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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사랑
창22:1-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1-12)
아브라함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이야기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귀한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 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받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 일 뒤에 그의 후대를 축복하였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8)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것,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과연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일,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95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 명령이라고 하여 순종하는 아브라함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반적인 신앙의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이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삭은 이 사건이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 할 수 있을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인간지사, 부자 관계에 있어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모종의 경쟁심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 아버지에 대하여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데, 거기에다 번제단에 제물로 자신을 죽이려 칼을 빼든 아브라함의 모습, 그것을 이삭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이삭은 평생 한을 품고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아케다의 이야기, 이삭의 한(恨)이다.
또 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인신(人身)제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다가 동물을 바치게 된데서, 인신제의 역사상 사라지고 동물, 수양이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13). 또한 이 제물은 신약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된 사건, 성전 휘장이 갈라지면서 구약의 제의를 종결하신 십자가에 달린 유일회적인 사건이 된 영원한 제사이야기의 전조(前兆)다. 맞는 이야기다. 이 이삭의 번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해서’ 그를 모리아 산에 바칠 제물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길이 이삭을 사랑하는 일, 집안 식구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브라함의 순종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사랑의 발로였다. 아브라함의 이삭 사랑하기는 유별난, 기이한 사랑행각이었다. 어떻게 자식을 죽이는데 내보낼 수 있을까. 제물이 되게 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하나님의 구속사, 과연 하나님이 어렵게 낳은 아들, 이삭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칼을 자식을 향해 들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마음 깊은 곳에서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 명령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그를 그곳에 까지 가게 하였고, 아들에게 깊은 상처가 주는 일에 까지 나가게 된 것이다.
아들을 선교사로 서원하는 아버지, 오지 어려운 땅에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수 있는 아버지를 영문도 모르고 자라는 아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선교사의 길이 가장 행복한 아들의 장래와 비전이라고 믿는 기도의 아버지는 그런 서원을 선뜻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은 아브라함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식이 복을 받고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만국의 아버지가 되는 것, 큰 복을 받는 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러한 믿음은 곧 소망이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한 이러한 소망이 있었고,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 사랑이 모리아 산으로 향하게 했고, 번제 단에 아들을 올려놓는 데까지 행하게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되리라 믿었고, 이삭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다.
모리아 산의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랑의 결과로 서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더 지극한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보셨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았고, 이스마엘의 후손을 긍휼이 여기셨고, 하물며 사라와 이삭을 어여쁘게 보지 않았으랴.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오늘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고 계신다.
이삭의 아내, 사랑의 조연
(창세기 24:1-67)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어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2-3)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약대를 성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10-11)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15)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나의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찐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하여”(42-43)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60)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장가가는 이야기다. 이삭을 장가보내기 위해 멀리 나홀의 성 메소보다미아까지 중매쟁이 아브라함이 가장 신임하는 늙은 종을 보낸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중매 결혼이 사라지고 있지만 본문은 혈통의 순수성과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친족의 딸에게 청혼을 하러 종을 보낸 것이다. 왜 동생의 아들의 딸에게 장가보내려 하는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 때문이라 본문을 말한다. 가나안의 딸을 취하여 결혼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 고향 내 족속에게’ 보낸다고 하였다(3). 근친결혼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물학적으로 근친결혼은 좋은 후손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일찍이 근친결혼,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근친결혼을 허용하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혼제도이다.
