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공부 제 8강 (이 근호목사, 2003년 1월 26일, 우리교회)
고아원을 방문한다든지 혹은 ARS 전화 한 통화를 하면 심장병돕기어린이를 돕는 구좌로 돈 1000원이 빠져나가는 그런 착한일, 지하철이나 길거리에 엎드려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 100원을 던져 주는 착한일, 이것은 한 1%쯤 된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죄짓는 것, 남에게 화내고 사기치고 폭행하는 이런것은 한 4%쯤 된다고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니고 중립적인 것이 90-95%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에 죄는 살다보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누가 있습니까, 4%쯤에서 다 걸리고요. 과속, 거리에서 침 뱉는 것, 금연구역에서 담배피우는 것 등이 해당되겠지요. 의는 연말에 몰아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겁니다.
교회 다녀주는 것, 헌금 해 주는 것, 기도해주는 것 이렇게 해서 살아간다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죠. 그래서 죄라는 것은 전체 중에서 한 4%정도밖에 안 되는 이정도 선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죠. 그래프로 그려보면 대다수가 보통사람의 삶을 살고 거의 극소수가 이런 분포로 되는데 만약 이런 4%의 죄마저 허용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 너무 완벽하고 너무 신이 되잖아요.
약간의 죄는 지어야 사는 재미가 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면 조금이라도 의를 행해서 보상해주면 되니까요. ‘하나님보시기에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평안해야 되고 행복해야 되고 근심걱정거리들이 일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의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만사 내 뜻대로 안되고 걱정과 근심과 불행한 일이 닥칠 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설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죄를 조금만 짓는다는 식으로, 그리고 죄를 지어도 의로 벌충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보통사람의 삶을 살면 평안과 행복이 늘 상 주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불안, 공포, 근심, 두려움 같은 것들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겁니다. 이것은 평화로울 때 그렇겠죠. 그런데 실제로 전쟁이나 재난 같은 급박한 상황이 들이닥치는 경우, 사재기를 해야 되는데 옆집이 10개 했을 때 나는 2개밖에 못할 경우에는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그리되면 보통사람들의 평온한 삶이라는 것은 다 날아가고 죄라는 것이 죽죽 늘어나게 되겠지요. 이처럼 상황 따라 여의치 않을 때는 죄가 늘어났다가 여유가 생기면 죄가 줄어들게 만드는 이 동기, 우리로 하여금 나약하고 주눅 들게 만드는 근본 원인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어디서 왔는지 그 문제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분명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왜 문제이며 그것이 어디서 왔는냐, 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문제라는 말이죠. 이것을 질타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네 주제파악을 해라’는 뜻도 되겠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는 그런 뜻도 되는데,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들이 ‘나는 나를 모르는데 너는 아나?’ 이렇게 따집니다. 그래서 질문을 주고받고 하다 보면 사람들이 소크라테스 앞에서 웁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는 척하면서 허송세월 했구나. 내가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내가 도대체 아는 것이 뭐야?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하고 탄식하면서 같이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모든 불행이 어디서 나오는가? 무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는 아나?’라고 하면 ‘나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내가 뭘 모르겠다는 것 자체가 아마 진리가 안되겠나’라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자기자신이 누군지 자기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냥 세월만 허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는 뭐라고 하는가? 오늘 12과에 보면 원죄(original sin)라고 나옵니다.
제 12 과, 원죄
제 16문, 아담의 첫 범죄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였습니까?
답) 아담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운 것은 그만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요 그 후 자손가지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그로부터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하는 인류는 모두 그의 안에서 그의 첫 범죄에 참여하여 그와 함께 타락하였습니다.
제 17문, 그 타락이 인류를 어떠한 상태에 이르게 하였습니까?
답) 그 타락은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원죄라는 것은 인간의 토대, 인간이 발 딛고 선 토대자체가 이미 대대로 죽 내려온 원죄로 해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듯이 죄의 꽃이 피고 죄의 열매가 맺힌다고 보는 거예요. 기독교에서는 그 원죄에 밭에 심겨진 나무를 가지고 사람이라고 본다는 말입니다.
아까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진리다’라고 했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아예 사람이라 하지 않고 ‘죄인’이라 합니다. ‘죄지은 자로서의 인간’, 이것이 원죄의 개념입니다. 아까 그 그래프 다시 보면 사람들은 평범한 일 95%, 죄 4%, 착한 일 1%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서 살아간다고 여겼는데 원죄가 되면 100% 시커멓게 죄가 되어 버립니다.
