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 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말은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지듯이 나쁜 것도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진다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 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주장, 자기 주체성과 자존감, 소신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똥고집이 된다면 문제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절대적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우기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완고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마르 8,15)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기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몸에 젖어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하느님을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의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육체의 욕망과 세상 걱정과 충돌하면 영적인 말씀임을 확신해도 좋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적으로 알아듣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4천 명을 먹이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을 다 먹이고 남은 빵조각도 4천 명은 일곱 바구니, 5천 명은 열두 바구니로 더 많은 이들을 먹일 때 더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빵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선 육체적 걱정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누구나 욕망하는 것만 보이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영적인 말씀을 간직하려면 육체적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듣는 말이 영적인 말인지, 육적인 말인지.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내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걱정과 충돌합니다.
이것을 보며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밍 핫’은 리차드 몬타녜스가 매운맛 치토스를 개발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떨어진 신발을 껌으로 붙이고 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아내가 길거리에서 아기를 업고 음식을 파는 돈만으로는 월세도 낼 수 없었습니다.
리차드는 멕시코계 미국 이민자 2세이고 공부도 못하고 문제아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80년대에 이런 사람을 취직시켜주는 데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리차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펩시콜라 자회사인 치토스 과자 공장 청소부로 취직합니다.
리차드는 펩시코의 회장인 로저 엔리코의 “CEO처럼 생각하라”는 말에 영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만이 아니라 기계 설비에 관해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백인 관리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이러저러한 많은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펩시의 재정 악화로 공장의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른 노동자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공장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리차드는 사장처럼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 개척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맛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매운 것을 매우 잘 먹는 것을 보고는 “저거야!”라고 무릎을 칩니다.
그때부터 리차드는 적은 월급으로 타서 팔 수 없는 과자들을 공장에서 사 와서 집에서 이러저러한 양념을 버무려가며 실험합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적극 도와주어 양념을 과자에 입히는 과정까지 완성합니다.
그러나 공장장은 신제품 개발에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며 나무랍니다.
리차드는 멈추지 않습니다.
반대가 심할수록 왠지 CEO처럼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여기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로저 엔리코 회장의 전화번호를 몰래 알아내 직접 전화를 겁니다.
회장 비서는 회장에게 리차드의 말을 믿고 전화를 연결해 줍니다.
아마도 사장처럼 생각하는 청소부라 여긴 것 같습니다.
회장은 그의 말을 믿어주고 만든 것을 맛보고는 시장성이 있을 것 같아 일단 그 공장에서만 시험적으로 만들어보라고 합니다.
본사의 마케팅 이사는 그런 것을 위해 1원도 쓰지 않습니다.
몇 주가 지났지만, 아무도 매운맛 치토스를 사지 않았습니다.
청소부가 헛된 생각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의 자녀들 또한 아빠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맛을 알게 하겠다고 공장 직원 모두가 매운맛 치토스를 차에 싣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러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잘 팔리게 되었고 6개월 뒤에는 전 미국으로 생산이 확대되었습니다.
회장은 마케팅 이사를 경질하고 리차드를 마케팅 이사 자리에 앉힙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어떤 말씀이 나를 움직일 때 이것이 하늘에서 오는 뜻인지, 나의 뜻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세상과 육신과 반대되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육체가 힘들어지고 세상의 박해가 심해진다면 그건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박해를 반드시 받을 것이라 예고하셨습니다.
꺼진 촛불을 계속 켜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영적인 열매와 육적인 열매, 세상에서의 영광까지 다 얻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예수님처럼 큰 꿈을 꾸고, 큰 그림을 그립시다>
수도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련자 시절, 수련소 공동체는 한 주에 한 번 오후 소풍을 다녔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하루 소풍을 갔는데...늘 버스타고 다녔습니다.
