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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6:45~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6:53~56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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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시고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바람 때문에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유령인 줄 알고 놀라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칩니다. 많은 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고침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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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6:45~52
예수님은 무리의 환호에 도취되지 않으십니다. 오병이어 이적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해 벳새다로 보내시고 자신은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무리가 말씀보다 떡에 집중하며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요 6:15). 밤 사경쯤(새벽 3~6시경)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을 살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오병이어 이적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그분의 권능 또한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바람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권능을 믿어야 두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무엇을 연상했나요?
내가 두려움으로 낙심할 때 나를 향한 주님의 관심과 사랑은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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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네사렛에서의 치유 6:53~56
사랑과 긍휼은 이적을 잉태하는 힘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병자를 침상에 실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55절). 예수님께 데려오지 못하는 병자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시장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의 옷자락(옷 술)에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받은 혈루증 여인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5:27~29). 게네사렛 사람들은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병자가 모두 치유받았다고 증언합니다(56절). 게네사렛 사람들의 수고와 열정을 보시고 예수님이 베푸신 이적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 앞에 병자들을 데려오는 게네사렛 사람들의 수고와 열정은 어떠했나요?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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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많은 인생에 찾아오신 분
가장 어두운 시간인 밤 사경, 즉 새벽 3시부터 6시에 풍랑을 만나 노를 저으며 분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많은 명령이 나오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풍랑 많은 나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배를 타고 오셔도 될 텐데 풍랑 위를 걸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찾아오십니다. 자연법칙을 거슬러서라도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도 그렇게 주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사랑만 있고 능력이 없다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나와 상관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풍랑 위를 걸어서 내게 다가오십니다. 풍랑 위에 서 계신 주님, 문제 위에 서 계신 주님, 나의 모든 문제보다 크신 주님이 내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안심하고, 그분께 삶을 맡기십시오.
살리는 질문, 사는 대답 / 황덕영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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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6장 51~52절
믿음의 실체는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드러납니다. 인생에서 깊은 동굴이나 긴 터널을 경험할 때는 주님과의 결속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로 인해 방향성을 잃고,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휘청거리곤 합니다. 삶의 중심을 바로잡는 길은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깊이 의지할 때, 인생의 안전과 평안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능력을 끝없이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핵심은 사탄을 향한 강력한 교전이 아닌 예수님을 향한 확고한 신뢰다. - 밥 소르기
오늘의 기도
주님, 어떤 거친 풍랑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제 시선이 눈앞에 닥친 삶의 고난과 고통에 집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뚫고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고정되게 하소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깨달아, 삶의 모든 순간에 하늘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02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산에서 기도하시다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기사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에 놀라 유령이라고 소리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내용이고, 세 번째는 건너편 땅에 도착하여 온 지방으로 다니며 예수님께서 수많은 환자들을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선 곧장 주님은 사람들을 해산시킵니다. 요한복음에 나온 것처럼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주님을 그들의 정치적인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 벳새다로 먼저 출발시킨 것입니다. 그리곤 밤 사경쯤에 바다위로 걸어 오셨던 것입니다. 밤 사경 즉, 새벽 3시에서 6시까지 밤새 배는 갈릴리 바다를 반 정도 갔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을 약 10km 라고 잡는다면 그들은 밤새 약 5km 정도 밖에 가지 못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배는 갈릴리 한 복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다고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00m 낮은 관계로 주변의 협곡을 통해 내려오는 바람으로 풍랑이 일곤 했는데 그 날은 매우 심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한 밤중에 멀리 약 5km 떨어진 배의 상황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그 날은 유월절 기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보름달이 호수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면 시야가 그리 흐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멀리서도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주님은 그들의 곁을 그대로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가 됩니다. 즉, 주님의 의도는 배를 지나쳐 가시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적합한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그 순간 막 일어나려는 일을 목격한 사람이 받은 독특한 인상을 표현한 것이다’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은 제자들의 고충을 간과한 것이 아니고 다만,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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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 오병이어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그 날밤 깜깜한 바다 위에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외친 제자들의 외마디입니다. ‘유령이다!’ 몇 시간 전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그들의 입에서 고작 나온 말이 그 말입니다. 정답은 “주님이시다!”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다시 딱딱해져 스승의 정체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는 잠시이고 다시 세상과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이지요. 만약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있었다면 그들은 금시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에게 예수님은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계속 산에 두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집도 며칠간 청소하지 않으면 먼지가 쌓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진공청소기를 돌리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주일날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어제 말씀 충만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약화합니다. 그리곤 어느새 은혜와 말씀이 사라지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자기에게 충만해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먼지가 쌓였고, 둔해지고 딱딱해졌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으로 마음을 청소하고 마음의 쓰레기통을 매일매일 비워야 합니다. 수시로 마음을 여다보며 그 때 마다 불청객들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은혜로 용서는 받았지만 죄악된 본성은 여전히 살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어서 그렇지요.
