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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7 이집트 기행 2 – 관광산업의 빛과 그림자
이집트 여행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꼭 해보고 싶다는 ‘bucket list’ 중의 한 항목일 겁니다. 볼거리가 많다는 말이겠죠. 이제 모든 나라가 지구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집트나 그리스, 이탈리아 등 고대문명을 꽃피운 국가들의 후손들은 조상 덕으로 공짜로 돈을 벌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이번 여행도 영국의 트라팔가 여행사의 이집트 여행 상품에 참여한 것입니다. 동유럽과 그리스 여행 때 트라팔가를 이용하여 10% 할인을 받았지요. 김동건(金東建) 변호사 부부가 동행하여 서로 의지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그냥 ‘김판사’라고 부릅니다. 여행 전에 공부를 어마하게 하여 이집트 상형문자까지 읽더군요. 서울에서 이집트 관련 책을 몇 번씩 읽고 부인에게도 읽기를 강권했다고 합니다. 여행 중 현지에서도 책을 사서 계속 공부하는 열정이 놀라웠습니다. 집사람은 교수라는 자가 아무런 준비 없이 여행할 생각을 한다면서 뭘 좀 보라고 합니다.
‘동행을 잘못 만난 건지.... 개고생 한 가지 늘었네!’ 투덜대면서 집에 있는 이집트 관련 책들을 꺼내보았습니다. <이집트 신화>는 오늘날 감각으로 읽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아 덮었습니다. 대학시절 그리스, 로마신화나 북구신화는 재미나게 읽었는데 왜 이럴까요? 젊었을 때라 그랬을까요? 지난 4-50년 동안 시대가 변했고 나의 감성도 이에 맞추어 달라졌기 때문일 겁니다. 1970년대 런던 유학시절 베토벤이나, 브람스, 슈베르트 등 고전, 낭만주의 음악이 좀 처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펭귄 판 역사지도(Historical Atlas) 시리즈 중 하나인 <Ancient Egypt>를 꺼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지도와 해설이 있어 좋으나 글자가 작아 보기 힘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그의 이집트 여행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옛날 <역사>를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옆에 코멘트를 붙여 둔 것이 있어 ‘이집트’편을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여행 준비를 마쳤습니다.
관광여행은 수학여행이 아니죠. 공부보다는 즐기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지금 나이에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라면 예습하고 또 현장에서 확인하는 ‘학이시습(學而時習)’까지는 필요 없을 겁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니 경관을 즐기고 고유 음식과 술을 맛보며 이들이 남긴 유산을 보면서 왜 이들은 이런 일에 몰두 했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들 거대한 유산을 만든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등등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번 여행지가 이슬람 문화권이라 술이 없고 또 의사도 술을 자제하라고 하니 다행이었습니다. 점심 때 찾은 일반 식당은 아예 술이 없더군요. 여행 중 술 없는 음식을 먹는 것은 연료 떨어진 차에 가솔린 채우는 기분이죠. 호텔이나 나일강 크루즈 선에서는 맥주나 와인을 팔았는데 최고가 20불정도 되는 local wine은 좋았습니다.
서울 여행사에서 보내 온 책자에는 공항에 도착하면 현지 안내인이 비자 심사하는 곳 ‘앞’에 나와 팻말을 들고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하네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외교관이나 정부관리가 되어야 입국심사 이전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죠. 일반 여행사 직원은 보통 짐을 찾고 입국심사를 마친 뒤 출국장 문을 나서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 여행사에 문의했더니 아마도 자기들이 잘못 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공항통로를 지나자 트라팔가 여행사 팻말과 우리 이름을 든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권을 받드니 비자대금 내는 곳부터 시작해서 일사철리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12인승 정도인 리무진에 우리만 태워 호텔로 갔습니다. 이집트는 서울에서 비자를 받을 필요 없이 공항에서 25불내면 관광 비자를 바로 내어줍니다. 인터넷에서는 15불로 나와 있던데 그 사이 10불이 오른 건가요? 이집트 구경하려면 먼저 25불부터 내라는 말이죠. 람세스 힐턴 호텔에 도착하니 10일(토요일) 아침 11시 경. 김판사 내외는 새벽 5시에 도착하였으나 방이 정리되지 않았다면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들은 런던에 있는 딸집에서 며칠 지내고 온 것입니다.
호텔에서 하젬(Hazem Khalafi)이라는 트라팔가 여행사 총지배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름은 중동식인데 인종적으로는 그리스 쪽에 가까운 이집트 본토박이라고 합니다. 영어는 철저히 영국식이구요. 이번 여행의 총 인원이 12명이라 합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온 모리셔스 계 남편과 영국 간호사 출신 부인 한 쌍, 80에 가까운 미국 노부부, 중동계이나 미국으로 이민 간 어머니가 20세 아들과 17세 딸을 데리고 왔고 혼자 여행길에 나선 60대 미국인, 그리고 우리 부부 4명입니다. 우리가 4명이니 가장 큰 집단인 셈이죠. 여행 일정을 설명하는 모임도 없이 내일 아침 8시에 출발할 것이라 하군요.