다들 배낭에는 점심 식사를 위한 식자재며 버너며 식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무등산이나 송광사, 선암사, 보성, 해남 등등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다들 기다리던 점심 식사 시간, 짐들을 펼쳐놓는 순간, 수련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쌀을 안 가져왔다든지, 양념에 잘 재어놓은 제육볶음을 안 갖고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련장님 눈치를 보며 '이 일을 어떡하지? 야 네가 당번인데, 정신 똑바로 안차리냐?'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늘 제자단 가운데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장거리 전도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빵 당번이 깜빡하고 빵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들 배에 올라타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순간에야 제자들은 아차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교육을 시키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깜박하고 빵을 챙겨오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미성숙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스승님이 세상만사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능력과 지혜로 충만하신 메시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탄 배 위에 앉아 계시는데, 웃기게도 제자들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세상 만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꿈을 꾸시고, 큰 그림을 그리시는데, 제자들은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잘 돌아볼 일입니다.
눈앞에 당면한 일에만 치중하고 혈안이 된 나머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큰 계획은 안전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14절의 ‘잊어버려’ 라는 말과 18절의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혼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억력이 부족한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이해가 부족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깨닫지 못하느냐?”입니다.
열두 제자가 모두 건망증 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에 관한 이야기, 즉 신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6,26-27)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요한 6,15),
아마도 그때 열두 제자도 군중의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군중과 분리시켜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마태 14,22; 요한 6,22).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빵’만 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빵’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혼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빵이 없는 것을 걱정해서 혼난 것이 아니라, 군중이 그랬던 것처럼 육신의 배고픔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난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빵이 없어서 걱정한 일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걱정 자체는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혼날 일도 아닙니다.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 것이 진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을 ‘생명의 주님’으로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요한 6,51).
예수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하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잘난 체 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도 처음에는 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모두 모아서 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가르침들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마태 6,24),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가르침(루카 6,2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가르침(마르 10,25)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들을 불편해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상에서(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빵만으로’ 라는 말은 ‘빵’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빵은 유한한 육신의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요한 6,68).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달음 예찬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뿐이다” -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사랑,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시편 37,3)
"괜찮아 힘내!"
제가 고백성사후 보속시 말씀 처방전에 자주 찍어 드리는,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하는 스탬프의 말마디입니다.
“아, 그렇구나!”하는 깨달음의 은총에 깨달음의 사랑이요,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할 깨달음이니 말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이 끝날 때 곧장 꼰대가, 부패인생이 뒤따르고 치매가 들어올 것입니다.
깨달음 역시 성령의 은총임과 동시에 부단한 의식적 훈련입니다.
모든 종교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강조되는 바 깨달음입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맹자의 말씀도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합니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짜임새 있게 담아낸 것이 간결함이다.
그래서 간결함의 유의어는 단순함이 아니라 탁월함이다."
- 다산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 요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 맹자
불교 고승들의 깨달음을 노래한 무수한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들의 시입니다.
옛 선비들의 한시(漢詩)들, 옛 사막교부들이나 불교 선사(禪師)들의 일화들 대부분 깨달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문득 공자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가 수도생활중 무수히 쓴 시들 대부분 역시 깨달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중 "하늘"이라는 짧은 자작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1997.2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하는 시공을 초월한 진리가 깨달음의 시적(詩的) 진리입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의 교과서란 칭하는 우리의 시편집입니다.
참 기쁨도 참 행복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깨달아 알아갈수록 참 나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구원의 참 기쁨이요 참 행복입니다.
참으로 내적 성장과 성숙의 삶은 깨달음의 여정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인간을, 자연을, 주변의 관계되는 모든 현실을 깨달아 알아가면서 자유로워지고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깨달음과 더불어 내적치유이자 자유로움이나 깨달음의 여정은 그대로 치유의 여정, 힐링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대부분 인간 불행이나 비극은, 병고는 무지에서 기인하는 바, 무지의 힐링에 깨달음의 약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이라 함도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도 결국은 깨달음의 지혜를 위한 공부임을 알게 됩니다.
지식 축적에만 끝나는 헛된 공부가 아니라 지혜로 전환되는 공부가 참 공부입니다.
공부의 기쁨, 배움의 기쁨은 깨달음의 기쁨으로 이어져야 참 공부, 참 배움입니다.
