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하는 이들에게 승복을 보내자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요즘 종종 삭발하는 이들 사진이 보입니다.
그 삼단같은 머리채를 끊어 내는 일은
출가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정치인들도 심심찮게 하고 있으니
기왕에 몸의 출가를 상징하는 삭발을 했으면
마음의 출가마저 단행하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삭발인들에게
인연이 닿는 불자나 사찰 총무원에서
승복 한벌 마련해 보자기에 싸 보내면서
정법의 당간을 높이 들고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합동 기도라도 하였으면 합니다.
삭발을 하면 승이 되는지라
승려가 된 뒤에는 치의를 입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치의는 검은 물을 들인 옷이지만
일반적으로 승복을 말합니다.
승복을 입고 난 다음의 행보는
입산 수도가 따르는 것이니
승복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문없는 문으로 찾아 들어가서
은퇴 출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동안 찌들었던 세파의 더러움을
청량한 산사의 공기로 씻은 다음
일구월심 염불정진하고 참선수도하여
종문에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깎되 마음은 깎지 못하면
그것은 그저 모습만 바꾼 것에 불과해
아무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일인데
기왕에 깎은 머리를 디밀고 절로 들어 가면
요즘은 어느 절이나 대환영이니
처자식 살리느라 온갖 지옥고를 만들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소와 말 노릇 하던 일
한번에 접어 두고 속히 산으로 향할 일입니다.
머리 기른 모습으로 있을 적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잘 몰랐지만
그 길고 긴 무명의 풀자락을 깨끗이 밀고 보니
부처와 보살의 본모습이 나타납니다.
앞으로도 삭발하겠다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지만
승복은 이곳 저곳에 산처럼 쌓이고
때 되면 먹을 밥과 잠자리도 골짝마다 가득하니
참으로 잘 생각하였다 박수를 칩니다.
여러분들이 피 터지고 박 터지게 싸우는
세상사가 다 거기가 거기고 말짱 도루묵이다
하는 말이 가장 진실한 말인 줄 알아야
속진에 대한 싫어하는 마음(염리심)을 일으키고
생사에 대한 두려움(포고심)을 깨달아서
발심 수행의 치열한 구도자가 될것이니
이 얼마나 귀한 인생을 받아 나온 사람으로서
크나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라도 출가하여 용상방에 이름 올리면
그동안은 똥통에 윙윙대는 똥파리들의
졸개노릇 하느라 별 볼일 없이 지내다가
비로소 용과 코끼리 사자가 되어
세상에 존숭받는 삼계의 스승이 되고
사생의 어버이 되는 길을 나서게 되니
갖가지 허위 문서와 거짓으로 위장하여
출세를 하려고 너력을 안 해도
저절로 부처의 자리가 보장된 곳이 여기입니다.
다만 세속에 찌든 마음은
일주문을 들어 서는 순간
헌 신짝 내버리듯 하고 들어 오고
세상에 배워 이뤘다는 학문 공명 지위 학위등도
입차문내 막존지해 하라는 말씀 앞에 몰록 내려 놓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대웅전에 들어 가 삼배 올리면
그로써 모든 일은 만사형통입니다.
정이나 전생에 지은 복이 없어
승복 한벌을 얻어 입지 못하면
내게 연락하면 바로 한벌 보내줄 것이니
승복 염려는 말고 머리나 속히 깎으라 하시요.
국회라고 하는 둥그런 집 내 가 보았지만
허울만 멀끄런 집이지 속은 텅텅 빈 자들의
쉼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더이다.
그곳에서 무위도식하며 죄만 짓고 살아봐야
다음생엔 지옥고가 앞을 가로막고 기다리는데
그것을 모르고 날마다 하는 짓이 하도 딱해서
이렇게 촌에 사는 노인이 한마디 하는 것이요.
귀가 있으면 알았다 예 하고 대답하고
눈이 바로 박혔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목표를 정하여 이 말 떨어 지는 즉시 행할지어다.
