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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 제3 수행편
제8장 참회문-1
반갑습니다. 오늘 참회문입니다. 이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하겠습니다.
앞부분은 이제선 교우님, 다음 주는 황원공 교우님께서 하겠습니다.
저번 주에는 무시선법이었습니다. 대종사님의 <총서편>에 나오듯이,
현재 물질 문명이 극성을 부려서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고, 물질이
앞서서 부모 형제간의 우애와 효심, 또는 인류애가 다 사라지고 오직
돈과 명예를 향해서 부러워하고 쫓아가는 세태입니다. 형제간의 의리는
깨지고 부모도 몰라봅니다.
신문에 보니 16%의 노인이 학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누구로부터? 자기
자식이나 가족에게서 당했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학대하고,
아들이 부모를 패는 등, 이런 것들이 다 무명과 욕심 때문에 물질이
앞서다 보니까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래 순수했던 마음들은 다 어디
가고, 뻔뻔해지고, 계속 거지근성으로 당연하듯이 요구만 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 천지자연의 엄청난
은혜이고, 부모의 은혜 속에서 내가 크고 자라고 숨 쉬고 먹고 마십니다.
또 우리가 이용하는 여러 것은 많은 동포들의 연구와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속에서 만들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또는
비난하기도하고, 때로는 당연시하면서 살아갑니다. 아기가 같이 한없이
요구만 하고 살아가는 게 우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TV에서 북극곰이 빙하가 녹아가는 그 얼음 위에서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 곰은 지금쯤 죽었을
것입니다. 바다의 고래도 많이 죽고, 다랑어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완도에 근무할 때 인데, 예전에는 그물을 치면 문어, 낙지, 오징어,
세발낙지가 막 올라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김에도 염산을 갔다가 뿌리면 김이 파래지면서 다른 것이 떨어지고
분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고 있죠. 그런데 그 염산이
뿌려지면 바닷속은 다 썩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다 죽어버립니다. 이미
그쪽 근방은 오염이 되어서 생명들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참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가 맛있게 먹은 것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가? 를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면 돈이 되니까 잡거든요..
우리나라 관광객이 러시아에 가서, 산 곰을 잡아서 빨대를 목에다
꼽아서 피를 빨아 먹는다. 또, 태안에 기름 유출 때 기름에 오염된 새,
멕시코만에서는 아직도 기름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생명들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현대문명, 물질문명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앞으로 100이나 200년 후에 후진들이
지금 살고 있는 조상들을 바라볼 때 당신들은 멍청했다. 너무 했다고
하지 않을는지… 결국 우리가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하면서 결국 우리가
다시 받을 거 아닙니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여자운전자가 없습니다. 그 운전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남녀 차별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그랬을 때 남자들이
참회하는가? 아니면 이를 당연시 여기는가?
개인과 개인 간의 잘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사죄하고 또 그것에 대한
대가를 갚아가는 것이 중요하듯, 개인과 단체 또는 국가, 사회, 세계,
자연환경 문제까지 생각해 볼 때 사은의 은혜 속에서 내가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천지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내가 머리를 감고 화학 약품을 쓸 때 나는 내 마음대로 쓰지 않았는가?
글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교당에서 교무님이 우리 학사마련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효소제품
EM을 직접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것을 보내고 통화 한적도 없습니다.
