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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를 구원하심
누가복음 19:1-10
성경에 몇 장과 몇 절이 있습니다. 원래는 없었는데 성경을 찾고 읽기가 불편해서 13세기부터 대주교들이 나름대로 장과 절을 나누었지만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했답니다. 그래서 16세기경에 프랑스의 유명한 인쇄업자 겸 학자가 장절을 나눈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쉽게 찾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 누가복음 18:31에서 19:10까지를 같은 장으로 묶었더라면 서로 비교하며 이해하기가 더욱 쉬울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던 일을 멈추시고 18:31부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맹인과 삭개오 두 사람을 만나 구원의 복을 주시고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19:11). 여리고에서 예수님이 구원하신 두 사람 중에 맹인의 사건은 18장에, 삭개오 사건은 19장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8:33-34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자신이 잡혀 희롱과 능욕을 당하시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생애 마지막이 되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셨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으로 매우 낮은 지형이고 따뜻하기 때문에 풍성한 초원과 많은 꽃들이 피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래서 ‘향기’란 뜻으로 ‘여리고’ 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견고한 성을 쌓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대적하였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주 받은 여리고에 잃어버린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3).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맹인을 만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18:35-43). 여리고에 가까이(입구) 길 가에 앉아 구걸하는 한 맹인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맹인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했습니다(막10:46). 맹인은 귀가 밝기 때문에 전에 들어보지 못한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이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고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 예수여’라고 외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제법 큰 소리로 외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18:38,39).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맹인 바디매오에게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됩니다. 밝은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시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맹인은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서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소리 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는 다른 사람이 아닌 같은 한 사람이지만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아느냐는 신앙적인 차이를 말해 줍니다. ‘나사렛 예수’란 나사렛에 사는 ‘인간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보내실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른 것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심을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자신의 눈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긴가민가가 아닙니다. 맞으면 다행이고 틀려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그래서 한 번 외쳐 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분이 메시야이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소리 친 것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달라는 애원이 담긴 말입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해도 더욱 크게 소리 칠 수가 있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확신이 없었다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을 때 입을 막고 슬그머니 숨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맹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18:41). 지금까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 주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한 푼을 달라’고 하지 않고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둔 눈을 보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구걸하는 맹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전능하신 창조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한 말입니다. 비록 구걸하는 맹인에게서 놀라운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지나가시는 분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야이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지어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음밀하게 따지면 ‘한 푼 달라’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 바디매오는 사람들에게는 ‘한 푼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에게는 ‘한 푼을 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어둔 눈을 밝게 해서 보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바디매오에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주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구경 나온 여리고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알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리친 바디매오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8:42)으로 구원의 복을 주셨습니다. 맹인의 눈도 뜨게 되었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아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지옥 갈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아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 갈 사람들 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맹인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로 믿고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19장으로 넘어가서 삭개오의 이야기를 봅시다. 1절에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는 길(출구)에서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2). 그러나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맹인 바디매오와 삭개오를 비교해 보면 너무나도 다른 대조적인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요 구걸하는 거지지만,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서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바디매오 같았으면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비록 길 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지만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인 반면에 삭개오는 세리장(세무서장)이요 부자지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맹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맹인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쳐서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위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찾아 오셨고 집에 유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일어 설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찾지도 않고 도와주지 않으면 잃어버린 자, 그대로 구원도 받을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오고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고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르쳐서 겨우 깨닫고 회개하여 믿는 성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구원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셨던 것처럼 우리(교회)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바디매오 지나가시는 예수님에게 소리 질러 걸음을 멈추게 하셨고 눈도 뜨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맹인처럼 소리를 치지도 않았고, 나무에 올라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 보기만을 하려고 했을 뿐 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부르지도 않았고 자신을 도와 달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의 믿음의 한계선은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삭개오가 아닌가를 돌이켜 봅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삭개오의 이야기를 많아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위해서 뽕나무위에 올라갔다는 매우 긍정적인 사람으로 배웠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구원도 원하지 않은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왜요?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무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쳐다 보시고 ‘삭개오야 ’라고 불렀습니다(5). 이것은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만 불려졌고 그래서 죄인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야’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정의롭다’, ‘순전하다’, ‘구원자’라는 뜻 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자’라고 부르셨다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삭개오야’, ‘의로운 자야’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 이 시간에도 나를 찾아오셔서 ‘거룩한 나의 백성 성도야’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들의 심령에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옛날 여리고의 삭개오에게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들에게도 부르십니다.
그리고 또 한 마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 외 어느 누구에게도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삭개오에게만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삭개오의 집에 유하셔야 하겠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두 마디의 말씀만으로는 쉽게 변화가 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맹인 바디매오와 같이 ‘보아라’는 말씀 한 마디로 문제가 해결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밤을 새워서라도 가르쳐서 구원받도록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무위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을 어떻게 지내셨는지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 나름대로의 추측으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넓은 방에 편히 주무시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지금까지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서러움과 눈물을 흘리며 율법도 지키지 않고 욕심대로 살았던 모든 잘못을 고백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상담자로서 삭개오가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었을 것이며 그리고 잘못한 모든 것을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어느 듯 날이 새고 아침이 되었을 때 삭개오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란 말씀은 예수님 앞에 일어서서 손을 들고 맹세하고 서약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라고 말했습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중생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므로 삭개오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죄인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삭개오처럼 오늘 밤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집으로 갑시다. 그리고 밤새워 예수님과 상담 합시다. 꿈속에서라도 예수님 앞에 고백합시다.
지금까지 남을 돌아보지 않고 욕심대로 살아 온 모든 잘못한 것들을 고백하는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날이 새면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납시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됩시다.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말고 구원받은 자로 남은 여생을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서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여리고의 바디매오와 삭개오도 만나서 함께 영생복락을 누립시다.