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 그리고 이동국
날으는 돈까스 | 2006·01·23 22:01 | HIT : 1,873 | VOTE : 214 |
1. 좌절과 오욕의 자리 -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국축구의 역사에서 올타임 통틀어 그동안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을 열거해 본다면 거두절미하고 김영근, 최정민, 이회택, 김재한, 차범근, 최순호, 황선홍 모두 7명정도를 추려볼 수 있겠다.
1) 전설 그리고 이회택 論
먼저 그저 아련한 먼 옛날의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고 김영근 옹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직접 경기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동영상은 물론이고 그 흔한 빛바랜 낡은 사진조차 그저 희미한 얼굴의 윤곽정도나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니 가타부타 김영근 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 있으나 주워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건데 동시대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나 브라질의 레오니다스에 비견될 정도의 초절정 테크니션이었다고 규정해 볼 수 있다. 축구원로들은 이구동성으로 70년대의 펠레 못지않을 정도로 193,40년대 당대의 김영근 옹의 플레이는 존재의 지평을 달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평양팀의 핵심 키플레이어로 심지어 그 콧대높은 평양기생들도 김영근 옹의 경기가 있는 날엔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달했다는 정도이니..... 아닌게 아니라 그 반반한 기생언니들 중 한분이 연정에 못이겨 결국 김영근 옹을 품에 안는데 성공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축구선수들은 영원한 여성들의 우상이었나 보다. 한국축구의 천재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의 보헤미안적 기질과 반골성향이 결국은 일제에 의한 베를린 올림픽출전의 배제로 이어지고 말년에는 참으로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보냈다는 그 분은 결국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불행아였던 걸까? 아무튼 축구원로들의 감상어린 회상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천재적 플레이어 였음은 분명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고 최정민 씨 역시 이북출신(원래부터 북에 계신 분들이 남녘 동포보다 소질은 더 뛰어난 듯)으로서 청소년대회와 아시안컵의 우승을 이끌고 미스코리아 출신과 결혼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잠시 보였으나 그닥 선수로서 만개 혹은 대성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인생행보를 걸었다. 170이 겨우 될까말까하는 단신에 한박자 빠른 슈팅타이밍, 엄청난 활동량과 스피드를 주무기로 하던 이회택 전 기술위원장님 역시 한국축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기린아였으며 일명 중앙정보부 산하의 ‘양지’팀으로 대변되는 국가주도의 축구발전전략을 대표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간과하는 사실 중에 하나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축구와 가장 많은 대결을 벌이면서 한국축구가 쉽게 넘기 어려운 벽으로 존재했던 국가는 호주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아니었다. 바로 과거의 ‘버마’(지금의 미얀마)였던 것이다. 한국축구의 전통적 강점인 민첩성과 스피드를 오히려 능가하는 속도감에 동남아 특유의 리드미컬한 유연성을 겸비하여 한국축구와의 팽팽한 대결에서 그 약간의 승부의 판가름을 결정짓는 요소는 언제나 버마가 한 수 위였으며 마치 66년 월드컵의 북한을 방불케하는 물흐르는 듯한 게임운영 등 당시의 박대통령컵의 초창기엔 버마가 컵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컨대 당시의 이회택은 물론 불세출의 스트라이커였지만 타도 버마를 완전히 달성하기에도 버거운 존재로서의 인식을 가져다주는, 따라서 당시의 축구팬으로서는 뭔가모를 부족을 느끼게하는 존재감을 던지는 스트라이커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회택의 전성기 당대에 한국은 가마모도의 일본에 밀려 68년 멕시코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으며 70년 월드컵은 물론이고 72년 서독 올림픽에도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불운과 좌절의 엄청난 무게가 이회택 개인에게 모두 걸머지어졌음은 물론이며 이회택 위원장님 역시 그 특유의 반골기질과 보헤미안적 성향(이분 역시 실향민이다)이 어우려져 그동안 이동국이 느껴야 했던 감정보다 오히려 더욱 회한일 수 있는 현역시절이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2) 차범근과 김재한 - 환골탈태의 피지컬
이러한 한국축구의 70년대에 거의 혜성처럼 나타난 두 존재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차범근과 김재한이다. 여기서 김재한은 어떤면에서 중고신인의 이미지가 강했으며 고만고만한 단신들의 경합에 머무르던 아시아권 팀들과의 국가 대항전에서 190에 육박하는 장신의 고공 포스트 플레이는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보세’ 구호에 버무려진 산업화 발전의 개발논리와 묘하게 오버랩되면서 한국축구팬들에게 어떤 우월감과 자긍심의 근원이었다. 김진국이나 고재욱에 의한 크로싱이 메르데카컵에서 맞붙은 동남아 팀들의 수비진을 훌쩍 넘어 김재한에게 연결될때 그들 수비수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그 이미지 그대로 한국축구의 힘이었다. 심지어 김재한의 위력은 이라크나 이란등 우리보다 피지컬이 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팀들에게 조차 위협의 대상이었으니..... 장신을 이용한 타켓형 스트라이커의 전형은 한국축구의 역사에 있어 이 김재한이 최초였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김재한은 받아먹기에만 능숙한 존재가 아니라 킥력또한 수준급이었으며(조금 과장해서 반 호이동크급 프리킥 감아차기 능력이 있었다.) 헤딩떨구기를 이용한 2선급 미들진에 대한 피딩패스 또한 뛰어났었다. 단지 순발력이 느리다는 단점을 빼고..........