당신이 환경 문제를 생각하고 교당의 불사와 학사에 도움을 주겠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용할 줄 모르고
홍보도 잘 안 돼서 사질 않습니다. 어떤 것이 자연 환경에 미치는
것까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쓰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쓴 샴푸가 강으로 흘러가서 미생물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천지가 구분되어있는 것입니다. 천지영기 아심정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 돌아가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일본이 우리 한국에 참회를 하는가? 제가 독일의 유태인 학살 장소를 간
적이 있습니다. 독일은 유태인 학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처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인 학살 장소에 사진으로 증명하고 오픈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기의 선조들이 어떻게 유태인에게 못된 짓을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 유럽에 일본인이 득실거려도 그
장소에는 일본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국가에서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참회를 안 하는데 독일은 참회를 하니까 그것을 알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기관에 있는 인물도 좋고 성품도 좋은 교무님이 교화계에 가고 싶은데
못 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손에 피부병이 있어서 아주 흉하기 때문에,
그 손을 보면 사람들이 질겁을 해서 교화계에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신 어릴 때 개구리를 무지하게 많이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저도
개구리와 쥐를 많이 죽였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사과한다. 기억이 안 난 것은
절대 수긍하지 못하고 설사 기억에 남아있더라도 자존심과 체면, 또는
명예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외면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잘못을 하면 철저하게 응징하려 하는데 내가 잘못한 것은 최대한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것도 원불교를 만났거나 법을 공부해 보면
느낍니다.
책을 한 권만 읽어도 많은 자극이 되고 참회가 됩니다. 누구와 만나서
깨어 있는 마음이라면 정말 자기를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무님 설교는 가슴이 아프다며 안 아프게 해주라고 하는데,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과실을 들추어 내거나 할
말 안 할말 다 합니다. 그래서 자살까지 하게 만들거나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글을 쓴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소화를 잘 해야지,
그것이 사실이잖아? 아마 그럴 걸? 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우리 안암 교당 카페가 있는데 연지 9년째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카페를 열 때 법명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대 어떤 청년이 인터넷은
익명성이 재미가 있는데 그러면 활성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달만 내 말대로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자네 말대로 하자고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친구의 말대로 익명성으로 카페를 운영 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을 못했을 것입니다. 차음에 카페에 들어온 사람은 누가 누군지
모릅니다. 아는 사람들만 압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적응하기에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익명성은 우리의 능선 능악 중에서 능악 부분이
아주 잘 발현합니다.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투서를 해도 투서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신뢰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밝혀야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찔러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칸트라는 사람은 어떤 목적과 처음에 시작하는 마음을 중요시 했습니다.
지금 현재 인류는 칸트의 힘을 쓰지 못하고 결과를 중요시 하는
벤담이란 사람의 힘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받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으로 못 태어났을 것입니다. 수단이야 어쩌든지 인간의
욕심으로 기본적으로 활용해서 돈을 벌고 그러고 나서, 같이 살아야
하니까 주의를 한 번 돌아보라는 주의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니 참회가 됩니까?
대종사님은 괴로운 일을 당하면 사죄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운 일을 당하면 꼭 누군가에게 풀어야 합니다. 어떤 괴로운 일을
5만큼 받았다면, 20, 30으로 되갚아야 합니다. 가는 몽둥이 오는 홍두깨
라고 합니다.
특히 요새는 말이죠. 개인의 이해관계에서는 조금도 피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공적인 것과 부딪혔을 때 공적인 은혜는 당연시 하고 철저히
이기주의로 나옵니다. 국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선진들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대종사님과 선진들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 선진들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불사한
살고 있다. 그런데 오직 자기 잘났고 자기 이득만 취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은의 은혜를 안 배운다거나, 자기를 객관화 할 수 있는 시각을 못
배운다면 엄청난 죄업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끝없는 요구, 끝없는
자존심, 끝없는 잘난 척과 교만함에서 살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 음식을 담으려고 하는데 그릇이 깨끗한 것이 없을 때, 어떻게
해요?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그릇을 안 씻고 음식을 예쁘게 담았습니다.
어떻겠어요? 본래 마음에는 예쁘고 안 예쁘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으니까 마음 공부하면서 먹어야겠죠? 우리가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음식을 담으려면 그릇을 먼저 씻어야 한다. 설거지를 한 후에
음식을 담아야 맛있는 음식이 된다.
우리가 어떤 신앙, 수행의 행위를 하겠다 하면 먼저 깨끗이 그릇을 씻는
행위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참회와 기도입니다. 그것이
수양입니다. 삼학병진을 무시선법으로 내놓고 다시 참회문을 내놓은
이유는 먼저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해 봐라.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못된 짓인지, 내가 얼마나 빚쟁이인지, 앞으로 나에게 얼마나
고통이 올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회를 하라고 하니까. 후회, 개탄, 자책, 학대만 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는 안될 놈이야. 역시 나는 죄인이야. 참 갑갑합니다.