죄의 달콤함이 생각이 났다면, 이미 유혹이 들어왔다면 죄에 노출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내리지 않으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흡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이 죄를 부르고, 기어이 죄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지요. 다윗이 심부름꾼을 두 번 보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쩌다 목욕하는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보냄으로, 죄는 실현되고 맙니다. 첫 번째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회개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요셉과 같이 흠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죄를 안 짓는 비결 중의 하나가 죄짓기 전에 회개하는 것일 것입니다.
죄짓고 회개하는 것보다 죄짓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더 힘이 들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론 아직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실제적인 범죄를 미리 차단하는 탁월한 예방책이 있습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두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몸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육신의 취약점을 잘 아시는 분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넉넉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처럼 피상적으로 주님을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굳어지면, 더 딱딱해지면 주님을 주님으로 우리 마음에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주님이시기에 다른 곳에 두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산에 두면 안 됩니다. 그 분을 하늘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그때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하늘에도 계시지만 땅에서도 계신 우리 주님이라 그렇습니다.
1월16일 청라호수공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신 후에 바다 위를 걸어서 가시는데, 거센 바람으로 인해 힘겹게 노 젖고 있던 제자들이 바다 위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인했을까요?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6:52)
여기서 "둔하여졌음이러라"는 헬라어로 "πωρόω"(포로오)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
여기서 "완고하여"도 헬라어로 "πωρόω"(포로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지고 무감각해져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즉, 마음이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면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인하게 되고, 성경도 진리도 깨달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이 둔해졌을까요? 다른 일에 민첩했기 때문입니다 거센 바람이라는 상황과 환경에 집중하여 노 젖는 일에 민첩하느라, 마음이 둔해져서 세상을 발 아래 두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도 바다도 발 아래 두셨음을 보이시려고 바다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마음을 집중하여 사람의 일에 민첩한 것이 아니라,
땅과 바다를 발 아래 두신 예수님의 두루마리 말씀에만 집중하여 주의 일에 민첩하기 원합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계10:8)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 일에 민첩하느라 하나님의 나라가 코 앞에 와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회개로 부르시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14:18~20)
그러나 우리는 주의 말씀에 집중하여 주의 일에 민첩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45,46절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십니다. 무리를 돌보느라 힘들고 피곤하셨지만, 규칙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십니다(1:35; 14:32; 눅 5:16; 6:12; 9:28).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이 시간을 통해 제자들의 그릇된 기대와 무리의 칭송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전진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서도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믿음의 바른 길을 정진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루 일과 중 최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47-52절 뭍에서부터 제자들의 힘겨운 상황을 보시고 물 위를 걸어 다가가십니다. 갈릴리 바다의 새벽 3시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의 시간입니다. 이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참조. 신 32:39)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 삶도 어두운 제자들의 시야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 역풍까지 덮쳐 갈 바를 찾지 못하고 하염없이 헛된 노질만 되풀이할 때도 있습니다. 내 삶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럴 때라도 우리 손을 붙들고 계신 주님이 계심을 기억합시다. 그분께서 우리 역풍을 모두 잠잠케 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적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49-52절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특별한 이적을 경험했지만, 아직 영의 눈을 뜨지 못한 맹인과 같았습니다. 여전히 풍랑 앞에 고전했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보다, 이적 자체에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묵상과 예배를 통해 주님을 알아가는 일보다 더 집중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53-56절 마음이 둔하여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과 달리, 게네사렛 사람들은 적극적인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고,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기를 구한 자들은 모두 나음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목격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의 행동 없이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길이 없습니다.