오늘 우리는 이 근친 결혼이야기를 통하여 신앙의 혈통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과의 결혼은 타민족의 신앙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들과의 결혼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 신앙의 혈통, 신앙인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아브라함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환도뼈에 손을 넣게 하고 종을 맹세하게 한 후에 나홀의 성으로 보내고 있다(2-3). 환도뼈에 손을 넣게 하는 것, 환도뼈는 대퇴뼈로서 골반을 보호는 뼈로 이곳은 인체의 중요한 곳이다. 야곱과 하나님의 천사가 씨름할 때도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절뚝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환도뼈는 이처럼 중요한 이스라엘의 실존의 중심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신체의 중요 부분이다. 아브라함의 생명의 중심에서 종과 약속을 하고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떠나는 종은 주인 아브라함과의 생명을 건 약속을 하고 이삭의 결혼을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랑은 자식 이삭을 좋은 결혼을 시키기 위해 종을 보내는 모습에 찾을 수 있다. 신앙의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인생의 대사이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하며 가장 신임하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가정총무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섭리를 기대하며 그 종은 하나님의 싸인을 알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다. 리브가가 우물가로 왔고, 물을 청하니 자신뿐만 아니라 약대에게도 물을 먹이는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여인임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싸인과 맞음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점지해주신 결혼 상대자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집으로 가니 아니나 다를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과 부인 밀가, 아들 브두엘, 브두엘의 아들 라반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대화를 하고 보니 모두가 만족한 혼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오니 이삭은 너무 기뻐하고 반가워한다. 어머니 사라의 장막에 모시고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보도하고 있다(67).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사랑하여 결혼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의 혼례가 되게 하기 위해 그 종을 맹세하게 하고 보내는 모습, 하나님이 인도하는 결혼의 과정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신앙의 순수성 유지와 신앙의 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 신앙의 문화를 가지기 위해 근친 결혼의 풍속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중매쟁이 노종이 역할이 크게 부각되고 있고, 리브가와 그의 식구들이 뒷부분에서 많이 거론되고 있다. 이삭과 아브라함은 초입과 결론 부분에 조금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은 바로 조연들이 대부분 활동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엎드린 결과라는 사실이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역할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삭에게 결혼하기 오는 리브가의 믿음은 천만인의 어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중매 장이의 결혼 제의를 수락하는 리브가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다. 보지 못하고 선택한 신랑을 기대하는 믿음의 눈은 모험과 신앙의 통찰력이 있던 것이다. 신앙의 사람 이삭을 남편으로 수락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머나먼 길이었다. 부모와 친족을 떠나 먼 곳을 가는 그녀의 결혼여행은 미래의 천만인 어미의 노정이었다. 중매 장이의 믿음의 길과 리브가의 결혼을 위해 시집가는 길은 이삭과 아브라함만큼 중요한 신앙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의 조연자 노종과 아브라함, 리브가의 오빠 라반과 나홀, 밀가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두 가문이 한 가문이 되는 역사이다. 천만인의 아비와 어미가 되는 역사는 이 사랑의 조연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신앙의 가정을 이루게 조연하며 기도하자. 천만인의 아비와 어미가 이삭과 리브가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또 복음의 노래를 부르며 기도하자
야곱의 사랑
(창세기 29:15-30)
“야곱이 한 달을 라반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 라반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의 조카이긴 하다만, 나의 일을 거저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에게 어떻게 보수를 주면 좋을 지, 너의 말을 좀 들어보자.’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맏딸의 이름은 레아이고, 둘째 딸의 이름은 라헬이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으며,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가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릴 떠이니, 그 때에 가서,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창세기29:15-18)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인간은 사랑하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혼 상대자를 사랑하여 혼인식을 치르고 나면 그 남편, 아내를 평생 사랑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지만 인간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인생에 많은 문제와 애환을 가지게 된다. 고대 시대에 신앙인 야곱은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보자.
축복권과 장자권을 획득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에 있는 삼촌 라반집으로 갔다. 삼촌을 반갑게 만나서 피붙이이기에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난 다음 삼촌을 도우니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때에 라반이 묻는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야곱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은 노임과 연관되어 그의 사랑을 밝힌다. 노동의 댓가가 결혼이었다. 사랑하는 여인 라헬과의 결혼 약속을 외삼촌 라반과 할 수 있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도 본문에서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라헬은 선택권도 없고, 결혼식에 참여하여 옷을 입고 혼례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
고대 결혼 예식이 어떤 풍습이었는지, 혼례는 라헬이 치르고 신혼 밤은 라반이 큰 딸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냈는지 모를 일이다(22-23). 하여튼 7년 일한 댓가로 결혼을 요구하여 혼례식을 치르고 레아와 신방을 차린 야곱은 항의하자 큰 딸 보다 작은 딸이 먼저 결혼할 수 없는 밧단아람의 법을 이야기 하면서 이레(7일) 기간 초례를 지키면 라헬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대신 또 7년을 봉사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야곱은 한 번에 레아와 여종 실바, 7일 후 라헬과 그 여종 빌하를 얻게 된다. 라헬을 사랑한 댓가가 너무 큰 것이었다. 철모르는 사람들은 많은 여자를 거느려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아니 회교도인들이 전쟁 미망인을 구제하기 위해 여자 4명과 결혼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부자들이 그렇게 결혼 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이 법이 남아 결혼의 많은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으로 인생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에 7년의 세월이 길지 않았다. 레아와 결혼 노동 댓가가 7년, 라헬을 위해 7년, 도합 14년을 라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곱이 라헬과 동침하였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그는 또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의 일을 하였다.”(창29:30) 젊음과 사랑, 사랑하기에 세월이 금방 지나갔다. 밧단 아람에서의 생활이 고향땅의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 생각이 잊어졌고, 라헬과 결혼할 생각,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된 일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야곱의 마음과 생각을 편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모를 일이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게 하여 세월이 약이 되게 한다. 야곱과 에서의 싸움과 미움, 증오를 잊어버리게 하시는지.
