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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시점이 죽음일까? 한때 끔찍이 귀했던 것을 버리는 것은 아픔이다. 작은 아픔을 자꾸 경험하다 보면 어느 날 닥칠 큰 아픔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내 인생에 중요한 것들의 리스트를 뽑아서, 덜 중요한 것부터 버려나가야 될 성싶다.
“무슨 소리야 지금? 이 꽃밭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들여 밀었는데 그래?”
“때가 된 것을 알아야지요?”
“그만둬! 당신 때려치워. 내가 혼자 잡초 뽑고 꽃 관리 내가 다 할 테니까. 말 되는 소리야 지금? 우리 인생이 통째로 숨 쉬고 있는 이 꽃밭인데 갈아엎고 잔디를 심어?”
시카고 시내에 아파트 빌딩을 샀더니 세입자들이 농사짓는 밭이 뒤뜰에 딸려 있었다. 뺑 둘러 들깨 울타리가 쳐져 있고, 고추 상추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밭의 반쪽은 명아주 망초 쇠비름 질경이 새경이가 꽉 찬 잡초천국이었다. 이듬해부터 세입자들의 농사를 전면 거절하고 대대적인 꽃밭으로 개조했다. 제일 생명력이 강하고 꽃이 화려한 플락스 밭으로 변신시켰다. 우리 부부가 일은 많이 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꽃의 종류가 다양해져갔다. 꽃밭은 과학적으로 철따라 순응해 주었고, 꽃들은 조직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꽃밭 다듬고 잡초 뽑기는 행복했다.
아내가 건강문제 때문에 꽃밭 일을 안 했던 작년에는, 나 홀로 꽃을 관리했다. 잡초와 잡나무 싹들이 우후죽순처럼 마구 치밀고 올라왔다. 젊었을 때는 조수라도 옆에 있었지만, 늙어서 아내까지 아프다고 뒤로 물러나니, 달랑 나 혼자다. 먹고살기 위해 뛰기도 할 텐데, 이까짓 꽃밭관리 쯤이야 왜 겁먹을쏘냐? 작년에는 꽃들의 위력이 워낙 우세하여, 꽃들이 실력발휘를 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백화가 만발하니 맥도날드를 사다가 꽃밭 둑에 펼쳐놓고, 아내와 함께 추억을 섞어가며 먹고 놀았다. 커피 마시지 말라고 의사가 아내에게 엄히 경고했건만, 몰래 소주잔 돌리듯, 우리 부부는 커피 컵 주고받으며 홀짝홀짝 마셨다. 꽃은 날씨 분위기 상관하지 않고 다가와, 항상 가슴 뻐근한 기쁨을 안겨준다. 꽃밭 둑에 서면 괜히 싱숭생숭하고 누군지를 무작정 사랑하고 싶어진다.
올봄에는 쏟아져 나오는 잡초에 겁먹고, 잡초는 나오는 대로 뽑아내려고 벼르다가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잡초 권세가 꽃의 체면을 앞지르던 어느 날, 허리가 노골노골하도록 밭을 맸으나 반의반도 못 해결했다. 곧 또 나가서 꽃밭의 잡초를 뽑으려고 벼르다가, 아파트에 들르지 못한 채, 한 달을 놓쳐버렸다. 다시 아파트 꽃밭에 나가 본 나는 기운이 쪽 빠졌다. 애쉬나무, 메이플나무, 엘름나무 싹들이 여기저기 터를 잡고 틴에이저 소년들처럼 기세등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온갖 잡초들도 제 세상을 만나 활기차게 뻗어나간다. 앙칼진 잡초인 메 싹은 사방 퍼져나가며 닥치는 대로 꽃들을 휘감고 뒤덮는다. 메 싹들을 뽑아내는 것은 차치하고, 무조건 잡아 뜯기만 하려 해도 이틀은 걸리겠다. 더욱이 잡나무들까지 캐내려면 나는 몇 고랑 못가서 녹초가 되게 생겼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잡초에 눌려 숨 못 쉬고 할딱거리는 플락스 락스퍼 하이비스커스 릴리를 바라보니, 꽃밭에 들어서기도 전에 기진맥진한다. 농사가 재미있진 않더라도 만만해야 밭으로 벌컥 덤벼드는 법인데, 잡초의 세도에 주눅이 든 나는 이미 일할 용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때는 무슨 때가 지났다는 거야? 멀쩡한 꽃밭을 미쳤다고 파 엎고 잔딜 깔아?”
늙었다고 물러나는 아내에게 노여워하던 나의 패기는 어디로 갔을까? 한숨이 푹 나오면서 눈물이 솟구친다. 세월이 가도, 해야 할 일은 왜 그렇게 끝없이 쌓이는가? 꽃밭만 매면서 남은 세월을 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할 수 없다. 내년엔 모두 잔디밭으로 만들자. 그래도 너무 가슴 아프지 않게 가장자리의 키 큰 꽃들은 조금 남겨두고 싶다.”
그날은 온종일 우울했다.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될 것 같아서 심란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무심코 리빙룸의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슬픔이 덮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내가 그렇게도 귀하게 생각해왔던 꽃씨들이 컵 채 몽땅 버려져 있었다. 색깔별로 종류별로 철저하고 엄격하게 구분하여 챙겨두던 가지각색 꽃씨 컵들이 엎어지고 쓰러지고 뒤섞인 채 버려져 있었다. 젊었을 때는 하얀 클레오미 꽃씨에 분홍색 클레오미 씨앗을 섞었다고 나에게 마구 화를 내던 아내였었다. 아내가 오늘은 클레오미씨 플락스씨 락스퍼씨 지니아 애스터 코스모스 마구잡이로 뒤섞어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쓰레기통 앞에 주저앉아 넋이 빠져 버렸는데, 이 꽃씨를 버린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으랴?
1). 순수문학 소설 당선으로 등단(2006년)
2).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공모 소설당선(2007년)
3). 한국산문 수필공모 당선(2010년)
4). 경희 해외동포 소설 우수상(2010년)
5). 서울 문예창작 소설 금상(2013년)
6). 재외동포 소설 우수상(2014년)
7). Chicago Writers Series에 초청되어 소설 발표 Event 개최(2016년)
8). 국제 PEN 한국 해외작가상(2016년)
9). 해외 한국소설 작가상(2023년)
10). 제 4회 독서대전 독후감 공모 선정 소설(2023)
11). 한국문협 회원, 국제 PEN회원, 한국 소설가 중앙위원
12). 시카고 문인회장 역임.
13). 시카고 문화회관 문창교실 Instructor
14). 현 미주문협 이사
저서: 단편소설집---“발목 잡힌 새는 하늘을 본다” “소자들의 병신춤” “달 속에 박힌 아방궁”
중편소설집---“나비는 단풍잎 밑에서 봄을 부른다”
수필집---“여름 겨울 없이 추운 사나이”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눈물 타임스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