트라팔가 여행단은 보통 30명이 넘는 규모인데.... 12명이라니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다음에 오는 그룹은 4명이라네요. 4명을 데리고 어떻게 그룹 투어를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한다고 합니다. 출발 전 집 아이가 이집트 정세 불안을 말하면서 가지 말라고 한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 날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에서 테러로 250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도 나오더군요. 이집트 본토와는 떨어져 있지만 그 여파는 카이로에서도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여행사와 관련 기관들이 보안과 치안에 신경을 쓴 탓인지 별 탈 없이 여행을 마쳤습니다.
이집트 정세는 마치 1980년 5공시대 한국사태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지만 국민들의 불만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죠. 여행 일정이 끝난 며칠 뒤인 26-28일 간 치러질 대통령선거도 걱정거리였습니다. 한국과 같이 대통령 후보들이 유세에 나서고 경찰과 충돌하면 차가 움직일 수 있을까 우려되었던 겁니다. 길거리나 큰 건물에는 대통령 후보 엘시시(el-Sisi)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더군요. 다른 후보들의 플래카드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요. 여러 후보들의 플래카드가 모여 있는 곳을 겨우 찾아 사진 한 장 올립니다. 선거화보에 초록 색 별이 그려져 있는데 문맹률이 29%나 되기 때문이라 하군요. 해방 후 우리의 선거 때 ‘기호 1번’이라 외친 것과 비슷하네요. 그런데 여행 도중 선거유세 장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이나 세종로에 해당하는 광장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엘시시가 어느 당에 속하느냐고 물었더니 가이드는 무소속이라고 합니다. 2011년 혁명과 그 이후 정권들이 정당을 등에 업고 집권했으나 국민들이 실망하여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아랍권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 정권이 퇴진하고 2012년 민주 선거를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 ‘무슬림 형제단’의 지원을 업은 무함마드 무르시가 사상 첫 문민(文民) 대통령으로 선출됐었지만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경제와는 거리가 멀죠. 2013년 국방부장관이었던 엘시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이번에 재선에 성공한 것입니다. 선거 자체는 무의미 한 것으로 그의 재선은 당연한 것이라 합니다. 실제로 3월 31일 보도에 의하면 그는 92%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무바라크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기회가 있을 겁니다.)
엘시시는 과거 전두환 정권을 연상시킵니다. 사회악을 일수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인사들을 깡패들과 함께 청송교육대로 보낸 일이 있죠. 엘시시는 이 보다 한 술 더 떠 2014년 4월 28일 반정부 시위에 나선 무슬림 형제단 683명에게 무더기 사형 선고를 내리고 이 해 말에는 시위 도중 경찰서를 습격한 18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합니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던 겁니다. 대부분이 감형되었더군요. 엘시시는 세속(secular)정권임을 내세워 경제를 망친 근본주의자들과 반대파들을 억압하면서 경제회복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것입니다. 독제정권의 전형적인 수법이죠. 이번 선거에서도 야당 지지자들이 집결하면 곧 체포되기 때문에 선거다운 유세는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의 정책이 성공하여 이집트 경제는 안정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집트 국가 수입 중 관광산업이 1위이고 그 다음이 수에즈 운하 통행료 수입이라 할 만큼 관광산업은 이집트의 기간산업인 셈입니다. 세계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요르단의 페트라는 요르단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는군요. 이들 나라에서 관광객들이 절대적인 수입원인 셈이죠. 그러나 2011년 이후 관광객은 급감하고 특히 5:1이었던 미국 달러에 대한 이집트 파운드(EP)화는 17대 1로 떨어졌습니다. 이것도 공식 환율입니다.
엘시시 정권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이들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공항 검색은 물론이고 호텔도 나가고 들어 올 때 모든 짐들을 검사합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따르지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여행 막바지에 알렉산드리아 부근 모스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두 신발을 벗고 들어갔는데 나올 때 미국인 노신사의 구두가 사라졌습니다. 여행에 나서면서 보통 오래 동안 신어 편한 신발을 고르죠. 이 양반의 신발도 그랜드 캐니언 까지 다녀 온 낡은 것이라 합니다. 가이드가 어디에 전화를 하니 경찰서장이 바로 달려오더군요. 카이로 시 전체를 담당하는 경찰서장은 아니겠죠. 종로경찰 서장 급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신발 임자에게 100불을 주더군요. 그리곤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근무자들의 임금에서 이 비용을 제할 것이고 합니다. 지금 이집트 국민 개인당 GDP가 3740불(2015년 기준)이니 100불은 큰돈이죠.
