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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추억
내 나이 36세 때는 꿈과 낭만에 부풀어 있던 젊음이 있었다.
1977년 여름밤 어느 날 멋있는 친구들 김무웅과 이정국, 세 부부가 생맥주집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랐고, 생활도 제법 안정된 상태라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승진이나 재산 모으기 같은 것은 남의 일이라 치부해 놓고, 어떻게 사는 것이 멋진 인생이고, 보람 있는 삶인가 하는 낭만적인 쪽으로 기울다가 가족이 함께하는 배낭 캠핑으로 뜻을 모으고 부라보의 잔을 높이 들었다.
여행은 계획을 세울 때가 가장 꿈에 부풀고 즐겁다. 리더는 여행을 많이 다닌 무웅이가 맡았고, 첫 여행을 이번 겨울 방학에 바로 가기로 했고, 코스는 설경으로 이름 높은 무주구천동으로 정했다.
그해 겨울, 12월 이브날 아침 경부선 열차로 영동으로 갔다. 방한복으로 무장하고, 옷, 쌀, 취사도구, 술 등을 넣은 15Kg 가량의 배낭을 멘 어른 6명에 아동 5명이 영동버스 터미널에서 무주구천동행 시외버스를 탔다. 예상한 대로 폭설이 내려 기분을 들뜨게 해주었다. 온 세상이 은색으로 뒤 덮인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과 논밭을 구경하며 무주읍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만 해도 여행이나, 등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특히 이 폭설이 쌓인 엄동설한에 구천동에 가는 승객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기사가 눈이 쌓여 더 못 간다는 말에 우리는 아연했다.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기사가 부렸다. 우리라고 고분고분 할 수는 없다. 세 명다 3년씩 군 복무를 했고, 교사 생활도 10년이나 한 장정 셋과 새아씨들이 따지고 들었다. ‘우리를 태울 때 목적지가 구천동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승객들이 많았으면 못 간다고 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늦은 시간에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교통비, 숙박비, 식사비 다 배상하겠느냐. 버스회사의 횡포 아니냐, 고발 조치하겠다,’고 엄포와 설득을 계속하여 억지로 구천동에 도착했다.
기사가 걱정 했던 만큼 폭설은 쌓여 발목이 잠길 것 같았고, 산장의 간판과 울타리가 눈 속에 반쯤 묻혀 있어 여기가 구천동의 깊은 계곡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산속의 해는 서산 끝으로 지는 暮煙의 시간, 村家의 굴뚝에서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나는 길손을 반기는 개 짖는 소리가 정감 있게 들리는데, 우리아이들은 눈을 뭉쳐 던지고, 발스케이트도 타며 한없이 즐겁기만 했다.
九折羊腸 九川굽이를 헤아린다고 해서 九天洞인지, 沼에 비친 하늘이 아홉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鶴巢臺,秋月潭,水心臺,水鏡臺,印月潭,淸流洞,九月潭,琴浦灘,淸流溪,九天瀑布에 비친 맑은 하늘을 보며 선녀와 신선이 머물렀으리라 생각하니, 奇巖怪石과 明鏡止水가 예사롭게 보이질 않았고, 천사 같은 우리 아이들이 던지는 눈 뭉치에 소나무 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紛紛雪 같이 눈 꽃가루가 되어 날려 뿌려 지는 길-白蓮寺로 가는 눈 꽃나무 터널 길은 호젓하고 우리들만이 가고 있는 우리들의 길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고 추억에 남는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입구 쉼터에서 차 한 잔하는 휴식의 시간은 고요한 숲의 편안함을 한없이 느끼게 해 주었고, 모던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피안의 평온함에 빠졌던 추억을 잊을 수 가 없다.