또한 애초에 고2때까지 단거리 육상선수였다가 경신고에서 축구로 전향한 차범근은 이미 고교무대에서부터 초고교급 신예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표에 발탁되었던 70년대 한국축구의 ‘희망’이었다. 전성기 백미터를 11초 01에 주파하는 엄청난 스피드에 당시로서는 꽤 장신인 177의 키를 스피드를 이용한 용수철같은 점프력으로 승화시키는 찍기헤딩, 간간이 날리는 위협적인 중거리 슈팅 등 그동안의 한국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어떤 설레임을 바로 차범근이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최근의 박주영 신드롬이 한국축구가 결하고 있던 게임을 읽는 촌철살인의 테크니션에 대한 기대이듯 당시의 차범근 신드롬은 늘 외국팀과의 평가전에서 동남아팀에는 유연성에서 밀리고 이란, 이라크등에는 피지컬과 속도에서 밀리는 한국축구의 자괴감을 상쇄해 줄 기대주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높이의 김재한과 속도의 차범근, 여기에 기존멤버들의 적절한 조합은 분명 그동안 한국축구가 겪어야 했던 오욕과 회한을 일거에 날려버릴 어떤 벅찬 기대감으로 연결되었으며 버마와의 일전에서 스포츠머리의 차범근이 미친 듯 직선의 질주를 달리다 냅다 갈긴 중거리슛이 버마의 오른쪽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을때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의 과거명칭)이 떠나가라고 양복 윗도리를 흔들던 축구팬들의 환호는 바로 이 기대감의 표현에 다름아니었을 터. 그러나..............
1974년 서독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은 한국축구의 기대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2대0의 절대적으로 유리한 리드를 끝내 지키지 못한 한국축구는 호주에게 티켓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페널티킥을 실축한 임국찬 선수는 ‘죽여버린다’라는 팬들의 광기어린 질타에 두 번다시 국내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도미해버렸다. 더욱이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마저 실패하자 특히 차범근에게 가해진 모진 뭇매는 바로 이것이었다.
‘ ㅂㅅㅅㄲ.......’
이동국에게 가해진 질타와 비아냥이 정도가 심하다고? 당대의 차범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차범근은 그 성씨의 車가 의미하는 대로 마치 장기판의 차가 일직선으로 질주하듯 하는 플레이스타일이었다. 지금의 차두리와 대단히 유사한 스타일이었던...... 따라서 상대방 수비진에게 분명 위협적 존재였지만 플레이의 유연성이나 동선이 상당히 획일적이고 투박하기 짝이없었으며 특히 문전처리의 조급성으로인해 어이없이 결정적 찬스를 놓치는 상황엔 늘 차범근이 주인공이었다. 더구나 크나큰 부상의 위험에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유연성부족으로 차범근은 이미 공군입대 전부터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동료와의 연계플레이가 너무도 미숙한 단순한 무한질주적 형태의 플레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이드라인으로 열심히 질주하여 크로스를 올려봐야 하도 빠른 차범근을 미리 맞춰주지 못한 이회택이 채 페널티 에어리어에 닿기도 전에 상대수비가 먼저 걷어내는 일이 잦아지자 이회택은 마음안의 짜증을 감추고 ‘ 그래, 범근아. 어찌됐든 너 꼴리는 대로 해봐.“ 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이니...... 차범근이 77년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내뱉었다는 ”다리하나만 믿고 갑니다“라는 코멘트의 의미는 축구선수로서 당연히 다리하나만 믿고 갑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발빠른 주력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자신에게 끝없이 가해졌던 비난에대한 자조적 그리고 우회적 서운함의 표현에 다름아니었다. 요컨대 차범근은 계속 이어지는 한국축구의 세계무대 진출의 실패에 대한 희생양으로서 일종의 도피처로 독일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 누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ㅂㅅㅅㄲ‘라는 표현이 달가울 수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축구팬이 어쩌면 월드클래스급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닌 선수를 매장시키는 최대의 주범이었음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현실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히 차범근은 20대후반 30대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축구선수로서 만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 한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선수의 잠재성을 단순한 연령의 계량적 수치로 쉽게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제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병신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최순호 그리고 황선홍 - 비운의 롱다리들