이집트 정부가 관광산업을 위해 이같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증요법일 뿐이죠. 중동 전체의 정세가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강경노선을 내세우며 국내적으로도 이슬람 교리의 충실한 이행을 요구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세속 정권과 계속 반목하고 있으며 여기에 민주화 욕구가 높아지면서 중동 전체가 불안한 상황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관광객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을 해야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와 같은 위협을 안고 무슨 볼거리를 찾아 오겠나요? 이집트는 관광객들로부터 점점 외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각박해지는 것 같군요. 우리가 도착하여 공식 일정이 없는 토요일 오후 가이드 하젬은 시내 구경나가겠느냐고 묻더군요. 내일 보게 될 일정에서 제외된 장소를 안내하겠다면서 3시간에 1인당 75불을 요구합니다. 4명이면 300불이죠. 그의 공식 팁이 매일 5불, 일한 날짜만 계산해서 7일 간 1인당 35불이니 4명이 140불인 셈입니다. 오후 3시간 구경시켜주고 300불이라면 너무 과한 게 아닌가요? 공식적인 오리엔테이션은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알바만 하려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더군요. 또 카이로 공항 등 몇몇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식당이나 관광장소는 화장실에서 나오면 1 파운드를 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 돈으로 겨우 60-70원 정도입니다. 한 여행객은 소변보고 나오는데 1파운드를 주기 싫어 오줌을 참는다고 하더군요. 1파운드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잔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공부를 열심히 해 온 김판사가 가이드로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카이로 지도를 펴는데 우리가 묵는 람세스 힐턴 호텔 바로 앞에 이집트 국립박물관 뒷문이 있고 정문 앞에는 Tahrir광장이라는 정치집회가 주로 열린다는 광장이 있습니다. 박물관은 내일 볼 예정이라지만 이집트의 유물을 전시하는 이런 박물관이야 1주일도 모자랄 것이라 이곳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김판사에게 모든 걸 맡겼지요.
문제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광장으로 가기가 엄청 어렵다는 겁니다. 인구 2400만이라는 카이로에 교통신호등이 있는 거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4차선 도로도 차선이 그어져 있지 않고 온 사방에서 경적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야만 했지요. 한국처럼 손을 들면 차들이 정지해 주는 것도 아니어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지요. 이들은 차들 간의 추-충돌을 Cairo kiss나 Cairo hug라고 한다군요. 우리 같은 초행자가 길을 건너는 최선의 방법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가 다른 쪽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었죠. 집권자가 신호등 설치하고 교통질서만 잡아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데...
Tahrir 광장에서 4인승 마차를 타고 카이로 타워로 갔지요. 호텔 방안에서도 보이는 곳으로 서울의 남산 타워 같은 곳입니다. 높이 185미터로 카이로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내일 갈 기자의 피라미드로 보인다고 해서 입장료를 내고 꼭대기까지 올라갔습지요. 바로 눈 아래 Opera House가 있군요. 나일강이 서울의 여의도 같이 샛강을 만들어 그 중간에 생긴 섬에 1869년에 처음 세운 것입니다. 카이로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여 세운 것인데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2년 뒤 초연된 곳입니다. 막이 오르면서 이집트의 젊은 장군 라다메스(Radames)가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를 그리워하며 부른 ‘청순한 아이다(Celeste Aida)’ 등 알려진 노래들이 많죠.
이 극장이 불탄 뒤 일본정부의 지원금으로 3년에 걸쳐 다시 지어 1988년 문을 엽니다. 다음 날 우리가 볼 기자의 피라미드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는 10억불(약 1조 1천억)을 들여 50헥타르의 규모로 이집트 박물관을 현대식으로 짓고 있습니다. 50헥타르는 50만㎡이니 경복궁 43만㎡보다 큰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1902년 지어진 현 이집트 국립 박물관은 3층 규모로 너무 작아 새 박물관에 투탕카멘의 황금 얼굴덮개 등 모든 문화제들을 옮긴다고 하군요. 초기 예상 비용 5억 5천만불 중 일본이 3억불을 내놓았더군요. 가이드는 총 비용이 10억불이고 일본이 10분의 1을 부담했다는데....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에 부분적으로 문을 연다는데 지금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같이 전 세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은, 그러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문화외교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 문화강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판사는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신호등 없는 거리를 조심스럽게 건너면서 옛 시장인 바자(bazaar) 거리를 구경하고 호텔이 눈이 보이는 곳에 신호등이 있어 잠시 기다렸습니다. 이 때 소매치기 3명이 김판사를 둘러싸고 푸른 신호등으로 바꿔서 조금 건너는 순간 둘이서 바람잡이를 하고 한 놈이 잽싸고 핸드폰을 뽑아 갔다고 하군요. 여행을 마칠 때 김판사는 핸드폰이 없으니 사진 찍을 일이 없어 편안하게 구경을 했다고 말하더군요. 맞는 말일 겁니다.
정치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국민 전체가 개고생하고 그들이 불러들이려는 관광객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게 현실입니다. 테러 등 보안이나 좀도둑을 잡는 등 치안만으로 이에 대응하는 건 짧은 생각이지요. 물론 본질적인 대응책은 알고 있어도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2018.4.2.)
사진1 : 옛 시장거리로 가는 길에서 본 대통령 선거 현수막들. 엘시시의 얼굴은 양쪽에 모두 보인다.
사진2 : 카이로 타워에서 내려 본 전경 바로 아래 오페라 하우스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