여행 3일째 날에 공주로 이동했다. 옛 이름은 熊津 -곰나루-이다.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낭군님을 부르다 새끼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암곰의 슬픈 사연에 연유 했는지, 옛날부터 곰이 많이 살았는지 확실치 않으나,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1200년이나 잠자던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이 발견되고서부터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공주에는 웅진백제시대의 주요한 사찰 甲寺가 있다. 잃어버린 왕국의 역사를 간직해서인지 애잔함이 서린 이절은 ‘春麻谷 秋甲寺’ 란 말처럼 가을에 아늑하고 좋은 자그마한 절집이다. 단청은 화려 하지도 않았지만 오랜 내력을 은근히 풍겨주는 의젓함이 있다.
대전 쪽으로 나가려면 계룡산을 넘어 동학사로 가야한다. 갑사에서 오뉘탑까지 오르는 길이 금잔디 고개다. 가을에는 뒹굴고 싶을 만큼 편안한 고개이겠지만, 오늘 우리가 넘을 때는 눈보라 치는 시베리아北風寒雪 이었다. 어른들도 눈과 코 끝에 몰아치는 진눈깨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4살, 5살짜리 아기들이 어찌 견딜 수 있으리오. 추위와 두려움에 울음이 나왔고, 어른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다.
여자 배낭을 남자들이 포개어 메고 머리를 폭 싼 아이들을 엄마들이 업어야 했다. 김무웅 아들은 7살 형님이니까 의젓했고, 정국이네는 막내 4살배기는 엄마가 업고 5살 장남은 하는 수 없이 아비가 안아야 했다. 이정국은 키도 크고 체력도 좋다. 우리가 홍성방에 식사하러 가면 물 만두 3접시에 짜장면 한 그릇을 거뜬히 먹는 대식가다. 그는 그날 그 대단 한 체력을 발휘했다. 배낭 둘을 멘 상태에서 아들을 품에 안고 2시간가량 고개를 넘어 남매탑까지 온전히 올라온 우리 친구 이정국에게 우리 모두 진정한 경의를 보냈다.
여름 캠핑장비는 엄청나다. 텐트, 침구에 주,부식과 술, 안주, 간식까지 챙기면 30Kg 가까이 된다. 78년 여름방학에 강릉행 열차를 탔다. 무려 8시간의 긴 여정이다. 우리 남자는 객차 안에 다니는 홍익회 구르마가 올 때마다 맥주 두 세병을 사서 한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나( 지금 같았으면 몇 번 경고를 받았을 것이겠지만, 그 때는 잘 참아 주었다. ) 여자들과 아이들은 지루 할 수도 있었는데 역시 아이들은 창의성이 뛰어나 자기들 끼리 게임을 하고 시간을 잘 보냈다. 물론 리더쉽이 있는 형님이 한명 있었기에 가능 했다.
아침 8시 출발한 열차는 오후4시에 강릉에 도착 했다. 오대산 남쪽자락 연곡리에 청학동 소금강이 있었다. 넓적하고 큰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에 푸른 물이 운하같이 유유히 흐르는 ‘무릉계’가 있는 청정계곡으로 지금은 아마도 곳곳에 출입을 통제할 것 같은 명승지다.
텐트치기 좋은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을 찾아 상류 쪽으로 4Km 이상 올라와 물가 모래밭에 자리를 잡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을 짓는 최우선이다. 텐트3채를 삼각형이 되게 배치하여 설치하고 나서는 다음은 上樑式이다. 땀 흘려 짐 지고 왔고 편히 쉴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마시는 한잔 술은 안도함과 편안함에 성취감 까지 느껴지는 진미다.
저녁밥을 먹고 아이들 까지 자게 해 놓고 어른들만 물가의 모닥불 가에 모여 앉아 우리들만이 누린 오붓한 시간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새들도 잠든 고요함을 碧溪水가 노래하고 창공에 휘영청 뜬 달님이 우리와 함께 어울린다고 자기 갈 길을 잊고 우리 뜰을 환하게 비춰 주는 가운데 모락모락 타오르는 모닥불의 나무둥치가 분위기를 은은히 감돌게 했다. 세상의 낙원이 여기 말고 또 있으랴. 이렇게 멋진 밤이 언제 또 오랴. 那能不飮酒 (어찌 술 한 잔이 생각나지 않으리오). 노랫가락 또한 멋진 명곡이요, 모두가 한마당 어울림 이었다. 벽계수도 한잔이요, 명월도 마다하지 않으니 아뿔싸 술이 동이 났다. 이틀 마실 요량으로 넉넉히 준비 한다고 했건만, 山川이 이렇게 秀麗할 줄이야! 終局에는 의리의 사나이 대장 김무웅이 배낭 메고 십리 먼 길을 술 사러 떠나야 했다.
