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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제1독서 : 바룩 5,1-9
제2독서 : 필리 1,4-6.8-11
복 음 : 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세례자 요한
류해욱 요셉 신부
대림 시기입니다.
교회 전례력으로는 시작이지만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있는 대림 시기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 누구나 새로운 결심과 각오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고
성실하게 한 해를 보내리라 다짐했었을 것입니다.
저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게으르게 보냈던 날들에 대해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해를
더 나은 도약의 해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되돌아봄은 미래를 향한 기다림이기도 합니다.
이 되돌아보는 시기를 기다림의 시기, 대림 시기라고 하지요.
대림 시기는 말 그대로 ‘누군가 오시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이지요.
누구를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립니까?
예수님, 우리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고, 와 계시며, 오실 분이시기도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가깝게는 우리 모두 ‘성탄’을 기다립니다.
성탄은 분명, 2000년 전 일어난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탄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의 베들레헴이라는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이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어제의 사건일 수만은 없고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탄을 단지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유다 고을에서 태어나신 탄신 일로
기념하고 축하한다면, 굳이 대림절,
이 기다림의 시기를 가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에 오셨던 분이 아니라 오시는 분,
오실 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릴 때, 무엇인가를 준비합니다.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오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집안 청소를 하고 대접할 음식 등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이 대림 시기에, 우리는 여러 번 매일 미사의 복음 말씀에서
오시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
‘회개하라’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너머 어디엔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오시는 그분,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과 삶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준비는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가 무슨 큰 죄인이라고 자꾸 회개하라고 하는가?
회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회개란 어원적으로 보면 ‘가던 길을 바꾸어 돌아선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아닌 곳을 향해 가던 길을 돌아서서
이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 천하를 주유하다가
드디어 어느 강가에 가면유명한 구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그에게 제자로 삼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구루는 가짜였습니다.
그 구루가 말했습니다.
“내 제자가 되려면 먼저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도를 닦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명정신이다.
그대의 순명 정신을 시험하겠다. 그대는 걸어서 강을 건너갔다 와야 한다.”
그 강에는 악어가 우글거렸습니다.
지금까지 그 강은 건너갔다 온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강을 건너면서 외쳤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러자 악어들이 모두 물러났고
그 사람은 유유히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놀란 중에 가장 놀란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구루였지요. 구루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그렇게 위대한 줄은 자기도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구루는 생각했습니다.
“와아! 저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자 악어들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물러서다니.”
그 구루는 그 생각이 드니, 그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지요.
자기는 적어도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 않을까요? 아니라고요?
아니, 어쩌면 가짜는 늘 자기에게 최면을 거나 봅니다.
자기가 가짜가 아니라고.
그의 생각은 그를 멋있어 보이는 장면으로 몰아갔습니다.
“저 친구가 단지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미를 받으라고 하는데
악어가 경의를 표했다면내가 직접 강에 들어서면
악어들이 얼마나 커다란 경의를 표할 것인가!”
그래서 그는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 광경을 보여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구루가 강을 건넌다는 소문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왔고
그 구루가 드디어 강물로 들어가면서 외쳤습니다.
“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라.
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라.”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뻔하지요. 여러분들, 모두 답을 아시지요.
악어들이 떼로 달려들어 그 구루를 삼켜버렸습니다.
오호, 통재라! 아니, 깨소금 맛인가요?
그렇게 말하면 너무 심하지요. 그래도 불쌍하지요.
오늘 대림 제2주일을 맞아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습니다.
그는 진짜 구루, 진짜 예언자, 참으로 위대한 인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것처럼 그는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랐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유다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친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 선민으로
자기들은 죄가 없기 때문에,
할례만 받을 뿐, 세례를 받지 않았거든요.
세례는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때, 세례를 주었어요.
그런데, 요한이 유다인들에게 외친 것입니다.
당신들도 죄인이고, 따라서 당신들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세례자 요한은 시대 변화의 한 가운데 선 인물입니다.
정통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입니다.
밉기 짝이 없는 인물.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밉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위엄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고,
실제로 많은 제자가 그를 추종했습니다.
군중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기대를 걸었고 그를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으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에서 듣는 것처럼
세례를 준 사람,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그는 외쳤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에서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바치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혹시 오시기로 되어있는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할 때,
그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자기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이어서 요한은 증언합니다.
그분, 자기 뒤에 오시는 분, 예수님이 바로 그분, 구세주라고.
복음에서 우리가 듣지요. 그의 고백을.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 신지 몰랐노라고.
그래서 제자들을 시켜 묻게 했지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메시아이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이제 그는 알았고, 알았기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찬미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깨닫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녔던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도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지요.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을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열려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깨어있는 의식을 본받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따르며 스승으로 삼고 추종했지만
자기 뒤에 오시지만 자기보다 더 앞서신 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낮출 수 있었던 그 겸손을 본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실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겸손은 어려워.’ 누가 불렀지요? 조영남 씨입니다.
그의 노래 가사 중에는
“겸손하지 못한 점 하나 빼 놓으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겸손은 어려워”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예화로 드린 이야기에서의 그 가짜 구루처럼 많은 사람들은 쉽게 착각합니다.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자기가 정말 위대하다고.
오! 찬란한 착각이여! 그야말로, 오호 통재라! 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입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육이 있어서 연수원으로 갔습니다.
연수원에서는 숙소를 배정하게 됩니다. 저의 방은 317호였습니다.
지나가며 보니 다른 방들은 독방이거나, 두 명이 지내는 방이었습니다.
제방은 317호인데 2층에 있었고, 어렵게 찾아가보니 그곳은 20명이 한 방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저의 침대는 아직 자리에 없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20명이 함께 지내는 것도 자신이 없었고,
아직 침대도 없었기에 자리를 배정한 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
담당자는 제가 잘 아는 선배였습니다.
선배는 곧 침대를 갖다 놓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며칠만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다같이 20명이 사용하는 방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독 저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불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사제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중 버스에 탑승할 때면 내리기 쉬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두 명 씩 침실을 배정받지만 저는 독방을 사용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맨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봉성체를 갈 때도, 환자 방문을 할 때도 봉사자들이 차량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꿈’은 그동안 제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살았음을 돌아보게 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카톡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큰 아들의 집으로 갔는데
아들의 집 비밀번호가 어머니의 집 비밀번호와 같았습니다.
큰 아들은 어머니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도록
어머니의 집과 같은 비밀번호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집도 같은 비밀번호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집으로 갈 때는
적어도 비밀번호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아들의 결단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준 며느리들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면 언제든 오실 수 있도록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아파트의 이름이 대부분 어려운 외국 말인 것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미국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긴 장벽을 설치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친지들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된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두사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이 도착하는 항구였습니다.
교황님의 방문 후에 유럽은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국경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북한이 초청을 하기만 하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으로 북한의 신앙의 문도 활짝 열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장벽과 차별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사랑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는 공유제로 국가와 빈부의 차별 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코로나19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스크를 벗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루카 복음은 좀 지나칠 정도로 개개 인물들을 역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의 신학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이러한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즉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요한의 직무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소식을 듣고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 길을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쫓고 있는 돈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