수도자들이 하루하루 평생 매일 바치는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 거의 모두가 깨달음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매일 깨어 노래로 바치는 이런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야말로 참 좋은 깨달음의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깨달음의 선택과 은총에 이어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습관화보다 이상적인 영적 삶도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이러니 깨어있음, 깨끗한 마음, 깨달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깨달음의 훈련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공동전례입니다.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반복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과도 통하니, 치매 예방에 이보다 더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반복의 훈련이 진리이자 답입니다.
영성생활도 반복의 훈련으로 요약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반복의 훈련에 충실해야 할 기도요 공부요 노동이요 수행입니다.
단순한 생각없는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이기보다는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깊어지는 반복입니다.
이래야 멋지고 아름다운 정주의 삶에 영성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달음이요 깨달음 예찬의 강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우선적 필수적 요소도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만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훈련이, 깨달음의 기쁨이 사라질 때 서서히 꼰대가 되고 치매가 오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고 참되고 아름답고 놀랍고 사랑스럽고 새로운지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대부분 시편들입니다.
새삼 성서의 예언자들을 비롯한 우리 예수님,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 한결같이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당대의 무지한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자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입니다.
이래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이라, 이 거룩한 미사은총뿐이라 고백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도 명심해야 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누룩으로 인한 악취나는 부패인생의 전개입니다.
한결같이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향기좋은 발효인생이 됩니다.
깨달음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얼마전 빵의 기적을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하고 수군대는 제자들에 대한 참 스승 예수님의 질책이 고맙습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빵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빵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배불리 먹였을 때 얼마나 남았었는지 다시 환기시키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거듭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깨달음을 촉구합니다.
이런 일련의 배움의 과정을 통해 제자들의 깨달음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 스승 예수님께 그 제자 사도 야고보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주석같은 제1독서 야고보서간에서 보다시피 야고보가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총하에 얼마나 치열하게 깨달음의 공부에 전념했는지 사도의 깨달음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복음에서 무지하다 꾸중받던 제자들중 예전의 야고보가 아닙니다.
약간 과장하여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가르친말)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시련과 유혹에 대한, 또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야고보 사도의 명쾌한 해명의 지혜가 참 멋집니다.
시련(試鍊)을 전화위복의 시험(試驗)의 계기로 삼으라는 말씀은 얼마나 위로와 도움이, 힘이 되는 지혜로운 말씀인지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유혹하지도 유혹받지도 않으시며 유혹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욕망 탓임을 또 명쾌히 밝히시는 현자 야고보 사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이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말론적 죽음, 영혼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참 좋은 지혜의 처방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께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불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뜻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뿐임을, 더 분명히 하면 예수님뿐이요 이 거룩한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진리의 말씀, 복음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영적으로 새롭게 낳으십니다.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
(시편 37,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아둔한 철부지여도 완고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나아갈 뿐>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는 각각 두 가치가 드러납니다.
복음에서는 생명의 빵과 육적인 빵이, 제1독서에서는 욕망과 은사가 맞서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방금 전에 배를 타고 떠나오기 전까지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달라는 바리사이들에게 시달리셔야 했지요.
그래서 하늘 나라의 일을 세상의 시야로 확인하려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함이 행여 제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미리 언질을 주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근거렸다.'
(마르 8,16)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당장 '먹는 빵' 얘기로 알아듣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율법주의와 세속 권력의 대명사인 바리사이, 헤로데의 오류가 누룩처럼 제자들 안에서 발효되어 변형과 부패를 초래할까 염려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빵을 부풀리는 누룩의 작용을 당장 떠올린 것 같습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마르 8,18)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빵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보잘것없는 소량의 빵으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하늘 나라의 표징입니다.
그런데 이를 직접 목격하고 나눔에 동참하기까지 했던 제자들이, 빵이 몇 광주리씩 남았는지 숫자는 정확히 기억하면서도, 감사와 축복과 기적의 의미는 어느새 잊은 듯 보입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마르 8,17)
그들에게 거듭 질문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가르침을 주실 수는 있으나 깨달음은 그들 몫입니다.
