 후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의 역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를 하는 현장에서 비웃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표현하지는 않지만 조롱하는 듯 한 행동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행동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임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천국 잔치에 그들은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실소 즉, 비웃음과 조롱의 기로에서 순종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니님의 영광과 사랑을 삶 가운데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막 5장 21~43절)... 빛이 있으라...
1.회당장 야이로(21-24절)
오늘 예수님앞에 나아온 회당장 야이로는 대단한 큰 결단을 하고 주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예도 딸보다 중하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도 사람들의 비난도 딸을 살리는 것보다 우선되지 않음을 그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서 신앙적인 담대함을 보이지 않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연약함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야이로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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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환경과 여건을 핑게하면서 신앙으로 행하여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2.12년의 아픔을 넘어선 믿음(25-35절)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12년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그 옷자락을 만져서 나음을 받는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이 가진 소원을 믿음의 행동으로 나타낼 때에 역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참된 소원은 믿음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묵상하기
나는 소원은 있지만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부족하고 또한 쓰실만한 것이 없는 인생을 찾아오시고
붙들어주시며 일으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다시 기쁨과 감사를 회복합니다.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
구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덮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높이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https://youtu.be/aKR-JPWaRyc?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