청나라 순치황제가 출가하며 남긴 시는
보너스라 알고 합장 삼배한 뒤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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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叢林飯似山 천하총림반사산 천하총림 산중에는 먹을 것이 산 같으니
鉢盂到處任君餐 발우도처임군찬 발우들고 이르는 곳 그대의 찬 걱정하리.
黃金白璧非爲貴 황금백벽비위귀 황금이나 백옥만이 귀한 것이 아닐지니
惟有袈裟被最難 유유가사피최난 귀하고 어렵기는 가사 입는 일이라네.
朕乃山河大地主 짐내산하대지주 이내 몸 중원천하 임금 노릇 하지마는
憂國憂民事轉煩 우국우민사전번 나라 백성 걱정할 일 갈수록 번거롭다.
百年三萬六千日 백년삼만육천일 인생 백년 헤아리니 삼만육천 날인데
不及僧家半日閑 불급승가반일한 승가의 한가로운 한나절에 못 미치네.
悔恨當初一念差 회한당초일념차 한스럽다. 애초에 한 순간의 잘못으로
黃袍換却紫袈裟 황포환각자가사 자색가사 물리치고 곤룡포를 입었도다.
我本西方一衲子 아본서방일납자 나는 본래 서천축국 수행하던 납자인데
緣何流落帝王家 연하류락제왕가 인연이 어찌 흘러 제왕가에 떨어졌나?
未生之前誰是我 미생지전수시아 이 몸이 나기 전 그 무엇이 나이며
我生之後我爲誰 아생지후아위수 세상에 태어난 뒤 나는 과연 누구런가?
長大成人纔是我 장대성인재시아 자라나 성인 된 후 그야말로 내라더니
合眼朦朧又是誰 합안몽롱우시수 눈 감으면 몽롱한데 또한 이는 누구런가?
百年世事三更夢 백년세사삼경몽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萬里江山一局碁 만리강산일국기 만리의 이 강산은 바둑 한판 노름일세.
禹疏九州湯伐桀 우소구주탕벌걸 우는 구주 다스렸고 탕은 폭군 걸을 쳤고,
秦呑六國漢登基 진탄육국한등기 진은 육국 병탄했고 한은 고조 등극했네.
兒孫自有兒孫福 아손자유아손복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복 타고 나왔으니
不爲兒孫作馬牛 불위아손작마우 자손들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하지마소.
古來多少英雄漢 고래다소영웅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영웅호걸
南北東西臥土泥 남북동서와토니 동서남북 천지사방 흙 속에 누웠다네.
來時歡喜去時悲 내시환희거시비 올 때엔 기뻐하고 갈 때엔 슬퍼하며
空在人間走一回 공재인간주일회 부질없는 인간살이 한 세상 돌다 가나
不如不來亦不去 불여불래역불거 그대로도 오지도 또한 감도 아니라네.
也無歡喜也無悲 야무환희야무비 그러니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다네.
每日淸閑自己知 매일청한자가지 매일 맑고 한가하니 내 스스로 아노라.
紅塵世界苦相離 흥진세계고상리 번뇌 많은 속된 세상 괴로움을 여읠지니
口中吃的淸和味 구중흘적청화미 입으로는 청화한 선열미를 맛보고,
身上願被百衲衣 신상원피백납의 몸에는 누더기 한 벌 입기 원이로다.
五湖四海爲上客 오호사해위상객 오호와 사해에서 으뜸가는 사문되어
逍遙佛殿任君棲 소요불전임군서 불도량에 노닐음이 그대가 살 곳이네.
莫道出家容易得 막도출가용이득 세속을 떠나는 일 쉽다고 말을 마소.
昔年累代重根基 석년루대중근기 숙세에 쌓아놓은 선근공덕 기인하네.
十八年來不自由 십팔년래부자유 18년 임금노릇 자유라곤 없었도다.
山河大戰幾時休 산하대전기시휴 산하의 큰 싸움에 몇 번이나 쉬었던가?
我今撤手歸山去 아금철수귀산거 내 이제 손을 털고 산으로 돌아가니
那管千愁與萬愁 나관천수여만수 천만 가지 온갖 시름 내 어찌 상관하리.