완고함은 나쁜 맘을 지어먹고 타인을 해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악행은 아니어도, 자기 틀을 고수하여 진리를 거부하고 선의 흐름을 막는 악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서간의 저자는 육적 욕망과 영적 은사를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야고 1,14)
욕망은 유혹을 부르고 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누가 봐도 속이 뻔히 보이는 노골적인 현세적 욕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은총을 돈이나 물질, 명예나 권력 등의 세상 가치로 환산하려는 숨은 욕망도 도처에 존재하지요.
신앙의 이름으로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속으로는 보이지 않게 욕망의 누룩이 발효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본인은 아는 진실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야고 1,17)
세상 가치들은 자기를 욕망하도록 온갖 치장을 하고 우리를 부추기지만, 우리가 진정 탐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세상의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실존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가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화답송은 주님이 깨우쳐 주시는 이의 행복을 노래하면서 양편을 가감 없이 보여 줍니다.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주님을 섬긴다고 불행이 닥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불행 중에도 평온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도록 주님께서 도우시지요.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주님을 섬긴다고 갈등이 없지 않습니다.
부딪히고 다투고 맞설 일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몸소 재판을 이끄시고 정의를 이루십니다.
"수많은 걱정들 제 속에 쌓여 갈 때 당신의 위로 제 영혼을 기쁘게 하나이다."
주님을 섬긴다고 걱정이 비껴가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니 근심 걱정 속에서도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처럼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걱정, 불행, 고통, 갈등 없는 무균실의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걱정, 불행, 고통, 갈등 중에서도 당신을 향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약속하십니다.
육의 현실이 아무리 고단하고 처절해도 영혼의 빵으로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각자 자기 삶에서 육의 현실과 영의 현실을 칼로 베어내듯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추구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균형을 잡아 주시리라 믿으며 나아갑니다.
가난해도 세속적 근심과 욕망에 매몰되지 않기를, 죄인이어도 주님 향한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아둔한 철부지여도 완고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나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5년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오늘부터 댈러스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제게 페이스북에서 좋은 글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홀로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홀로 된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뉴욕에 사는 것도 댈러스에 사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늘 그렇듯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난 5년간의 뉴욕 생활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 앞에 펼쳐질 댈러스의 시간들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첫발을 내딛으려고 합니다.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댈러스에 올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준비해 주셨습니다.
2012년입니다.
12년 전에 댈러스에서 사목하던 동창 신부님이 제게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중견사제 연수를 마치고 3개월간 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다리에 골절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고, 그때는 갈 수 없었습니다.
6년이 지난 2018년입니다.
이번에도 동창 신부님이 특강과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한 달간 휴가를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안식년 중이었기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2018년 12월 27일 저는 댈러스로 가서 2달 정도 있다가 왔습니다.
2022년 6월입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서울대교구 사제모임이 댈러스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의 가톨릭평화신문에 있었기에 댈러스로 갔습니다.
4년 전에 2달 머물렀기에 교우들도 알고,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2022년 11월입니다.
저는 댈러스에 신문홍보를 하려고 갔습니다.
댈러스 신자분들은 신문을 구독해 주었고, 후원금도 주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저는 3번 댈러스 한인성당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댈러스 한인성당의 본당신부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진 날들을 감사드리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릴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빵이 적다고 걱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면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하십니다.
댈러스에서 지내는 제게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뉴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물질의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시간의 십일조도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려 합니다.
둘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말씀으로 하루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표징입니다.
교우들의 말을 경청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교우들과 함께, 교우들과 더불어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려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함께하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아! 이제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 미국 댈러스 한인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매서운 겨울밤, 급하게 운전해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실제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신한 딸이 출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운전하는 차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둘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해서 나무를 옮기려고도 했지만, 둘이 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워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목적지인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반대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차 열쇠를 서로 교환한 뒤에 상대방 차에 올라타서 목적지를 간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를 바꿔타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상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빵이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을 빵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이미 보았습니다.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나누어주는 것을, 또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던 기적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이 기적을 기억하고 있다면, 빵 하나만 있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의 부족함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것처럼, 마음 안에 있는 허영, 가식, 탐욕, 권력욕, 교만 등의 작은 죄악들이 점점 부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걱정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누룩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풀어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누군가가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특히 가장 힘센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