또 사랑은 모를 일이다. 왜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는지,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다고 하고, 라헬은 몸매와 용모가 아름답고 예쁘다고 한다. 눈매가 부드러운 레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남자들은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날씬 여자를 좋아한다. 야곱도 외모를 보고 라헬을 좋아하고 사랑한 것 같았다. 사랑과 결혼 상대자 선택이 똑같지는 않지만 야곱이 살던 시대는 중매결혼 시대였고, 품삯으로 결혼을 정하는 풍습이 있던 때라 오늘날 결혼 상황과는 달랐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결혼하는가. 요즈음 여자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자식을 낳는 것을 꺼리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이 취업을 하고 자기 경제력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라 결혼 풍속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성이 결혼을 선택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은 여전히 인간을 살아가는 존재이유가 되게 하니, 사랑의 형태가 달라질 뿐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여전하리라.
야곱의 인생은 결혼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이역만리 고향을 떠나서 마음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야곱은 사랑하면서 인생 문제가 앞으로 여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으로 많은 이야기가 전개 된다. 자녀 문제와 사랑을 차지하려는 사람의 마음, 욕심, 애증이 섞인 문제가 이어질 것이다.
주여,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요. 주님은 우리를 지극히 깊게 사랑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가페의 사랑으로.
요셉의 사랑
(창세기41:45, 50-52; 39:6-10)
“바로는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 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시켰다. 요셉이 이집트 땅을 순찰하러 나섰다”(창41:45).
요셉의 사랑이야기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다만 바로의 신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주인 부인에게 유혹을 받는 장면이 소개된다. 거기서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 생긴 미남이었다”(창39:6)고 보도한다. 보디발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며 동침을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요셉은 그 유혹을 뿌리치려하다가 결국 당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꾸며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간 비전의 사람이었다. 이 비전으로 고난을 당하게 되고 수난의 현장에서 사전오기(四轉五起)의 정신으로 재기하여 역전의 기회로 삼았다. 고난이 바뀌어 축복의 장소로 변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에 팔려갔지만 그곳에서 보디발 장군의 가정총무가 되고, 보디발 부인의 유혹으로 인해 감옥에 갖히지만 거기서 시종장의 꿈을 해몽하여 바로 왕 앞에서고, 꿈 해몽 덕분에 왕의 선택으로 애굽의 총리에 오르게 된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노정에서 요셉은 늘 꿈꾸는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는 연애의 시간들이 한가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준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용모가 뛰어나 유혹하는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을 꾸기에 그는 그 유혹들을 하나님 경외로 극복할 수 있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잠언의 말씀이 요셉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잠언은 역으로 보면, 꿈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말이다. 꿈있는 요셉은 어떠한 유혹과 불의한 꾀임에도 넘어가지 않고 정도(正道)를 갈 수 있었다. 요셉은 자신의 출세가 보일 때 사랑의 때를 마련하게 되었다.
애굽의 선교사 요셉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으로 애굽의 사람이 되었고, 높은 위치에 오르자 최고의 종교 정치 권력자인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 그의 딸과 결혼할 기회를 가졌고, 바로 왕의 중매로 아스낫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요셉은 첫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팔레스틴에서 목동으로 있으면서 첫사랑을 하였을까. 보디발의 집안의 총무로 있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였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성서가 침묵하는 것은 침묵하고,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요셉과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난 것은 흉년이 들기 전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다.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 하면서,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다”(창세기41:50-52).
요셉은 아스낫과 결혼하면서 사랑에 빠졌고, 그의 고생의 괴로움을 잊어버릴 수 있는 기쁨의 자녀들을 가지게 되었다. 므낫세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렸다’고 고백하며 자기 정화(카타르시스)를 하였다. 아내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두 번째 아들을 낳고 ‘에브라임’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고 기뻐하였다. 이 에브라임이 후에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를 이끄는 에브라임 지파가 된다. 야곱의 축복 기도는 둘째(에브라임)에게 오히려 오른손의 축복을 하게 한다(창세기48:17-20).
요셉은 선교사의 사랑을, 선교사로서 사랑을 하며 산 인물이었다. 애굽에서 총리에 오른 그는 애굽 사람으로서 최고의 정상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아브라함 가문, 야곱의 집안을 일으킨 인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은 꿈과 하나님 경외, 선교사의 비전이었다. 그는 꿈이 있었기에 인생의 순간 순간을 귀하게 보고 하찮은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헛된 망상을 하지 않고, 어떤 유혹이 와도 눈 깜짝하지 않고 고난의 순간에도 정직하게 고난의 쓴잔을 마시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를 높이시고 좋은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게 하여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요셉은 꿈의 사랑, 꿈이 이루어 놓은 행복한 조건에서 사랑할 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애굽 선교사의 사랑을 이룬 신앙 4대(代) 명문 가문의 사람이었다.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때에 사랑하고 축복받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란다. 또 요셉처럼 이국에 가서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고, 하나님의 대가족을 이루는 축복된 사람, 놀라운 사랑을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
모세의 사랑
(출애굽기2:15-25; 4:24-31; 18:1-7; 민수기12:1-16)
모세는 오경의 저자로서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주인공이다. 물론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모세 오경의 주인공이시지만 보이는 등장인물 중의 중심이 모세이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었고, 출애굽 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사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이었다. 모세의 사랑은 따라서 특이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출애굽기2:21-22).