아름다운 동백 숲과 운치 있는 계곡으로 유명한 두륜산은 땅 끝 마을 해남에 있다. 광주에서 대흥사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나주, 영암, 해남읍을 지나는 장장 4시간의 긴 여정이다. 오후 2시 시외버스는 만원이었다. 짐 보따리를 든 귀향 객과 장사꾼에 밀리며 억지로 끼어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안쪽에 태우고 우리 남정 셋은 운전석 옆 본넽 위에 배낭 짐을 겨우 얹어 놓고 차 문가에 붙어 섰다.
먼 길을 지루하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느냐며 무웅이가 소주 한 병과 쥐포안주 몇 마리를 사서 봉지에 담았다. 차 안은 비좁고 흔들리니 입대고 한 모금씩 마실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한 병은 조금씩 아껴 마시니 다음정류장 까지 이어졌다. 정류소에 차가 정차 할 때마다 보충하여 마신 술이 몇 병째 인지 알 수가 없고 대흥사 종점에 도착하니 날은 어두워 졌고 우리 셋은 만취상태가 되어 배낭 진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酒量이 大斗인 대장 무웅이가 방향을 못 찾아 거꾸로 올라가고 있으니 돌아가던 버스기사가 반대로 돌아가라고 차를 세우고 길을 안내해 주었다.
정신을 차려 유선여관을 찾아 갔다. 집 가운데뜰이 있고 ㅁ자로 방을 배치 한 운치 있는 한옥집인 이 여관은 유홍준씨의 답사기에도 소개된바 있는 이름 있는 여관인데, 우리가 더 먼저 답사한 셈이다. 미리 장작불을 넣어 놓은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몸을 좀 녹인다는 것이 家長셋이 모두 골아 떨어 졌으니 아씨들은 얼마나 한심했겠느냐! 천리 먼 길 僻村에 데려와 저녁밥도 굶기고 술에 녹아 떨어져 있는 이 한심한 和尙들에게 아이들과 내가 믿고 의지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한잠자고 깬 시간이 밤11시가 다 되었다. 늦었지만 버너에 불 붙여 부인들이 쌀 씻어 준비 해 놓은 코펠에 밥을 하여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하여 한밤중 제삿밥같이 저녁을 먹은 날의 미안하고 부끄러운 추억도 이제는 아련한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겨울 여행은 답사 위주로 이동하고 여름은 캠핑으로 시원한 계곡에서의 휴양 쪽이다. 80년 여름방학은 한탄강 하류의 법수동 계곡으로 갔다. 이정국친구의 동서되는 분이 대대장인데 군인 가족 휴양지로 외부 인사는 출입이 안 되는 치외법권 지대로 우리에게는 천혜의 휴양지였다. 대장 당번이 수시로 맥주Box ( px 가격이라 값이 샀다) 를 가져다주고 과일에 부식까지 제공해주니 이런 신선놀이가 없었다. 어쩌다 삼겹살에 양주까지 진상 되는 날은 파티가 벌어졌고 밤늦도록 등불을 밝히고 재미난 이야기와 노래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호랑말코란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쓴다고 이정국의 별명이 말코다. 코가 큰 기태아빠(호웅)가 말코인가, 잘 때 코고는 소리가 요란한 완이 아빠(무웅)가 말코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형부가 말코인줄을 몰랐다는 처제의 말에 웃고 즐기며 마신 맥주가 동이 났다. 왜 맥주를 안 가져 오느냐고 하였더니 부대 px의 맥주제고가 바닥이 났다며 대장부임 하고 생긴 초유의 사태라고 했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지낸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강 물가에 띄워 놓은 맥주가 다 떠내려갔고, 강 수위가 높아져 우리텐트 앞자락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비가 조금만 더 왔거나, 우리가 민감하게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큰 일 날 뻔 했다. 방심한 우리에게 경종을 울렸다. 서둘러 텐트를 걷고 짐을 챙겨 철수 작업이 시작 되었다. 들어 올 때 징검다리로 건너 온 곳이 물이 불어 허벅지 까지 차올랐다. 강 하류의 물이 불어나는 것은 초를 다투니 빨리 건너야 한다. 아이들은 업고 짐은 이고, 지고 왔다 갔다를 하며 도하작전을 펼쳤다. 다행히 물살이 세지 않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지만, 누구 한명이라도 삐끗하거나 다리에 나무둥치라도 쳤으면 아찔 할 뻔했다. 편안하고 좋을 때 만일을 대비해야 함을 새삼 깨닫고, 우리 모두가 살아 오면서 모진 짓 안하고, 착한 마음으로 산 덕분이라고 위안하며, 조상님과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위기의 추억도 있었다.
