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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복희가 8세 때 무대에 올라 천부적인 가수의 재질을 보이고 있다. |
- 아버지 윤부길은 극단 운영자
- 어머니는 춤꾼 최승희 제자
- 타고난 끼로 11살때 미8군 무대
- 어릴적 집 나간 오빠 윤항기
- 키보이스 결성해 한국 록 주도
1967년 초 한국에 귀국할 때부터 이 땅에 미니스커트의 유행을 몰고 왔던 가수 윤복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연예매체를 관심사가 되었다.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국제적인 스타로 살았던 윤복희는 오히려 국내에서는 스캔들 메이커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파란만장한 가수생활을 뒤로 하고 1977년부터 윤복희는 가수에서 뮤지컬배우로 전향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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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복희의 아버지인 한국 최초 개그맨 윤부길의 원맨쇼 공연 모습. 김형찬 제공 |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윤복희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10년 정도의 가수활동을 했지만 노래만 해도 '여러분'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화려한 스캔들에 가려 그녀의 연예인으로서의 재질과 가수로서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지면을 통해 그동안 있었던 황색 저널리즘의 경박한 평가는 걷어내고 대중음악저술가로서의 진지한 관심으로 윤복희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 몇 회에 걸쳐 재평가를 해보고자 한다.
만능연예인 윤복희와 키보이스라는 록밴드로 한국 록음악의 장을 열었던 오빠 윤항기의 예술적 재능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 윤부길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이후 1947년부터 '부길부길쇼'라는 악극단을 운영했는데 노래, 편곡, 무대 장치, 연출, 연기 등을 모두 해내는 만능 연예인이었다. 어머니 성경자는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서 윤부길과 일본에서 만나 1942년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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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 때부터 송영란과 '투스쿼럴스'라는 듀엣을 조직해 노래하는 모습. |
그러나 악극단 가족으로서의 생활은 공연을 위해 일정한 주거가 없이 전국을 떠도는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과로를 이겨보기 위해 아편을 한두 대씩 맞기 시작한 것이 그만 헤어날 수 없는 아편 중독자가 돼버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편을 끊기 위해 어린 두 남매를 여관에 맡겨놓고 수용소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그때 어머니는 유랑극단과 함께 돈을 벌러 강원도로 공연을 가고 없었다. 아버지의 손을 놓은 두 남매는 여관에서 어머니를 목마르게 기다렸으나 좀처럼 소식이 없었고 마침내 두 남매는 여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추운 겨울에 겨울옷도 없이 여름옷을 입은 채 오들오들 떨며 거지처럼 거리를 방황했다.
윤복희가 처음으로 무대에 선 것은 6살 되던 1951년이었다. 윤복희가 무대에 서겠다고 어머니를 졸라댔지만 연예계의 비정함을 체험한 어머니는 딸이 연예인이 되는 것을 반대해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복희는 오빠의 깡통필통에 자신의 손가락을 쑤셔 넣는 자해를 저질렀다. 이에 놀란 어머니는 결국 딸을 무대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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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8세 때 에이원쇼에서 활동하던 시절 윤복희. |
윤복희의 역할은 마그네슘을 터뜨리며 색종이를 뿌리는 가운데 산타클로스가 등장하여 메고 온 선물자루 속에서 튀어나와 노래하는 것이었다. 산타클로스가 "여러분 오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하고 자루를 풀자 그 속에서 인형 같은 소녀가 나와 인사를 하고 부기우기의 멜로디에 양손을 마리오네트처럼 흔들어대며 앙증맞게 노래를 부른 것이다.
수용소에 들어간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윤복희에게 어머니 사망이라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954년 강원도 묵호에서 낭랑악극단의 주연배우로 출연 중이던 어머니가 무대 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수용소를 나와 어린 남매를 이끌고 악극단에서 코미디언으로 출연하며 받는 출연료로 겨우 연명하다가 1954년 재혼을 하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오빠 윤항기는 집을 떠나게 된다. 윤항기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1964년 해병대를 제대하고 키보이스를 조직하여 한국 록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오빠와 이별한 윤복희는 11살이 되던 1956년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8군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다. 천안으로 요양을 떠났던 아버지는 결국 1959년 세상을 떠났고 고아가 된 윤복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이미 꼬마가수로 활약하고 있었던 송영란의 집으로 들어갔다.
1961년 16세부터 윤복희는 송영란과 투스쿼럴스(두 마리의 다람쥐라는 뜻)라는 듀엣을 조직하여 남산 UN센터에 출연을 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꽤 인기를 얻었다. 남산 UN센터에 출연하던 어느 날 에이원쇼의 단장이 구경을 왔다가 이들을 에이원쇼의 멤버로 스카우트했다.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던 쇼단에서 윤복희는 만돌린, 기타, 색소폰, 드럼, 트럼펫, 하모니카 등의 각종 악기는 물론이고 아크로바이트까지 섭렵하며 재능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에이원쇼에서 활동하던 1963년 10월 쇼단과는 별개로 필리핀에 2주 동안 공연을 다녀오자는 제의가 있어서 10월28일 10명이 따로 팀을 꾸려 필리핀으로 공연을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이 팀은 귀국하고 4명만 필리핀에 남아서 코리언 키튼즈라는 이름으로 계속 해외활동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윤복희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대중음악 저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