대종사님은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걸음이다 고 했습니다. 싱싱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참회를 하면 무거운 업은 가볍게 들 것이고
가벼운 업은 소멸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종교는 무겁건 가볍건 믿기만 하면 다 돼버리고, 신부님을 통해서
사죄 받으면 다 끝나 버리죠? 밀양이라는 영화 생각나세요? 초록
물고기가 원본이라고 하던데, 그 밀양 영화를 보면서 감독
초록물고기를 쓴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딸을 납치해서 죽여 버린 범인이 감방에 가있어도
오랫동안 괴롭고 힘들어서 기독교 신앙에 들어와서 신심으로 합니다.
교회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그래 사랑해보자 고 하면서
마음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죽인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해주려고 감방에 가서 면회를 신청했더니 그 죄인이 나와서 하는
말이 “저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받았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개뿔이 있나. 지금 내 딸이 죽어서 내가 괴로워서 겨우 마음
돌려서 왔는데, 하느님에게 이미 사죄를 받았다고? 그럼 하나님이 딸
살려 놨어요? 용서하려고 한마음 먹고 갔다가 팔짝 팔짝 뛰었습니다.
종교인들이 잘못하면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받았다는 것은 이참 입니다. 그 사람은 사참을 안 한 것입니다.
그 피해 입은 당사자에게 갚아야 한다. 그래서 대승의 참회, 불조의
참회는 이참과 사참을 병행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불 제중,
제생 의세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불교 신앙과 수행과 교리를
풀어 놓은 것이 참회문입니다. 사은 사요, 삼학 팔조가 참회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종교문에 들어와서, 자신의 욕심을 부추기고 본인을 점검해 보지 못하고
잠시 정신적 위안만 얻어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을 증장 시키고
욕심을 조장합니다. 원불교 법을 통해서 내가 적당히 더 잘살아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이 설거지해서 음식을 담듯이 참회를
해야 합니다.
즉, 먼저 인과의 이치를 점검 하여 합니다. 내가 왜 이런 부모를 만났고
나는 왜 이런 인물과 이런 지혜와 집에서 이런 직업을 가지고 이런
점수가 나오는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괜히 부모 탓, 나라 탓, 대통령
탓, 조상 탓을 합니다.
애들이 땅에 넘어지면 엄마가 땅을 딱 치면서 땅을 나무라면 애는
갑자기 안 아파지죠. 그리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같이 발로 땅을
치면서 통쾌해한다. 엄마하고 애하고 똑같죠. 자기가 힘이 없어서
자빠져 놓고 엄마는 땅에다 화풀이 하고, 애도 땅이 자기를 다치게
했다고 화풀이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부지기 수입니다. 오늘
원문을 잘 풀어서 제가 딴 소리를 좀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죠?
-네
이 참회문의 구성을 보면 처음에 원리가 나옵니다. 참회의 원리는 음양
상승의 원리, 인과의 원리입니다.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참회의
개념을 명확하게 해주고 뒷장에는 참회의 근본과 참회의 방법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참회를 하면 그 공덕과 결과가 어떠한가? 맨
뒤에는 주의할 점이 나옵니다. 얼마나 좋아요?
< 음양 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
음양 상승의 도를 따라. 음이 극하면 양이 희생하고, 양이 극하면 음이
희생한다. 이것이 음양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음양의 이전 자리를 알고
나서 음양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음양 이전
자리에서 음과 양으로 나타나는 묘유 자리입니다.
선행자는 후일에 반드시 상생의 과보를 받는다. 여러분이 아깝지만 낸
돈도 있잖아요? 하기 싫은데 봉사도 하고 그러죠? 받기는 다 받을
겁니다. 그런데 똑같이 선행을 해도 어떻게 선행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천차만별입니다. 기뻐서 하는 사람, 체면으로 하는 사람, 나중에 하는
사람, 먼저 하는 사람, 마지못해 하는 사람, 욕하다 하는 사람.