한국축구의 반복되는 패턴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축구가 가장 어둡고 침체된 시기에 바로 다음세대의 스트라이커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맨땅의 척박한 인프라에서 끊임없이 인재가 등장하는 것은 황량한 몽골초원에서 계속해서 중원을 노리는 영걸들이 출현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인가? 최순호는 한국축구가 78년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진출실패는 물론이고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어차피 미국의 보이콧으로 인해 자유진영 국가의 상당수는 불참할 것이었지만...)예선에서는 말레이시아의 수중전에 말려 3대0의 치욕적 패배를 경험한 나락에 떨어진 바로 그때, 분데스리가에서 연일 상종가를 치던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팀과 내한하고 마침 한국대표팀이 신예위주로 전면적 개편을 단행하던 바로 그때 까까머리 청주상고 3학년생으로서 등장했었다. 안그래도 축축히 스콜의 물기를 머금은 콸라룸푸르 경기장에 일부러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물을 뿌렸으니 그라운드는 말그대로 물바다 그 자체였으며 우리가 허용한 3골중 한골은 수비수 김홍주가 워낙 미끄러운 잔디에 저절로 미끌어져 하필 골키퍼에게 연결된 크로스에 발이닿아 먹은 자살골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욕적이었다. 허정무와 박상인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날린 대포알같은 슈팅들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긴팔을 가진 아르무강 골키퍼의 손에 번번이 걸렸으며, 핫산 알리드의 발빠른 드리블과 소친온의 얄미운 시간끌기에 내내 끌려다니다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 (이미 이 이전인 김정남-김호 시대부터 ‘말레이시아 징크스는 존재했었다) 당장 장경환 감독은 경질되었고 돌이켜 보건대 이때만큼 한국축구가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진 때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어두운 시간이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신군부등장의 뒤숭숭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더욱 한국축구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직면했었던 것이다.
새로이 선임된 한홍기 감독이 70년대를 대표하던 박성화, 황재만, 박상인, 김진국 등의 기존멤버를 아예 배제해버린 채 주로 대학과 실업의 신예들을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와의 평가전을 대비했다. 테크니션 이태호, 드리블러 정해원(그 80년도의 종합선수권 결승에서 당시 최강 충의팀을 상대로 골키퍼를 포함 6명을 제치고 넣은 골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이 가장 인상깊은 선수로 평가한 발빠른 이정일, 정통 스트라이커 황석근, 신예수비수 박복찬 등 이 새로이 선발되어 나름대로 프랑크푸르트와 겁 없은 패기로 일전을 벌였다. 필자는 바로 이 경기를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관전했었는데 경기 팜플릿의 선수프로필에서 난데없는 까까머리를 발견했고 그가 바로 최순호였다. 솔직히 몇분이라도 프랑크푸르트전에서 뛰었는지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으며 ‘최순호가 누구야?’라는 술렁거림이 운동장 여기저기서 일어날 정도로 최순호는 말그대로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축구팬에게 최순호라는 이름 석 자를 깊이 각인시킨 경기는 바로 다음의 포르투갈 FC보아비스타 내한경기였다. 두 번에 걸친 그 친선경기에서 최순호는 연속골을, 그것도 첫 경기에서는 대단히 감각적인 힐킥으로 제2경기에서는 중앙선부근에서 날린 빨랫줄같은 장거리슛으로 선취점을 얻는 인상적 데뷔전을 치렀던 것이다. 김재한과 별 차이없는 고공신장에 헤딩, 슈팅, 위치선정은 물론이고 이후 한국축구의 일세를 풍미한 윙어 변병주나 박경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스피드 등 스트라이커가 갖취야할 조건을 구비한 최순호 - 필자 개인적으로 올타임 넘버원 스트라이커라고 생각하는 선수가 바로 최순호다. 최순호는 아시안컵에서 연일 득점포를 몰아치는 ‘무서운 아이’로 급성장했고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81년 호주 세계청소년 대회에서 첫 경기 이탈리아의 강철 수비진을(이때의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 수비라인은 당시로서는 황금세대로 기대를 받던 수준이었다.) 