5월 연휴 때 밀양 천황산에서 야영을 하고 하산하는 날이다.
정상 넓은 벌판 사자평에서 방향을 찾아 길로 접어들었다. 얼마간 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수려한 계곡에 맑은 물과 태고의 신비를 품은 기암절벽과 원시림 같은 무성한 숲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처녀림을 개척하는 흥분을 느끼게 했다.
무한한 감동과 신비감에 젖으며 3시간을 거쳐 당도한 마을은 언양군 상북면 이천리라는 오지촌락이었다. 밀양 남명으로 가야 할 길이 정 반대로 온 셈이다. 가장 가까운 곳이 석남사 입구라고 했다. 교통편은 없고 걸어서 4시간은 가야 한다고 하니, 기가차고 억장이 무너졌다. 우리 모두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시각은 벌써 해거름이고 이 일을 어찌 할꼬!
그때 한 가닥 희망으로 마을 사람이 언양 장에 갈 때 이용하는 경운기 트럭이 갈 수 있는지 알아 봐 주겠다는 아주머니에게 우리의 운명을 걸었다. 마침 면사무소에 갔다 와서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있는 육순의 노인기사에게 사정하여 좁은 경운기트럭에 어른 7명, 아이들 6명에 배낭 짐까지 실으니 트럭 안이 꽉 찼다.
경운기가 그렇게 힘이 좋고 잘 달리는 줄은 처음 알았다. 털털거리고, 울퉁불퉁 거리며 튀어 올라도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에 빨리 가기만을 바랬다. 1시간 반을 달려와 석남사 버스 주차장에 당도하여 부산행 막차가 있음을 확인하고, 마시는 안심의 맥주 한잔은 너무나 시원했고, 택시비 같은 경운기차비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만 몇 번이고 했다. 春來事事奇(봄에는 모든 일이 기이하고) 旅程은 變化無常이라, 언제나 비상대책을 세워 놓아야 함을 깨달았고, 窮側通이요-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는 희망적인 말을 실감하는 산행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낭만과 스릴이 있었던 멋진 추억이다.
양산군 원동면 장선리에 있는 원동 배내 골에도 갔다. 파래소 폭포가 있는 위쪽은 언양 배내로 계곡이 깊고 길게 이어져 있어 제법 큰 하천이 흐른다. 이곳 영포천이 흐르며 삼각주를 이룬 곳이 원동 배내 골 캠핑장이다. 숲이 우거지고 맑고 힘찬 계곡물이 흐르며, 마을에서 얼마 멀지 않은 편리한 조건 때문인지 가족 캠핑족이 많이 왔다. 원동역에서 험난한 천태산 고개를 넘어오는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고 짐은 버스 지붕위에 얹어 밧줄로 묶어 싣고 와야 했다 계곡물이 맑으니 아이들이 놀기에 더 없이 좋았고, 코펠을 들고 다니며 피라미와 가재잡기에 푹 빠지곤 했다.