가지가지입니다.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다. 사람들은 선행자가 받는 상생의
과보는 자신이 받으려 하지만, 내가 악행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설사
알았다 할 지라도 그 과보는 안 왔으면 좋겠다 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공부는 안 해놓고 점수는 많이 나왔으면 좋겠고,
이생에는 복 지을 때는 아까워서 못 지어놓고 내생에는 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기도비는 아주 조금 내면서 복은 많이
달라고 하니 복이 올지 안 올지 나도 잘 모르겠네.
호리도 틀림이 없다. 왜 호리도 틀림이 없을까요? 음양 상승의 이치에
따라 그렇고 자연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호리에 틀림이 있습니다. 아
바자회 때만 해도 현도 교우가 부드럽게 굵직한 목소리로 차를 빼달라고
차 주인에게 전화해도 지금 멀리 있다고 하면서 안 빼주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예쁜 현정이가 전화해서 ‘여보세용~. 바자회 때문에 차 좀
빼주시면 좋겠는데용~’ 그 친구가 금방 달려왔습니다. 차를 바로
빼주었습니다. 그리고 평가회 할 때 다음에는 차를 뺄 때 반드시
여자교우가 차 빼달라고 전화하라고 보고서에 써 놓았습니다.
참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진리는 호리도 틀림이 없는데 왜 그러느냐? 진리는 지극히 공변 되어서
사가 없습니다. ‘사’는 원근친소라고 해도 됩니다. 끌림이 없고 사적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연이 있니 없니, 학교 동문이니 아니니, 돈을
썼니 안 썼니, 예쁘냐 안 예쁘나를 떠나서 진리를 그대로 입니다.
바다는 더러운 물을 가려서 안 받습니까? 바다는 다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호리도 틀림이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전부 안 믿고 살아야죠? 사람이 그렇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쉽게 말해서 아까 남자가 차 좀 빼주라고 남자에게 전화해도 안
빼주니까, 네가 틀렸다 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여자로 바꾸는 것도
요령입니다. 현실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어두운
암실에서 이 생각, 이 말, 이런 짓을 했을 때도 진리는 다 압니다. 옛
말에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고 합니다. 그러죠?
참 그게 호리도 틀림없는 인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희한하다. 내가
상대방이 미워서 없는데서 욕을 좀 했는데, 귀신 같이 그 기운이
전달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옛날에 스님들이 월명암에서 선을
시작했는데, 대종사님이 영광에서 이렇게 보더니 월명암에서 선을
시작했는가 보다 하고 아셨습니다. 그곳에서 맑은 기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질이 나면 욕하는 건 자유지만, 음양 상승의 도를 따라
호리도 틀림없이 업이 됩니다. 입으로 했든, 몸으로 했든, 마음으로 했든
신구의 삼업 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우리 학교 다닐 때 어떤 학생이
회의 때 아무 말을 안 해서 물었더니 생각만 해도 없이 되니 처음부터
차단하겠다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인과를 알아서 선업을 짓고 은혜를 만들고 덕을 베풀자는 것,
제생 의세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업 때문에 큰 덕을 포기하는
것은 소극적 사고입니다. 작은 업이 다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사회에서 큰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업은 짓습니다.