마음껏 농락하며 2골을 몰아치며 4대1의 충격적인 대승을 이끌어 내는 견인차였다. 곽성호(방송사 해설위원)의 선취골은 물론 이경남의 승리를 확신케하는 네 번째 골 모두 최순호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결과였다. 아마 이때부터 유벤투스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을 것이 분명한 최순호는 그러나 한국축구가 당시까지 악몽처럼 치러야했던 세계무대 진출좌절이라는 덫에 걸려들고 만다. 최종예선도 아니고 2차예선에서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을 만나(그때는 홈 앤드 어웨이가 아니었다. 쿠웨이트에서 4개국이 한번씩 경기해서 한팀의 진출을 가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 결국 쿠웨이트에게 진출권을 빼앗기고 만다. 당시는 2차석유위기의 뒤끝이었으며 따라서 일부러 우리나라가 중동의 석유수급을 위해 져주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말많았던 쿠웨이트전의 0대2패배(잘라먹는 헤딩으로 허용한 두 번째골은 그렇다쳐도 별로 막기 힘든 스피드와 코스도 아닌 평범한 슈팅을 조병득 골키퍼가 그냥 흘려보낸 것 하며, 몸에 닿기만 해도 휘슬을 부는 심판의 작태 등)는 한국축구를 또한번 나락과 침체로 빠뜨렸다. 뒤이은 82년 뉴델리아시안 게임에서는 숙적 일본에게 강신우 해설위원의 선제골로 앞서나가다 치욕의 1대2역전패를 당하는 장면에서 고개를 푹숙이고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최순호에게 그때부터 ‘어슬렁 거리고 볼을 질질끌며 늘어지는 게으른 스트라이커’라는 달갑지 않은 색안경의 마수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83년 멕시코 4강신화에 힘입어 박종환 체제의 대표팀이 84년 올림픽의 대비를 위한 태능선수촌의 지옥훈련에 돌입하자 이태호 등과 함께 강압적인 박감독의 훈련방식에 반발한 무단 이탈을 감행하여 급기야 ‘ 조직 융화력도 없고 싸가지 없는 ’최순호로 전락하기에 이르러 ‘더이상 최순호 그 xx는 필요없다. 김종부, 신연호로 대표팀을 꾸려라’는 팬들의 단죄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이동국의 경우는 한마디로 이에비하면 애들 장난수준이다.
다행히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드디어 한국축구가 32년 한을 풀고 진출하는데 있어 최순호는 비록 한골에 불과했지만 살신성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대활약을 펼쳐 이모든 감회들을 상쇄했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일찍부터 유벤투스로 진출했더라면 필자의 사견이지만 당대의 반 바스텐 따위가 범접하기 어려운 톱클래스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최순호가 호주 청소년대회에서 날라다닐때 반 바스텐은 아약스 유스의 풋내기에 불과했으며 더욱이 바스텐이 출전한 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에서는 네덜란드의 특징없는 플레이에 빗대어 멕시코 언론이 ‘왜 저런 멀대같은 친구를 공격진에 넣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신랄한 비아냥을 들었음을 기억해 볼 때 참으로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80년 신예위주의 대표팀이 청주에서 연습할 때 우연히 기웃거리던 최순호를 발탁해주었던 한홍기 감독과 포항제철팀에 대한 의리를 지킬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순박함이 냉정한 이기주의에 힘입은 보다 큰 무대에 대한 의욕을 꺾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한홍기 감독이었으면 만사 제치고 보냈을 것이다.
황선홍 역시 한국축구가 88년 안방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기대밖의 졸전을 펼치다 예선탈락한 시점에서 출현했다. 김정남 체제에서 이회택체제로 바뀐 대표팀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출전한 것이 바로 88년의 아시안컵이었으며 원래는 듬직한 체격의 고려대 송주석이 발탁될 예정이었으나 보다 움직임과 개인기가 좋은 건대의 황선홍이 발탁되어 예의 대 일본전에서 감각적인 리바운드 슛으로 대표팀의 첫골을 신고했다. 이후 황선홍이 걸어간 길도 위의 선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견디기 힘든 질타와 단죄라는 업보를 겪어야 했음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인터....... 특히 ‘황새’라는 닉네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유난히 마른체형이었던 황선홍의 초창기에 상대수비수와의 헤딩경합과 몸싸움에서 힘없이 밀리고 받아먹기에만 급급하는 과감성부족을 지적받는 연장선상에서 ‘저 xx는 축구선수가 무슨 여자모델같이 저렇게 가늘어서 엇다 쓰겠어?’라는 왜곡된 이미지의 결과물이다. 특히 94년 미국월드컵 운명의 볼리비아전의 홈런성 똥볼은 두고두고 황선홍 미스캐스팅의 근거로서 회자되었으니 오죽하면 ‘울지 않는 황새’라는 상징성이 황선홍의 대명사이겠는가 말이다. 그나마 황선홍은 2002년의 영광의 순간 명예로운 은퇴로서 선수생활의 대미를 장식했으니 앞의 선배들에 비하면 복받은 편이라고 애써 자위해볼 수 있겠다.