모세는 이집트의 궁전에서 왕자 교육을 받으며 잘 살았다. 모세는 어렸을 때부터 이중국적자로서 히브리인이라는 자신의 혈통을 요게벳 유모이자 친모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법적 어머니, 바로의 공주에게 애굽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거대한 이집트 제국의 왕실에서 자라면서 동족 히브리인들이 노예 살이 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지만 자신의 위치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다 그만 살인자가 되었고(출애굽기1:11-15), 미다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광야에서 중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출애굽의 지도자 교육을 받게 되었다. 미디안 광야에서 르우엘(이드로) 장인을 만났고, 거기서 목자로서 양을 치며 목축을 하는 생활을 한다. 모세는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고 아들 게르솜을 낳고 그녀와 사랑한다. 낯선 곳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게르솜이라고 아들을 이름을 짓고 아들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정화하기도 하며 이 세상의 나그네 인생을 생각하였다. 더욱이 애굽의 백성들, 자신의 동족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그곳에 사는 불쌍한 자신의 민족들에게 가야 하는 일과 사명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동족을 애굽에서 구원할 생각을 하며 40년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려 이집트로 들어가는 때가 되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제 아들의 양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주께서 그를 놓아 주셨는데,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할례 때문이다”(출애굽기4:24-26). 바로를 만나기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모세의 아내가 모세를 피의 남편이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남편 모세가 죽게 될 때 할례의 남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고백이다. 모세의 할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의식이 되었다. 이스라엘 남자로 태워나면 8일 후에 할례를 행함으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나타냈고, 자신의 몸 안에 표식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 중요한 할례의식의 모형이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되었고,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도 이 할례가 이루어진다. 미디안 여자 십보라가 모세의 죽음 앞에서 이 ‘피의 남편’이라는 고백을 하여 남편을 살리게 하면서 자신도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녀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할례의 아들로 교육해야 하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모세는 아내가 자신을 피의 남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한 가장이었다. 미디안 여자 십보라와 히브리인이면서 애굽의 왕자 교육을 받은 모세, 다른 문화와 환경을 가진 두 존재가 서로 모세의 죽음의 순간에 만나는 십보라의 고백을 통한 구원의 시간이었다. 이 사랑의 고백 후에 모세는 아론과 함께 담대하게 바로에게 갈 수 있었고, 백성들 앞에서도 그들의 신뢰를 주기 위해 이적을 행할 수 있었다(출애굽기4:27-31).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딸 십보라와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의 진으로 찾아왔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있는 광야로 찾아온 것이다. “십보라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섰다. 한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인데, 이 이름은 ‘내가 타국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모세가 지은 것이고, 또 한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인데, 이 이름은 그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바로의 칼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고 하면서 지은 이름이다”(출애굽기18:3-4).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장인어른이 모세를 만나러 진영으로 온 것이다. 모세는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족들을 떠나 하나님의 사역,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면회(가족 상봉)가 이뤄지고 있는 장면이다. 모세의 사랑은 가족 사랑과 아내 사랑, 자녀 사랑만큼이나 헤세드(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이 깊었다. 그는 사적인 사랑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더욱 컸다.
모세의 사랑은 민족을 구원할 만한 넓은 사랑이었다. 공적인 대업,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갓난아이들은 미디안 광야에 장인어른 집에 맡겨놓고 애굽으로 떠날 정도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민수기에 가면 모세가 광야에서 구스(이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그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해서 모세를 비방하였다. ‘주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께서 들으셨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수기12:1-3). 미리암이 이 비방으로 악성 피부병에 걸리게 되었다. 모세의 영적 권위와 지도력에 도전한 결과 받는 벌이었다.