대종사님, 대산 종사님도 목 뒤에 뭐가 났고 정산 종사님은
암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과품에 그대로 풀어져 있습니다. ‘내가
인과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실지로는 죄업을 안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 안 듣는 교도가 있으면 때로는 혼내줬다.’ 왜? 제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너를 위해서 했기 때문에 나는 업이 없을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정업이라고 합니다. 정업은 상대가 주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정당한 일이든 안 정당한 일이든지 마음 아프게 했다면
그 사람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것은 정업이 되고 반드시 나에게 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서 그 업이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빚을 받으러 와도 내가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면 그
빚을 갚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가난해졌다면 그 빚이 부담이 되어서
미쳐버릴 것입니다. 그와 같이 정업을 통해서 상대가 업을 갚는다고 할
지라도 현재 나의 자력에 따라서 그 업이 크게도 작게도 될 뿐이지
오기는 옵니다. 그런데 이 정업을 녹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도는 주위에 덕을 베푸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업을 안 짓고 덕만 베풀겠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덕만
베푸는 일이 어디에 있어요? 그런 것 없어요. 덕을 베풀면 반드시 업도
따라 옵니다. 이것이 음양의 이치입니다. 본래는 음양의 이전 자리지만
나오면 전부 음과 양입니다. 세상은 상대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훌륭한 사람도 적이 없을 수 없고 어떤 공덕도 피해자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업 때문에 큰 덕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 복이고 죄는
죄입니다. 그래서 복과 죄가 서로 더하기 빼기가 되지 않습니다.
한 번은 대종사님이 과수원의 벌레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사라들이 업이
되니 못 잡겠다고 하니 대종사님이 그 벌레를 잡아서 공중 일에 쓰니까
그것은 당신이 업을 받을 것이니 걱정 말고 하라 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제자가 웅덩이의 고기를 잡게 되었는데, 자신이
대적공 하려고 고기를 잡아 살생한 업을 다 받을 테니 맘 놓고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대종사님이 그 사람을 아주 혼냈습니다. 사람 따라
다릅니다. 똑 같은 업이 와도 힘도 없는 사람이 받으면 죽습니다.
찬바람을 쐬었을 때 건강이 약한 사람은 바로 감기 걸립니다. 건강한
사람은 절대 감기 안 걸립니다. 그와 같습니다. 대종사님은 힘이
있으니까 내가 달게 받겠다 고 하는 것인데 힘도 없는 것이 공중
일이라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안 됩니다. 공중 일을 했어도 복은
복이고 죄는 죄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복과 죄가 같이 따라 옵니다.
제가 완도에 근무할 때 식당의 조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리장이 술을 먹고 깽판을 부려서 별 수없이 잘랐습니다. 자를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는 이생에 한 명도 적이 없어야겠다 는 심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리장이 얼마나 원수처럼 알겠어요.
완도 의료원 원장이 병이 났는데 의료 분쟁이 있을 때 위에서 직원의
20%를 자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린 사람들이 욕설과 협박
전화를 하니 병이 온 것입니다. 죽고 싶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그
직원을 자르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업을 지으려고 해도, 그 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복지부동 하는 짓거리가 그것입니다. 공정하게 법대로 처리하면
사적으로 달라 듭니다. 국가 공무원 청사에 근무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위 사람에게 로비를 해서 아랫사람을 어떤 일을
자르지 못하게 한 대요. 자르면 언론에 내보내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별 수없이 허락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 고생이 많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일을 해도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고, 나쁜
일을 하면 아픈 사람이 더 많습니다. 예전에 대도
여자가 있었죠? 애인에게 돈 잘 챙겨주고 매너 있게 하니까 그 여자는
그를 감추어 주었습니다. 그 돈은 다 훔친 돈인데 자기에게 잘해 주니까
판단력을 잃은 것입니다.
제가 참회문의 기본을 한 번 훑었습니다. 참회문의 원문을 푸는 것도
좋지만, 내 생활 속에서 내 마음을 점검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참회문에 대한 노래를 하나 했던 게 있죠? 내가 낸 CD 중에서 6번
트랙에 있는 성가 87장 입니다. 노래의 1절은 사참에 대한 내용이고,
2절은 이참에 대한 내용이다. 즉, 참회계입니다. ‘아석소조 죄악업
개유무시 탐진치’ 를 한글로 풀어서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이 노래를 자기 마음에 대조하면 들으면 좋겠습니다. 성가 87장
<내가 지은 모든 죄업> 입니다. 눈을 감고 들으셔도 좋습니다.