2. ‘이동국’ 그는 누구인가?
1) 이동국의 출현과 시대적 의미
앞서 상당히 장황하게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여기서 정병탁, 유건수, 오석재 그리고 김종부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들을 상대적인 낮은 수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은 아니니 넓으신 해량있기를)를 열거했던 이유는 지금의 소위 ‘이동국 논쟁’은 별로 색다를 것 없이 계속 이어지는 반복된 역사에 불과하다는 점을 새삼 인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동국 역시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에게 天刑처럼 다가오는 오욕과 회한의 동일한 희생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면에서 그래도 이동국에게 가해지는 질타의 수준은 요즘이 인터넷 세상이라서 더욱 적나라해진 면이 있어서이지 과거의 스트라이커들이 지금의 정보화사회의 상황이었다면 이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었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동국을 처음 본 것은 90년도 중반의 어떤 이름모를 고교대회에서였다. 덩치도 큰 녀석이 상당히 자신감있게 효창구장의 인조잔디를 헤집고 다니면서 뻥뻥 대포알 같은 슈팅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며 ‘물건이구나’하고 느꼈다. 현명하게도 대학을 거치지 않고 포항스틸러스로 직행한 점하며 우연히도 최순호, 황선홍과 같이 자랑스런 스틸러스의 전설에(필자는 포항팬이다.) 화려한 계보를 이은 점 등등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행보를 갖췄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모든 것을 차치하고 초창기의 이동국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바로 98년의 네덜란드전이었다. 많은 분들이 그러했듯이...... 한마디로 그때가지의 한국축구는 강팀들과의 경기에서 싸워보기도 전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심리적 위축을 보였다는 것이 필자로서는 가장 짜증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후배들에게는 무서운 고참이었던 그 잘난 중견급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둥대는 꼴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며, 나아가 마치 그런 메이저급 팀들을 꺾으면 어떤 불경죄라도 저지르는 양 하는 멘털리티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차범근 감독의 지나친 독일축구에 대한 외경도 탐탁치 않다. 독일이 볼이나 좀 차나?
그런데 이동국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듯 반 데 사르가 지키는 골문에 냅다 못먹는감 찔러본다는 식의 과감한 슈팅을 날렸다. 바로 그 겁 없은 마음이 지금도 절절히 한국축구에 필요한 부분이다. 예상치 못한 강슛에 화들짝 놀란 에드가 다비즈의 당혹한 표정은 마치 ‘어쭈, 제법 개기네...’하는 의미가 녹아들어가 있었다. 이때로부터 잘 아시다시피 이동국이라는 아이돌이 한국축구에 있어 하나의 화두로 등장한 것인데, 그 균열의 조짐 - 즉 ‘굼뜨고 느리며 골결정력이 생각보다 떨어지고 무브먼트가 부족하며 겉멋이 들었고 무엇보다 받아먹기에만 익숙하다는’ 예의 안티 이동국 論이 대두된 시점은 바로 그 남아공의 청소년 대회에서가 아니었는가 한다. 발만 갖다대면 들어갈 결정적 기회 - 그걸 넣었으면 여유있게 다음라운드를 진출했을 것을 우르과이의 교활한 축구에 말려 오히려 실점하며 예의 드러누워 시간끌기의 향연에 머리가 폭발할 지경까지 이른 바로 그 상황들 말이다.
