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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싹 난 지팡이 (민 17:1-11)
가수 최진희 씨가 부른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로란 미궁과 같은 말인데, 가도 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길을 의미합니다. 길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서 앞으로 가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뒤로 한참을 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미로입니다. 아마 그 노래를 작사한 사람이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여 사랑을 미로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미로에 빠진 사람은 처음에 재미를 느낍니다. “아! 이상하다. 다른 길로 갔는데 나온 길이 똑같네.” 그러나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점차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지나게 되면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이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미로를 헤맸습니다. 물이 없다고, 고기 없다고 원망하다가 큰 재앙을 당합니다. 그래도 형제들이 원망하고, 백성들이 원망하고, 지도자가 원망하여 땅과 불이 삼키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또 원망하는 바람에 염병으로 14,700명이 죽는 재앙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는 죄는 마치 미로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미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미로 가운데 돌파구는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미로에서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본문 17장 12-1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싶지 않지만 또 원망하게 되고, 우리는 죄짓고 싶지 않지만 또 죄짓게 됩니다. 원망을 하면 하나님께서 불과 병으로 죽이시니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 과연 우리가 다 망하여야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좌절의 하소연입니다. 미로를 헤매는 도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죄와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외치는 간절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 간절한 물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제기됐지만, 사실 오늘날 죄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인류들은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죄의 미로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는 없습니까?”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
이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파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일러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돌파구를 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로와 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방법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열 두 종족으로부터 지팡이를 하나씩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지팡이를 ‘마타’라고 하는데 이 ‘마타’가 ‘종족’과 같은 말입니다. 종족을 대표하는 것이 지팡이가 된 이유는 히브리어의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족이나 지팡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에 열 두 종족을 대표해서 지팡이를 하나씩 취하고, 지팡이마다 각 족장의 이름을 쓰되,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 열 두 개를 모아서 증거궤 앞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장막에 들어가 보니 열 두 개의 지팡이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살구 열매는 영어로 ‘Almond’라고 하는데 초콜릿에 넣어서 먹으면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습니다.열두 지팡이는 모두 죽은 나무요, 원가지에서 끊어진 생명력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는 생명을 얻어서 열매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론 지파의 제사장 직위를 명확하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다른 지파에서는 제사장이 임명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니,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후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도로 가져다가 증거궤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자에게 표징이 되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
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10절).
왜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기상천외한 기적을 행하신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망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사망을 피하려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 나타난 표징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세 가지 특징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택함 받은 지팡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절)고 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라고 해서 스스로 생명력을 갖추고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은 것도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도 죽은 나무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질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도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힌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혜를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사실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을만한 조건을 가진 지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을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모두 한두 마디씩 축복을 건넨 야곱이 유독 레위에게는 단 한 마디의 축복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야곱은 도리어 레위를 두 번씩이나 저주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처럼 레위는 야곱의 이중 저주를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이나 야곱의 저주를 받은 레위 지파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공로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우리 공로나 우리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레위처럼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5장 20절에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이며,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에는 일부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정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고,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지팡이를 살아있는 가지로 만드시고 살구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도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이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는 표징의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를 보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 표징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언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느냐고 반항하며 불평하는 사람은 죽게 됩니다. 죽고 사는 표징의 지팡이가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택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지팡이를 통하여 표징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영적의미
그렇다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11장 1절 말씀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싹’이라는 말은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는 ‘rod’, 곧 ‘지팡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지팡이가 나와서 가지가 나고 결실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지팡이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6장 12절에도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이라고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의미하는데, 영어로 ‘branch’입니다. 이 ‘순’이라는 가지가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인데,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으신 구주시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구주이십니다. 사람이 그 분을 믿으면 생명을 얻게 되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표적으로서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미궁에 빠진 인간들의 유일한 돌파구요, 생명을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의 매 페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간의 죄를 미궁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해결책이요, 돌파구라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난 이유
그렇다면 다른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지 않고,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존재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구세주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경쟁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경쟁자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구주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도들도 이 진리를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공자, 혹은 석가모니를 비교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어떤 경쟁자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소위 종교 다원주의, 즉 다른 종교도 모두 천국 가는 각기 다른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지, 다른 지팡이에는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면 저는 종교 다원주의가 옳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팡이는 싹을 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동일하게 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시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막대기를 의지하는 존재는 둘째 사망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라이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상천하에 유일한 구세주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싹이 나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는 사실 그런 은혜를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에, 레위가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은혜요 또한 이름값입니다. 레위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과 연합되었다(attached)’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에서 싹이 났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싹도 나고 열매도 맺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연합된 자만이 인생에 움이 돋고, 순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연합됨이 없는 인생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채 이 땅에서 살다가 영원히 끊어지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죽은 막대기에도 꽃이 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아닌 다른 지팡이에도 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화가 아니고 조화입니다. 죽은 막대기에 열매가 맺힌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선량하게 사는 것은 부수적인 교훈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그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른 지팡이처럼 될지라도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 맺는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을 서로 대할 때에도 하루 이틀 보고 말 그런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보고 끝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서로를 보고 또 보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죄의 미궁을 헤매는 존재들입니다. 내 스스로 죄를 벗어나보고자 해도 다시 죄로 돌아오게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연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죄를 그치고 사망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 표징을 보는 것 외에는 다른 치료책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유일한 구주라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두 가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예배에 처음 나온 분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면 언제나 돌아가 다시 그 분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만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고, 기쁨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혹시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다시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가시고 그 분과 연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