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살롱은 누구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토론장이자 새로운 정보의 유통 공간이었습니다. 칼럼을 통해 조금이나마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다양한 토론거리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트윈스 살롱'이 열정적인 LG 팬들과의 소통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병규와 이병규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6년. LG가 역사적인 긴 암흑기의 중간 지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직 많은 이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김성근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던 2002년 이후 LG는 3년 연속 6위에 머물다 2006년 창단 첫 꼴찌의 굴욕을 맛봤다.
이병규는 2006년 시즌을 마치고 최하위로 추락한 LG를 뒤로한 채 주니치 드래건즈에 입단했다. 2007년부터 이병규가 활약한 무대는 일본 프로야구였다. '적토마'라 불리는 LG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스타, 등번호 9번 이병규(42)의 이야기다.
또 다른 이병규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LG에 신고선수(지금의 육성선수)로 입단했다. 타격 재능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체구가 작고 수비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지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LG의 4번타자를 맡고 있는, '작뱅' 또는 '빅뱅'으로 불리는 등번호 7번 이병규(33)다.
LG 트윈스에는 두 명의 이병규가 있다.
두 선수가 동명이인으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9번 이병규는 주니치에서 컴백해 다시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고, 7번 이병규는 처음 1군에서 자리를 잡았다. 두 선수가 동시에 출장할 경우의 전광판 표기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당시 7번 이병규의 등번호는 24번이었다. 편의상 현재 등번호로 두 선수를 구분하고자 한다)
이름 앞에 등번호를 병기하는 것으로 전광판에서의 공존(?) 해법을 찾은 두 이병규. 이름이 같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큰 이병규와 작은 이병규, 큰뱅과 작뱅 등으로 구분한 호칭이 일단 선수단 내 고민이었고 선발 출장 타순이 뒤바뀐 해프닝도 있었다.
7번 이병규는 최근 "이병규 선배님은 선배님 그대로 유명하고 훌륭한 선수이신데, 괜히 나 때문에 사람들이 구분을 해야 하니 얼마나 불편하시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름이 같은 대선배에 대한 존경과 겸손의 뜻이었다.
◆ 리빌딩의 경계선에 선 이병규와 이병규
장황하게 동명이인 두 선수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LG의 당면과제인 리빌딩, 세대교체를 논하며 두 이병규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9번 이병규가 '흘려보내야 할 시대'의 상징이라면, 7번 이병규는 '새롭게 열어갈 시대'의 중심이 돼야 할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양상문 감독은 '리빌딩 청부사'다. 롯데 자이언츠 사령탑 시절에도 강민호, 장원준 등 당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해 팀의 주축 선수로 키워냈다. 롯데의 한 관계자는 2014년 양 감독의 LG 사령탑 선임 당시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양 감독님이 계실 때 팀 성적은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구단에서는 양 감독님이 세대교체를 이끌었기 때문에 롯데가 다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 시기를 앞당겼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LG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시지 않을까요."
양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2004년과 2005년 롯데는 8위(최하위)와 5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6년과 2007년 강병철 감독 시대를 거쳐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2008년부터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약체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양 감독의 LG 부임을 기점으로 두 이병규의 운명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9번 이병규의 출전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고, 7번 이병규는 '4번타자' 자리를 꿰찼다. 9번 이병규의 부상 영향도 있었지만, 양 감독의 리빌딩 의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올 시즌 역시 두 이병규의 상황은 판이하다. 7번 이병규가 꾸준히 4번타자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는 달리 9번 이병규는 아직 1군 무대를 밟지 못했다. 스프링캠프도 2군 선수들과 함께 대만에서 소화했다.
9번 이병규의 기용은 단순히 1군에 자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9번 이병규는 주니치에서 컴백한 후 줄곧 덕아웃과 라커룸의 리더 역할을 해왔다. 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박용택과 정성훈, 지금은 kt 위즈로 이적한 이진영 등 베테랑들이 9번 이병규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은 팀 분위기를 주도했다.
7번 이병규는 앞으로 LG를 이끌어나가야 할 선수다.
세대교체를 위해서는 팀 분위기도 달라져야 했다. 젊은 피, 새얼굴들이 주도할 분위기가 필요했다. 이진영이 40인 보호선수 명단에 포함되지 못해 kt로 떠난 것에는 젊고 새로운 LG를 만들겠다는 구단과 양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고 젊은 선수들로만 팀을 꾸려나갈 수는 없는 법. 과거의 LG와 새로운 LG의 사이에 다리가 될 선수가 있어야 한다.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7번 이병규다. 7번 이병규는 올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주장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입후보해 류제국에 이어 투표수 2위를 기록했다.
새 주장으로 선출된 류제국은 팀 분위기를 바꾸는데 힘을 쏟고 있다. 올 시즌 LG의 라커룸에는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외국인 선수 히메네스는 고국 도미니카공화국의 음악은 물론, 한국 대중음악까지 따라부르며 라커룸 분위기를 띄운다.
7번 이병규는 동갑내기 류제국을 도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할 중심 인물이다. 전력 면에서도 타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4번타자다. 여러모로 LG의 새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양 감독도 7번 이병규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지금은 LG를 떠난 현역 코치 한 명은 언젠가 "LG에서 베테랑 야수들의 큰 존재감은 감독들에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선수들을 키워야 하는 시점에서 베테랑들의 기용법과 은퇴 문제를 놓고 큰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비단 그 코치 한 명의 생각이 아니다.
양상문 감독이 총대를 메고 LG의 커다란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큰 비난을 감수하며 이진영을 kt로 떠나보냈고, 9번 이병규를 대신해 젊은 외야수들을 중용하고 있다.
LG의 올 시즌 초반 분위기도 양 감독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젊은 야수들의 성장세가 뚜렷하고 팀 성적도 기대 이상이다. 새로운 팀 분위기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의 "LG가 세대교체를 잘 했다"는 말은 그저 립서비스가 아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상대 투수들은 9번 이병규를 향해 "던질 곳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리빌딩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현재, 9번 이병규는 여전히 퓨처스리그에 머물고 있다. 박용택과 7번 이병규가 건재하고 이천웅, 채은성, 이형종 등 팀의 미래를 이끌어갈 외야수들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 9번 이병규가 1군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9번 이병규는 묵묵히 퓨처스리그 경기를 소화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다. 비록 퓨처스리그지만 타격 기록도 출중하다. 23일 현재 9경기에서 타율 4할7리 1홈런 7타점을 기록 중이다. 1군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2군서 새까만 후배들과 함께 땀 흘리며 성적도 내고 있는 KBO리그 현역 최고령 야수를 그냥 두기도 어렵다.
9번 이병규의 FA 계약기간은 올해로 만료된다. 선수 본인도 "마무리를 잘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리 리빌딩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팀 내 상징성과 그동안의 업적 등을 생각할 때 9번 이병규에게 현역 생활의 마지막을 명예롭게 장식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 구단 안팎의 중론이다.
올 시즌은 이병규가 1997년 LG에 입단한 후 프로에서 보내는 20년째 시즌이다. 선수도 구단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원하고 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병규가 1군으로 올라와 팀 전력에 힘을 보태는 것. 리빌딩이 궤도에 오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토마' 이병규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