워낙 이동국에 대한 찬반양론은 상당기간 한국축구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기에 여기서 일일이 그 논점들을 열거하는 것은 이제 다소 진부한 느낌을 줄 수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우리는 너무 사치스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원샷원킬의 정확도에 더 나아가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 나갈수 있는 자체역량을 지닌 스트라이커는 많이 쳐줘도 지금 현재로서는 티에리 앙리, 셰브첸코, 특히 전성기의 호나우도, 에투 정도가 열거될 수 있다. 반니 혹은 모리엔테스 마저 자체타개역량까지 구비한 스트라이커인가 하는 것은 좀.......... 요컨대 현재 본선에 진출한 국가들을 통틀어 봐도 이러한 타겟형 스트라이커나마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는 팀은 의외로 몇 안된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웃한 일본도 주지하다시피 후지산 대폭발슛이나 남발하는 열악한 ‘최전방 수비수’의 현실앞에서 암울한 것임은 굳이 열거하고 싶지도 않다. 굳이 스트라이커가 무브먼트나 패싱까지 최상급일 필요는 없다. 89분 내내 삽질하더라도 단 한번 확실히 결정지을 수 있는 ‘받아먹기 혹은 길목지키기’형 스트라이커라도 그나마 가능성을 지닌 이동국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필자가 결코 이동국 만능론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동국은 나름의 결점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다. 그러나 어차피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은 어쩔 수 없이 안고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인터......... 요컨대 내가 요즘 드는 느낌은 이동국이 기존의 단점 - 무브먼트의 부족은 상당부분 업그레이드 되었으나 오히려 장점 - ‘겁 없은 난사‘가 상당히 풀죽은 겁먹음으로 돌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애초에 이동국이 히딩크호의 최종엔트리에 승선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개인역량이 모자랐다기 보다는 히딩크가 구상하고 있던 전술의 그랜드 디자인에 아무리 끼워맞춰 보아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딩크 스스로가 ‘참으로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하면서 이동국의 탈락을 아쉬워 하기도 했지만, 요컨대 이동국이 당면한 문제는 이동국의 스타일에 맞는 전술을 지닌 감독이 오거나, 아니면 이동국이 히딩크류의 전술에 맞게끔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의 두 가지 측면이었다. 리누스 미켈과 크루이프 시절부터 태동된 네덜란드식 토틀사커는 클루이베르트, 다비즈, 리트마넨으로 이어지는 아약스의 황금시대에 출현한 ‘아약스식 343전형’으로 귀결되었다. 히딩크는 물론 안복한 감독이 사용하는 전술의 기본도 원톱을 위주로 한 343전형에 기본골격을 두고 있는 바 - 당시의 아약스는 원톱 클뤼베르트가 천방지축에 가까운 좌우의 횡적이고 폭넓은 움직임속에서 2선의 리트마넨과 데부르 그리고 오베르마스의 활발한 침투를 요체로 한 가공할 공격력이었으며 이는 눈감고도 반복되는 끝없는 패턴훈련이 아니고서는 실행조차 불가능한 방법론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이동국의 변신은 단지 이동국 개인의 플레이스타일의 변화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축구의 게임운영이 바로 이러한 유기적 움직임의 체화를 요구한다는 관점에서 해석함이 마땅하다. 다시말해서 실제로 클뤼베르트 자체의 개인역량에 의한 득점보다는 유기적으로 팀플레이가 만들어낸 골을 추구한다는 것이 비단 네덜란드에만 국한되지 않는 유럽축구의 대세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잠그기 축구는 일단 선제골을 선점한 후 최전방의 톱에게 한번에 연결되는 스나이핑 패스로 계속 달아나겠다는 대단히 효율적인 듯 하면서도 상당히 도식적인 패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탈리아 대표팀이 82년의 영광이후 이렇다할 소득없는 좌절을 거듭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전술의 근본적 한계에 다름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이동국에 대한 비난은 밋밋하다. 유로 2000이후의 델 피에로는 심지어 살해위협에 가까운 비난에 시달려 견디다 못한나머지 스스로 ‘모든게 내 잘못이다’라는 백배사죄를 거듭하고도 여전히 카사노의 앞길을 막을 지도 모르는 늙다리로 치부되고 있으며, 로베르토 바조 역시 허공의 PK로 인해 말못할 수모와 회한을 겪어야 했다. 82년에는 거친 태클로 퇴장당한 마라도나 역시 ‘너같은게..........’라는 비아냥을, 이탈리아에 패배한 위대한 지코에게는 그 모든 패전의 책임이 덧씌워졌으며, 나아가 스페인에 비겨 다음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잉글랜드의 케빈키건에게도 동일한 질책이 뒤따랐다.
2) 이동국에 대한 사월의 기본시각의 재해석