-성가 87장 <내가 지은 모든 죄업> -
참회문 원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음양상생의 도를 따라 음과 양이
상승하는 것은 상추라고 합니다. 서로 순환하는 것입니다.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고 우주계 법칙으로써 음과 양이 서로
순환합니다. 한때 양이라고 너무 뻗댈 거 없고, 금방 음이 되는 것이죠.
지금 현재 음이 라고 해서 기죽을 것 없다. 다시 또 새 움이 트는 것
같이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은 것은 음과 양의 변화에
의해서 주는 자가 받는 자가 되고 받는 자는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는 자는 가는 자가 되고 가는 자는 오는 자가 되는 것이 음양
상승으로써 순환한다. 이것이 인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행자는 상승의 과보, 악행자는 상극의 과보를 받는데 언제 받느냐?
그것은 바로 받을 수 있고 이생에 세월이 지나고 받을 수도 있고,
내생에 몸을 바꿔서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수생 뒤에 연따라 받는
것입니다.
인이 생겨서 과가 되려면 그 중간에 연이 있어야 한다. 연을 따라서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인이 바로 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너무 맘 편할 것도 없습니다. 마치 연씨가 천 년이
지난 후에 땅을 만나고 조건을 만났을 때 연 잎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씨앗이 즉, 인을 지었던 것이 어느 연을 만나고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바로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수생 뒤에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걸 생각해 볼 때 거꾸로 뒤집어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은 과거의 총합이고, 과거의 총합이 나의 지금 모습입니다.
이 총합을 끌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업그레이드 해서 변화할 것인지는
내 심신 작용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래서 상생 상극이 호리도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호리도 틀림이 있지만, 진리는 음양 상승의
이치에 따라서 호리도 틀림이 없다. 그러니 원망할 것도 없고 억울해 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설사 진리가 잘못 돼서 내가 억울하게도
빚을 더 받아 갔어도 저는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호리도 틀림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갚을 테니까. 돈을 떼어 먹고 도망 갔다고 너무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언젠가는 갚습니다. 우리 집 소로 와서 갚던지 언젠가는
갚습니다. 그것 떼어 먹고 안 갚았다고 좋아할 것 없습니다. 언젠가 몇
배로 갚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 사람 관계를 보면 정말로 돈 빌려서 갚은 사람 10%도 안
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작은 딸이 공부를 한다고 하길래 기운 좀
살려주고자 신발을 하나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제께 딸에게 어떤 애가
‘야 너 신발 예쁘다 신발 바꿔 신자’ 고 그러더랍니다. 그것은 바꿔 신는
것이 아니라 뺏어 가는 것에요. 그런데 그 애의 언니가 있어요. 그 애가
나를 좀 닮아서 약간 좀 셉니다. 그 언니를 알기에 ‘나 이것밖에 없어..’
라고 핑계를 대고는 넘어갔답니다.
좋은 신발을 신고 오면 뺏어 간답니다. 1년 동안 70만원을 빼앗긴 애도
있답니다. 3학년은 2학년한테 뜯고, 2학년은 1학년에게 뜯어서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중학교 여학생들이 그런다고 합니다. 돈을
갚은 사람이 10%도 안 되는데, 갚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뺏어갑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뺏어가면 그 업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알면 베푸는데, 모르면 어떻게든지 뺏어갑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급선무가 돈을 벌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과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급선무이고,
둘째는 영생의 이치, 자기의 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인과와 영생이 맞 돌아 갔을 때, 그 사람한테 가장 희망적인
꿈을 심어주는 것이고, 영생을 가장 잘 살게 해주는 것이고, 보물을
지어 주는 것입니다.
자.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난다. 아까
질문 했습니다. 상생도 상극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생이라는 것은 다
좋은 것 아닌가요? 서로 은혜도 베풀고 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게 가장 좋은 것인데.