어찌 보면 모세의 외도를 고발한 정의로운 처사일지 모른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준다. 고대 사회의 결혼 생활과 문화가 달라서 인지 몰라도 오늘 우리들의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어떤 상황에서 모세는 구스 여인을 사랑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은 이 본문을 다룬 곳에서 모세를 두둔하고 칭찬한다. 긍정적인 말만 나타난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민수기12:6-8)
주의 종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권위 앞에 존경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가르쳐준다. 모세의 구스 여인 스캔들은 우리에게 영적 지도자에게는 존경과 순종만이 올바른 처사임을 시사한다. 미리암이 이레 동안 진 밖에서 갇혀 있게 되었고, 백성들은 미리암이 돌아올 때까지 행군하지 않았다(민수기12:14-16). 이스라엘 군대가 행군하지 못하는 사건이 미리암이 벌 받는 일에서 발생하였다. 얼마나 영적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지는 지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모세의 사랑은 미리암의 치유를 바라는 중보 기도로 이어졌고, 용서와 치유사랑으로 화해하기를 바랬다. 모세는 개인적인 사랑의 차원보다는 공적인 차원에서 공동체를 사랑하고 공동체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는 일을 우선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모세의 역할은 히브리서에서 예수를 비유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스런 사환이고, 예수는 그 집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모세보다 뛰어난 분임을 밝힌다(히브리서3:1-6). 모세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가자. 구약의 예언 성취로서 모세의 사랑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사랑의 완성으로, 우리가 그 사랑의 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여호수아와 라합의 만남
(여호수아2:1-6:27)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며 일렀다. ‘가서, 몰래 그 땅을 정탐하여라. 특히 여리고 성을 잘 살펴라.’ 그들은 그 곳을 떠나, 어느 창녀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서 묵었다. 그 집에는 이름이 라합이라고 하는 창녀가 살고 있었다. 그 때에 여리고 왕은 이런 보고를 받았다. ‘아룁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몇 사람이 오늘 밤에 이 모든 땅을 정탐하려고 이곳으로 왔습니다(여호수아2:1-2). ” “그러나 그 여인은 두 사람을 데려다가 숨겨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그 사람들이 저에게 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여호수아2:4). “여호수아는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서, 너희가 맹세한 대로, 그 여인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그 곳에서 데리고 나오너라.’ 정탐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가서, 라합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라합의 식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진 밖으로 데려다 놓았다”(여호수아6:22-23).
여호수아와 라합, 두 사람은 서로에게는 적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군대에 총 사령관이었고, 라합은 여리고성의 첫 관문의 민간인이었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은 최후의 승리전까지 있지 않았지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나서 유일한 생존자 가족이 라합이 되었다.
“여호수아는 창녀 라합과 그의 아버지 집과 그에게 딸린 사람을 다 살려주었다. 라합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데,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보낸 사람들을 그가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여호수아6:25).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주목하였고, 승승장구하며 가나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구속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여호수아2:9-11).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은혜의 댓가를 요구하였다(12-18). 홍색 줄이 징표가 되어 그 집을 치지 않는다는 맹세를 갖게 되었고, 식구들이 집안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약속하였다(18). 라합은 분홍색 줄을 창에 매달고 이스라엘 군대가 오기만 기다리었다(3:21).
라합은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인물일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창녀로서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에 라합과 그의 가족들 전체가 구원받은 사건이 있었다.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평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건너기전 요단 강 물에 12개 기념비를 세우고(여호수아4:4-10),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진을 치고 거기서 할례를 베풀었다. 광야에서 무할례자이었지만 이제는 계약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5:7-9). 유월절을 지키자 광야에서부터 내리던 만나가 멈추게 되었다(5:11-12). 여호수아는 주의 군대 사령관을 만나고(5:13-15), 모세처럼 신을 벗는 소명을 받는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하나님 군대의 특별한 전략이었다. 여리고성을 7번 도는 전략이었다. 마지막 이레는 한번이 아닌, 일곱 번 돌고, 마지막 때는 큰 함성을 내고 진격하는 것이었다. 사령관의 명령 중 특명은 모든 여리고 사람은 진멸하되 라합의 가족만은 살리라는 것이었다(6:17-19). “이 성과 이 안에 잇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께 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창녀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인은 우리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17).
전시에 적 사이에 우정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여호수아와 라합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정보를 교환한 친구가 되었다. 여호수아와 라합은 완전히 대조되는 신분이지만 우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구원이 두 사람에게 있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총사령관으로 승리를 맛보는 구원의 기쁨을 보았고,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살린 덕으로 자신의 가족 전부를 살리는 구원의 환희를 가진다. 이 우정으로 라합은 예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린다(마태복음1:5).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예지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눈을 가지고 구원이 누구에게 있는지 역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필요하다.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복을 라합처럼 누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여호수아는 라합을 만남으로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가진 행운을 가지게 된다. 역사의 결정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람들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기를 바란다.