최근 고질적 발병처럼 예의 이동국 논쟁이 운영자님까지 나설정도의 이슈거리를 만들어낸바 있다. ‘사월의 특히 회게는 본심을 숨긴 엄숙주의자들의 짜증나는 짓거리’ 이거나 ‘어떤 사월 초창기의 기득권세력에 의한 독재적 전횡’이 축게의 일방적 폐쇄로 연결되는 횡포로 낙착되었다는 지적이라든가, 아니면 ‘사월은 이동국빠들의 천국인가? 이동국에 대한 비난은 결국 고상한 운영진에 대한 불경죄로 처리되느냐?“라는 식의 문제제기가 봇물터지는 듯한 댓글의 향연으로 표면화 된 바 있다. 미리부터 얘기할 것은 필자는 결코 운영진과는 일면식도 없으며 심지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회게의 글쓰기가 5년이 넘게 허용되지 않아 꿀먹은 벙어리의 눈팅을 지속해야 했던 평범한 축구팬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런면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미리부터 밝혀둔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월식구들이 사월의 본질적 정체성을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 듯 하다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열악한 한국축구 - 특히 ‘그들만의 리그’에 가까운 한국프로축구의 황당하고 암울한 현실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 이 사이트를 형성한 열쇠다. 모두가, 심지어 그 지각없는 구단의 잘나신 경영진들이 그 리그운영에 대한 무지성을 드러내고 승리에만 눈이 먼 일부 몰지각한 코치진이 선수들의 어깨를 더없이 짓누르는 현실에서도 사월만은 그들을 영원히 지지하고 살갑게 품을 수 있는 맹목에 가까운 충성을 통해 한국축구를 또다른 일면에서 지지하고자 하는 그런 멘털리티에 기반해 있다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처음에 안양을 연고로 하다 지금은 무단횡단한 'FC서울‘(이 용어를 써도 되는지?)에 대한 집요한 거부 역시 이러한 맥락을 바탕에 깔고 있다. ’박주영‘이라는 아이돌이 아니라 이름조차 생소할 수 있는 ’내팀‘의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에 시선을 집중하겠다는 것이 바로 사월의 정체성이다. ’스타‘가 아닌 리그의 ’선수‘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그런......... 그런면에서 분명 사월이 국외자의 입장에서 운영진의 일종의 폐쇄성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해도 스타와 트렌드가 아닌 평범한 기층성에 주목한다는 점이 필자가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동국은 스타이자 아이돌이면서도 한편으론 더없이 질타당한 희생양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바로 그런 선수를 보듬겠다는 것이다. 축구팬들의 걸러지지 않은 코멘트가 표현의 자유로 연결되는 그런 다양성보다는 덩치와는 다르게 여린 소녀적 감성과 별로 틀리지 않은 선수들의 심약한 가슴을 어루만지겠다는게 사월의 본질적 의도인 듯 하다. 팬들의 표현자유가 우선인가? 아니면 선수의 성장을 위한 감싸기가 먼저인가?
스트라이커에게 최우선으로 요구되는 덕목을 이탈리아인들은 ‘칵티베리아’라고 표현한다. “자기가 직접 결정하겠다는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오만함과 의지, 집요함”이라고 표현되는 뉘앙스가 칵티베리아의 요체인데 한국축구의 문화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 ‘칵티베리아’의 표출에 가장 암적존재인 유소년 축구에서의 지각없는 코치들의 질타이다. “이 xx야 뒈질래? 똑바로 하란 말이야! 거기서 왜 패스안해?” 이런 얘기를 골백번 듣다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문전에서 허둥대게 마련이며 비슷한 그림이 오면 동료에게 미루기 급급하게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야’ 문전에서 침착해지는 것이다. ‘내가 좀 못넣을 수도 있는 거지 뭐 어때?“ 이런 뻔뻔함이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야 뻔뻔스럽게 다음에도 또 슈팅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많이 쏘다보면 들어간다. 히딩크가 지적한 ”골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괜찮다. 그러나 이후 주눅이 들어 시도를 주저하는선수는 용납지 않겠다.“는 것도 칵티베리아의 철학이 추구하는 논리와 완전히 동일한 맥락이다. 과거의 바티스투타, K-리그의 샤샤 그리고 지금은 아틀레티고 마드리드에 있는 케즈만이 이러한 칵티베리아의 집요함에 부합되는 선수다.
3. 결론 그리고 직접 만나면 꼭 하고싶은 얘기(to 이동국)
결론적으로 내가 이동국에게 하고 싶은말은 세가지다.
첫째, 제발 그 여린 소녀적 감수성을 좀 버려라. 덩치는 남산만한게 서정적 눈망울을 굴리며 팬들 혹은 고참선수의 질타에 눈에띠게 주눅드는 거 영 못마땅하다. 옛날 리그에서 고정운이 ‘똑바로 해’ 할때 주눅들어 꼼짝못하던 거 보면서 이미 알아봤다. 유럽리그 같으면 당장 멱살잡고 ‘니가 내 선배야? 이 xx가 .........“ 했을 일이다. 히딩크 감독이 왜 계속되는 야자타임을 명령했는지 알겠니? 니가 알게모르게 이런 사이트 와서 니 험담보고 마음아파하고 의식하는 거 안봐도 다 안다. 싸가지 없는 이천수와 이호 혹은 남일이 형을 좀 보고 배워라. 누가뭐래도 피치에 서는 동안은 니가 최고라는 엄청난 착각을 계속 마인드 컨트롤화해라. 관중과 축구팬들 앞에서 오만해져라. 그래야 귀머거리로서 마음껏 자신있게 슈팅을 날릴 것이다. 최소한 니가 샤샤보다는 낫다.
둘째, 다좋은데 딱 한가지 공격전환시의 피딩패스가 어설프다. 낮고 빠르게 피딩해라. 현대축구는 받아먹기 좋은 떼굴떼굴패스가 오히려 공격의 흐름과 스피드를 끊고 역습을 허용하는 주범이다. 정경호나 이천수는 니 패스가 좀 부정확하고 길어도 따라붙을 주력을 가진 친구들이니 과감하고 빠르게 패스해라.
