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집에 키우는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작은 화분인데 어느 날 보니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별 관심이 없어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죽을날만 기다리는 지치고 불쌍한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희망을 완전히 잃은 사람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그 모습에서 들리는 메세지는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하여 물을 주기로 한것은 와이프 였습니다. 저는 잠시 구경만 하다가 금방 잊고 다시 딴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와이프가 놀라며 저에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얘 한번 봐봐. 물 준지 얼마나 됐다고 모습이 이렇게 변했어." 하고 말했습니다. 한번 가서 봤더니 놀랍게도 다시 살아 힘찬 모습으로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한부 선고받은 사람 같이 시든 모습이더니 지금은 이보다 희망찬 모습이 없을 정도로 변한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관심도 없고 별일 아니라 생각했던 저를 부르시고 느끼게 하십니다.
화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방금 전에는 절망속에 고개를 땅으로 떨구던 모습이더니 이제는 희망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에 있는 분에게 감사 찬양을 드리는 듯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생각 했습니다. "이 작은 식물도 감사의 보답으로 힘차게 다시 일어나 온몸을 바쳐 영광을 돌리는데 그보다 훨씬 나은 우리는 왜 감사하지 못하고 작은 영광조차 돌리지 못할까?" 하고 잠시 저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사는데 문제없이 괜찮은데 왜 우리는 고개를 땅에 떨구고 매사 힘없이 지친 모습일까요?
우리는 겸손하지 못합니다. 혼자서는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하면서 그 도움을 잊고 모든 공로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교만하고 연약하여 그렇게 하고 싶은데 항상 말 뿐이라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항상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죄악된 욕구에 종처럼 끌려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결코 의롭게 살수 없는 것입니다. 겉에서 보이는 의가 아닙니다. 겉과 속이 같은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음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헛된 것들에 의지하며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코 우상숭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고통을 아는데 결코 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씻음 받아야 합니다. 이 길민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작은 죄라도 있으면 우리는 둘째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정죄를 받아 이를 피할 수 없는 사람은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으며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 살려달라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살려주시는 이도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수 있습니까? 죄가 없어야 살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요. 예수께서 물과 피를 전부 흘려 세상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시지 못하셨다면 그저 훌륭한 성인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보혈의 능력은 무한한 것이며 오직 그분에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라 칭함 받으시기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행위가 있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이 모든것을 값없이 성취하시고 거저 주십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이 알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이는 당연한 순리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을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직 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를 믿음만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말씀 하시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셨습니다. 죄를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첫 번째요. 이 믿음으로 회개하여 죄씻음 받고 구원받아 의로움을 입어 자녀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나라와 의로움을 기쁘게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의로움을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억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의 이름을 마음에 새기고 부르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하시고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생명의 능력있는 보혈 흘리시며 세상의 죄악을 대속 하신 이유는 죄악에 억압되어 사망속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우리를 건지시려는 것입니다. 이를 마음에 새겼다면 저 작은 식물이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힘없이 병들어 시들어진 모습에서 변화 되는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힘찬 모습으로 담대하게 사는 것이 주께 찬양하는 길이며 보답하는 길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입었다면 우리가 더 이상 고개를 땅에 떨굴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렇지만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은혜와 담대함을 더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세상것으로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는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해보겠다는 생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은 자기보호요. 이는 곧 자기집착으로 교만함이 되고 이는 우리의 탐욕이 되며 이로인해 고통에 방황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매사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고 땅만 보며 살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땅에 사는 우리가 땅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땅은 잠시 뿐입니다. 이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땅에는 사망이 있으며 하늘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순서이며 사람된 도리입니다. 이것이 순종이며 사람은 창조되었을때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어진 존재입니다. 때문에 그때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번의 불순종으로 죽음을 선고 받아 우리가 땅만 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을 이기지 못하기에 살려고 스스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고뇌와 죄악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먼저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 스스로 넘어져 고통에 산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복된 소식은 엄청난 희망을 줍니다. 때문에 그를 믿어 거듭난 우리는 땅의 노예로 살던 삶이 변해 땅을 누리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열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가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든든한 아버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를 부르며 순종하는 자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여 듣지 못하는 자는 행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종하며 들을 수 있는 자는 행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욕망이 아니라 값없이 베푸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기보호에 취해 할 수 없었던 이 사랑을 이제는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능력이 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만물을 회복시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해도" 일어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물만 주었습니다. 자라게 하시고 힘찬 모습으로 고개를 들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항상 먼저 바라봐야 하는 곳은 하늘입니다. 그곳에 영원하고 참된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사랑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