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첫 남편 계훈제-
이희호 여사 전 남편 계훈제은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계훈제는 1943년 경성제국대학 재학 당시 일제의 강제징용 학병에 거부하다 강제노역을 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교육자로 일하기도 하고 언론인으로서 사상계 편집장과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평생 고무신을 싣고 1970년대와 1980년대 수차례 투옥되었다.
이희호 여사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김대중과 면회를 다니다 김대중과 결혼 했다.
나는 이대목에서 선생님으로 모시던 분이 옥중에서 고생하는데 그의 부인과 면회다니다 결혼 한다는게 이해가 안된다.
계훈제 선생이 감옥속에서 이소식을 들었다면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때 김대중의 본부인은 차용수는 김대중의 정치자금 뒷바라지 중 빛더미에서
음독자살하였다.
계훈제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몇달 뒤1999년 사망했다.
나는 우리나라 영부인 이셨던 분에 대한 시중의 유언비언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제 전 남편으로 알려진 계훈제과 김대중 본부인 차용수에 대해 명확히 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이번에 방북하게 되면 첫남편 영정을 모시고 그의 고향 평북 선천과 김대중 본부인 차용수 묘지를 찾아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인간적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
영부인을 지낸 분으로 자신의 과거를 담대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전세계 여성들의 본보기가 될것 이라고 생각한다.
<H1 id=firstHeading lang=ko class=firstHeading>
계훈제</H1>< H1 lang=ko class=firstHeading>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H1>< H1 lang=ko class=firstHeading>
계훈제(桂薰梯,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다.</H1>
<H2>
생애[편집]</H2>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재학 당시 일제의 강제징용 학병에 거부하다 강제노역을 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에 복학하여 문리대학생회장을 지내면서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미군정에 의한 서울대의 국립화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육자로 일하기도 하고 언론인으로서 사상계 편집장과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 수차례 투옥되었다. 1999년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첫 배우자는 이희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