셋째, 제발 좀 슈팅을 난사해라. 박주영이나 이천수 신경쓰지 마라. 너 아니면 날릴 사람도 없다. 가급적 니가 슈팅을 날리는 횟수가 늘어나야 골대가 출렁거릴 확률이 크다. 케즈만이나 예스트로비치의 플레이 동영상 구할 수 있으면 보고 배워라. 너보다 슈팅력도 없는 것들이 허구헌 날 슈팅날린다. 근데 바로 그게 칵티베리아다.
아아, 동감. ㅋㅋ 좋은 글이군요. 마막, 저도 반니나 루니 보면서 저렇게 막 쏘아대면 언젠가는 들어가지 않겠냐고, 우리 나라 축구가 무슨 골결정력이 부족하니 어쩌니 하는 것도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이동국 선수! 화이링!♡ 때론 이기심도 필요한 겁니다. 스트라이커면 욕심이 있어야죠. 얼굴에 철판깔고 날리십시오^^
첫댓글 좋은글이네요.
이동국 논쟁이 없어질라면, 이동국 선수가 유럽 진출하는 수밖에는...유럽진출한 선수의 활약상은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므로..
동감100% 이동국팬으로써 정말 좋은글
기네요;;ㄷㄷㄷ 읽다가 포기 죄송 정신상태가 안됨 ㅋㅋㅋ
그럼 이동국 부분만이라도..ㅋ
저도..동국씨힘내세요!!
간만에 좋은글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특히 중간에 칵티베리아 이야기... 이동국도 싸가지 없을 만큼 칵티베리아의 표출을 했다면 큰선수가 되었을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ㅋ
저두 한떄 와우햇었는뎅.ㅋㅋ 어느썹이삼?ㅋㅋ
이동국 선수 여기 가입했으면 이글 볼수도;;. 이제 슛팅 조낸 날리는거다!;;
오. 정말 좋은 글이네요. 올드팬의 내공이란...;;;
음...굉징한 글이군요 토론장에 어울릴만한 훌륭한 내용입니다..감사
최소한 샤샤보다는낫다...ㅋㅋ 이것만빼고는 동감 ;
이런글 좋아 ㅋㅋ 왜 이동국 욕을 하는지.. 참..
글 잘쓰셧네요...옛날 스트라이커 알고...근데 동국이 해외진출점 하지 왜 안하고 국내에 머물고 있는지 약채라도 가서 햇으면
동국선수 욕하는 사람들은.. 이글 보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 글 읽어도 '이동국 그게 그럼 그렇지.' 뭐 그런식... 미운 놈은 뭘 해도 밉게 보이고, 고운 놈은 뭘 해도 곱게 보인다잖아요. 제 눈에 안경, 혹은... 뭐.. -_-;; 쨌든 마음에 안들어요. 그런 사람들. 선수들이 그런 사람들 무시하고 뛰었으면 좋곘네...
아아, 동감. ㅋㅋ 좋은 글이군요. 마막, 저도 반니나 루니 보면서 저렇게 막 쏘아대면 언젠가는 들어가지 않겠냐고, 우리 나라 축구가 무슨 골결정력이 부족하니 어쩌니 하는 것도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이동국 선수! 화이링!♡ 때론 이기심도 필요한 겁니다. 스트라이커면 욕심이 있어야죠. 얼굴에 철판깔고 날리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골결정력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하하.. 많이 때려서 들어가면 되는거지, 뭐. ㅠ
동감;;; 완전 원샷원킬을 바라는 사람들...
요즘 이동국 때릴기회나 있나? 패스가 안오는데 ㅡ_ㅡ
이거 이동국선수 주소로좀 보내시오 ㅡㅡ:
헥헥....... 읽느라 죽는줄알았군.
ㅠㅠㅠ
케즈만이나 에스트로비치가 이동국 보다 슛팅력이 없다???? 이동국 첼시 갈날 멀지 않았네 ^^
싸가지없는 이천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정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이동국 선수가 이글 읽고 힘냈으면 좋겠어요. 근데 진짜 요즘 이동국이 슛팅 날릴 기회도 별로 없어요;;;;
컥~읽느라 힘들었습니다~~정말 좋은글이네요^^
이동국선수가 눈에 뛰게 못하는 부분을 날카롭게 적어주셨네요. 두번째, 피딩패스...등지고 패스해주는 플레이에서 너무 완벽하게 줄려다 보니 볼이 공중으로 패스가 되던데 그냥 낮게 깔아서 주면 될듯... 다소 뺏겨도 그게 잘하게 보임...
최고다. 내공도 그렇고 글솜씨도 그렇고. 대단하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