순치황제(1643~1661)
청나라의 2대황제인 태종이 1643년 급서하자
후계자로 6살 난 아들이 즉위하니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이다.
1644년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자
순치제는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에서 또 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청나라 황제의 즉위선언문은 만주어, 한어(漢語),
몽골어의 세 가지 언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곧 청황제는 세 민족을 아우르는 대황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만주왕조인 청나라에서의
한인(漢人)과 몽골인의 대우는 사뭇 달랐다.
청조정은 몽골인에게는 왕작(王爵)을 주고
친형제처럼 대우하면서도 한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만주와 몽골은 서로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몽골문화를 무시하고는 만주문화의 일면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일찍이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몽골의 문자를 빌려 만주의 말을 표기하게 한 사례만 봐도
두 민족의 관계를 짐작할 만하다.
청나라 황실은 몽골의 왕가를 매우 높게 대우하였는데
태종이나 순치제의 섭정왕이었던 예친왕(睿親王)도
몽골왕가에서 아내를 맞았으며 순치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순치제는 다른 만주족들과는 사상이 다른 황제였다.
7살에 자금성의 주인이 된 순치제는 어려서부터 중국의 문화를 매우
사랑하는 황제였으며 철저하게 중국적인 교양을 쌓으며 자랐다.
그의 거실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고전에서부터
소설 등속에 이르기까지 고루 갖춘 수십 개의 책장이 가득 차 있었고,
장원출신의 서원문(徐元文), 오승사(吳承思) 등 젊은 학자들을
내정의 황제거실까지 불러들여서 정치, 문학, 미술, 문단 등에 대한
담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불교를 좋아하여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 높은 스님을 초대에서 불도를 묻곤 했다.
허울뿐인 황제로서 모든 실권은 숙부인 예친왕이 쥐고 있는 가운데
순치제는 이러한 중국적인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선황제 태종의 황후인 순치제의 어머니(몽골인이다)가
예친왕과 결혼을 한 것이다.
즉 형수와 시동생이, 그것도 황태후와 섭정왕이 재혼을 한 것인데
이는 몽골이나 만주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중국사상에 물든 순치제로서는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조정의 한인관료들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철이 든 순치제는 그러한 문화에 심한 반발심을 느꼈다고 한다.
예친왕이 죽자 순치제는 자신의 몽골출신 황후를 트집을 잡아 폐하였는데
새황후를 또 몽골왕가에서 데려오자 예의를 모르는 여자라며 냉대하며
반몽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순치제는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野史)가 전해온다.
순치제의 후궁 중에 동귀비(董貴妃)가 있었는데
그녀는 만주귀족가문 출신이라고 되어있으나 한인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런데 황제는 동귀비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녀가 곁에 없으면 밥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동귀비가 덧없이 죽어버리자
황제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에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옥좌를 내팽개치고 출가하여
산서성의 명찰 오대산(五臺山)에 죽치고 들어박혀 버렸다.
아무리 조정대신들이 돌아오기를 간청해도 들은 척을 안 하자
대신들과 황실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야사로만 전해져 내려올 뿐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튼 순치제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언이 발표되었는데
한인을 너무 우대하고 만주인을 무시한 점,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홀대한 점 등을 반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살에 제위에 올라 24살에 죽은 젊은 황제에게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한 실정이 있었을까?
그 유언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만주출신
무관들의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태조나 아버지인 태종, 숙부인 예친왕에 비해
너무나도 중국적인 황제였던 순치제는
비록 유언으로 지나친 중국화를 뉘우쳤지만
순치제와 그 뒤를 이은 강희제의 대에 이르러
만주의 정복왕조 청나라는 몽골에서 중국으로 크게 기울게 된다.
순치 황제는 중국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이다.
황제 전생에 인도의 수도승으로 있었는데
그 나라 임금님의 폭정에 백성들이 시달리자,
수행(선정) 가운데 '나 자신이 왕이었다면
백성을 위하여 왕도로서 정치를 할 것이거늘',
하고 찰나 생각을 한 인과(因果)로 중국의 제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였다.
<옮긴 글>
-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해월스님 2019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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