조금 아래쪽 절벽 밑에는 장정 2 길 정도의 여울이 있었고 다이빙도 했다. 우리 아들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두 살 많은 형님이 잘 이끌어 주니 수영을 배우는 것도 빨랐다. 처음에는 물가에서 엎드려 물장구만 치더니 차츰 물속을 헤엄쳐 보고 조금 깊은 곳에도 들어갔다. 절벽에서 다이빙 하던 한사람이 물속에 반지를 빠트렸다고 말했다. 참 말인지 헛말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물속으로 잠수하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고, 덕분에 우리아이들의 수영실력은 日就月將 했다.
캠핑장의 분위기는 밤에 있다. 텐트마다 문기둥에 달아 놓은 등불이 어두운 숲을 장식하고 있는 풍경이 멋있다. 그중에서도 우리텐트의 燈이 가장 밝고 화려 했다.
이름이 프랑스 수입제품 ‘심포니’ 가스 등이다. 우리 둘레 뿐 아니라 멀리서도 환하고 빛났다. 넓적한 돌들을 깔아 평평하게 만든 사랑방은 밥 먹을 때는 식당이요, 차 마실 때는 까페가 된다. 밤에는 남정네들의 놀이방이 되는데, 낮에 두꺼비를 보았거나, 자기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날은 고스톱에서 행운을 잡기도 했다.
등불아래 용감하게 온몸을 부딪쳐 산화한 불나방의 裸身들이 소복하게 쌓일 무렵이면 저쪽 깊은 숲속에서 두견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꼬옥-콕콕, 꼬옥-콕콕’ 그 애절하고 독특한 울음소리가 들릴 때는 밤이 깊었음을 말해 주었다. 잠 못 이루는 情人에게 피를 토하는 나의 애절한 사연을 말 하려는 것 같은 애연한 소리는 애간장 깊숙이 파고들어 가슴을 쓰리하게 한다.
여기 하늘이 손바닥만큼 만 보이는 깊은 숲속, 맑은 물, 신선한 공기가 아니면 살지 않을 두견이 소리를 언제 다시 들어 볼 수 있으리오.
그렇게 원동 배내 골의 밤은 깊어만 갔다.
첫댓글 매일생한"님.
글 잘 보았습니다.
글 끄트머리에
‘꼬옥-콕콕, 꼬옥-콕콕’ 그 애절하고 독특한 울음소리가 ....
두견이 묘사 멋지게 해주셨습니다. 감사
새 박사님꼐서 표현이 잘 되었다고 해 주시니 안심이 되고 감사하오이다.
@매일생한 아주 오래전의 추억들을
아름다운 필치로 엮었습니다.
덕인....
그 가스등 불빛은 지금도 환하게 빛나고있다..
*참조 ; 컴用으로 제작. 파일'크기는 대용량.
@동박새 용하게도 잘 찾으셨네요. 정이 들었던 등이라 반갑고 감회가 깊습니다. 글에 애정어린 관심을 보여주시어 너무고맙소. 건강하십시오.
대단하시다. 이렇게 긴 여행기를 적절한 표현과 옛글까지 인용해가며 기록하다니 평소 독서를 통한 어휘력과 문장력을 가늠하게한다. 도대체 우리 산삼 친구들은 언제 늙을란가. 가버렸다고 생각한 젊은 날이 가지 않고 여기 그대로 살아있지 않은가. 기태 성은 상은 완이 남희 이 아이들이 그 당시 아비, 어미들 보다 훨씬 나이 많아졌는데 누가 주장이 되어 올 여름 아비 어미 모시고 추억여행 한 번 했으면 얼마나 감동일까. 하기 전에 이 여행기 함 읽어보고.
좋은 말씀 고맙고, 그놈들이 제 바쁜 것만 생각하니 나이가 더 들어봐야 알른지!
38년 전의 추억을 마치 어제 오늘 일처럼 리얼하게 재생했다. 글 쓴 이는 아직도 두되활동이 젊은 이와 다름없음이 증명되었다. 그 날의 추억이 준 가족 전체의 행복, 영원히 지속되길 바랍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