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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의 불신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열두 제자 파송 6:7~13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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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그 지혜와 권능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소수의 병자만 고치실 뿐 권능을 행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귀신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열두 제자를 둘씩 보내시니, 그들이 나가 회개를 촉구하고 귀신을 내쫓으며 병자를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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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의 불신 6:1~6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으로 가십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회중이 놀랍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이적을 일으키는 권능에 놀라면서도 그 권위를 부정하는 말을 쏟아 냅니다.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경멸이 담긴 표현입니다. 또한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로 지칭해 예수님의 권위를 낮추고, ‘목수’라 규정해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무자격 설교자로 낙인찍습니다. 인간적 편견은 구원과 멀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받기 어렵다고 하시며 나사렛에서는 소수의 병자만 치유해 주십니다. 편견과 불신은 구원을 가로막는 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라면서도 그분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버려야 하는 편견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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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파송 6:7~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십니다. 둘씩 짝지어 파송하신 것은 증거(증인)의 확실성과 동역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지팡이(방어용 무기)와 옷 한 벌과 신발만 소유하게 하십니다. 양식과 배낭과 돈을 금하신 것은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눅 22:35). 마을에 들어가면 복음을 영접한 사람의 집을 거점으로 삼아 머물되,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발의 먼지를 떨어 증거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 땅을 지나온 후 신발의 먼지를 떨어 부정을 제거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을 행합니다. 복음 전파는 교회의 본질이자 성도의 본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제자를 파송하실 때 예수님이 주신 것과 금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제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모든 필요를 아시고 완전히 채우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그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반응하길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겸손을 입고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03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오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여 회당에서 가르치자 사람들이 그 지혜와 권능으로 놀라지만 곧 출신성분을 파악하고는 배척한다는 내용과 열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선교여행을 보내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 불신의 결과, 열두 제자의 파송, 제자들의 활동 등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은 뒤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으로, 예수의 신상명세를 보니 별것 아니었다는 조롱이 담긴 냉소입니다. 우선 ‘이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이 지혜롭고 권능이 있을 진데 그렇다면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람에 준용해서 적어로 랍비 즉, 선생님정도는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으로 하니, 이는 원어상으로도 경멸의 뜻이니 멸시와 모욕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아들’ 이라고 한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1C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아버지가 생존해 있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아들로 소개되지, 어머니의 아들로 소개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머니의 아들로 소개되면 그것은 사생아의 아들이라고 광고하는 매우 대상자를 경멸하는 표현이지요. 특별히 목수라는 직업을 밝히니, 이는 신분을 까발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들은 여간해서 직업을 거론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하나님 아래 모든 사람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랍비가 아닌 경우 직업을 밝히는 것 역시 삼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출신성분과 그 직업까지도 공개적으로 밝히니, 이는 당시의 관습과 예의에도 어긋나는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이상에서 보면 그 말은 결단코 주님을 높인 말도, 제대로 평가한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폄하하고 비아냥대는 말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고의적으로 주님의 존재가치를 떨어뜨리고자 그런 말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담담한 말씀입니다. 이는 ‘철학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렵게 산다‘라는 당시 잘 사용하던 격언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특히 ’친척‘,’자기 집‘이라는 말을 하므로 가까운 친족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 전도여행을 보내면서 주님이 당부하신 내용입니다. 그렇게 여행지침을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문입니다. 다른 데를 의존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침은 지금도 선교사의 기본정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멸망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여행하고 올 경우 이방 땅에서 묻혀온 먼지를 떨어버리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대인일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집안을 나올 때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나 하는 행동을 유대인들에게 함으로써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가를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 제자들이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는 말입니다. 기름을 발라주었다는 말은 당시의 의술을 활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에서는 환자에게 기름 바름을 통한 ’죄 사함’과 ‘병 나음’을 빌게 하는 성례전을 만듭니다. 이를 부유식(傅油式) 또는 종유식(Extreme Unction)이라 부르는데,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해설과 묵상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 ‘고향 나사렛에서는 예수님이 아무 기적도 베풀 수가 없어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다.‘라는 말입니다. 실은 갈릴리 여러 마을처럼 나사렛에서도 수많은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나사렛 회당에서 주님이 가르칠 때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 지혜와 권능에 아연실색해, 그래서 듣고 감탄한 나머지 그 지혜의 출처까지도 물어본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그 후 반응입니다. 그렇게 큰 감동을 받았다면 예수님을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더 가르침을 달라고 무릎 끊고 간청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고작 예수님의 신상을 턴 것입니다. 예수의 가정배경을 기억해 내니, 그 가족은 그들의 아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들은 즉각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합니다.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해보니 그런 집안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는 것입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고, 속으로는 괘심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배척은 곧 불신입니다. 불신 가운데선 믿음의 행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방금 전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선 권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물질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영의 권세인데, 그것을 행사하는 거룩한 영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 나사렛에서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불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신으로 인해 능력을 불러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처럼 관념적으로 믿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12년 혈루 병을 앓은 여인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 결코 아니지요.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한 백부장의 믿음도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그 증표가 어제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입니다.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다녀도 온전히 믿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연현상을 벗어나더라도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적과 기적을 막는 존재가 있으니,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능력이 능력이 되게 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주님은 부모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증인될 사람과 믿음의 사람들만 대동한 것입니다. 곧 믿음은 믿음을 불러오고 불신은 불신을 불러오는 까닭입니다. 믿음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만, 불신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기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불신상태에서는 주님도 손을 놓으십니다. 거부하는 인간들에게 그 의지를 반해서라도 해줄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믿었던지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안 여인처럼 믿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 주님이 감동한 백부장처럼 믿기를 원합니다. 성경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 없이 이루어진 성경의 인물은 없습니다. 성경 역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믿지 않고서는 읽을 수도, 깨달을 수도, 그리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우리 들숨 날숨보다 더 확실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능력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믿음 없이 갈 천국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믿음으로 반응하여 신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해 열두 제자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둘씩 각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나가서 가장 먼저 외치며 전도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2~13)
예수님께서도 가장 먼저 외치신 일성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전도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라를
"이 죄인아~"라는 정죄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히브리어로 "שוב"(슈브)로 회복하라,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즉, 정죄하는 판사의 외침이 아니라,
돌이켜 회복하라는 아버지의 외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복하라는 것일까요?