이게 과연 실감나는 현실성이냐, 하는 겁니다. ‘인간의 전부 다 가 죄냐?’ 기독교가 인간의 죄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범죄, 혹은 고의로 짓는 죄인 고범죄가 있고 또 하나는 원죄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원죄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왜 평소에는 인간이 죄를 안 짓는가? ‘원죄로 인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 순간만큼은 죄를 안 짓고 은혜의 감시체제가 약간 허술하다 싶으면 갑자기 인간이 자범죄를 짓게 된다’고 설명을 해 왔습니다. 저는 이런 설명에는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성경에서는 원죄를 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 기독교신학에서 원죄를 말하는가? 자범죄, 인간의 고의로 짓는 범죄, 파출소 끌려가고, 감옥소 가고, 남보다 더 나쁜 생각을 가지고 도둑질, 사기, 강간, 강도, 살인등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실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원죄라는 것이 도입된 거예요.
‘인간은 왜 죽느냐, 인간은 왜 죄를 짓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된 거예요. 죄짓는 것은 하나의 현상이고 그 현상의 바탕을 원죄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겁니다. 성경적으로 부합되는 것은, 성경에서 죄라고 할 때는 인간이 저지르는 현상을 가지고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의 단절됨을 죄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저지르는 것을 죄라는 입장에서 보면 의라는 것은 자기가 착한 일을 하는 것들,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하는 것, 꽃동네 가서 사람들 돌보는 것 등을 착하고 의로운 것으로 보기 쉬운데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된 것, 이것을 의라 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의로운 일이라는 것은 이것을 증거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그것을 가지고 빛이나 소금이니 하면서 의롭다고 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사람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이고 성악설은 순자라는 사람이 주장했습니다.
성선설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실수나 오류가 있고 완벽하지 못해도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욕만큼은 꺾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겁니다. ‘가뜩이나 남들 괴롭히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눈이 뻘개가지고 덤벼드는 이 세상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 의욕, 기본적인 질서 유지책마저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맹자나 순자 같은 도사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관계에서 하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을 좀 질서 있고 평화롭게 살수 있게 하느냐’는 여기에 도가 있는, 곧 제대로 되고 가치 있는 철학과 윤리라고 보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 하면 ‘진리라는 것은 뭐냐? 실용적인 가치, 실용적인 의미가 있을 때 이것을 진리라고 삼자’는 말입니다.
그 실용적인 가치라는 것은 옛날 중국 같은 경우에는 국가의 안정입니다. 국가가 안정하려면 왕에게 다 복종하고 봉사해야 되고 부부 같으면 남편이 주도권을 쥐어야 됩니다. 친구를 빼놓고는 전부 다 위아래 계급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질서라는 것은 강자 앞에서 약자는 굴복해라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의 전부이며 그 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국가 질서가 흔들리면 지방의 리 단위의 질서도 다 깨지니까 국가가 우선이고 국가가 우선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자 되는 왕에게 절대 충성하고 복종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이란 국가 질서를 위해서 사람을 다독거리는 일종의 테크닉이고 기술’이라고 보는 겁니다.
현대에 와서도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행복이란 국가에 봉사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많이 발휘할 수 있느냐의 그 폭에 따라서 행복은 결정되며 자신의 그 욕망을 펼치는데 방해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비자유고 슬픔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의 자유를 많이 발휘할 수 있는가’를 진리라고 봤습니다. 그러면 국가라는 것은 자기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평등의 원리, 평등의 기회를 많이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자유를 많이 주려면 그만큼 개인이 속해 있는 조직의 자유가 많아야 되고 조직의 자유가 많다 보면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또 개인적인 자유를 누를 필요성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에서 실용적 가치에 대해서는 손을 놔 버렸어요. 해결책이 없습니다. 내 만약에 S그룹에 취직했는데 상사가 시킵니다. 전에 있던 H그룹의 기밀을 빼오라고 시켜요.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진리야.”
“그게 왜 진리입니까?”
“이 회사가 살아야 네 애들이 학원비 내고 아파트 관리비 낼수 있고 그게 바로 의로운 거야.”
오늘날 의롭다는 것은 전부 다 김00가수가 부른 노래처럼 전부 가 다 ‘핑계’고 ‘변명’입니다. ‘어쩔 수 없었노라.’ 그걸로 끝났어요.
“당신은 왜 카드를 위조 했습니까?”
“카드 빚 때문에요.”
남에게 피해를 줘놓고는 그게 무슨 핑계와 이유가 됩니까? ‘왜 카드빚을 졌는가?’하면 ‘재수 없어서’ 그랬답니다. 그것은 저가 재수 없는 것인데 저가 재수 없는 것을 가지고 왜 남이 피해를 받아야 됩니까? ‘왜 남을 때렸나?’ ‘그것은 맞은놈이 나에게 재수없이 걸렸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죄, 의, 진리라는 개념이 완전히 와해된 이판에 성경은 계속 이야기 합니다.
‘모든 원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데 있다.’ 그러면 이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이어지면 하나님은 돗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주 예수’에서 ‘주’라는 개념이 ‘왕’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왕이시여.’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자진해서 누군가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가 졸때기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내가 돗대고 내가 최고 이기를 원하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고개 숙이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기껏 내놓는다는 것이 이런 변명, 핑계만 내어놓는 아주 험악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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