삼손의 사랑
(사사기14:1-16:31)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가, 딤나에 있는 어떤 블레셋 처녀를 보았다. 그가 돌아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였다. ‘내가 딤나에 내려갔다가. 블레셋 처녀를 하나 보았습니다. 장가들고 싶습니다. 주선해 주십시오.’그러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타일렀다. ‘네 친척이나 네 백성의 딸들 가운데는 여자가 없느냐? 왜 너는 할례도 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을 아내로 맞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삼손을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꼭 그 여자를 색시로 데려와 주십시오. 그 여자는 첫 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사사기14:1-3)
삼손과 들릴라, 이 이야기에 대해선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삼손이 들릴라를 좋아하기 이전에 딤나에 사는 블레셋 처녀를 사랑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딤나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강청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삼손은 주의 영이 임하여 사자를 만나서 위기에 처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없이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일 수 있었다(삿14:6). 그는 사자의 주검에 벌 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는 것을 손으로 떠다가 걸어가면서 자신이 먹고 부모에게도 주었지만 사자에게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사사기14:8-9). 삼손의 용맹은 겸비와 함께 빛을 냈다. 영웅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는 민족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손에게는 계속되는 여자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사사로서의 사명은 블레셋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딤나 처녀에게 가서 결혼식을 하는 풍습에 따라 잔치를 열었고, 거기서 삼손을 수수께끼를 내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14) 이 수수께끼 내기에 모시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이 걸러 있었다. 그래서 동족인 블레셋 사람이 딤나 처녀에게 삼손을 꾀어서 그 해답을 알려달라고 하였다. 일주일간 계속 삼손을 독촉하여 울면서 졸라댔다. 그러자 아내가 자기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삼손은 약속대로 이행해야 했다. 그는 아스글론에 가서 서른 명을 죽이고 노략한 옷을 가져다 주었고, 화가 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삼손의 아내는 들러리로 왔던 한 친구의 아내가 되었다. 꿀과 사자, 암소와 밭 갈음, 삼손의 불행은 암소, 여자에게 있었고, 그로인해 자신의 꿀과 용맹은 사라지고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삼손은 딤나에 가서 장인에게 아내의 침실로 가게 허락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미 결혼하였고, 동생이 더 예쁘니 그를 아내로 삼으라고 한다. 삼손은 화가 나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가리에 불을 놓아서 상당한 재산손실을 냈다. “불은 곡식가리뿐 아니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원까지 다 태워 버렸다”(사사기15:5). 피는 또 다른 피를 흘리는 법,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행위임을 알고 딤나의 처녀와 그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삼손은 복수로 블레셋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마구 무찔렀다(사사기15:8). 삼손의 사랑이 불러일으킨 불행이었다. 왜 삼손은 자신의 민족의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블레셋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랑과 전쟁은 동시에 공존하게 되고 원인과 결과의 꼬리가 연결되어 사랑하는 블레셋 여인과 생활세계가 같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지역의 레히 지방에 이르러 유다 사람과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에 있는 삼손에게 와서 죽음의 전쟁을 원치 않으니 결박을 당하고 블레셋에 포로로 붙잡혀 가라는 권유였다. 삼손은 적군에게 붙잡혀 넘겨지려는 순간, 주의 영이 임하였고 당나귀 턱뼈 하나를 주어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이나 쳐 죽이는 영웅적 행위를 하였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사사로 있었다”(사사기15:20). 삼손의 용맹으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없었다.
삼손의 인생은 반복되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불행과 위험이 거듭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매한가지이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창녀를 하나 만나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사사기16:1). “삼손은 밤늦도록 누워 있다가,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을 양쪽 기둥과 빗장째 뽑았다. 그는 그것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 맞은편 산꼭대기에 올라가, 거기에다 버렸다”(사사기16:3). 삼손과 들릴리의 관계에서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사건를 만나게 된다.
삼손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매번 전쟁에서 지는 블레셋 통치자는 그 여인을 통해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게 하였다. 삼손은 ‘마르지 않은 푸른 칡 일곱 매끼(7)’,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밧줄(11)’, ‘내 머리칼 일곱 가닥을 베틀 날실에 섞어서 짜면 된다(13).’ 세 번 유사한 비밀의 단서를 가르쳐 준다. 사랑은 비밀을 토설하게 한다. 결국 네 번째 힘의 원천인 머리, 그 머리를 짜르면 힘이 상실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나의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는데, 이것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오, 내 머리털을 깎으면, 나는 힘을 잃고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될 것이요”(사사기16:17). 삼손의 운명은 비밀을 발설하는 순간, 비참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두 눈이 뽑히고, 가사로 끌려간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되고 재주 부리는 신세가 되었다.
삼손의 후회는 비극적 사건을 맞이하면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떠난, 유혹과 시험에 넘어간 결과 후회와 절망, 회개로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블레셋 적을 무찌르는 야웨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신전을 무너뜨리는 괴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리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니, 그 신전이 무너져 내려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사사기16:30). 삼손의 영웅적 장렬한 죽음을 본다. 수 천 명의 타인을 죽이는 영웅적 이야기, 셀 수 없는 인류와 수 세기의 사람들을 살리는 십자가의 죽음, 이 두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결말이 판이하게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한다. 삼손의 사랑이야기에서 예수의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삼손이 나갔다면 결말의 이야기는 달랐을 텐데.