깨어졌던 하늘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렸던 에덴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짝하던 삶에서
하늘아버지께로 돌이켜서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거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그래서 사막 같은 인생을 에덴 같은 인생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여호와의 동산 같은 인생으로,
황페한 인생을 기쁨과 감사와 창화하는 소리가 있는 인생으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그래서 이 땅에서도 전도자나 회개자나 전대 없이도 에덴 같은 채워짐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막6:8~10)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회개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자는 발 아래 먼지처럼 여겨질 것이고, 이제는 인자하신 주가 아닌 엄위하신 재판관으로서 그들을 대하게 되실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막6:11)
주님은 제자들에게 둘씩 짝을 지어 주님과 같이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어 이스라엘 마을(마 10:6)로 파송시키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돈도, 숙소 예약도, 먹을 것은 염려하지도 말고 오직 잃어버린 양들을 향해 ‘회개하라’(12절,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10:7))라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 그리고 그렇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깨닫는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들어도 받지 않고 축복의 손길도 단호히 거절하는 이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히려 풍성한 물질과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세상적 신세를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선물이 주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구원은 그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기다리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발걸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4-6절 믿지 않는 이들에게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조롱하고 위협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눅 4:22,23,28,29). 말씀의 능력은 오직 말씀을 믿고 반응하며 수용하는 이들의 삶에 나타나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나는 ‘믿음의 능력’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7-13절 제자들을 각 고을로 파송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목격한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가르침과 하신 일을 증언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재현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권능을 주십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이나 재정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세상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시스템과 재력은 있지만, 주님의 능력은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6a절 내 편견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에 놀라지만, 그분이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데 더 놀랍니다. ‘이 지혜와 권능이 어디서 왔을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답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친숙한 동네 청년 예수에 대한 편견이 그들의 이해를 가로막았습니다. 내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 불편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내 틀에 하나님을 욱여넣는 대신,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인정하고 겸손히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8-11절 선교 여행의 지침은 지팡이 하나 외에 모든 필요를 ‘사역지에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말씀 선포와 귀신 축출, 병자를 치유하는 ‘베푸는 자’일 뿐 아니라, 숙식을 공급할 타인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수혜자’이기도 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서 제자들은 ‘모든 이가 베푸는 자인 동시에 호의를 받는 자’라는 예수님 공동체의 작동원리를 배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듣는 우리는 이 호혜(互惠)의 원리를 충분히 구현하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의 가르침을 믿으며, 그 가르침이 온전히 공동체의 삶에 구현되도록 더욱 힘쓰게 하소서.
✔ 진짜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삶입니까?
➲ 편견을 버림으로 이해하는 삶입니다(1~3절).
예수님은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듣고 놀라...’는 부정적인 놀람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표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이 사람이...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2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불신하는 어투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얕잡아 보았습니다. 더더욱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3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느 한 사람을 어머니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예수님의 인간적인 배경만을 바라봄으로써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보고 놀라기만 했지 그 이상의 것들은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질투심만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별 볼일 없었던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지금의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왔던 예수님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소위 잘 나가고 있었기에 질투심을 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평범했던 어린 시절을 쭉 지켜보았던 것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을 성장시켜 나아감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삶의 틀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인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살아가는 진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입니다(4~6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4절). 예수님은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5절,새번역).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계속해서 사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고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뜨뜻미지근한 믿음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내 자신의 상식과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놀랍게 역사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오늘, 아니 바로 지금이라도 기적은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말씀 위에 세워지고, 그 위에서 견고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답게 부지런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의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삶입니다(7~13절).
예수님은 제자들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8~9절).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사역하고 있는 내 자신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습니다. 현실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복음 전도의 사명은 언제나 뒤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세상 염려에 사로잡혀 사역의 자리를 지켜내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무장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당당하게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진짜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어쭙잖은 내 판단을 내려놓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이거니와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 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6:1~13절)...
1.믿음의 눈을 가지자(1-3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있는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지혜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하여도 감탄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협된 지식과 선입관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참된 신앙의 사람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러한 겸손과 갈망을 가지고 있는가?
묵상하기
나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내게 일어나는 일을 보는 자인가?
2.고향과 선지자(4-6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의 환자만 고치고 별다른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인간들이 가진 죄성을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놀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종이 되어 있는가를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의 모습을 생각하며 참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은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겸손함을 가지는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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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사렛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3.능력을 주시고 파송하심(7절)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서 파송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를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영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그들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셔서 파송하십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함께 허락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 일하게 하시면서 겸손하게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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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겸손하게 잘 사용하고 있는가?
4.필요를 채워주심(8-13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몇 가지 그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십니다. 그것은 지팡이아 신만신고 그 이외에 어떤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외에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채워 주시면서 그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보장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을 가질 때에 부족함이 없는 은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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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안에 살아가고 있는가?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시고 부족한
믿음을 새롭게 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보내시는 곳마다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고
교만과 불순종을 벗고 날마다 새롭게 하심과 겸손케 하시는
거룩의 옷을 입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을 다스리는 악의 영들을 제어하시고
주님 앞에 엎드려 영원을 사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모든 악독과 교만과 음란을 내려놓고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도록
선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