기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정진하게 하소서.
원래 제자들을 향하게 하셨던 벳세대가 아니라 풍랑으로 인해 배는 게네사렛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이들 역시 주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뛰어 쫓아다녔고 아픈 이들을 짊어지고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모이며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자들 모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묘사된 장면 가운데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마가복음 2장),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었고 그분의 옷자락을 잡은 혈루증 앓은 여인(마가복음 5장)의 믿음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원래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신실하게 임하시고 주님께 간절히 찾는 어떤 자에게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고 장소와 무관하게 그분으로부터 임하는 참 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초청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구하며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기도하신 예수님(45-47절)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바쁜 사역을 마치신 이후에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새벽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는 일에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는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범을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우리는 닮아야 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는 일을 쉬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일을 하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임을 잊지 말고 어떤 일을 행하든지 늘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갖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묵상하기
기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2.깨닫지 못한 제자들(48-53절)
예수님께서 새벽까지 기도하시고 호수의 물 위를 걸어서 건너실 때까지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바람과 싸우며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오시는 모습을 보고도 주님 이심을 알지 못하고 유령으로 여겨 두려워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영적인 모습을 52절 말씀에서 낮에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미련함을 갖고 있지 않은가?
3.병을 고쳐주신 예수님(54-56절)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아픈 사람들이 넘쳐 났습니다. 육신의 질병을 고치겠다는 마음의 간절함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다 고쳐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라도 낫고자 하는 간절함에도 응답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들이 질병 가운데 고통 받는 모습을 긍휼하심으로 바라 보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고쳐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있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 역시 이 땅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온전하게 신뢰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 풍랑 속에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는 삶입니다(45~49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십니다. ‘재촉하다’는 ‘~하도록 강요하다, 억지로 시키다’라는 뜻을 강조하여,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보여줍니다. 심각한 문제라고 하면 요한복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오병 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그리고 억지로 붙들어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요 6:14~15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떠나도록 하셨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46절). 예수님은 규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는 것에 충실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1:35,14:26~42;눅6:12;요6:3,15)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오는 바다 위에서 힘겨워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 오시니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여 소리를 쳤습니다.
기적을 행한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고,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대업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반면 예수님과 떨어진 제자들은 풍랑이라고 하는 문제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고 있지만, 딱히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몇 시간 전만해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현장에서 의기양양 했던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주님과의 단절은 작은 풍랑에도 두려워하게 합니다.
아무리 거센 풍랑이 몰아쳐 온다 할지라도 그 풍랑을 이겨보겠노라 힘써 젓는 노를 내려놓고,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괴로움 중에 처해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보셨던 것처럼 나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풍랑 속에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풍랑 속에서도 평강을 놓치지 않는 삶입니다(50~52절).
예수님은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50절).. ‘...내니..’는 ‘에고 에이미’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친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권능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고, 바람도 그치게 하셨건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을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져있었기 때문(52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권고의 말씀을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고, 단지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으로 인식하여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 믿음이 약해지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할 때 나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내 마음을 굳어지게 하여 어떤 위로의 말씀도, 축복의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확신하는 것은 나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염려와 걱정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신 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능력의 팔로 나의 삶을 건지시고 돌보시며, 풍랑 속에서도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풍랑 속에서도 믿음을 놓치지 않는 삶입니다(53~56절).
예수님은 벳새다가 아니라 게네사렛에 배를 정박시키고 그 배에서 내렸습니다. 게네사렛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온 지방으로 다니면서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도록 허락하셔서 치유함을 얻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어떤 상황과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온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편견을 갖지 않으시고,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장 평범한 진리이지만 그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 없는 열광주의적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을 믿고 닮아가려는 열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풍랑 속에서도 믿음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 평강의 축복을 누림으로 망망대해에서 만난 풍랑과 같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6:45~56절)...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향한 그 눈길을 돌리지 않으시고
연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믿음을 새롭고 견고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와 회복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모든 악한 의도를 소멸시키시고
그 길 잃은 양들을 주님의 선한 팔로 안아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크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거룩하신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