룻의 사랑
(룻기1장 2-4절; 1장16절; 2장1,
8-10절; 3장6-13절; 4장3-6절)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다윗의 증조할머니이다. 그는 오벳을 낳고 다윗 가문의 신앙의 어머니가 된다. 룻은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살며, 남편 말론은 질병에 걸려 죽었다. 룻의 시집에는 불행이 겹치며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기룐)등이 연이어 죽으면서 힘든 형편이 되었다. 나오미는 고향 땅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며느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작은 며느리는 오르바는 울면서 돌아가지만 큰 며느리 룻은 돌아가지 않고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룻기1:16-17절). 마라의 인생, 나오미는 남편도 잃고 아들 둘도 잃고, 며느리 까지 잃어버린 삶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기쁨(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괴로움(마라)이라고 부르라 한다(룻기1:20). 기구한 인생이다. 하지만 룻의 시어머니 사랑으로 그의 인생 말년을 더 이상 괴로움이 연속되지 않았다. 룻이 효부로서 나오미를 먹여 살리면서 상부상조, 상호의존적 삶을 살아간다. 나오미에게 룻이 어떻게 처세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집안의 기업을 무를(수혼법) 친척 보아스에게 접근하는 방법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지시한다(룻기3:1-18).
룻의 두 번째 사랑은 고대 결혼법에 의해 새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이가 든 보아스, 룻은 젊은 남자를 택하지 않고 고대의 사회법에 맞추어 나오미의 말씀에 따라 보아스에 다가간다. 성경은 보아스가 먼저 나오미를 알아보고, 곡식 보리와 밀을 주어갈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한다(룻기2:1-23). 생존의 특별한 상황에서, 보리와 밀을 주어야 살 수 있는 나오미 가정이다.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해서 나오미와 함께 최소의 가정생활을 한다. 나오미의 시어머니 사랑은 지극하였고, 그 사랑의 복이 룻의 인생 후반을 멋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룻을 사랑하는 보아스는 집안의 회의를 소집하고 룻과 결혼을 합법적으로 만들려 한다(룻4:4-10). 보아스의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기업 무를 첫 번째 집안사람이 재산이 탐나서 기업의 땅을 사려고 하지만 룻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집안 간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집안 간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소. 잘못하다가는 내 재산만 축나겠소. 나는 그 책임을 질 수 없으니, 당신이 내가져야 할 집안 간으로서의 책임을 지시오”(룻기4:6).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보아스는 미리 간파하였을 것이다. 욕심 많은 집안 친척이 나오미와 룻을 맞이해서 재산을 축내리란 생각을 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보아스는 룻의 정숙함과 착함을 알고 수혼법에 의해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며 나오미까지 가족으로 맞이할 생각을 하였다. 고대의 사랑은 가문의 결혼으로 이어진 대가족 제도아래서 가족 사랑이 동반된 것을 알 수 있다.
룻과 보아스의 새로운 사랑은 오벳을 낳게 하였고, 이새와 다윗을 후손으로 가지는 결과와 복을 가진다.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룻기4:17). 이 족보는 유다와 다말의 사랑이야기로 올라가서, 베레스의 계보로 이어진다(룻기4:18-22). 이 베레스의 족보가 룻기의 결론이 되어 한 룻의 사랑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됨을 보여 준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는 한 계보가 된다. 역사적 예수의 할머니 이야기가 바로 룻기의 이야기다. 룻의 우주적 사랑이야기는 예수의 인류의 사랑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룻기는 민족과 고부간의 갈등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이야기로 남을 감동의 드라마이다. 이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야기를 이해하게 한다. 할렐루야.
한나의 사랑
(삼상1:1-3:21)
“에브라림 지차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풍성한 은혜)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홍보석)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사무엘상1:1-2).
한나는 사무엘의 어머니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처음 예언자로서 활동하였다. 이스라엘의 격동의 시대에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다. 사무엘이 탄생하기 까지는 한나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고, 한나의 하나님 사랑이 있었다. 한나는 처음에는 석녀(石女)로서 자식이 없는 신세였다. 한나의 한은 깊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눈물로 주님 앞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사무엘상1:7-8)
한나는 인생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슬픔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슬픈 삶을 살았다. 한나는 이 슬픔의 근원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1:10-11). 서원 기도를 한 한나는 그 이후에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믿고 더 이상 슬픈 기색을 띠지 않고 살았다(삼상1:18-19). 한나와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나는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주님에게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를 하였다(삼상1: 12-15). 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비한 기도, 한나가 온몸과 정성을 다해 하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이 한나를 기억하였다. “한나가 임신을 하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주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하나님이 들으셨다)이라고 지었다”(삼상1:20). 한나의 슬픈 인생에서 슬프지 않는 가장 기쁜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을 얻은 순간이었다. 사무엘을 잉태하는 시간은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순간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간이었고,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 서원을 이행하였다. “나는 그 아이를 평생 나실 사람으로 바치겠습니다”(삼상1:22).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을 성소에 바쳐서 엘리 제사장의 심부름꾼으로 보내야 되는 시간이 다가왔고, 젖을 떼자 마자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한나는 아이를 데리고, 삼 년 된 수소 한 마리를 끌고, 밀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가 든 가죽부대 하나를 가지고, 실로로 올라갔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에 있는 주의 집으로 갔다. 그들이 수소를 잡고 나서, 그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삼상1:24-25). 한나는 자신의 서원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아이의 한 평생을 주께 바치는 아름다운 성직의 뒷바라지를 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얼마나 고대한 자식인가. 그 사랑하는 아들을 주님께 바침으로 그는 더한 주님의 축복을 받는다. “주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 앞에서 잘 자랐다”(삼상2:21).
