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 동상 앞모습
아우구스투스의 영묘
악티움 전승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내란을 평정하기 위해 그에게 부여되었던 예외적 명령권을 원로원과 민회에 반납했다. 그러나 기원전 27년 원로원과 민회는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의 칭호를 부여했다. 이때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지중해를 주축으로 한 로마세계의 제 1인자(Priceps)가 되었고, 그에 의한 통치로 지중해 세계 제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사가들은 이때부터 로마 제정(또는 원수정)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로마인들에 의해 이 체제 및 그 뒤를 이은 체제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지중해 세계 제국'이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상한 정체는 제 1인자에 의한 원수정(Pricipatus)이었다. 그는 이미 카이사르에 의한 전제 정체가 실패한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자신이나 일부의 시민들도 공화정이 로마세계에 적합한 정체가 아니라는 것도 시인하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외 정세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전제 군주정과 공화정을 절충한 지배 형식을 택했다. 프린켑스는 시민들 중의 제 1인자라는 뜻이며, 다른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존재일 뿐, 초시민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원수정은 군주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아프리카와 마케도니아를 제외하고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모든 속주에 대하여 종래의 명령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속주들 중에서도 중요한 곳은 황제령으로 지정하고 그 재정을 관장함으로써 근위병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상비함대를 설치하고 관리를 위한 은급제를 실시했으며, 공공 건물, 군용 도로, 교량, 상하수도, 빈민 구제 등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군대와 재정의 대권을 장악함으로써 황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로마 시민들과 속주민들에게는 평화와 질서를 회복해 주었고, 종래 착취의 소굴이었던 속주에서의 조세 청부제를 폐지하여 직접 징세함으로써 지중해 제국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한편 그는 국경선의 방비를 강화하여 북방은 도나우강과 라인강에, 동방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 사막에, 서방은 대서양에, 남방은 사하라 사막에 접하고, 브리타니아의 남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각 국경지대에는 군단을 파견하여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국경을 수비하게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역대 황제들 중에는 네로와 같이 낭만적이면서도 기독교를 박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도 있었으나,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티우스(Antonius Tius), 마르쿠스 아우렐라우스 등 '5현제'의 시대(96-180)도 있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제위에 즉위할 때부터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제까지의 약 200년 동안에 로마 정치는 대체로 안정되고 조직화 되었으며, 전 제국 내에서는 각종의 교역이 하등의 장해 없이 자유로이 발전하여 로마는 그 내부에서 소위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 사건들과 역대 황제들의 전제정을 염두에 두고 그 2백년을 볼 때, 특히 로마시 주변의 무수한 카타콤 내의 음성적인 존재였던 기독교도를 생각한다면 순수한 평화시대라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