이 상생의 하나는 상대에 바탕 한 상생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에 바탕
한 상생입니다. 상대에 바탕 한 상생은 상극을 싫어하면서 상생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양변에 떨어지게 되어있고 이분의 세계에
놀아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생할 때는 겁나게 좋아하고 상극 할 때는
겁나게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상생과 상극이 서로 바뀌어 돌고 도는 것입니다. 상생에 상대한 상생은
집착한 상생이고 상극을 싫어하는 상생입니다. 그런데 절대에 바탕 한
상생은 상극을 싫어하는 상생이 아니라 상극을 넘어선 상생입니다.
상생에 집착하지 않은 상생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불교의 기가 막힌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해도 될 정도로 기가 막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 한 상생 밖에 모릅니다. 너하고 나하고 잘 살아보자. 상생을
부귀라고 생각해 봅시다. 상대된 부귀는 부할 때 교만해지고,
가난해지면 자기 자학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낯을 못 들고 숨고
그럽니다. 교당 다닐 때 잘되면 잘 되니까 교당 안 나오고, 혹은 잘 될
때만 교당에 나오고, 뭣이 안 풀리고 꼬이고 망하면 자존심 때문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돈을 잘 벌 때도 있고 안 벌 때도 있고 올라갔으면
내려갈 자리가 있고 내려갔으면 올라갈 자리가 있듯이 이것의 돌고 도는
음양 상승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절대에 바탕 한 상생은 그 음양을
넘어선 양이고 진공에 바탕 한 묘유 입니다. 상대에 바탕 한 상생은
나타난 현실만 본 것입니다.
저번 주에 배웠죠? 진공에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느냐? 진공에 바탕
해서 상생이라는 용을 삼을 것인가? 아니면 진공에 바탕 하지 못하고
상생만 바라 보느냐? 에 따라서 그 사람은 달라집니다.
교만 하든가 학대 하든가. 좋아 죽어서 한잔, 슬퍼서 한잔입니다. 이기면
이겼나 보다, 지면 졌나 보다 라고 하면 됩니다. 지금 도는 구나 라고
생각하면 포커 페이스가 되는 것입니다.
카드가 잘 들어오면 좋아하고 안 들어 왔다고 찡그리면 벌써 들켜서
돈을 잃습니다. 절대에 바탕 한 상생은 절대 얼굴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절대에 바탕 한 상생은 이해를 해서도
가능하고 신심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확실히
알지 못하면 상대의 세계에서 언제나 놀아나게 됩니다. 절대의 세계를
체득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계속 상대의 세계에서 놀아납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주위에 여러 인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극도 있고
상생도 있을 것입니다. 또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이 진공에 바탕 해서 그것을 바라보느냐,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잘되고 안 되는 것도… , 아니면 그 속에서
빠져있느냐. 그것은 여러분들이 음양 상승과 음양의 이전 자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을 모르면 상생과 상극을 계속 윤회하면서 좋았다 싫었다, 좋았다
싫었다.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하는 것입니다. 시소로 그것을
표현하면 상대에 바탕 한 상생은 시소의 끝에 앉아서 좋았다 싫었다 를
반복하는 것이고 절대에 바탕 한 상생은 시소의 중간에 앉아서 중도를
잃지 않습니다. 올라간 한 쪽을 보고는 풀리네, 내려간 다른 한 쪽을
보고는 안 풀리고 있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객관화 해서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냥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 아. 깝. 다.
-ㅎㅎㅎ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까 강연자가 정업과 천업, 위력으로 감하는 것, 자유하는 것 등을
구분해 놓았는데 아주 정리를 잘 했습니다. 15쪽을 보면 묘유의 세계는
선악, 시비, 죄고, 고락이 있다. 선악이라는 말은 마음에 주로 쓰고,
시비란 말은 일 속에서 있고, 죄와 복은 인과적 측면에서 푼 것이고,
고락은 감정적 측면으로 푼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했는데 참 잘
했습니다. 결국은 묘유의 세계를 풀어 논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이 말 입니다.
질문 없어요? 다음 주에는 황원공 교우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이운도,
950615_화공_59_제3 수행편_제8장_참회문-1.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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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