한나는 남편 엘가나에게 사랑받는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교회의 여자이었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아들을 주님께 바치는 헌신의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나실인으로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을 바치고 기도와 헌신으로 그 아들을 후원하는 민족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그의 사랑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자랐고,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영적 지도자이었다. 나라의 대사가 그의 기도와 지도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나의 하나님의 사랑과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큰 별이 되어 사무엘이라는 거목을 낳는 신앙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자.
요나단의 우정
(사무엘상20:1-42)
“요나단이 다윗을 제 몸처럼 아끼는 터라, 요나단은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였다”(삼상20:17).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의 운명은 희비가 갈린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사울 왕조를 열 수 있는데, 요나단은 하늘의 뜻을 좇았고 우정을 소중하게 여겼다. 요나단의 우정이 없었다고 하면 다윗의 나라와 왕조는 있을 수 없었다. 요나단은 자신의 가족의 운명이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이 사생아 같은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아이와 단짝이 되다니, 너에게나 너를 낳은 네 어머니에게 욕이 될 뿐이다.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너의 나라도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아라. 빨리 가서 그를 당장에 끌어 오너라.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사무엘상20:30-31).
사울은 다윗이 위협적 존재가 되어 자신의 나라가 안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권 유지가 힘들 것이라고 보았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사무엘상18:7)라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다윗이 블레셋을 무찌르고 들어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춤추고 환성을 지르며 외친 소리였다. 사울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다윗을 시기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사울과 다윗은 이후에 쫓고 쫓기는 줄 달리기를 시작한다. 사무엘상 18:5-31:13은 이 사울의 추격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자신의 가족과 가문, 왕국의 보존을 위해 다윗의 위협을 사전에 처치하겠다는 의지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다고 말한다. 사울이 순종하지 않아서 주께서 사울을 버렸다고 한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께 부르짖었다.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사무엘상15:11-12). 사울의 결정적인 실수는 진멸법(헤렘)을 어겼다는 것이다. 아말렉 사람들의 양 떼와 소 떼를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께 순종하였습니다. 주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로 나갔고, 아말렉 왕 아각도 잡아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 다만 우리 군인들이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만,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사무엘상15:20-21).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붓게 한다.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사무엘상16:13). 구속사,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일들을 결정하고 선택한다.
이후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음 사울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윗의 장군이 된다(삼상17:41-18:5).
아마도 요나단은 이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고, 다윗의 인물됨을 미리부터 알았을지 모른다. “다윗이 사울과 이야기를 끝냈다. 그 뒤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 사울은 그 날로 다윗을 자기와 함께 머무르게 하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요나단은 제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어,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고,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모두 다윗에게 주었다”(사무엘상18:1-4).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였다고 말한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여러 차례 맹세를 통해 나타난다(삼상20:3; 20:17; 20:42).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삼상20:42).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울 왕조가 계속 되는 길을 그 주체 장본인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돕지 않고, 적수 다윗을 돕고 있는 모습이니. 하지만 요나단의 우정은 하나님 구속사의 길을 가는 것이었고, 역사를 창출하는 높은 차원의 결단과 선택이었다. 요나단의 우정은 길이 역사에서 기억되고 찬양 되어야 할 이야기이다. 요나단은 대아(大我)의 큰 정치를 한 사람이다. 다윗의 왕가 이야기에서 이 요나단의 우정과 도움을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다. 사울은 처절하게 다윗을 좇지만 대세를 판단하지 못한 어리석음은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갔고, 결국 죽임을 맞이한다. 사울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블레셋 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치명상을 입자 명예롭게 죽음을 당한다(삼상31:1-7). 그 전투에서 사울의 아들 세명,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전사한다(삼상31:2).
요나단의 우정은 다윗을 일으키고 다윗 왕가를 형성하는 씨앗이 된다.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나가는 모판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고 깊은 우정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첫댓글 모리아 산의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랑의 결과이고 야곱의 사랑은 인생의 결혼을 위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되었고 요셉은 이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대 가족을 이루는 축복된 사랑, 모세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삼손은 영웅적 사랑으로 십자가의 죽음인 예수님의 사랑을, 룻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시키는 사랑, 한나는 하나님과 남편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큰 별이되어 사무엘이라는 거목을 낳은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렇게 신앙으로 이룩된 사랑은 엄청난 축복과 하나남의 큰 뜻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